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묵상

고난주간 묵상

등불지기 2012. 4. 1. 21:51

 

 

예수님의 고난주간 묵상(종려주일에서 부활주일까지 8일간의 여정)

 

(1) 종려주일

 

 

옆집에 멋진 Palm tree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중근동과 아프리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나뭇가지는 시원시원하게 뻗어 있어서 승리victory의 뜻을 잘 전달하고 있고요..그래서 옛날부터 개선식이나 환영식에 자주 사용되었다 합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지요. 자기들의 원수를 무찔러서 자기들을 구원해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원수에게 화평을 전하기 위해 입성하는 것임을, 그들의 멋진 왕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라한 종이 되기 위해 입성하는 것임을, 그들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생명을 주고 섬기기 위해 입성하는 것임을, 400여년 전에 예고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임을 분명하게 하시려고(슥9:9,10) 어린 나귀colt를 타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사랑하고 자랑하는 왕이십니다.-막11:1-11

 

 (2)고난주간월요일

 

 

 제 옆집에 fig treee가 있는데 찍어보았습니다. 잎사귀는 무성한데요..열매가 달렸는지 멀리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역시나 열매는 없고 잎사귀뿐이네요. 무화과는 꽃이 안보이는 열매란 뜻으로 여름열매이지요. 북반구인 한국같으면 6월 정도에 열리지요. 아무튼 예수님께서 시장하셨고hungry 잎사귀 무성한 fig tree에 열매를 기대하여 다가가셨습니다. 열매맺는 철이 아님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무화과 이야기 사이에(Mk.11:12-14; 20-25) 성전에서의 이해못할 활동이 끼여있지요(15-19). 성전에서 매매하고 돈을 바꾸는 행위는 먼 곳에서 예배드리러 온 이들을 위해 율법에서도 허용된 '합법적인'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분주한 활동만 무성하고 실제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본질인 '기도'라는 열매는 전혀 없는 모습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곧 성전시대의 종말을 행위적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fig tree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봅니다. 예수님이 시장하셨고, 그래서 열매를 기대하여 다가갔지만 잎사귀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고 했슶니다. 예수님께서 시장hungry하신 것은 단지 육신의 배고픔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선언하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시는데..예수님의 일갈을 통해 예수님이 그토록 간절히 기대hungry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기도의 특권을 만민이 아닌 유대인 자신에게만 국한시킴으로 결국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기도'에 관한 것임을 이튿날(화) 아침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Mk.11:22-25)에도 잘 나타나고 있지요. 오늘 우리 삶과 교회를 바라보면서 잎사귀(종교활동)만 무성하고, 열매(기도)는 맺지 못하는 모습은 아닌지요...

 

fig tree를 가까이 관찰해보면 참 재미있는 것을 많이 발견합니다. 예전 제가 살던 집에는 감나무도 있었고 무화과나무도 있었는데요.. 감나무에는 벌레를 잡아주어야만 했는데 희한하게도 무과과나무에는 벌레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고 단단하단 뜻이겠지요. 그런데 열매는 당도가 높아서 새들이나 개미들에겐 밥이었습니다. 창세기3장을 보면 아담 하와가 범죄한 직후 '무화과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해입었지요. 무화과 잎이 꼭 사람 손 모양처럼 생겼답니다.ㅎㅎ선지서들을 보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등장하고..예수님의 제자중 나다나엘은 무화나무아래서 은밀히 기도하기도 했는데 무화과나무 아래 기도하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원하는 바리새인들의 열망을 나타내기도 했지요. 열매와 잎사귀가 색이 비슷해서 멀리서는 잘 구분이 안 가는 특이한 나무에요. 그래서 멀리서는 열매가 달렸는지 잘 알 수 없답니다. 교회도 그렇지요. 멀리서 보면 참 활동적이고 살아있는 것같은데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실속도 없고 사데교회같은 유명무실한 교회도 많습니다. 분주함이 충성이 아니고, 많은 활동, 이벤트와 행사들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아니지요..

