영성회복학교

레노바레의 관상기도에 관하여

등불지기 2012. 10. 20. 21:34

 

지난번에 올린 Slain in the Spirit에 대한 글에 이어 이번에는 '레노바레renovare'의 핵심의식core practice인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에 관해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 글을 교리란에 올리지 않고 영성란에 올린 것은 최근들어 레노바레 운동이 한국교회의 새로운 영성회복운동의 한 축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입니다.

 

레노바레란 무엇인가?

레노바레ronovare란 '새롭게 하다'to renew라는 뜻의 라틴어 '레노보'renovo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갱신' '부흥'이란 말입니다. 레노바레 운동의 창설자와 회장은 리처드 포스터이며, 한국에는 2000년 중후반에 소개되었는데 최근에는 지구촌교회, 영락교회, 남서울은혜교회, 분당샘물교회, 신촌성결교회, 동양선교교회등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가 레노바레코리아를 설립하여 한국교회 안에 레노바레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겠다고 선언한 일이 있었습니다(2005년 11월 8일).

 

(참고로 리처드 포스터가 레노바레의 설립자이지만 영성수련에 관한 그의 사상은 중세부터 이어져온 것이었습니다. 미국교회 교계내에서도 리처드 포스터에 대한 교리적 비판이 거세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레노바레 운동은 영성회복운동으로서 레노바레측이 정의하는 바에 의하면 레노바레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스스로 변화되고, 이를 통해 교회와 이웃을 새롭게 하는 운동이다. 원하는 것을 큰 소리로 외치는 기존의 통성 기도와 달리 침묵 기도는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내면 여행'을 강조하는 영성운동입니다.

 

레노바레 운동의 핵심은 바로 '침묵기도' 혹은 '관상기도'라고 불리는 것인데 (영성기도, 호흡기도, 경청기도, 묵상기도, 마음기도, 향심기도, 등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레노바레 운동이란 '침묵을 강조하는 영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촌 교회 홈페이지에 이와 관련된 소개와 영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도 [영성회복] 코너가 있는 만큼 저도 이 운동에 관해 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성과 의무감을 느끼게 되어서 이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침묵을 강조하는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는 레노바레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practice인데 이에 대한 저의 입장은 한 마디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영성회복을 강의하고, 또 묵상에 대해서 현지인들에게 강의하고 훈련도 하지만 레노바레에서 말하는 영성훈련과 관상기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으며 그 노선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의 전통에서 벗어난 '변질된 영성운동'

이것이 제가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레노바레 운동은 성경을 인용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사도들이 전하여준 신앙의 본질에서 교묘하게 벗어나있다는 것입니다.

 

관상기도에서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침묵' 그리고 '촛불'과 같은 분위기, 그리고 상상력과 내면의 직관력에 대한 강조, 등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대충 살펴보기만 했는데도 금방 '레노바레 운동의 관상기도'는 교회사에 나오는 신비주의 카톨릭 운동과 비슷하며, 관상기도는 로욜라의 예수회에서 시행했던 영성운동과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신비주의적 영성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레노바레 운동은 교리적으로 심하게 비판하자면 "이방종교의 명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자세히 다루기보다는 간단하게 요점만 가지고 제 입장을 서술하겠습니다.

 

1. 관상기도에 있어서 침묵을 강조하는 것에 관해서

저는 침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침묵이 기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만약 침묵이 곧 기도요, 기도는 침묵이라면, 다시 말해서 레노바레에서 말하는 대로 침묵이 기도의 본질이라면 레노바레에서 가르치는 기도는 더 이상 기도가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대화'요 '말을 하는 것'이며 '소리내어 아뢰는 것'입니다. 제가 침묵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침묵이 기도의 본질이요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침묵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일 뿐입니다. 또한 침묵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아뢰고" "부르짖고" 간절히 "구한" 다음에 필요한 것이지, 침묵 그 자체가 곧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침묵을 기도의 본질로 여기는 레노바레의 가르침은 기도의 본질인 '아뢰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관상기도에 중요한 '분위기'에 대해서..

관상기도할 때 촛불을 보편적으로 사용합니다. 때로는 종bell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죽채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분위기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곧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촛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제가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인본주의적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관상(관조)의 의미에 관해..

