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클리닉

갈보리 채플은 무엇이 다른가?

등불지기 2012. 10. 22. 16:17

 

 

 

척 스미스 목사님은 제가 목회와 설교의 모델로 삼고 있는 멘토와 같은 분입니다.

이곳 아프리카에서 흑인 목회자들에게 신학과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저에게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Chuck Smith 목사님이 쓴 [Calvary Chapel Distictives]란 글의 앞부분(서문과 특징 1)을 대충 번역해서 올려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갈보리 채플은 무엇이 다른가?

:갈보리 채플 운동의 12가지 원리들

 

저자: 척 스미스 목사

번역: 김광락 목사

 

목차

 

서문

들어가는 말: 목회로의 부르심

1.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모델

2. 교회 정치

3. 성령의 권능을 받음

4. 하나님의 방식으로 교회를 세움

5. 은혜위에 은혜

6. 말씀의 우선순위

7.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

8. 영광스러운 재림과 교회의 휴거

9. 성령으로 거듭남

10. 사랑의 탁월성

11. 균형감각

12. 믿음의 모험

 

 

● 서문

 

갈보리 채플은 성경을 믿는 다른 복음주의 교회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독특하신 역사를 이해하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만약 갈보리 채플이 길 건너에 있는 다른 교회와 똑같다면 단순히 둘로 구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특징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분명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갈보리 채플 운동에 있어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데 그것이 많은 부분에서 우리를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사역을 믿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에 강하게 강조하지 않거나 혹은 성령을 경험하는데 말씀의 인도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강조하지만 오늘날에도 성령의 은사들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관점은 공유하지 않습니다. 갈보리 채플에서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성령의 능력과 활동에 마음을 열고 있습니다. 갈보리 채플이 다른 교회와 다른 이유, 그리고 하나님의 운동에 특별하게 복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균형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계속 존재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시는지 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는 성경적인 원리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갈보리 채플이 다 똑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단순한 기본 원리들을 사용하셔서 그토록 다양한 모습을 창조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항상 놀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두 개의 눈과 하나의 코와 입, 그리고 두 개의 귀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얼마나 다르게 보입니까? 사람들은 또한 서로 다른 감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매우 감정적인 사람도 사랑하시며 둔하고 무딘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이 그와 관계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은 매우 다양한 모습의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성격상 매우 감정적인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반면에 다른 교회들은 매우 근엄하고 딱딱한 인격에 호감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복을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매우 감정적인 사람들로부터 매우 형식적인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질 수 있도록 다양한 종류의 교회를 갖게 되는 것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각자 활동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넓은 범위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디에 맞는 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갈보리 채플이 다른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무엇이 우리의 모임을 특별하게 하는가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목회로의 부르심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5:4)

우리가 ‘갈보리 채플의 특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목회에 대한 우리의 부르심과 헌신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만약 효과적인 목회사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명감(sense of calling)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을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벧후1:10)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목회로 부르셨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목회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전문직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부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목회로의 부르심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고전9:16)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다주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합니다. “이봐, 너는 끝났어. 너는 이곳에서 끝날거야” 그런데 그는 말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목회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그런 모습을 가집니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4:12)라고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당신을 목회로 부르셨다고 할지라도 그 부르심은 극단적인 시련을 통과해야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분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확신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목회로 부름 받았다고 처음 느꼈을 때 부르심을 준비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신학교 다닐 때는 힘들었는데 왜냐면 빨리 졸업해서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책상에나 앉아서 책을 읽어야 한다니...”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나는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사역에 임하게 되었을 때,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제가 받은 충격을 여러분은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그럴 때 시련(testing)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영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나는 사역에서 보기를 원했던 즉각적인 결과와 짜릿함 같은 그런 열매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재정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나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서 가족을 부양하면서 사역을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목회만으로는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사역에 입문한지 17년 동안에 나는 교회 밖에서 다른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부름 받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것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내가 부르심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바꿔달라고 간구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를 사업가로 불러주십시오. 나는 사업하는 일에 잘 할 것 같고 또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나는 돈 버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 저는 정말 좋은 크리스챤 사업가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교회를 후원하거나 사역하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그의 부르심을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비전이 내 중심을 계속 불붙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소명감입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다음과 같이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를 목회로 부르셨을까?”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 ‘헌신’(commitment)입니다.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나됨은 나의 야망이나 나의 원함이나 나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나된 것은 그분의 의지로 된 것입니다. 나는 내 삶을 그분께 맡겨드렸습니다. 만일 내가 주님께 헌신했다면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사역에 또한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2-44)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는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우러러보는 그런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최근에 나는 어느 목사들의 회의에 참석했다가 목사들의 추한 행동을 보고 감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커피잔을 들고 모임이 있는 방으로 가지고 들어오곤 했습니다. 지금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헤어질 때 그들은 캔과 커피잔을 바닥에 내버려두고서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돌아다니면서 커피잔과 음료수 캔을 집어들기 시작했고 그 회의실을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나는 누군가가 와서 커피잔을 차서 카페트 위에 엎질렀을 때 일어난 일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갈보리 채플의 목사들이 그런 시설에 그런 모습을 남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회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보다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있습니다. “글쎄요, 누군가가 뒤에 쓰레기를 치우겠지요, 왜냐면 나는 목사이니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목회자라는 뜻과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인 태도입니다.