 

(3) 고난주간 화요일

 

화요일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주로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가지고 보면 21장 18절부터 26장 5절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가르치신 전체 말씀의 분량 중에서 이날 차지하는 말씀의 분량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오늘 가르치는 말씀이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누군가 그렇게 말씀한 것을 기억합니다. 자신은 이번 설교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고 설교한다고..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날은 성전에서 가르치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신 날입니다. 모든 교사와 목사와 설교자들에게 이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많은 가르침 그 이상의 삶이었습니다.

 

화요일 오전에는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로 마른 것을 두고 제자들에게 '믿음의 기도'에 가르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마21:18-22) 산을 옮기는 믿음의 기도야 말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찾으셨던 '성전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가르치는 일을 하려 하시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예수님의 절묘한 대답은 그들이 잘못된 권위자들임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두 가지 적용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의 권위로 일을 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권위로 일을 하는가? 둘째, 나는 하나님께 받은 권위를 잘 사용하고 있는가? 혹시 진리를 가로막는데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에 예수님은 여러가지 비유의 말씀으로 권위자들의 불순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마21:28-32; 33-46; 22:1-14) 그리고 세금문제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시고(22:15-22),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대해 논쟁하십니다(22:23-33). 그리고 가장 큰 계명에 대해(22:34-40), 다윗의 자손이시며 동시에 다윗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33:41-46)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잘못된 권위주의의식에 대해 분노를 쏟으시며 무섭게 책망하십니다(마23). 예수님은 모두 7번의 '재앙'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23:37-39) 여기서 깊이 생각해볼 것은 권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잘못 사용할 때 오는 결과는 재앙이란 사실입니다. 교회나 사회나 국가에 권위주의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재앙의 징조입니다.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면서 재난의 징조들, 대환란, 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때, 종말의 때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는 어떤 모습인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종말의 때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미혹을 받지 말 것을 당부하시면서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가 종말의 때에 갖추어야 할 중요한 성품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마25장) 열 처녀 비유를 통해 지혜의 성품을, 달란트 비유를 통해 충성의 성품을, 그리고 양과 염소의 심판비유를 통해 사랑의 성품을 갖출 것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세번 째로 예고하십니다(마26:1-5) 여기까지가 화요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날은 주로 가르치심에 집중하신 날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는 것이고, 죽으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라 최선을 다하여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강의사역을 하는 저에게 고난주간 둘째날 예수님의 모습은 큰 도전과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4) 고난주간 수요일

 

예수님의 수요일 행적을 정확히 말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14장 3절에서 11절까지 내용을 시간적인 흐름상 수요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정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그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화요일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월요일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 행적을 보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이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까지 6일간 머무신 곳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은 마르다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머무시면서 2km 떨어진 성전에 방문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매일 밤 베다니에서 주무신 것같지는 않습니다. 성전에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가르치시는 동안에는 가까운 감람원에서 야영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눅21:37-"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그리고 예수님이 이곳에 머무시는 날 저녁에 잔치가 벌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신 날 저녁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유월절 6일 전이라고 했으니 종려주일 전 날이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성전에서의 가르침을 마치시고 수요일 저녁에 다시 베다니에 들렀을 것이고 그때 향유옥합 사건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은 종려주일 직전에 향유를 부어드린 것으로 나오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종려주일 이후에 부어드린 것으로 나옵니다만 저자의 강조점에 따라 저술된 것이므로 이 문제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그저 '묵상'을 돕기 위해 편의상 '수요일에 향유를 부어드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시각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향유사건을 먼저 기록하는 것이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라고 판단했을 것이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동일하게 유월절 이틀전 유대지도자들의 모의 이후에 향유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적인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6일간 나사로의 집에 머문 것은 사실이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음식 봉사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우 값진 향유라고 했는데 그 가치는 사람들이 적어도 "300 데나리온"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아 매우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매우 값비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노동자의 일당 수당이 10만원이라면 3천만원이나 되니까요) 아무튼 이 옥합은 아마도 마리아가 자신의 결혼을 위해 준비한 예물이 아닌가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마리아는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부어드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14:4)" 허비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겟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분노하고 책망하는 주체는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분노와 책망은 그들의 가진 '자기의'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가난한 자들의 편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메시아'임을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녀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네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14:6)" 오직 예수님만이 베다니 마리아의 심중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제자들이 분노하고 그녀를 책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리아는 더욱 슬픔에 잠겼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사랑하는 구세주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떠나보낼 때 슬픔이 어떤 것인지는 경험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가 하는 행동은 그녀가 예수님의 죽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이고 자신의 곁을 떠나가실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실 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베다니 마리아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데..아마 그이유로 예수님이 체포당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데리고 멀리 피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심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안그래도 속상하고 슬픈데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저렇게 분노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제자들을 보니 더욱 속상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그녀를 괴롭게 하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한 행동을 "내게 옳은 일을 하였다"고 평가하십니다. 좋은 일이 아니라 옳은 일입니다. 마리아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장례준비는 마땅한 일이요, '옳은 일'입니다. 마리아는 장례준비를 해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어느 사람도,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중에 아무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지 못했고, 마리아의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마음은 들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분노하며 책망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이 흥분으로 들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곧 완성될 것으로 믿었고, 자신들이 대업을 이루는데 일등공신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를 두둔하고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찬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14:9)"

