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하나님의 음성에 관한 오해와 진실
등불지기
2012. 5. 22. 20:12
Hearing the voice of God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참 용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물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생활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험이어야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음성을 들었다고 말을 하는 부분은 지극히 조심해야 하는 일이고 신앙의 성숙에 속한 문제입니다. 제가 볼 때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음성을 들었다, 주셨다, 혹은 받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분들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남들을 통제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거나 혹은 자신의 믿음을 과시해보이려는 욕심이 다분히 있지요. 이것도 역시 일종의 외식입니다. 길거리에서 서서 기도하거나 오래 기도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믿음에 관해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지요. 특히 나름대로 기도를 많이 한다는 분들이 빠지기 쉬운 교묘한 함정인데요..자신이 듣고 싶은 부분을 듣는 것입니다. 혹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음성이니 혹은 환상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한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짜 믿음'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놓치게 만듭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어느 순간 그것이 들려지기도 하고 보여지기도 하는데요 여기에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만든 '음성' '환상' 혹은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도 위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내면의 욕망이 만들어낸 가짜 음성인지 언뜻 분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은 경험한 사람들만이 아는 것인데 결코 자신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은 자신의 이성을 깨뜨려 말씀에 순종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음성에 압도당하여 침묵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아주 조용하고도 묵묵히 순종의 길을 걸어갑니다. 반면 내면의 욕망을 음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 성품과 행위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거짓 선지자들을 성경에서 많이 만나는데요..그들은 온유하지 않고, 자신의 우월한 믿음을 자랑하며, 권위주의적이며, 과장하며, 자랑하며, 조급하며, 다분히 감정적이고 충동적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 역대하 18장은 아주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가까운 동료 선교사님 중에 불치의 아픔을 겪는 아들을 둔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 아들은 언제나 미소를 띈 얼굴이었고 밝고 똑똑하고 아주 아름다운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늘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주님이 아이를 치유해주신다는 응답을 여러번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게도 여러번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주에는 이미 휠체어를 버리고 걷고 있고 뛰고 있다는 메일을 보내어 깜짝 놀라기도 했는데요..알고보니 믿음으로 먼저 선포하고 미리 메일을 쓴 것이었습니다. 중남부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그 가정을 위해 염려하며 기도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아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날벼락같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천사같은 얼굴을 한 그 아이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슬픔과 안타까움을 금치못하지만 한편으론 무엇이 참 믿음이고, 무엇이 참 하나님의 음성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거나 혹은 이러 저러한 음성을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면 속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대신 아직도 성숙해야 할 부분이 많은 분이라고 느껴집니다.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도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문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내가 들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음성을 들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특정한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들었다고, 보았다고, 꾸었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것은 여전히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은 그것이 굉장히 영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착각입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 '음성'의 형태로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깨닫지 못하니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음성'의 형태로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특별한 사람, 영적으로 대단한 사람만이 경험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야, 굉장하다!'라고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죽 깨닫지 못하였으면 그렇게 '음성'의 형태로 말씀하셨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음성을 듣는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즐거이 순종하는 삶인 것입니다. 잘 듣지만 잘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대로 잘 듣지 못하여도 잘 순종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영적인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들어본 사람만이 압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의 형태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인데 대부분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음성'의 형태로 말씀하실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과시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이성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즐거이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의 음성의 열매는 순종인 것입니다. 자랑과 나눔과 과시가 아닌 것입니다.