 

나는 집에 옷을 집안 이곳 저곳에 놓아두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내가 말했습니다. “보세요. 나는 당신의 노예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요! 그 옷들은 당신이 직접 걸어놓으세요! 왜 내가 당신의 옷을 걸어놓아야 합니까?” 글쎄요, 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그녀가 옳았습니다. 나는 그녀가 내 옷을 걸어놓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제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나는 다스리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고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던 밤에 그분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돌아다니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5) 베드로는 훗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목회”라는 단어는 사실 섬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을 섬겨야 하고 또한 그분의 자녀들을 섬겨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습관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냄새가 나며 가는 곳마다 냄새를 풍깁니다. 누가 담배를 피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걸어다녀 보면 그들의 옷에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겁니다. 담배를 피는 집으로 들어가면 옷이나 커텐 같은 곳에 냄새가 배여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더러운 습관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데나 담배재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통 담배를 끄기 위해 발을 가지고 문질러버림으로써 길가에 쓰레기를 남깁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많은 경우 그들은 담배를 피는 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설 때 그들은 담배를 던져서 발로 그것을 끕니다. 누가 담배꽁초를 주어야 합니까?

 

내가 자랄 때는 어머니로부터 담배든 담배꽁초든 만지지도 말라고 배웠습니다. 나는 담배를 너무 싫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담배를 만질 때면 더러워진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담배꽁초를 주울 때마다 나는 어릴 적 담배를 혐오했던 어릴 적 생각이 나곤 합니다. 나는 정말 담배를 혐오합니다. 교회 마당을 거닐면서 담배꽁초를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이 마당에 보이는 것이 싫어서 그것을 줍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주울 때마다 나는 누가 그런 것을 그곳에다 버렸는지 투덜거리곤 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사려깊지 못하고 양식도 없는 사람들일거야!”

 

그때 주님께서 내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단순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누구를 섬기고 있느냐?” 나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지요.” 그런데 그분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불평하지 말라.” 쓰라린 마음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심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담배꽁초를 주우면서 더러운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것을 행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좋아요, 주님, 저는 주님의 마당을 깨끗하게 치울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그것들을 주워서 치우면서 내 안에서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나는 주 예수님을 위해서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나는 다른 어떤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단지 주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

 

목회하는 데 있어서 가져야 할 태도 중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불쾌게 여기기 때문에 더욱 주께 하듯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은 요구하기만 하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돌아보기에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내가 그들을 섬겨야 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항상 당신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나는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러한 불평하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주님게 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당신은 당신의 상급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친찬을 바라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오, 감사합니다. 당신은 내게 너무나 소중합니다.”라고 맗는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종종 그러한 것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위해서 행하고 행하고 행하지만 더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면박 주고 야단치게 만듭니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당신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는 정신적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분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섬김에 대해 내게 상을 주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길 때 그러한 관점을 유지하고 올바른 태도를 마음에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헌신할 것을 강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백성들을 섬기는데 또한 헌신할 것을 강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해야만 합니다. 나는 성경이 성령에 의해 감동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많는 사람은 목회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 미국에서 목사들의 50%가 그런 부류라고 봅니다. 왜 자신이 믿지 않는 책을 가지고 가르칩니까? 만약 당신이 성경이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하든지 그 책을 알아야 합니다. 그 책에 헌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아마도 성경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과정은 결코 끝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내 자신을 드리는 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1.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모델 (God's Model for the Church)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

 

