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빈곤에 대한 묵상

등불지기 2012. 4. 24. 17:32

 

 

Meditation on Poverty

 

제가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빈부격차율이 세계 1위인 나라입니다. 경제권을 쥐고 있는 소수 아프리카너들에 비해 대다수인 흑인들은 가난합니다. 물론 주변 국가인 모잠비크나 말라위, 레소토나 스와질랜드에 비하면 그나마 잘 산다고 할 수 있는데 심리적으로는 제일 가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란 말씀이 해당하는 그런 좋은 의미의 가난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 상대적 빈곤감이 크다는 것입니다. 공휴일이 되면 흑인들이 유원지에서 술판을 벌이는데 술을 마시고 나면 술병을 홧김에 깨뜨려버립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그렇게 가난한 것도 아닌데 그 어느 나라보다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며 비참해하는 현지인들을 말씀으로 섬기면서 문득 가난poverty에 대해서 묵상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1.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궁핍한 것을 두고 하나님이 자신을 덜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하나님이 덜 사랑하신 것이 아니며 부유하다고 하나님이 더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없는 자를 택하시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없는 자들은 잃을 것이 없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의 모험을 떠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도 불편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홀가분하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1:28

 

2. 왜 어떤 사람에게 가난이 상처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감사가 되는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어떤 이에게 가난이 상처가 된다면 가난을 부끄러워하는 어떤 권위자(부모, 친구, 교사..)때문이고, 반대로 가난이 영광이 된다면 모든 부요한 자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 때문입니다. 개인이나 교회사를 보면 영성이란 꽃은 풍족할 때는 언제나 시들었고, 궁핍할 때에는 늘 활짝 피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회opportunity인 것입니다.-계2:9

 

3. 가난한 것은 진짜 친구를 얻을 기회다!

내가 많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면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여기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납니다. 그런데도 만일 내 곁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피를 나눈 내 형제들보다 더 가까운 사람일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며 광야에서 전전긍긍할 때 훗날 왕국재건의 임무를 맡길 진짜 친구들faithful friends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은 진짜 친구를 얻는 좋은 기회입니다.-잠18:24; 19:4

 

4. 가난한 것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자식을 가난하게 키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교육도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난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다는 것, 배고픔이 무엇인지, 굶주림이 무엇인지, 집없는 서러움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위험한 일일 수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엄청난 기회입니다. 가난 속에서 자란 사람이 인성이 삐뚤어지고 사회에 대해 분노심을 품을 수도 있겠으나 가난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집 없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습니다. 좋은 학벌과 많은 재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가난한 자를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을 배우지 못하게 되면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극심한 가난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압니다. 저를 포함한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서 지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삶이 싫어서 가출을 꿈꾸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렇게 힘들고 서럽고 어려운 시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의지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힘들어서 예배당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우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위로가 되던 시절이 지나고 보면 가장 은혜로운 시절이었습니다.

  

5. 가난은 좋은 스승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교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1:8,9)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할만한 것인데 왜냐면 가난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의 원천resouces이 우리가 가진 어떤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보면 '좋은 스승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잘 배우고 못 배우고는 본인에게 달려 있겠지요. 하지만 가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길이 없는 것입니다.

 

6.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천사를 불러 들이는 것이다!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4)" 복받는 개인, 복받는 교회, 복받는 나라의 비결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격려하고, 그들이 희망을 갖도록, 아무리 궁핍해도 절망하지 않도록, 한쪽 어깨를 부축하여 일으켜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며 천사를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며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세상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잠19:17; 17:5

 

7. 내 잔치에 가난한 자를 초대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나의 잔치에 초대할 가난한 자가 없다는 것은 나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곁에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가난한 자가 없다는 것이 진정한 빈곤의 증거입니다. 반면 내 곁에 가난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은 내가 부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 가난한 자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그 큰 크기와 많은 출석수와 천문학적 헌금과 아무 상관없이 영적으로 빈곤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위로받고 즐거워하는 교회가 진정 부요한 교회입니다. 내 잔치에 가난한 자들을 초대하는 것은 부요함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눅14:12-14

 

8. 가난한 심령, 그러나 부요한 마음을 가져라! 