 

마리아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만 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것임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건'이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언급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를 실망케 하셨습니다. 12제자 중 가룟 유다는 가장 정의에 불타는 제자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돈궤를 열어 허락도 없이 가져가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은 제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궤를 맡아서 음식을 사는 일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책임지는 제자였습니다(요13:29절). 요한복음을 보면 흥미로운 것은 마리아를 책망한 이가 다름 아니라 가룟 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12:4,5)"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행동에 의아해하고 속으로 화를 내었지만 그 중에서 가룟 유다가 제일 적극적으로 마리아를 향해 분노하고 책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요한복음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가룟 유다를 도둑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돈궤를 맡으면서 그가 임의대로 꺼내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쓴다는 명목으로 유용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실망시켰다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는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요13:27). 가룟 유다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고, 가룟 유다는 분한 마음으로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갔던 것입니다(막14:10)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베다니 마리아(찬송가211장에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라는 찬송을 부를 때마다 속이 불편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데..베다니 마리아인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마리아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도 마리아..한국에 김씨가 많은 것처럼 마리아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보다는 가룟 유다의 행동에 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나름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허락도 없이 돈궤를 열어 유용하면서까지 선행을 하였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의협심도 있었고, 불의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정신도 있었지만, 어째서 한순간에 예수님을 팔아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도 급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승을 향한 존경과 사랑이 어느 한 순간에 실망과 절망 분노와 배신감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감정적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감정적이고 매우 불안하고 매우 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나를 위해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따랐던 가룟 유다..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며 권능도 경험했던 가룟 유다..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듣고 지켜보았던 가룟 유다가 이렇게 일순간에 예수님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돌아서버린 사건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면서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자기의에 사로잡힌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다니 마리아의 행동에 그 어느 누구보다 분노하며 그 어느 누구보다 맹렬하게 그녀를 책망하던 그의 마음 속에는 '자기의'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가는 자신을 '자기 의'로 포장한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내 안에 '자기의'가 있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분노, 나의 책망, 나의 자랑 속에 나만의 의가 꽈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룟유다처럼 언제든 자신을 파멸시키고 사랑하는 이들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정당하고, 필요하고, 떳떳하며, 의로워보일지라도 나는 구세주의 속죄가 필요한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절실한 가련한 인생일 뿐입니다. 가룟유다의 배반과 유대인들의 불순종에는 모두 '자기의'라는 무서운 독소가 그 원인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고난주간 이날에 내가 할 일은 내 안에 '자기 의' '나만의 의my own righteousness를 조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를 붙잡는 일입니다.

 

(5) 고난주간 목요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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