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클리닉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설교

등불지기 2016. 4. 4. 03:00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설교

 

오늘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13절에서 22절까지의 본문을 가지고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주보에 적힌 설교제목을 보고서 저는 속으로 어떤 방향으로 설교를 할 것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제목은 미리 알려주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제목을 정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본문에 있는 구절이라든지 혹은 본문의 핵심사상main idea를 담고 있다면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제목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늘 들어왔던 이야기나 단어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들이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많이 들었고 알고 있다는 어느 개념이 본문에서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의 진정한 본질인 하나님의 마음을 청중들에게 풍성하게 드러내는 과업에 중대한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설교자들이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만난 설교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성전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잘 하였으며, 본문의 바로 전 문맥도 언급하는 등 신중하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과 목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해석을 따라갔습니다. 요즘 성경책에는 소제목이 인쇄가 되어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도 본문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란 제목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과연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을 해석할 때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의 제 기능이 타락하였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해이와 타락의 근거로서 환전상과 매매상들의 장사행위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자는 당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의 묵인 아래 비정상적인 이윤착취를 통한 부의 축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사장들과 율법사들이 성전에서의 매매행위를 통해 재정적인 부를 축적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본문에서도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매매상들이나 환전상들이 과도한 이윤을 추구했다고 보아야 하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혹은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접근하는 해석이 가지고 있는 정당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신명기 1424절 이후 본문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환전이나 제사를 위한 동물을 사고 파는 매매행위에 관해서는 일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분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매매행위를 통해 일정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의도를 정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서의 매매행위 자체에 어떤 불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과도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부당거래를 통한 착복행위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문이 그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당시 부당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흔히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보는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장사하는 행위자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으로 장사를 통해 수익을 얻는 것 자체를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집이 갖는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선물로서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며 예배하는 곳입니다. 구약에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였을 때 성전의 기능에 관해 기도로써 잘 표현하였습니다.(왕상8:41-43절 참조)

 

다시 말해서 다른 복음서에서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듯이 아버지의 집은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죄인, 모든 열방에게 기도를 위해 열린 곳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은 모든 민족이 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가로막는 곳이 바로 매매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방인들도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제사하기 위해 사용할 예물을 구입하고 기도할 수 있는데 매매상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매매상들은 오직 유대인들게만 매매를 허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너희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마태21:13절 참조)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너희가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매매행위나 이윤을 추구하는 거래행위 자체가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매매를 허용하는 문제에 있어 유대인들만 구원받는다는 유대주의가 강하게 적용된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에서 소굴이라고 표현하는 진정한 의도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관점에 의하면 성전은 유대주의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의 관점에 의하면 성전은 더 이상 이방인들이 찾아와서 기도할 수 없는 곳이 되었고, 매매행위는 이방인들의 출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장벽이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자는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실 때 굉장히 흥분하신 상태라고 묘사를 하였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행동은 과격한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셨을 때 분노와 흥분에 가득 찬 분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볼 때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실 때나 말씀을 하실 때 어느 때라고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 흥분하여 하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사건이 있기 직전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에도 도움을 요청하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물으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설교자는 본인의 설교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오셨다는 것을 잘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제목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건물 성전의 무효화를 선지자적 행동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성전에서 매매상들과 환전상들을 바라보고 갑자기 혈기가 폭발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성전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이제는 끝났다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 당시에 예수님의 그러한 과격한행동을 보고 예수님이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닥칠 화를 짐작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짐작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행동패턴에서 특이한 것 중에 하나가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임을 잘 안다면 오히려 예수님이 자신이 짊어질 십자가 사건을 확실히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매우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하신 것으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 우연이나 흥분에서 비롯된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라 매우 의도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마가11:18절 참조)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성전이란 분명한 자의식을 가지고 구약의 건물로서의 성전시대가 이제 공식적으로 철폐되고 끝났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시고 이를 위해 자신의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계산되고 고려된 매우 의도적인 행위라고 볼 때 성전을 정화시킨 것도 아니며 매우 흥분해서 즉흥적이고 우발적으로 하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더 타당한 것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예수님 자신의 육체가 곧 성전임을(20절 참조) 선지자적 행위를 통해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위가 흥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흥분이 아니라 선지자적 선포인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자는 해석의 단계를 거친 후 적용으로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십자가의 삶과 부활의 삶에 대해 강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이 우리에게 그러한 삶을 살아내라고 요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삶과 부활의 삶을 강조하려면 다른 적합한 본문이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행동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이야기를 본문이 들려준다고 볼 근거가 약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성전을 향하여,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는지 잘 깨닫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어떤 삶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의식의 본질을 깨닫고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 22절이 그것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설교란 무엇일까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의도에 더할 수도 감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드러내 보여주고 계시는지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 이상의 것을 보여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풍성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설교의 본분이라고 가정할 때 그 본문을 다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가 본문과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렇게 보셨는가?”라고 말입니다. 거듭된 이 질문에 우리 마음이 강력한 확신으로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그럴 것 이라는 추측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마태복음 25장을 가지고 설교하는 어느 설교자로부터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재산을 세 명의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눠준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설교자는 주인이 자신의 재산을 각각 그 재능대로 종들에게 나눠주는 행위를 은혜로운 행위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왜냐면 세상에서 자신의 재산을 가족이나 자식들에게 맡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종들에게 맡길 주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종들은 결고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인의 엄청난 재산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 먼 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주인의 행위를 자격없는 자에게 거저 주는 은혜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매우 흥미롭게 경청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본문을 들여다보고, 여러번 본문을 살펴보아도 주인의 그 행동이 자격없는 자에게 거저 주는 은혜인가에 대해 강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볼 때 그것은 은혜로운 행동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그리고 매우 심각한" 사명이었습니다. 왜냐면 주인이 그저 공짜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종들에게 준 것이라면 분명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맡긴 것이고, 남겨야 하는 것이기에 은혜라기보다는 분명 사명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감사해야 할 은혜'가 아니라 불평 불만을 가질만한 일입니다.

