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클리닉

설교자의 언어

등불지기 2013. 1. 31. 18:29

 

 

설교자의 언어

 

설교자의 언어사용에 대해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강단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역이므로 말을 하는 법에 대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설교자는 말에 실수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면책특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더 큰 책임과 상벌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3:1) 강단에서 말을 많이 하는 목사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되려고 애씁니다만 목사가 되지 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교사가 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가르치려는 자리에 올라가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더 큰 심판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또한 무서운 책임도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의식중에 한 말이라도 심판날에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6,37) 무익한 말도 큰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다면 의도적으로 하는 말은 더욱 더 큰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언어사용에 누구보다 조심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음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상처받는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는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설교자는 말의 권세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말의 권세가 얼마나 엄청난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18:21)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죄악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평소에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강단에서도 말을 함부로 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평소에 말을 아끼고, 말을 할 때는 신중히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성경은 함부로 말하는 것을 마치 칼을 함부로 휘두르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12:18)

 

설교자는 가장 더러운 지체를 가지고 봉사하려고 하는 자이다.

 

또한 성경은 이 혀가 우리 지체 중에서 가장 더러운 지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3:6)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자신의 지체 중에서 무엇보다 입술이 가장 부정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가장 더러운 도구를 가지고 가장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자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설교자는 언어를 단련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혀가 가장 더러운 도구임을 깨닫고 평소에 자신의 혀를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며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아야 합니다. 저의 집에서 아이들을 훈육할 때 원칙은 아빠가 쓰지 않는 말은 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혹은 영화를 보면서 이상한(?) 말을 배워와서 집에서 사용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교정해주어야 합니다. 언어사용에 관해서 저는 아이들에게 매우 엄하게 가르칩니다. 무심코 말했을 뿐이데 하며 억욱하다고 하겠지만 눈물이 나도록 무섭게 책망을 합니다. 저는 동일한 원칙으로 설교자가 자기언어를 훈련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용하지 않으시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의 문제는 부모가 자녀의 언어를 교정해주는 것처럼 누군가 교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설교자의 제일된 훈련은 날마다 자기 언어를 불과 물로 정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날마다 주의 제단 숯불로 내 혀를 정결케 하소서라고 울부짖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언어사용에 있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달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3:8-12) 가정에서 사용하는 말과 말투과 강단에서 사용하는 말과 말투와 다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강단에서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평소의 말과 강단에서의 말이 다르다면 누가 은혜를 받겠습니까? 따라서 설교자는 평소에 설교하듯이 말해야 하고 평소에 기도하듯이 말해야 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벧전4:11)

 

설교자는 덕을 세우기 위해 말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4:6) 덕을 세우기 위해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 그들을 은혜 안에서 강하게 해주고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덕을 세우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정결해야 한다는 선결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다른 이들의 덕을 세우기 위해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22:11) 덕을 세우기 위해 말을 하는 연습이란 평소에 정결한 마음을 늘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주목을 끌기 위해 말하려는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설교자에게 가장 큰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자극적인 말, 선동적인 말, 선정적인 말로 청중의 시선과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케 하려는 설교자가 되기 보다는 차라리 설교자가 되지 않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인기를 받는 설교자보다는 차라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이 훨씬 복됩니다. 자신이 자극적인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청중이 진리를 기억하지 않고 설교자의 단어나 예화를 더 기억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자가 너무 솔직해서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하기 전에 항상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부디 저는 사라지고 주님만 나타나시길 원합니다. 제발 나의 말은 감추어주시고 주님의 말씀만 마음에 새겨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설교자는 진리의 전달자이지 진리의 제조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유혹을 단호히 뿌리쳐야 합니다.

 

피자메이커 vs. 피자배달원

 

제가 흑인목회자들에게 설교훈련을 시킬 때 늘 사용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여러분들은 진리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피자메이커가 아니라 피자배달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피자를 주문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집 주소로 피자를 배달합니다. 그 사람이 피자 맛을 보더니 맛있다고 평가한다고 여러분이 그렇게 기뻐하거나 혹은 맛이 형편 없다고 평가한다고 여러분이 의기소침해하거나 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피자배달원이 아닙니다. 배달원은 주문한 피자를 정확한 주소에 신속히 배달했느냐에 신경쓰지 얼마나 맛이 있느냐 없느냐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에 청중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너무 신경을 씁니다. 오늘 은혜받았습니다 라고 반응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진리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진리 제조자로 행동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이비 교주처럼 설교한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의 설교에 청중의 평가가 기대이하라는 이유로 의기소침한다면 이것 역시 여러분이 진리를 제대로 전달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설교자가 아닙니다. 왜냐면 여러분이 진리제조가인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말장난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 혹은 혼갖 현학적인 말을 하는 것은 강단에서 금물입니다. 저는 이것을 말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자가 범하기 쉬운 실수 중에 하나가 강단에서 말장난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청중 앞에서 설교하는 자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설교하는 자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을 의식하는 설교자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설교자여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설교하는 청중에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앉아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내가 하는 말 하나 하나에 신경을 쓸 것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를 선택하는 것도 신중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하는 설교라면 더욱 두렵고 떨릴 것입니다. 진실한 설교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설교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벌벌 떠는 사람이 최고의 설교자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는 그런 면에서 최고의 설교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하나님의 임재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말을 더듬을 것이다

 

정말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반드시 말을 더듬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가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 그런 설교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 사람이라도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말을 더듬을 것입니다. 저는 말 잘 하는 설교자보다는 차라리 말을 더듬을지라도 그래서 말을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식함으로 두려워서 떠는 그런 설교자가 되고 싶고 그런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현란한 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설교자보다는 삶을 통해 진정한 능력을 보여주는 그런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청중 역시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에서 드러나는 능력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