레노바레에서 말하는 관상(관조)이란 직관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즉, 사람의 직관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직관력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명상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우리의 직관을 강조한다면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경의 가르침을 위반하거나 침범하는 것입니다.

 

4. 마음을 비우는 것에 대해..

관상기도는 마음을 비우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데 이것은 이교도의 명상종교에서 가르치는 사상, 즉 New Age Movement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44,45을 보면 마음을 비우는 것은 악한 영들이 좋아하는 상태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기도를 가르치거나 훈련할 때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인들을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하게 하는 일입니다. 제가 앞에서 쓴 글 Slain in the Spirit에 관한 교리적 비평글에서 언급하였지만 의식을 잃는 것은 성령의 인격적 속성과 일치하지 않다고 했는데, 마음을 비우는 것(무의식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마음을 열도록 초청하고 있지 마음을 깨끗이 비우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는 조건은 진리를 향해 우리 마음을 열고(비우는 것이 아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지 내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5.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관상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리적으로 볼 때 범신론적이고 다원주의적인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직관을 이용하여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하나님과의 연합(합일, 일치)을 도모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상상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상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묵상할 때 요청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기도시간에 우리의 상상력을 활용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레노바레의 가르침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6. 묵상의 개념에 대해..

관상기도를 또한 침묵기도, 혹은 묵상기도라고도 하는데 레노바레에서 이해하는 '묵상'은 '내면의 여행'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불교나 신비주의적 카톨릭, 힌두교 등과 같은 '명상'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고 또한 이곳 아프리카에서 가르치는 '묵상'은 내면에 잠기거나 혹은 내면으로 깊이 여행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을 되새김질하듯이 자신의 마음에 채우고 새기는 것입니다. 저는 묵상과 명상을 엄밀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가르칩니다. 묵상은 명상과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성경에 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성경구절을 인용할지라도 그것은 문백을 벗어난 '아전인수격'이고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7. 명상과 묵상의 차이에 관해..

그러면 묵상과 명상이 어떻게 다릅니까? 간단히 말해서 명상comtemplation이란 마음을 비우는 것이지만 묵상meditation은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명상은 사람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이지만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그분의 성품과 원칙)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명상은 자기 마음의 상상을 강조하지만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명상은 직관intuition을 따라 자기 마음 깊은 곳으로 여행하는 것이라면 묵상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여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상은 내면여행을 위해 직관을 의지하지만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여행하기 위해 계시의 영을 의지합니다(고전2:10-12참조). 명상은 상상력을 동원하지만 묵상은 오직 믿음을 동원합니다. 물론 묵상 역시 상상력을 수용하지만 의존하지는 않으며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제가 상상력을 강조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이지 기도할 때가 아닙니다. 저는 기도할 때 내면에 집중하지도 직관을 의지하지도 또한 상상력을 동원하지도 않습니다. 기도할 때 상상력을 동원하는 시도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또한 명상contemplation은 자기 마음의 보좌를 바라보지만 묵상meditation은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봅니다. 명상은 자기 의지에서 출발하지만 묵상은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서 출발합니다. 명상은 인본주의적이지만 묵상은 신본주의적입니다. 레노바레에서 말하는 '묵상'은 묵상이 아닌 '명상'입니다. 레노바레에서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갖다 붙이더라도 그 개념은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레노바레에서 말하는 '관상'의 개념은 성경이 아닌 신비주의적 명상종교contemplative religion에서 온 것입니다.

 

 

왜 오늘날 목회자들이 레노바레에 기웃거리는가?

제가 볼 때 목회자들이 레노바레 운동에 기웃거리는 것은 신비체험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회적 대안찾기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신비주의는 이미 전 세계의 대세가 되었습니다. 불확실성이 커지고 불안감이 심화되는 마지막 때의 특징이 신비주의의 창궐인 것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목회자들이 깨어서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표적을 잘 분별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춤을 추어서야 되겠습니까?

