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일정한 패턴 혹은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호기심을 가지고 실험을 해 보며 검증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그래서 얻어 낸 결과를 ‘법칙’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진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물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학자들은 어떤 물체나 물질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의 위치와 속도(혹은 운동량)를 측정하는 방식을 찾는 데 고심하였다. 갈릴레이는 실험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는 점에서 근대과학의 지평을 열었고, 뉴턴에 의하여 이러한 사물의 ‘운동법칙’을 찾는 일이 거의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이것을 ‘고전물리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의 관측기술이 발달함으로 인하여 고전물리학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빛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이 싹 틀 준비가 되었다. 고전물리학자인 뉴턴은 빛이 직진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빛이 입자라고 했다(1675년). 뉴턴 당시에 뉴턴의 주장과 달리 빛이 파동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있었지만 빛이 입자라는 것이 오랫동안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서 토마스 영(Thomas Young, 1773-1829)이 실험으로 빛의 간섭 현상을 발견하면서 빛이 파동이란 결론이 났다(1803년). 이 결론이 날 때까지 뉴턴 시대로부터 100년이 걸렸다.
참고로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인 가시광선의 파장은 380nm부터 270nm(나노미터) 정도이다.(1nm는 10억분의 1m이다) 일반적으로 빛의 회질은 파장이 길수록 크게 나타나는데, 파장이 짧은 가시광선에서는 큰 회질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가시광선에서 그림자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빛은 흰색으로 보이지만 실은 매우 다양한 파장을 가진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의 영역은 매우 좁은 가시광선이고,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빛의 영역은 훨씬 넓다. 파장이 짧을수록 에너지가 강력하며 푸른 계열의 빛을 띠고 있고, 파장이 길수록 붉은 계열의 빛을 띠고 있다. 따라서 푸른빛을 띠게 되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반대로 붉은빛을 띠게 되면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빛은 서로 관계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간섭효과를 나타낸다.
19세기 과학자 토마스 영이 그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빛이 바다의 파도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을 관측하였다. 좁은 틈을 지난 파도는 틈에서부터 다시 동심원 형태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두 틈에서 나와 다시 동심원을 그리면서 퍼져 나가는 파도는 서로 간섭하고 중첩되는 독특한 간섭무늬(interference fringes)를 만든다. 이로써 빛이 파동이란 사실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간섭무늬가 나타나는 것은 빛이 입자의 성질이 아니라 파동의 성질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 준다.
1864년 스코틀랜드 과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전자기학을 확립하였는데 그 역시 빛의 파동성을 뒷받침하였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번갈아 가며 전진하는 ‘전자기파’를 예측했는데 그가 계산한 전자기파의 속도는 빛의 속도와 일치했다. 즉,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의 파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맥스웰이 죽은 후 1888년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가 빛이 실제로 전자기파임을 입증하였다. 빛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다음의 그림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19세기 과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든 몇 가지 현상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물체에서 나오는 전자의 움직임이었다. 이른바 ‘광전효과’이다. 광전효과는 빛이 물체에 부딪힐 때 나오는 전자의 현상을 말한다. 방출되는 전자의 양은 빛의 밝기가 아니라 빛의 진동수에 비례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빛의 밝기를 바꿔도 전자의 운동에너지는 변하지 않고 진동수가 짧은 빛일수록 더 많은 전자가 나온다. 빛이 단지 파동이라면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세기 말 막스 플랑크(Max Karl Ernst Ludwig Planck, 1858-1947)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플랑크 양자가설”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유로 특정 진동수의 빛이 진동수에 비례한 단위로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한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은 덩어리 형태로 나온다고 하였다. 플랑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였으나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그 이유를 간파하여 새로운 가설을 세웠는데 이것이 인류를 ‘양자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빛을 입자로도, 동시에 파동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파동의 성질을 지니면서 동시에 한 개, 두 개로 헤아릴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입자를 ‘양자’(quantum)라고 부른다. 1921년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광양자설’ 혹은 ‘광전자효과’에 관한 논문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빛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 모든 만물이 양자로 되어 있다는 인식에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원자로 되어 있으므로 원자를 이해하면 주변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1869년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1834-1907)가 ‘원자를 가벼운 순서대로 나열하면 비슷한 성질을 지닌 원자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라는 관측 결과를 보고한 것이 큰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원소주기율표를 발견한 것이다. 원자에 패턴이 있다는 사실은 원자가 쪼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아직 보지 못한 다른 구조가 숨어 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후 1897년 조지프 존 톰슨(J. J. Tompson)이 전자를 발견하면서 원자에 어떤 구조가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원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띤 전자와 플러스 전하를 띤 무언가가 모여서 만들어진 복합 입자였던 것이다
원자(atom)는 쪼갤 수 없는 최소 입자를 말하며, 원소(element)는 물질을 이루는 기본 성분을 말한다. 인류는 자연계에서 118종의 원소를 찾아냈다. 주기율표는 원자량이 작은 순서로부터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원소가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학자들은 이것으로 만물의 모든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 주기율표에서 원자번호는 양성자의 수를 의미한다. 가로줄(주기, period)은 전자껍질의 수를 나타내며 가장 안쪽에서부터 2, 8, 8, 18, 18, 32, 32개의 전자가 차례대로 들어간다. 세로줄(족, family)은 최외곽 궤도에 위치한 전자의 수가 동일하여 비슷한 화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전자의 결합과 운동에 따라 전자기파라고 불리는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하기도 하며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다양한 물질의 화학적 결합이 만들어진다.