저도 어릴 적 한 때 그랬지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하려고 작심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택시를 탈까요? 아니면 버스를 탈까요? 말씀해주세요." 이렇게 말입니다. 삶의 사소한 부분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하려는 태도가 어떤 관점에서는(특히 훈련의 관점이나 초신자의 관점) 좋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성숙의 관점에서 보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로봇처럼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는 종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창의적이고 책임감있게 행동하는 '청지기'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매사에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음성을 듣고서 결정하고 행동하려는 태도보다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헤아리고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능동적으로 결정하고 창의적으로 경영해나가는 삶을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은 어떤 형태일까요? 공기의 파동을 일으키며 다가오는 사운드일까요? 마음을 흔들며 다가오는 깨달음일까요? 시편19편 1절을 보면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고, 들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공기의 파동을 일으키는 사운드로 말씀하실 수 있고,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하게 말씀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물론 사람이 자신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거나 듣고자 열망할 때 '음성'인 것처럼 착각하며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있고, 사단이 만드는 소리도 있습니다. 여러 소리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하나님의 소리인지 분간해내는 것은 요령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적 자주 보았던 동화책에 엄마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늑대에게 어린 양들이 발을 보여달라고 하자 밀가루를 묻혀서 내밀자 엄만 줄 알고 문을 열어주었다가 다 잡혀먹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와 달리 사실은 양들은 시각이 매우 퇴화했고 대신 청각이 매우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다른 음성을 변조하여도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간해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랍오니여'라고 응답했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간하는 것은 가르침받고 훈련받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와 같은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혹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종종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당했을 경우 "주님, 이런 상황에서 저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교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100만불짜리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책임있게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일을 앞두고 "주님,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말씀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을 하려는 태도는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결정하겠습니다."라는 기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엄밀히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선택과 결정의 책임을 자신이 맡겠다는 것인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하나님께 떠맡기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책임있게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할 영역에 있어 하나님의 음성에만 매달리는 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전에는 아무 결정도 하지 말고 행동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별은 내게 주신 이성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며 찾으려는 태도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인 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책임감 있게 행동하려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별을 명령하고 있지만 선택과 행동에 있어 음성을 먼저 들으라고 명령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계시록에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잘 보면 이 또한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분별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주님이 보시기에 어떤 교회인지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행동을 하기 앞서 음성을 듣는 문제와는 별개인 것입니다. 많은 부분에 있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매달리면서 자신의 책임과 의지를 뒤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일종의 영적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란 이름으로 불순종을 정당화하거나 연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선택과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하고,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음성을 듣기를 갈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단 분별이나 거짓 영을 분별하는 문제는 의외로 쉬울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2:26, 27절에는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기로에 서서 어느 길이 최선이냐 차선이냐를 분별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게 되고, 자신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롬12:2절 참조) 그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즐거이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영적인 사람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할 배우자를 두고서 이 사람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분별의 의무와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께 맡기려는 일종의 무책임한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배우자를 선택했다고 할 때 저는 그 내용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내가 책임있게 선택하고 행동해야 할 영역에 있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무게와 결혼하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닐 것입니다. 혹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여 들은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제게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어떤 형제가 자신에게 와서 "하나님이 자매와 결혼하라"고 하셨다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뭐라고 대답하라고 일러주었을까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대답해주라고 했습니다. 가끔 흑인 목사들 중에서도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동차를 내게 주기를 원하신다" 그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요.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요" "당신은 지금 나를 조종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겉으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내게도 말씀하실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기다려 보겠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혹은 자신의 욕망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교인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들었다고, 남에게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꿈을 주셨다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흑인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깨닫는 것은 아프리카는 이러한 '음성' 혹은 '꿈'이나 '환상'에 관해 매우 예민하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기반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에 온 교회가 귀를 기울이고, 또 그런 이야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밤에 자신이 꾼 꿈을 가지고 저마다 예배 시에 앞에 나와서 간증을 합니다. 그러면 온 교회가 흥분해하는데 목회자는 그러한 모습을 보고 '부흥'이라고 여깁니다. 저는 흑인 목회자들에게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과 기적을 추구한다고..그리고 사도바울이 삼층 하늘에 올라간 경험을 14년 동안 이야기하지 않았다고.."여러분은 만약 어제 삼층 하늘에 올라간 놀라운 경험을 했다면 14년 동안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기를 오늘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말씀의 기반이 약한 그리스도인, 말씀보다는 표적과 기사를 더 추구하는 영적인 음란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기적, 꿈, 환상, 체험, 그 어느 놀라운 경험도 말씀, 그리고 순종보다 더 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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