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나의 어릴 적 꿈은 천문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무한한 우주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즐겼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별들 사이를 유유히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그러한 우주를 여행할 우주선을 만드는 나 자신을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십 대 초반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내 생애를 드리기로 결심했다.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래서 대학교의 영문학과로 진학을 했다. 그리고 신학대학원을 나왔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기 시작했다. 어찌어찌하여 영어권 선교사로 파송되어 15년간 선교사로 사역을 하였고 또 어찌어찌하여 선교지에서 철수하여 고국인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연고도 아는 사람도 없던 강원도의 어느 작은 도시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등 한국에 재정착하는 것이 잘 마무리되고 한숨 돌리려는 순간에 내게 찾아온 것이 양자역학이었다. 문과 출신인 내가 현대물리학의 주류가 되어버린 양자역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처럼 보였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관련한 책과 관련된 정보를 알아 가면서 점점 흥미가 커져 갔다. 내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있을 때 했던 일은 가난하여 신학교를 가지 못했던 흑인 목회자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양자역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마도 내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나의 성향이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도 다양한 구경의 반사 및 굴절식 천체 망원경을 사용하여 밤하늘을 관측하는 것을 즐겼고 틈틈이 천문학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나와 함께 살아서인지 아내는 거의 모든 별자리를 다 알고 있다! 내가 양자역학을 알아 가면서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재미를 경험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며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으며 신음하는 온 세상을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주신 분이며, 그 아들을 통해 죄인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뒤틀린 온 세상을 회복하며 새롭게 통일시키려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계시며, 만물은 그 창조주의 영광과 능력을 빛나게 반사시키고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황홀했고 큰 즐거움이었다.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은 외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잊게 해 주었다. 우주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내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하는 스승이자 말을 걸어 주는 친구와 같았다. 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
양자 물리학자들이 나의 글을 본다면 양자론을 신학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신학자들이 본다면 과정신학의 한 흐름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믿음을 양자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면 양자물리학은 만물이 원자로 되어 있으며 원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이론, 즉 양자역학으로 만물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롭게 알게 된 양자역학은 나의 믿음이 비이성적인 영역이 아니라 ‘과학적’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의 존재나 기독교 신앙체계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과학의 용어를 빌려 ‘설명’하려고 할 뿐이다. 과학은 실험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은 충분히 신학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는 언어와 실험 결과를 가지고 있다. 내가 양자역학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지금도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생생하게 이해시켜 주었다. 양자역학을 접하기 전에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았던 신학의 체계가 흑백으로 채색된 그림이었다면 양자역학을 접하면서부터 찬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예전에는 무조건 믿었고, 당연히 믿어졌던 그러한 신념이 이제는 왜 그러한지 이해되기 시작했고 선명한 그림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 만물, 우주, 그리고 인간, 하나님의 말씀, 인간의 믿음과 불신앙, 삼위일체, 구원, 심판, 부활과 영생, 새 하늘과 새 땅 등등 모든 신학체계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화려한 색깔로 덧입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와 딸들에게 혹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내가 배운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주변인들은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내가 알아 가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평범한 목사요, 선교사일 뿐이다. 그러나 나의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이 현대과학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지성인들이 있다면 특히 더욱 그렇다. 신학은 최첨단 물리학의 세계와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배우고 느낀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과학을 신학에 적용하려는 이른바 ‘과정신학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성경의 무오성을 굳게 믿는다. 나는 신학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화론적 입장에서 신학을 이해하려는 ‘과정신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모든 학문이 복종해야 한다고 철저히 믿고 있다. 성경의 권위와 과학의 관측과 실험 결과를 동일한 권위의 선상에 둘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어떤 학문이나 실험 결과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부정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주 만물에는 부인할 수 없는 ‘변화’가 관측되고 있는데 신학은 그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주 만물에서 발견되는 참되고 의미 있는 변화,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다.