빈곤poverty는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 있습니다. 전자는 기본적인 생계가 위협받는 경우이고, 후자는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박탈감을 느끼며 고통받는 경우입니다. 남아공의 경우 인근국가인 레소토나 말라위, 짐바브웨 등에 비하면 삶의 여건은 나은 편이나 반대로 상대적 빈곤감이 큰 편입니다. 연봉 3천만원 받는 사람은 5천만원을 받는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고, 5천만원을 받는 사람은 1억을 받는 사람을 바라보며 가난하다고 느낍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다면 의외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자신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의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지만, 심리적 가난함이란 늘 자신보다 더 가진 사람을 바라보며, 비교하며,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늘 열망하며, 자신이 가지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비록 삶은 빈곤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가진 것에 만족하고, 받은 것에 감사하며,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스스로 "나는 세상에서 꽤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감사하는 것, 즉 부요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딤전6:8

 

9. 가난할 수록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라!

"..their overflowing joy and their extreme poverty welled up in rich generosity."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서로 공존할 수 있을까요? 네,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분명 고린도 교회가 겪었던 가난은 절대적 빈곤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린도 교회가 그러했듯이 넘치는 기쁨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가난할수록 웃음과 유머를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넘치게 베풀어주고 후하게 구제해야 합니다. 빈곤의 시대일수록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정신은 빈곤과 싸울 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후8:2

 

10. 가난할수록 부자심리를 가져라!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약1:9)" 사람들이 나를 가난하다고 여길수록 나는 '부자다!' '나만큼 잘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봐!'라고 자랑하고 다녀야 합니다. 궁핍할수록 말은 반대로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느끼고 말합니다. 환경이 힘들고 궁핍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느끼고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할수록 부자심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말을 하고 다녀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지 자랑하고 다녀야 합니다.

 

11. 가난한 자가 헌금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21:3)" 하루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헌금보다 작은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은 한 과부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칭찬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똑 같은 액수라도 천국은행에 입금되는 금액은 다른가 봅니다. 하나님의 계산 방식은 이렇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엘리야를 접대한 시돈의 과부는 아들과 함께 한 번 먹을 밀가루와 기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크게 쳐서 갚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과부의 동전 두 개를 부자들의 큰 액수보다 더 쳐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12. 가난하여도 빚은 지지 말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빚을 진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종으로 파는 행위와 마찬가지입니다. 빚진 자는 채권자에게 종으로 팔린 것입니다. 크건 작건 간에 누군가에게 빚을 지게 되면 일단 마음이 묶여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무리 가난하여도 빚을 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쉽지 않겠지요. 특히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 혹은 대학에 진학할 때 많은 빚을 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부득불 빚을 져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내가 채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잘 따져봐야 합니다. 빚은 나의 지출계획서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빚을 지기 전에 반드시 빚을 언제까지 다 갚을 것인지 기간을 정해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분할하여 갚을 것인지 적금계획까지 먼저 세워야 합니다. 비슷한 원리로 아무리 부자라도 보증은 지지 말아야 합니다. 보증을 서게 될 경우에는 원금을 다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빚과 보증, 이 두 가지는 매우 위험하고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저는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 전셋집 마련하려고 주신 돈도 빚으로 생각했습니다. 결혼하고 조금씩 적금을 들어 7년만에 다 갚아드렸습니다. 비록 이자를 얹어서 갚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로 파송되어 선교지로 나올 때에도 2천만원 전세금을 그대로 다 부모님께 드리고 나왔습니다. 요즘 하우스푸어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대출을 얻어 집을 구했으나 대출이자가 높고 원금까지 갚기 위해서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큰 집에서 살아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사실은 노예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신분은 노예가 아닐지라도 생활은 노예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가난하여도 빚을 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득불 빚을 지게 되었다면 최단기간에 갚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13. 가난을 벗어나려면

