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클리닉

때리는 설교, 먹이는 설교

등불지기 2013. 10. 5. 22:17

 

 

설교자로서 가장 조심하고 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때리는 설교"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자의 임무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맡은 교인들에게 양질의 꼴을 풍성하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흔히 빠지기 쉬운, 스스로 착각하기 쉬운 교묘한 함정이 있는데 자신이 사랑스런 주님의 양떼들을 날카로운 말씀의 채찍으로 마구 때리고서도 자신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의로우며 선지자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때리는 설교"에 속병이 들고 깊은 상처를 계속 받고 있는데도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더욱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양떼를 때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고, 심지어는 그렇게 설교하는 것이 자신의 주 임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설교에 아파하면서도 희열을 느끼는 메조키즘에 걸린 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리는 설교"란 정죄의 심령을 가지고 하는 설교입니다.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자신의 영을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만약 정죄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그런 설교가 아닙니다. "때리는 설교"의 전형적인 특징이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회개는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로 방향을 돌이키고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지 '목사'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인 양 착각할 때 "때리는 설교"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사람의 기대와 하나님의 기대를 먼저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때리는 설교"가 위험하고 해로운 까닭은 다름 아니라 그 설교를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가장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 오해하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과 고난을 통해 믿음으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고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영혼들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때리는 설교"에 익숙한 교인들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 신념을 가지게 되며, 그러한 신념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정죄하고 학대하게 되고, 다른 믿음의 형제들을 향하여 항상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설교는 이와같이 '정죄의 영'spirit of condemnation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설교자들은 잘 인식해야 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설교는 단지 말을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어떤 영spirit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또 나름 성경을 읽고 '깨달은 부분'을 강단에서 전한다고 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설교'가 아닙니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사실 전혀 성경적인 설교가 아닐 수 있고 기독교적인 설교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금에 대하여 설교할 때 많은 헌금을 드린 교인들에게 하늘의 큰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설교하고 따라서 만일 적은 액수를 드린 교인이 그 마음으로 수치심과 고통을 느낀다면 그 설교는 전혀 성경적인 설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에서 '헌금'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액수의 크고 작음에 따라 축복의 크고 작음을 이야기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대로 설교한다고 굳게 믿고 있겠지만 사실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가 받을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이처럼 교인들을 "때리는 설교"는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공격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칭 설교자들이 왜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정죄의 영'을 가지고 설교하게 될까요? 은혜를 끼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실제로는 강단에서 주님께서 피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스런 양떼들을 마구 떼리는 설교를 하게 되는 걸까요? 설교자 자신은 철저히 교인들을 "위하여" 설교한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사실은 교인들을 핍박하는 걸까요? 그 결과 그러한 설교에 점차 익숙하게 된 교인들은 자신들이 '아픔'을 느낄수록 자신들이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며 그것을 오히려 '은혜'라고 여기게 되는 걸까요? "때리는 설교"를 하게 되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원인은 다름 아니라 설교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죄의 심령을 가지고 설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리는 설교를 하지 않기 위해 설교자는 매우 조심해야 하고 주의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는 것입니다.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설교자는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히 적셔져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 지식적으로 알고 있고 또 지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 있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목회자들을 관찰하면서 신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혹은 제법 규모가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발휘하는 리더십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이 '은혜'를 경험한다는 말을 들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설교자의 심령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있게 되면 우선 구원의 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율법주의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래서 마음의 참된 평강과 기쁨이 깃들 수 없게 됩니다.

 