 

종교개혁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

더구나 레노바레의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카톨릭의 명상기도 그 자체인데, 레노바레 운동을 확산하겠다고 이름난 목회자들이 똘똘 뭉쳤다고 하니 개신교를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되돌리겠다는 시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침묵기도 혹은 관상기도를 하는 분들 모습을 보면 가부좌를 틀고 손바닥을 양 무릎에 가지런히 놓은 채 손바닥은 위로 향하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부처가 되겠다고 '기도'하는 불자와 무엇이 다르며, 누구나 직관을 가지고 신을 만날 수 있고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인도의 힌두승려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하지만 자기 직관과 내면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자기 이미지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직관을 의지하고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믿음과 소망이 차지할 공간은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회의 영성훈련 바로 그것과 같은 것인데 레노바레 운동은 기독교를 다시 카톨릭으로 되돌리자는back to the Roman Catholic 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1. 분위기를 조장하지 마십시오.

2. 침묵은 필요하나 침묵이 기도의 전부가 아니고 본질도 아닙니다.

3. 기도의 본질은 '소리내어 아뢰는 것'speaking이며 '대화'conversation입니다.

4. 만약 기도의 본질이 침묵이라면 침묵은 기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5. 상상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상상력은 기록된 말씀의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6. 우리는 내면의 직관과 상상력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여 겸손히 그러나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7. 이교도가 하는 기도의 어떤 것도 본받지 마십시오.(호흡기도, 명상기도, 등)

8. 묵상은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에 집중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합일을 경험하기 위해 침묵하면서 내면에 잠기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레노바레에서 주장하는 레노바레 운동이란 침묵 속에서 자기 내면에 깊이 들어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으로 스스로 변화되고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운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9. 제가 확신하는 바,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아뢰는 것speaking입니다. 그러나 레노바레 운동에서는 육성기도나 통성기도 등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10. 묵상이란 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성품과 원칙)을 오히려 채우는 것입니다. 레노바레에서 말하는 '묵상'이란 사실상 이방 명상종교에서 말하는'명상' 혹은 '뉴에이지적 비움'입니다.

11. 마음을 비우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12. 직관에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에 의지하십시오.

13. 자기 마음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하십시오.

14. 자기 생각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십시오.

15. 자기 상상으로 하나님을 그려내려고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16.하나님 앞에 침묵하지 말고 소리내어 아뢰십시오.(아가서2:14절 참조)

17.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지 말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18. 내가 만든 하나님을 만나려하지 말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만나려 하십시오.

19. 입을 다물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고백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여"라고 말입니다.

20.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은밀히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골방에서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마6:6참조)

 

 

기독교 내 신비주의 영성운동

기독교 운동 중에 신비주의적 영성운동가로서는 레노바레의 창시자인 리처드 포스터를 비롯하여, 헨리 나우웬, 필립 얀시, 달라스 윌라드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카톨릭 신부요 수도사인 토마스 머튼의 신비주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는 로마 카톨릭 안에 있는 신비주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레노바레 운동의 핵심 훈련인 '관상기도'(경청기도, 묵상기도, 호흡기도, 침묵기도, 마음기도, 향심기도, 영성기도..여러가지 표현이 있는데 내용은 같습니다.)는 예수회Jesuit의 영성훈련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

과연 레노바레의 관상기도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입니까? 아닙니다.

레노바레의 관상기도가 사도들이 가르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레노바레의 관상기도와 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았고 또 그런 본을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레노바레의 관상기도운동은 '변질된 영성운동'인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하는 체험은 성경이 말하는 은혜와 거리가 먼 신비주의 체험인 것입니다.

 

신비주의 영성으로 기우는 세계교회

제가 듣기로는 신학교(장신이라고 들었습니다.)에서조차 이러한 관상기도를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를 바른 신학과 신앙으로 인도해야할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을 한국교회에 확산시키겠다고 선언했다고 하니 지금 한국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매우 걱정이 됩니다.

목회자들은 시대의 표적을 읽어야 하는데 도리어 시대의 흐름을 타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네요..

지금 한국교회를 포함하여 온 세계 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넘어뜨리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육성기도를 거부하고 침묵을 통해 내면세계로 잠기려고 하는 쪽으로 흘러가려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소위 신사도운동이라고 일컫고 후자는 영성회복운동이라고 하는데 둘 다 신비주의 영성이요,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가 무엇이며, 누구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인가?

 

기도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아뢰는 것입니다.

 

기도는 직관에 의지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묵상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레노바레를 찾아가서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신비한 방법으로'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조국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2012년 10월 29일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