앞에서 말했듯이 절대적 빈곤이 있고 상대적 빈곤이 있습니다. 상대적 빈곤의 경우는 대게 내면의 문제를 말씀으로 잘 다루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나는 많이 받은 사람이며 이래뵈도 나는 부자라는 부요한 마음을 갖는 것, 비록 빠듯한 재정살림에도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헌금하고 구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 등은 상대적 빈곤을 벗어버리고 누리며 사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편 의식주와 같이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절대적 빈곤의 경우 어떻게 벗어버려야 할까요? 앞에서 언급하였듯 만일 결혼할 때, 혹은 집을 살 때, 혹은 대학을 진학하면서 부득불 채무를 떠안게 되었고, 내 수입이 원금은 커녕 이자도 감당하기 힘들게 되었다면, 원인과 과정은 어떻게 되었든 간에 내 '실수'로 인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거나 내 의지와 아무 상관없이 갑자기 정리해고당하거나 혹은 IMF와 같은 경제적 재앙이 닥쳐서 갑자기 생계형 빈곤을 겪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내 필요를 채우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나에게 먹을 씨앗과 심을 씨앗을 함께 주심을 기억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심을 씨앗'은 먹지 않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심을 씨앗'은 보호해야 합니다. 셋째, 빚의 경우는 먹을 양식보다 우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우선순위입니다. 먹을 것을 아껴서 빚문제를 처리해야 합니다. 넷째, 빚을 갚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마련해야 합니다. 다섯째, '심을 씨앗'을 예전보다 더 효과적으로 뿌릴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합니다. 똑같은 구제액수라도 누구는 아무 효과도 못보고, 누구는 30배, 누구는 6,000%, 누구는 10,000% 결실을 거둡니다. 얼마 전 저희 집 뒷 마당에 무우를 심었습니다. 작년에도 심었는데 그 때 제가 배운 것은 심는 시기에 따라 수확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해는 좀 더 일찍 심었습니다. 그리고 솎아주는 것thinning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작년에는 아까워서 솎아주는 일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올 해는 과감하게 솎아주었더니 그 다음날부터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 보일 정도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솎아줄 때는 얼마나 아까운지 모릅니다. 그래도 과감하게 솎아주어야 열매가 튼실해지고 커집니다. 때로는 풍성한 열매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아까운 마음 과감하게 접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올 해는 작년보다 자연퇴비를 더 많이 사서 거름작업도 많이 했습니다. 씨앗도 중요하지만 밭을 잘 기경하는 것도 풍성한 열매를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위해 농부는 연구를 하듯, 똑같은 십일조와 구제헌금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실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것이 공개적으로 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성경에는 효과적인 재정사용을 위해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이지에 대해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가난할 때 재정사용에 관하여 성경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묵상하면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섯째, 비상상황에는 비상은혜가 작동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시돈의 과부와 아들의 경우, 선지자 남편이 죽고 과부와 아들만 남았는데 많은 빚을 져서 아들을 종으로 빼앗길 위기에 처한 가난한 과부가 경험한 은혜는 아무리 가난하고, 그것이 아무리 극심한 생계형 빈곤, 절대적 빈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기적이 있습니다. 절대적 빈곤이라 할지라도 벗어날 기적은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만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피할 길을 내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을 만나도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일곱째, 땀흘려 노동하는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타파해야 합니다. 게으름은 빈곤을 불러들이는 죄입니다. 물론 모든 빈곤poverty이 나의 게으름에서 온 것이 아니겠지만 빈곤의 시대일수록 땀흘려 노동하는 즐거움, 근면 성실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워서 기도만 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땀흘리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즐거이 응답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도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땀흘려서 일하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잠6:10,11

 

14. 아낀다고 다 부자가 되는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11:24)" 상식적으로는 안 쓰고 저축하면 부자가 된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식이지 진리는 아닙니다. 반대로 아끼며 사는데 점점 가난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안 쓰고 아낄수록 더욱 가난해지는 경우가 어쩌면 주변에서 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인색하고 째째하며 아끼는 일을 잘 합니다. 아끼고 모으면 잘 살아야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진짜 부자는 흩어 구제하는 데도 점점 부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참 부자는 아끼고 쓰지 않는 구두쇠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아닙니다. 참 부자는 쓸 데 쓰는 사람입니다. 진짜 써야 할 곳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가치있는 투자처를 알고 인색함없이 투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가장 가치있는 투자처는 당연히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진짜 부자는 "흩어 구제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재물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는 길은 여기 있습니다. 부자처럼 생각하고 부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깝다고 생각하고 계속 아끼면 참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아껴서 저축해야겠지요. 필요needs가 아닌 희망사항wants에는 아끼는 태도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꼭 써야 할 곳을 알아야 하고, 써야 할 곳에는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부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진짜 부자처럼 살 수 있습니다.

