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영양실조
교회의 영양실조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이사야42:3)
영양실조를 흔히 쓰는 영어로는 malnutrition, unbalanced nutrition, 어려운 단어로는 dystrophy라고 합니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분배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세계의 어느 누구도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빈부격차의 심화, 소수에 편중된 부와 음식, 독점 등으로 인한 피해로서 영양실조의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심각해질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지역 신문마다 흑인 마을의 영양실조문제를 연일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비만율obesity rate이 최근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은 그래도 남아공이나 미국, 멕시코보다는 나은 편이나 한국역시 최근 비만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는 통계가 보도되고 있고 아침식사를 거르는 것이 비만율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로서 지목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의 식생활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몇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번 먹을 때 굉장히 많이 먹고 안먹을 때는 끼니를 건너뛰는 일이 잦습니다. 폭식과 불규칙적인 식사 습관이 매우 심각해보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관찰해보면 짜고 달고 기름집니다. 특히, 한식에 국물이 있다면 여기 음식엔 반드시 코카콜라가 있습니다. 현지 흑인들과 가끔 함께 식사를 하는데 날씨가 매우 덥고 또 목이 막히니까 저도 할 수 없이 콜라 없이는 현지음식을 못먹을 정도입니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싱크대와 화장실 청소용으로 사용했는데 여기는 이상하게도 날씨가 더우면 저도 콜라가 막 생각이 날 정도입니다. 길거리에서 종종 짠 감자튀김과 콜라 한 병으로 한 끼를 떼우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저도 흑인 마을에서 며칠을 지내게 되면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감자칩스와 콜라로 허기를 떼우기도 합니다. (현지인 음식에 채소와 과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저야 그런 식사가 가끔이지만 대부분 현지인들에겐 이미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식습관입니다.
영양실조란 제 때에 못먹고 굶주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먹어야할 것을 먹지않는 것도 중요한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잘 못먹기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리는 것보다는 먹어야 할 것을 먹지않기 때문에 혹은 골고루 먹지않기 때문에 걸리는 것입니다. 영양분 균형상실로 인한 결과인 것입니다. 즉, 많이 먹는데도 불구하고 영양실조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정의하자면 영양실조란 적게 먹기 때문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먹지 않기 때문에 걸리는 것이고 먹어야할 것을 먹지않아서 걸리는 병입니다.
제가 가끔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아이들이 싫어하는 당근이나 버섯, 마늘 같은 것을 ‘싫어하니까 이건 빼야지’라고 하다가 점점 ‘그래도 몸에 좋은데 어떻게 하면 맛있게 먹게할 수 있지?’하며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입에 맞는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는 몸에 좋은데 입에도 맞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제가 어릴적 편식도 심하고 고기냄새도 못맡을 정도로 비위가 약했었는데 저의 어머니께서 그런 저를 위해 고안한 것이 만두였습니다. 고기를 민스하여 다른 식재료와 섞어 만두피로 감싸 구워주시면 저는 아주 맛있게 먹곤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만두를 좋아하고 만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부족한 영양분을 제게 채우시려고 만두요리를 연구하고 만드신 것입니다. 저의 어릴적 최고의 음식이자 지금도 제 인생요리는 단연 만두요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꼭 하고 싶은 직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아프리카 교회들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양실조..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목사들은 자신들이 전하고싶은 본문만 설교하지 성경전체를 “골고루” 설교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인들은 자신들이 듣고싶은 부분만 듣고 “아멘”하지 들어야할 부분엔 마음의 귀를 닫아버립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처음 이유식을 먹일 때 자기입맛에 맞지 않으면 맛없다고 말을 못하는 대신 혓바닥으로 쑥 밀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어떤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자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오늘날 많은 교회는 정의에 관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슬그머니 혓바닥으로 내밀어버리고 축복이나 영성 같은 달콤한 메시지만 쏙 받아들이는, 목사나 교인들이나 모두 편식하는, 어떤 음식에는 너무 비위가 상해서 뱉어내는,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눈에는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어야하는데 어떤 말씀은 맛이 없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아직도 기저귀를 벗지못한, 걸음마도 못배운 단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제가 몇년전 신유의 능력이 있어 50여개 교회를 직접 개척하고 감독하는 칠순이 넘은 어느 능력있고 영향력이 있는 ‘틀라피’란 이름의 흑인 목사님과 그 제자목사들에게 1~2년 신학훈련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분에게 다음과같이 물어봤습니다. “목사님, 혹시 성경전체를 체계적으로 가르쳐본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자신의 50여년 목회사역 동안에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 “혹시 아가서나 소선지서 중 어느 책을 강해설교해본적 있습니까?” 그 역시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지요?”란 물음에 아프리카인들이 터부시하거나 불편해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의 시대에는 핍박을 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강한자 가진자의 억압에 저항함으로써 (물론 일부 신사참배에 동조하는 목사와 교회들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사회의 존경과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공의의 메시지가 예리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해방후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산업을 일으키고 물질적 성장을 추구하던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며 교회성장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공의의 메시지를 버리고 성장과 축복의 메시지를 주로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남북조 역사를 보면 바알신앙과 여호와신앙이 서로 대치하였음을 알 수 있듯이 성장과 공의는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는 성장을 위해 공의의 문제는 살짝 눈감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와 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곳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백인정부가 흑백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밀어부칠때 칼빈의 후예이며 개혁교회라 자부하던 백인교회들이 억압받는 약자의 고통에는 눈을 감고 권력으로 억압하고 차별하는 백인정부의 편에서 교묘한 신학적 논리를 만들어 제공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백인교회와 신학교는 세상을 밝힐 촛대가 더이상 옮겨진지 오래되었습니다. 학위를 얻기위해 오는 한국목사들이 없으면 모두 폐교해야할 실정입니다. 이런 슬픈 현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어야할텐데요.
70년대 산업개발 붐을 타고 80년대에는 교회와 신학교에서 교회성장학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설교자니 청중이나 듣고싶은 메세지에 뒤를 열고 불편하게 만드는 정의의 메시지에는 혓바닥으로 밀어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서 교회들은 저마다 자신들도 모르게 영양실조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줄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결국 교회성장학은 오늘날 교회를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든 암세포있습니다. 지금 새롭고 강력한 치유제가 필요합니다. 마치 어릴적 너무 허약해서 고기냄새도 맡지못할 정도로 비위가 약했던 약골들 중 최약골이었던 저를 위해 고민하고 만든 제 어머니의 만두요리처럼 오늘날 보이지않은 영양실조의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눈물과 고민으로 교회와 교인들을 다시금 균형잡힌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일으켜세우는 균형잡힌 설교운동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김광락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