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로서의 설교, 사건으로서의 설교
사랑하는 등불가족 여러분..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립니다.
꾸준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글을 올려야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몇 가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시력도 많이 나빠졌고
그 동안 설립하여 3년간 섬겼던 한인교회사역도 내려놓았고
3년만에 안식월을 맞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 계속 물으며
원래 부르심인 현지인 목회자 훈련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복귀하면서 가장 먼저 묵상한 내용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다른 설교자를 판단하기보다는 그 동안 제 설교사역을 돌아보는 의미에서 글을 올립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종입니다.
더 고민하고 더 훈련하고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국을 방문하였을 때 너무 짧은 일정으로 인해 일일히 찾아뵙지 못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첫 사랑되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안을 드리며 부족한 글을 올립니다.
2016년 3월 25일 고난주간 중 십자가를 지신 금요일에..
전달로서의 설교, 사건으로서의 설교
설교란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설교행위act of preaching에 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설교를 영어로 delivery라고 합니다. 보편적으로 ‘설교’를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혹은 전달한다는 뜻으로 설교를 정의합니다. 이것은 대부분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설교행위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설교행위가 있습니다. 설교행위는 설교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설교를 변화시키는 일은 설교이해를 변화시키는 일로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설교행위를 ‘전달’로서 이해하게 된다면 실제로 설교가 이루어질 때 설교자와 청중이 서로 깊은 괴리 deep gap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행위를 ‘전달’로 이해하는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청중은 그저 관람객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 전달하려고 애쓰지만 청중에게는 그저 ‘잔소리’와 ‘충고’ 정도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행위에 대한 혁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청중이 관객으로 머물러 있는 이유에 대해 매주일 고민하고 어떻게 해야 청중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설교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틀frame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청중이 진리에 대한 구경꾼이나 관람객이 아닌 무대 위에서 함께 호흡하는 참여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설교행위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의 툴tool을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설교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청중을 진리의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세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달’이라는 개념으로서의 설교행위preaching as delivery 가 아닌 ‘사건’으로서 설교행위 preaching as an incident 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설교를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특정한 시간 specific time to experience 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설교이해를 가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청중은 보다 쉽게 진리의 관객이 아닌 진리의 주체로 설교자의 설교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행위를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첫째,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하는 동안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설교행위는 설교자뿐 아니라 청중이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셋째, 설교행위는 설교자가 생각하는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진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넷째, 청중은 진리를 단지 듣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서 진리를 증언하는 존재입니다.
흔히 설교자가 생각하는 설교행위에 대한 이해가 학교모델입니다. 학교모델에서는 선생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설교자가 ‘전달’로서의 설교를 이해하게 되면 마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설교하는 행위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청중은 설교를 참고 견뎌내야 하는 시간 정도로 이해하게 되고 설교시간은 지루한 잔소리를 감내하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은 청중 뿐만 아니라 설교자 자신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설교행위를 ‘전달’이 아닌 ‘사건’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법정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판정에서는 판사, 검사 그리고 변호사가 특정 사안을 두고 맹렬하게 언쟁을 벌입니다. 이 법정에서는 어느 누구도 졸 수 없고 지루하여 하품할 수 없습니다. 법정모델에 의하면 설교자와 청중은 엄숙한 재판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판검사와 변호사와 같습니다. 법정모델로서의 설교행위는 엄숙한 증언행위 act of witness입니다. 설교자와 청중은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걸고 법정에 출두하는 증인이며, 설교자의 설교는 설교자 자신만의 것이 아닌 청중도 함께 참여하는 엄숙한 증언입니다.
많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때 저는 이 두 가지 모델—학교모델 대 법정모델 school vs. court—을 가지고 듣습니다.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행위에 대한 이해가 어떤 패러다임 frame을 가지고 있는지 눈여겨봅니다. 제가 한국에서 자라면서 그리고 만난 대부분 목사들의 설교는 전통적인 학교모델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어릴적 몇몇 소수의 부흥사의 설교에서 저는 법정모델로서의 설교,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부흥사의 설교’라고 하면 부정적인 뉘앙스로 이해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순기능으로서, 하나님께서 시대에 맞게 세우신 소수의 부흥사들이 교회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믿습니다.
모태신앙이었던 저는 14살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제 인생의 최고 목표가 주님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일임을 깨닫고 그것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저는 교회의 모든 모임-새벽기도, 주일 오전 오후 수요예배, 철야기도회, 산상기도회 등-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만 아니라 제가 참석할 수 있는 모든 부흥집회에 참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부흥집회에 참여할 때 좋았던 것은 늘 출석하던 교회에서 맛볼 수 없었던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위기를 저는 제 글에서 ‘엄숙한 법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 부흥사들의 설교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고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였습니다. 그분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내가 마치 연극무대에서 배우들과 함께 연극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진리에 관해 일장 훈계를 듣는 학교가 아니라 진리를 직접 만지고 맛을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고 이성봉 목사님의 천로역정 설교는 어린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분의 설교에서 그분은 진리를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증언하는 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의 증언으로서의 설교를 듣노라면 듣는 제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증언하는 증인이 된 것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갈급해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증언대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는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 성도들이 갈망하는 영적인 필요입니다. 이러한 영적 필요에 관해 설교를 단지 전달로서 이해하는, 학교모델로서 이해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결코 채워주지 못하는 구시대적이고 낡아빠진 패러다임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갈망을 채워주기에는 전달로서의 설교행위는 낡은 가죽 부대요, 찢어진 누더기 옷과 같습니다.
마지막 시대의 설교자들로 부름받은 목사는 반드시 학교모델이 아닌 법정모델, 전달이 아닌 사건, 가르침이 아닌 증언으로서의 설교관을 의식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설교자로서의 목사는 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 배워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교인들이 경험해야 할 것, 만나야 할 엄숙한 하나님의 심판대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설교자 자신이 자신의 설교에서 ‘무언가’를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설교하면서 경험한 바를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I came to you in weakness and fear, and with much trembling.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but with a demonstration of the Spirit’s power.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설교하는 동안 무엇을 경험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설교자들은 자신이 설교할 동안 무엇을 경험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청중이 무엇을 경험하기 전에 설교자가 먼저 경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진리를 경험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진리를 전달하면서 진리를 만질 수 없다면 청중 역시 진리를 들으면서 진리를 만질 수 없는 것입니다.
패러다임이란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물이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설교행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설교행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청중의 변화는 설교자의 변화에 달려 있고, 설교자의 변화는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행위의 변화에 달려 있습니다. 설교행위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이것은 오늘날 모든 설교자들에게 요청되는 도전입니다. 올바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설교행위를 진실하고 신실하게 수행해나간다면 청중은 물론 설교자 자신이 먼저 진리에 의해 변화되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중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불평하는 일을 그치게 되고, 진리가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주목하면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전했지만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불평한다면, 진지하게 그 동안 자신이 어떤 패러다임의 설교해위를 견지해왔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