 

15. 엄격한 규율과 훈련은 필수적입니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13:18) 옛날부터 부자들은 자식을 엄격하게 훈련하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많은 재물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 한 번의 실수로 탕진하거나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주 엄격한 규율로 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자신의 자식을 엄격한 규율로 훈련하는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이 계속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빈곤을 극복하는 길은 교육에 있습니다. 단순한 교육을 넘어서서 엄격한 규율과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엄격한 규율로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시기 전에 우리를 그와 같이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곤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교육과 훈련에 더욱 투자를 해야 합니다. 가난할수록 더 많이 배우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16. 구제는 빈곤을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거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잠19:17)" 가난할 수록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행하는 일을 소흘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면 제일 먼저 구제에 지출을 줄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돕는 행위는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행위는 그 어떤 투자보다 확실한 투자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면 어떻게 갚아주시겠습니까? 연금, 주식, 부동산, 등에서 얻는 불확실한 수익에 비하면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할수록 가난한 자를 더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가난하다고 도움을 받으려고만 하면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일은 매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보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왜냐면 같은 처지로서 가난한 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큰 재정이 아니더라도 매우 효과적으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언제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을 더욱 잘 할 수 있습니다.

 

17. 중독을 피하십시오.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잠31:7)"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수록 중독에 잘 빠지게 됩니다. 고통을 직면하기 두려워서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기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집의 자녀들이 게임중독에 잘 빠집니다. 중독addiction은 일종의 도피행위입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심리적 경향입니다. 그것이 일단 고착화되어버리면 알면서도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맙니다. 아이들은 게임에 중독되고, 어른들은 술이나 도박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해도 안 된다 절망, 해도 안 될 것이라는 좌절감 때문입니다. 가난과 중독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가난과 싸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으로 싸워야 합니다.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좌절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이 두려움이 너무 컸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기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다단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도 '중독'에 빠졌습니다. 중독은 우리 곁에 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할수록 중독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싸워나가야 합니다. 요행과 운을 버리고 땀과 정직과 성실로 싸워야 합니다.

 

18. 진보 속의 빈곤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계6:5)"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헨리 죠지가 쓴 [진보와 빈곤]이란 책은 가난의 문제를 탁월한 관점에서 풀어가는 명저입니다. 가난의 문제를 구조적으로 풀어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도시화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도시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도시는 점점 커져가고 살기 편해져갑니다. 그러나 도시가 점점 커져가고 삶이 편리해져갈수록 빈곤의 문제는 왜 점점 커져만 가는 걸까요? 고층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데 가난의 그림자는 왜 커져만 가는 걸까요? 헨리 죠지는 이 문제를 선지자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있고, 명쾌하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도시화, 문명화가 발전할수록 소수의 사람들이 토지와 정보사용을 독점하게 되는데 그로 말미암아 다수의 사람들은 일터를 잃어버리게 되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일이 점점 확산되는 것입니다. 문명화와 토지사유와 토지독접제는 양극화를 점점 심화시키는 결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종말의 때가 바로 이런 원인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점점 이기적으로 되어가고 하루 벌어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는 빈곤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유일한 위로와 소망은 서로 사랑하는 교회만이 줄 수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자신의 상황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가난한 이웃, 믿음의 가정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19.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를 가난의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징계discipline란 '엄격한 교육과 훈련'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엄격하게 가르치고 훈련하는 곳이 가난의 골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를 이같이 징계하시는 이유는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은 풍요로운 삶의 직전단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거나, 우리를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실 것이면 그렇게 우리를 강력하고도 혹독하게 징계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혹독하게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선한 뜻이 있다는 뜻입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6)" 광야생활은 고달프고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삶입니다. 그러나 그 끝자락에는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광야에서 배워야 할 것을 확실히 배워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잘 되고, 풍요한 삶을 누릴 때에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 힘과 내 지혜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이 훈련을 어설프게 받으면 '풍요의 단계'에서 반드시 넘어집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재물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자신의 노력과 지혜만을 자랑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맘몬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광야생활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 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한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8:19)"

 

20. 하나님을 경외하라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가져야 할 지혜의 본질입니다. 만일 구제하는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을 할 때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일시적인 것을 드려서 영원한 것을 얻는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을 가지고 영원의 친구를 얻는 것입니다. 이 보다 남는 장사는 없을 것입니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15) 이 세 가지 원칙을 잘 기억한다면 가난한 자를 돕는 구제가 즐거운 일이 될 것입니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29:17)"

 

South Africa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