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행복'happiness에 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예전에 제가 했던 설교 중에서 '행복'에 관해서 설교한 것이 무엇이 있나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10여년 전쯤 삭게오가 발견한 행복에 대해서 설교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제목은 "뽕나무에 깃든 행복"이라고 했는데
개역개정성경에는 "돌무화과나무"라고 번역을 했네요..
예전에 제가 사용한 제목 그대로 설교원고를 올려봅니다.
삭게오가 발견한 그 행복을 지금 나도 누리고 있습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뽕나무에 깃든 행복
본문: 눅19:1-10
뽕나무에서 인생의 참된 행복을 발견한 한 인생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행복으로 여러분을 올해 축복하고자 한다.
그는 삭개오란 이름의 사람이었다.
➀그 이름 뜻은 “의로운 자”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불의한 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➁그는 세리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다.
➂그는 부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➃그는 키가 작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쉽게 그를 멸시했다.
그는 나름대로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던 것이 분명하다. 8절에서 자신있게 고백하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삶을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출세와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목표지향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간 것을 보라. 그가 세리장이 된 것은 그의 야심과 정열과 나름대로의 성실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많은 재물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그가 부자라는 것은 재물에 만족감을 얻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이룩해놓은 업적이나 명예나 물질에서 참된 인생의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3절)라고 한 말씀을 보아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만일 명예나 부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결코 한가로이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 보기 위해서 길가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한번 보려고 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외로움과 불만족스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참된 만족과 행복을 찾아 방황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다른 동물들과 사람은 구별시켜주는 점이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며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분이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의 유명한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소문은 그의 영혼에 깊은 목마름과 영적 갈망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자신의 신체적 핸디캡을 극복하면서까지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예수님을 한번 보는 것이 그에게 희망이 되었다. 그가 염치불구하고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그로서는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한번 보는 것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많은 무리들 앞서 달려갔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행이 자나가게 될 길목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기다렸다.
그런데 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행복이 찾아왔다. 우리가 성경에서 참된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맛본 모든 인생들의 공통된 특징이 이 행복을 발견하는 축복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점이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먼저 보셨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그러한 열망과 목마름을 먼저 간파하셨다는 점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에 그분이 날 먼저 아셨다는 사실! 참 놀라운 진리가 아닌가?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날 대속했네"
➀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셨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가셨다. 예수님은 지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그 뽕나무를 목표로 나아가셨다. 단지 지나가실 줄로만 알았던 삭개오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➁예수님께서 그를 우러러 보셨다. 아무도 우러러보지도 않는 한 인생, 그래서 외롭기 그지 없는 한 인생을 이처럼 대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인생, 오히려 멸시하고 질투하고 왕따시키는 인생을 주님은 우러러 보심으로 대접하셨다. 이처럼 주님은 죄인의 아래로 내려오셔서 죄인을 우러러보신다. 이것인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방법이다.
➂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야...” 삭개오에겐 이 말씀은 과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분이 어찌 내 이름을 알까?’ 아무도 그를 삭개오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의 존귀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는 외로워했다. 사람의 이름을 친근히 불러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내 이름을 자상하게 불러줄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서 사랑과 애정과 고마움을 느낀다. 삭개오는 ‘이 세리장이여’ 혹은 ‘이 부자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자여’라고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몸 둘 바 몰라 했다. 이처럼 주님은 죄인들의 이름을 불러내신다. 이것이 죄인을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주님의 방식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나는 선한모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➃예수님께서 그의 수치를 제거해주셨다. “속히 내려오라.” 예수님은 삭개오와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뽕나무에서 상담을 나누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수치를 각오하고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속히 내려오라’고 하심으로 삭개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셨다. 이처럼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죄인들의 수치를 자신이 가려주시는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➄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셨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셨다. 아무도 자기의 집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외로운 사람 삭개오에게 주님은 친히 들어가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죄인을 오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높은 곳에서 죄인을 올라오라고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죄인의 자리보다 더 낮은 곳에 내려오셔서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신다.
삭개오는 참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했다. 자신의 수치와 자존심을 구겨가면서까지 올라간 뽕나무에서 삭개오는 인생의 참된 행복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초청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안다’라고 할 때 오는 그 행복감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재물과 명예와 부가 제공해주지 못하는 근원적인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비난할 정도로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죄인을 예수님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다. 이 사랑, 이 만남이 삭개오가 발견한 행복이요,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기쁨인 것이다. 곧 구원받음에 대한 감격인 것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행복을 맛보았는가?
이 감격에 겨워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다. 주님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용납하셨기 때문에 모든 거을 드릴 수가 있었다. 이제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라고 부른다. 그는 인간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주는 것은 율법의 규정에는 없었다. 오직 주님을 소유한 인생만이 이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남의 것을 훔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겠다고 했다. 삭개오는 남의 것을 훔친 것으로 재산을 증식했다고 여기고 살지는 않았지만 다시 한번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검사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부당하게 착취한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네 배를 갚겠다고 말한다. 율법에는 본전에다가 오분의 일을 더해서 본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했지만 삭개오는 네 배를 갚겠다고 했다. 율법의 조항을 뛰어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예수님은 그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러주심으로써 그가 받은 구원을 인쳐주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주님께서 그의 새롭게 된 신분과 정체성을 분명히 정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인을 찾으시고 구원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모든 사람이 다 잃어버린 자들이다.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참 행복을 발견하기까지 물질이나 명예나 야망의 성취 등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서 실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을 주님은 찾으신다. 예수님은 모든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오직 잃어버린 자로서 회개하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찾아 구원하신다.
오늘 우리는 어떤 행복을 찾아다니고 있는가?
삭게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그가 간절히 찾았던 돈, 명예, 소유 등을 찾지는 않은가?
뽕나무에 깃든 행복을 발견한 삭개오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고 맛보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을 때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와 함께 식사를 나누셨을 때에 모두 다 벗겨졌을 때 그 홀가분함, 자유함, 상쾌함, 시원함을 맛보기를 축복한다.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맛보는 것이다. 이 자유함이 오늘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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