저는 모든 설교자가 자신의 심령을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엄격하게 점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자신의 심령을 점검해볼까요? 지난 한 주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은혜의 복음에 관해 감격해본 적이 있었는지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동했던 적이 최근 언제였습니까? 은혜의 복음을 가장 명쾌하게 그려주는 로마서를 보면서 은혜의 복음 앞에 자신의 전 존재가 울릴 정도로 전율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사전적인 정의를 내릴 줄 아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사로잡히고 깊은 감동과 감격에 사무친 적이 있습니까? 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폭포가 빅토리아 폭포입니다. 빅토리아 폴에 관해 사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실제 그 앞에서 서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설명하는 설교자는 많겠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본 설교자는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수없이 설교해보면서도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겨보지 않은 설교자들이 수두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깊은 이해, 경험적 지식,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재발견으로 인해 자신의 전 생애를 뒤바꿔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체험을 갖지 못한 설교자들은 자신이 아무리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교인들을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설교를 준비하고 또 열심히 기도하고 설교할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교인들을 마구 때리는 그런 설교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영혼의 공허함은 자연스럽게 정죄의 영으로 채워지게 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할지라도 정죄의 심령으로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설교는 결코 청중을 영적으로 자라나게 할 수 없습니다. 청중을 자라나게 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뿐인데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설교자의 심령으로는 결코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고 느낀다면 최소한 로마서를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복음에 관하여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코페르니쿠스적인 발견, 자신의 전 존재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체험의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앞에 깊이 고꾸라져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깊이 통감하고 가슴 두드려보았어야 합니다. 이사야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 앞에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특히 자신의 입술이 얼마나 부정하고 불결한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전혀 자격이 없는 인생임을 깊이 깨닫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갈라디아서를 통해 자신이 율법의 심령에 얼마나 깊이 매여서 종노릇하며 살았는지 깨닫고 깊이 뉘우치고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은 그러한 은혜의 사건을 잊어버리게 되면 설교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사로잡히기 쉽고 결국 정죄의 심령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할 때 율법주의적으로 혹은 도덕주의적으로 접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 앞에서 사래를 자신의 아내라고 말 못하고 누이라고 말한 것을 가지고 아브람의 거짓말 때문에 그의 가정이 큰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당한 문제의 원인을 아브람의 '실수' 혹은 '죄'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접근방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본문은 아브람의 죄 때문이라고 아브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아브람을 보호하시고 그런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모든 성경본문을 들여다보고 해석할 때 [인간의 행위-하나님의 반응]이라는 율법주의적인 도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행위-인간의 반응]이라는 복음주의적인 도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특히 설교자가 설교할 때 강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원칙, 즉 하나님이 어떤 원칙을 가지고 행하고 계시는지를 강조해야 합니다. 그 말은 설교자가 교인들의 윤리적 삶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청중에게 더욱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강조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로운 원칙을 가지고 행하셨는지를 더욱 강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은혜로운 일을 행하셨는가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의 열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리는 설교" "정죄하는 설교"는 반드래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은혜로운 일을 행하도록 만들기 위해 먼저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양떼를 먹여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때리는 설교"가 아닌 "먹이는 설교"를 해야 합니다. "먹이는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설교, 진정한 의미의 신본주의 설교입니다. 사람의 책임과 윤리적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일이 먼저요, 그에 대한 반응과 열매로서 인간의 삶이 자연스럽게 뒤따라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설교는 궁극적으로 '적용적'이어야 합니다. 삶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설교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만 강조한다면, 혹은 인간의 삶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려고 한다면 설교는 오히려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먹이는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은혜로운 일을 행하셨는지 하나님의 은혜의 증인으로서 명확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설교하는 청중이 자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며, 자기 편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를 뒤따르는 주님의 사라들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선한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혼들을 아주 잠시, 일시적으로 설교자에게 위임하신 고귀한 영혼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때리는 설교"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설교하는 청중은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의 결정을 좋아해야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이 설교하는 청중이 자신의 소유,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사람임을 제대로 자각하게 되면 그들의 반응에 따라 설교자가 우쭐하거나 혹은 상처받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그들 중에 일부가 자신의 목회적 결정에 대해 반대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자신의 설교에 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리는 설교"를 피하고 "먹이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무엇보다 자신이 설교하는 청중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그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신 영혼들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들의 현재 모습만을 바라보고 정죄하려 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이미 영화롭게 하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화의 발걸음을 믿음으로 격려하며 그들의 앞에서 믿음의 본을 보이며 함께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비로소 정죄와 책망의 경계선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먹이는 설교"를 하기 위해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하는 청중을 진심으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주일 설교를 위해 토요일에는 목양실이나 자기 집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골방에 들어가 말씀과 씨름하고 기도의 깊은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평소에 해야 할 일입니다. 최고의 설교준비는 골방이 아니라 바로 청중의 삶의 자리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희노애락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저의 제안은 이것입니다. 설교 전날에 서재나 골방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숨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설교 전날인 토요일에 결혼예식과 장례가 있는 것에 대해, 혹은 개업예배가 있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만 결코 불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설교하기 전날일수록 자신이 설교해야 하는 청중을 심방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상할 시간이 없고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자신의 설교를 듣게 될 청중과 함께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 설교준비입니다. 반대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청중의 삶과 스스로 격리시키는 것은 양질의 꼴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청중의 삶에 대한 이해와 그들의 삶의 자리에 대한 감각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오히려 청중을 "때리는 설교"를 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주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배반한 베드로에게 세 번 씩이나 거듭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설교자는 주님을 부인하여 주님의 낯을 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베드로의 심정을 가지고 강단에 서야 합니다. 설교자는 자격없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자신에게 주님의 양떼를 대신 맡겨주시면서 주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먼저 받은 자로서 주님의 양떼를 주님의 말씀으로 먹일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훗날 베드로는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임을 한번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참 지식 가운데서 목양을 하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설교자는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임을 자각하고 자신에게 부탁하신 주님의 양떼들을 위하여, 주님이 대신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귀한 영혼들을 위하여 사랑의 그릇에 복음을 담아 먹여야 할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설교자의 임무를 다 하였을지라도 청중에게 자신의 수고에 대해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공적인 강단에서 은퇴하였을 때 아무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지라도 교인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질 자격조차도 없습니다. 광야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세례요한과 같이 설교자는 단지 울렸다가 점점 약해져가는 소리일 뿐입니다.

 

사랑으로 풍성한 꼴을 먹이는 거룩한 사역에 부름받은 모든 형제 그리스도들에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