 

제가 볼 때 마태복음 25장의 문맥은 고난주간의 성전강화final teachings in the Temple이며, 마태복음 24장 끝부분에 있듯이 종말의 시대에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영벌과 영생을 결정짓는 구원의 문제,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그 설교자는 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러한 해석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종의 개념과 달리 성경에서는 매우 넓은 종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자신의 재산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청지기와 같은 종이 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그러한 주인의 행동이 은혜로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은혜로운 행동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짐을 지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무거운 짐을 주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받았을 때 종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 것입니다. 한 부류는 주인을 착하게 보고 그래서 불평 불만을 쏟아내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을 선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의도대로 열심히 일을 하여 남긴 것이고, 다른 한 종은 주인을 악하게 보고 주인의 의도와 달리 주인의 것을 땅에 묻어 두어서 주인에게 단지 손해만 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님, 결국 주인님은 손해 본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오늘날도 내가 이렇게 산든 저렇게 산들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되냐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짐이 얼마나 무겁고 중하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중에 결산할 때 주인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많이 남겼든 혹은 적게 남겼든 자기 재능대로 최선을 다하여 남긴 종들에게 똑같이 잘 하였도다! Well done!! 착하고 충성된 종good and faithful servant”이라고 한 것입니다. , 충성이란 착한 성품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 착한 성품이란 다름 아니라 주인을 착하게 보는 관점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반면 한 달란트를 그냥 땅에 묻어둔 종에게는 악하게 게으른 종wicked and lazy servant”라고 책망합니다. 그 종은 주인을 굳은 사람hard man, 즉 악한 사람으로 보았고, 그래서 주인에 대한 잘못된 두려움과 편견으로 인해 결국 게으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의 말씀은 마지막 시대를 '충성'이란 성품으로 살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며 충성의 삶이란 결국 하나님의 성품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착하게 보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 아무리 무겁고 어려울지라도 즐거움으로 충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보거나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만홀히' 즉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mocking (갈6:7절 참조) 여기게 되면 어떻게 살든 게으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갈지라도 게으를 수 있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주인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상급을 내립니다. 이때 앞서 말한 그 설교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을 신분의 상승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의 잔치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발한 해석이나 그러나 주인의 잔치 자리에 함께 참여하여 잔치를 누린다고 해서 반드시 종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아들의 신분을 얻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면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청지기와 같은 특정한 종은 주인의 잔치에 함께 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애굽에서 그러했고, 또 아닥사스다 왕에게 포도주를 부어드린 신하 느헤미야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잔치에 함께 참여하여 주인의 즐거움을 누린다고 반드시 신분의 변화를 말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분의 변화나 상승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종으로서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여 주인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굉장한 상급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처럼 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때 우리는 자격 없는 사람이라는 특정한 개념을 생각하게 됩니다. 혹은 본문을 보기 전에 은혜라는 단어를 붙들고 본문을 보게 되면 주인의 모든 행위가 은혜로운 행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본문이 은혜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기는 주인의 행동은 은혜로운 행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매우 무거운, 어쩌면 얼마든지 불평할 만한 사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는 대로 설교자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설교자 안에 있는 고정관념들과 일반적인 신념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설교자의 경우에고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제목을 예배순서에 기제하기를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서도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다고 볼만한 근거나 구절이 없습니다. 그 설교제목은 현대적으로 인쇄된 성경에서 나온 것이지 본문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현대적으로 인쇄된 성경에는 성경본문에 기록되지도 않은 성전을 정화 혹은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이란 소제목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제목이 설교자로 하여금 본문을 그러한 관점과 선입견으로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본문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것은 본문에 기록된 장사하는 집이란 특정 단어와 구절들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성속이분법이란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행위는 더러운 성전을 청소하는 행위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본문에서는 그렇게 그리고 있지 않는데 설교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더럽게 된’ ‘청소가 필요한어떤 곳이란 신념을 가지고 본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벌고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business의 세계를 불의한 세계로 바라보는 이원론적인 신념을 가지고 본문을 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자 되기에 애쓰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등에 관해서 정죄하고 있으나 결코 정당한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행위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전에서 장사하는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이라고 설교하게 된다면 우리는 의도하지 않는 다른 메시지를 전하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교하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된 교인들이 세상에서 장사하며 돈을 벌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과 세상을 분리시키며 성속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교인들을 무장시켜 세상에서의 삶은 언제나 고통과 수치로만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은 이방인들과 죄인들에게 철저히 차단된 건물성전의 장벽을 허물고 그 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세상의 죄인들과 만나고 싶어 하시며 소통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더 이상 어떤 건물도 어떤 장벽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본문의 참된 적용은 말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운 십자가의 삶, 부활의 삶이란 무게가 아니라 다른 데 있을지 모릅니다. 막힌 담을 허물고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세상 가운데서 더 강력한 선교적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무서운 위험은 고정관념의 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늘 들어왔던 말들이, 성경본문에 없는 현대성경에 인쇄된 어떤 소제목들이, 혹은 '종servant'이나 '장사market'와 같은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이고 성속구분적이며 이원론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관점들이 설교자로 하여금 본문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설교는 설교자 안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의 틀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조명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세상에서 스스로 갇혀 있던 나를 감옥에서 이끌어내어 자유를 만끽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