과학자들은 종교인이나 신앙인과 달리 오직 실험으로 증명되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증명할 수 없는 ‘이론’이나 ‘가설’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실험뿐만 아니라 이론이나 가설을 세우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고,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어떤 현상에 대해 상상력과 논리적 유추를 통해 ‘그럴듯한 가설 혹은 이론’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좋은 이론이 좋은 실험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이론 물리학자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밝혀진 실험 결과를 토대로 어떤 새로운 이론을 세우기도 하고, 세워진 가설들을 검증하는 방법들을 모색하기도 한다. 그들의 모든 출발점은 ‘이성’과 ‘실험’이다. 그들이 학문을 하는 방법은 귀납법적(歸納法的)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관점은 ‘계시’에서 출발한다. 기본적으로 신학은 연역적(演繹的)이다. 물론 이성과 과학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이성과 과학을 하나님의 말씀과 병립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 그렇다. 그러나 나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이성과 경험이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과 과학자들의 이성과 실험이 서로 상충된다고 보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옛날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한다고 했을 때 교회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갈릴레오를 정죄한 교회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 역시 갈릴레오를 정죄했었다. 지난 2천 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의 판단이 언제나 옳고 언제나 진리였던 것은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수많은 과학자들을 마녀 취급하며 정죄하던 어리석음을 교회가 범했다. 교회가 정직한 과학자들을 비난한 적이 많았다. 성경은 무오하지만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교회가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만일 어떤 과학자들의 주장이나 실험 결과가 전통적으로 교회가 믿고 가르쳐 왔던 것과 서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과학자들의 이론과 실험 결과가 언제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빛은 입자라고 믿었던 뉴턴의 주장이 150여 년간은 확실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졌지만 결국 ‘빛의 파동설’로 대체되었고, 또한 빛의 파동설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빛의 입자-파동 이중성’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던가? 과학자들의 이성과 실험은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왔던 교리가 성경의 권위 아래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천동설을 굳게 믿었던 교회가 지동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중세교회가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정죄했던 이유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 ‘교리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교리가 ‘틀릴 리가 없다’고 믿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신념이 ‘진리’라고 믿었고, 다른 신념을 가진 과학자들을 정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가 권력을 가졌을 때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피를 흘려야 했는가?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모두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힐 수 있다. 역사를 보면 대체로 종교나 과학이 권력을 가진 권위주의 집단이 될 때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교회가 평소 가져왔고 가르쳐 왔던 ‘신념’이 과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과학자들을 정죄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할 것이 아니라 한 번쯤 자신들의 신념이 ‘완벽하지 못한’ 혹은 잘못된 신념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해⋁봐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교회들의 잘못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생각과 전통을 더하여 왜곡된 신념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리를 지킨다는 강한 신념이 오히려 진리를 대적하게 된다. 사실 과학과 신학은 서로를 보완해 주는 좋은 친구 같은 관계이다. 과학과 신학이 서로를 돕고 보완하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만큼은 공통분모를 형성하기 때문에 과학과 신학은 서로를 배척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 즉 겸손한 마음이기도 하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배우려는 자세이다. 학자가 겸손을 잃어버리면 교권을 휘두르게 된다.
고전역학의 세계관에 젖어 있던 과학자들은 결정론적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던 과학 법칙을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신비, 기적, 신의 존재 같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더라도 하나님이 그저 우주를 창조하시고 관망만 하는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면서 양자역학이 급부상하면서 과학자들은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원자의 세계가 인간의 이성과 실험으로 알아내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교회가 스스로 변화되어야 할 시기이다. 자신들의 신념에 갇혀 있기보다는 과학의 눈으로 자신들의 교리체계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과학을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언어와 논리로 자신들의 교리와 신념을 서술하는 용기와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교회는 세상에서 고립될 것이다. 옛날처럼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거나 지구가 평평하다고 외쳐 보라. 누가 귀를 기울이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교회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학자들은 끊임없이 실험하고 격렬하게 논쟁함으로써 조금씩 변화하는데 교회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는가. 교회는 자신들이 붙들어 왔던 교리체계를 되돌아보아야 하고, 새로운 언어로 다시 진술해야 한다. 물론 이럴 때 결코 놓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는데, 성경의 권위 아래 모든 학문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학은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얻어 낸 결과들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언어로 자신들이 신학체계를 재구성하되, 그러한 노력이 성경 스스로 부정하는 또 다른 모순을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7부로 나누어서 정리하고자 한다. 1부는 양자역학에 대해 배우게 되면서 내가 갖고 있던 신학체계와 어떻게 상호 관계할 수 있을지에 대해 모색하는 내용이다. 2부에서는 앞으로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글을 전개할 것인가에 대해 정리했다. 3부에서부터 6부까지는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골격인 ‘창조-타락-구속-완성’을 따라 써 내려가고자 했다. 3부에서는 기독교 신학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창조와 창조주’에 관하여 진술하려고 한다. 4부에서는 ‘인간, 죄, 타락’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5부에서는 ‘구속과 회복’에 관하여 6부에서는 ‘완성된 세상’에 관하여 다룰 것이다. 마지막 7부에서는 우주론과 시간론과 같이 사소할 수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주제들을 챙기고자 한다.
나는 양자역학의 용어로 내 안에 형성된 기독교 신학체계를 다시 써 보기로 결심했고 『퀀텀신학』이라고 제목을 붙여 보았다. 과학도 그렇듯이 신학도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고 개혁되어야 한다. 아무쪼록 평범한 일반 신학도가 양자 물리학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것으로 신학체계를 다시 진술한 것을 통해 다른 누군가 기독교 진리의 진수를 조금이라고 알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현대 물리학과 우주론에 관심이 있는 크리스천들, 그리고 양자역학이 점점 일반인들의 상식이 되어 가는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쉽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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