갈보리 채플에서는 사도행전을 교회의 모델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가 대부분 실패에 관련된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임을 믿습니다. 많은 끔찍한 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의 깃발 아래 자행되어 왔습니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 교수들이 내가 기독교인인줄 알고서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교회 역사의 문제들을 제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단지, “이보세요. 역사에서 본 불완전한 예를 가지고 기독교를 판단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기독교를 판단하세요. 그분이 무엇을 말했으며,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볼까요? 그분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문제가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지요. 그것에 대해 불만이 있습니까? 그분은 또한 주는 자가받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고 가르치셨지요. 그것에 대해 불만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 회의론자들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기독교인이라 간주되는 사람들과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토록 이른 시기에서조차 예수님은 교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결점에 대해 지적하셨고, 교묘하게 들어온 잘못된 교리, 또한 교회 안에 이미 부패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잘못된 관행들을 지적하셨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1세기 말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영지주의와 아리안주의가 교회 안에 침투해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제주의의 발전과 교회가 관료화되어가기 시작한 때가 교회 역사의 초기에 시작된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향한 그분의 편지에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불만족하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워진 지 불과 60년도 안 되어서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여 주님께서 입에서 토하여 내실만큼 미지근하게 된 데는 세월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매우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서 나는 상황이 개선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더욱 악화되어져 가고 있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교회에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인류 역사를 바라보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의도를 발견할 수 없듯이, 교회 역사를 바라보면서 교회의 모델을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모델(divine ideal)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서 거룩한 보델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거룩한 모델은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역동적인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성령의 권능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복음을 전세계로 전했습니다. 바울은 오순절 이후 불과 30년 지난 즈음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5,6) 초대교회 신자들은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는데 효과적인 교회를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볼 때 나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의 교회를 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발견하는 이 모델은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성령의 권능을 받은 교회입니다. 오직 한분 성령께서 활동하시고 일하시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얼마나 성령을 의지했습니까? 우리는 성령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바울은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15:28) 그리고 그들은 성령에 민감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이들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며, 성령의 지도하심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4장에서 그들이 무서운 핍박을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어떻게 간구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새롭게 오셨고, 그들은 나가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초대교히에 네 가지 기본적인 기능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42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 네 가지 기초는 믿는 자들이 모일 때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인들에게 사도들의 교리를 가르치며,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교제하게 하며, 서로 떡을 떼는 데 참여시키며, 기도의 사람들이 되게 하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계속 견고하도록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 사도행전의 교회에 모든 것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교회에 사람들을 더하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분의 일입니다. 당신의 일은 양떼들을 먹이고, 돌보며, 사랑하며 그들이 잘 돌보아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적은 양떼일수록 필요합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당신이 적은 무리에게 신실할 때까지 주님은 당신을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 하지만 우리가 교인이 한 천명쯤이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만일 오천 명의 교인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계속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데리고 있는 여덟이나 열 명을 목회하십시오. 그들을 섬기는 데 충실하십시오. 그들을 살찌우는데 신실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규모는 당신의 관심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관심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이제 당신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들을 본다면, 주된 목표는 교회에 사람을 더하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이 섬기는 교회에 사람을 더할 수 있는가에 대해 방법을 보여주는 성장 프로그램과 세미나들뿐입니다. 글쎄요, 방법을 알고 싶습니까? 그건 쉽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교회가 성장하는지 배우기 위해 세미나에 175달러나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사람들을 말씀으로 인도하세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세요. 그들로 교제하게 하고 떡을 떼도록 하세요. 그러면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실 것입니다.

 

내가 교단에 여전히 소속되어 있었을 때 내가 한 가장 현명한 일들 중에 하나는 교인들의 수를 세는 것을 중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항상 벽에다 금주, 지난주, 그리고 작년의 주일학교 출석을 보여주는 도표를 붙여놓았습니다. 출석수에 대해 계속 강조했습니다. 교인들은 항상 출석통계에 대해 듣곤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배히 오늘 어떤가?” “작년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요새 모든 사람들은 어떤가?” “왜 우리가 침체되는가?” 교인들은 계속 숫자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숫자를 세는 함정은 빠져들기 쉬운 무서운 함정입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단지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깨닫기 바랍니다. “이들은 내가 오늘 섬기라고 주님께서 오늘 내게 주신 자들이다.” 그들에게 당신의 최선을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가슴으로부터 그들을 섬기십시오. 부지런하게 그들을 섬기십시오. 당신이 신실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신실한 청지기로 당신 자신을 증명할수록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더 많이 돌볼 수 있는 사람들을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감독 아래 두신 자들에게 충실하십시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안에 구제프로그램에 대해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봅니다. 헬라 문화를 따르는 과부들이 소외감을 느꼈고 더욱 유대적인 과부들에게 구제의 혜택이 돌아갔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가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사믄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2-4)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기도와 함께 최우선순위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교제하는 것과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주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을 더하시니라”(행2:47)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모습이 될 때, 교회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기대하시는 그것을 행할 때에 주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원하시는 것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에 날마다 구원 얻는 자들을 더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항복하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추구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치유한 뒤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행3:12,13) 베드로 역시 엄청난 기적을 행한 후에 영광이나 공로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주목하게 했으며 일어난 기적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초대 교회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명성을 만들려고,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주목하게 하여 각광을 받으며 카메라 촬영을 받도록 언제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방식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당신을 사용하시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으로 되게 해 달라고 나는 날마다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 역시 같은 것을 원했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성공은 위험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에 성공을 가져다주신다면 당신이 중요하지 않고 떨어진 곳에서 열 명의 교인들과 함께 몸부림치면서 노력할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계속 무릎 꿇고 있는 것이 더 쉽습니다. 당신이 영광을 받을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공하게 되면, 사역에서 진자 위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공로와 칭찬을 받는데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 때문에 생기는 지름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6,7) 요즘 선전하는 것이 게임의 비결인 듯 보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자기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교회를 선전하거나 자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는 데 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홍보는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조심하십시오.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교회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령인 인도하시고, 말씀을 가르치고 사귐과 교제를 통해 하나됨이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함께 떡을 떼고 함께 기도하는 그런 교회입니다. 나머지는 그분의 일입니다. 그분이 그것을 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날마다 구원 받아야 할 자들을 교회에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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