이제 과학자들은 원자의 구조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톰슨의 제자이며 원자핵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알파선이라는 방사선을 가지고 실험하던 도중 원자의 구조가 태양계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을 하게 되었다. 러더퍼드는 음전하인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으며 전자가 진동할 때 전자기파(빛)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을 방출하고 난 전자는 에너지를 잃고 중심부에 위치한 핵과 충돌해야만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덴마크 과학자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전자의 궤도설을 주장했다.
그를 이어 프랑스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전자 또한 빛과 같은 파동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물질파’라고 한다. 전자가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 원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입자가 아니라 원자핵 주위를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여도 핵과 부딪치지 않는 것은 낮은 궤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원자가 붕괴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물질파 이론이 발표된 이후 전자를 쏘는 실험을 통해 전자가 간섭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확인되었고, 빛은 물론, 온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셀 수 있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성을 지닌 ‘양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빛과 물질 모두 양자로 되어 있다. 양자의 가장 큰 특징은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즉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만 염두에 두면 모순이 생긴다. 여기까지가 ‘초기 양자이론’이다.
원자모형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는 다음의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다. 18세기 과학자 돌턴(John Dalton, 1766-1844)은 고대 그리스도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따라 만물이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였다(1803년). 이후 100여 년이 지난 후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푸딩에 건포도가 박힌 것과 비슷한 모양의 원자모형을 제안하였다(1903년). 이후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가 원자핵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전자의 모습을 제안하였다(1911년). 그리고 그의 제자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는 원자의 궤도모형을 제안하였다(1913년). 지금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는 구름의 형태로 존재하며 그 위치는 확률로만 알 수 있는 전자구름의 형태로 원자모형이 정착되었다(1936년-현재). 오늘날 현대 기술은 원자의 실제 모습을 직접 촬영할 정도로 발달하였다.
이제 양자론을 더 깊게 넓게 발전시키는 과학자들이 계속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의 과학자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는 ‘행렬역학’을 사용하여 그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라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불확정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측정 능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양자의 위치와 속도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가설은 사고실험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의 주장을 입증하는 실험이 그 유명한 전자의 ‘이중 슬릿 실험’(double-slit experiment)이다. 양자는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 모두 가지고 있다. 이중 슬릿을 만들고 그 뒤에 형광물질을 바른 스크린을 준비한다. 그리고 전자를 이중 슬릿을 향해 쏘아 보자. 그러면 슬릿을 지난 전자는 슬릿 뒤의 스크린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전자를 하나씩 쏘았는데 스크린에는 간섭패턴을 보였다. 이것은 전자 한 개가 양쪽 슬릿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슬릿에 전자 측정기를 설치하면 스크린 위의 간섭패턴이 사라진다. 전자는 둘 중 어느 한쪽 슬릿만 통과한 것이다. 관측이란 행위가 전자의 성질에 영향을 준 것이다. 이것은 모든 물체의 위치와 속도는 확정되어 있다는 지금까지의 자연관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18-1988)은 이러한 이중 슬릿 실험을 “양자역학의 심장”이라고 불렀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려면 이중 슬릿 실험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중 슬릿 실험에서 나타난 양자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숙제는 관찰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양자이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1. 양자의 위치와 속도는 확정된 값이 아니므로 ‘양자 본래의 위치와 속도’를 일반적인 숫자로 나타낼 수 없다.
2. 양자를 관측해서 얻을 수 있는 ‘측정한 위치와 속도’는 일반적인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
3. 같은 조건으로 측정했다고 해도 그 측정치에는 불확정성에서 유래하는 오차가 있으며 실제 측정했을 때 어떤 값을 얻을 수 있을지는 어디까지나 확률의 문제다.
4. 양자이론으로 한 번 측정해서 얻을 수 있는 물리량을 예측하는 것은 원리상 불가능하지만, 물리량의 분포에 따른 평균과 분산과 같은 통계량이라면 예측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행렬로 표현하려고 했다. 이것이 ‘행렬역학’이다. 그러나 행렬수학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1887-1961)는 ‘파동함수’(wave function)를 이용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만들어 ‘파동역학’을 제안하였다.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가 대충 마무리되던 1948년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은 ‘경로적분법’(path integral method)을 제안하였다. 그는 양자가 가능한 모든 경로를 동시에 통과한다고 말한다. 전자총에서 보내진 전자가 달에 갔다가 내 눈앞에 관찰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역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다.
행렬역학이냐, 파동역학이냐, 아니면 경로적분이냐 할 때 결국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여기서 양자역학은 해석의 문제에 부딪힌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은 진정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과연 하늘의 별들이 파동인가? 사실 입자로 보이지 않는가? 빛은 오히려 파동으로 보이고, 물체는 입자로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아직도 양자역학이 넘어야 할 난관이다. 현재는 덴마크 물리학자들의 해석인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관찰이란 무엇일까? 관찰자의 의식이 양자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 파동과 입자로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찰을 통해 입자로 고정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양자역학에서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이에 따라 양자역학 물리학자들은 여러 해석파로 나뉘게 된다. 대표적인 해석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코펜하겐 해석
② 다세계 해석
③ 서울 해석
④ 데이비드 봄(혹은 드 브로이-봄 해석)
양자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사실은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리처드 파인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양자의 특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해석이라는 난제가 남아 있지만 양자의 특성으로 “중첩”과 “얽힘”에 대해서 모든 양자 물리학자들이 동의한다.
양자중첩(quantum superposition)의 원리란 양자가 모든 가능한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측하는 순간 변화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가상 실험이 등장한다. 원래는 양자역학을 비판하기 위해 고안된 사고실험이지만 양자역학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여기서 다시 한번 ‘관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즉 해석의 문제가 등장한다.
또한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은 양자에서만 발견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으로서 고전물리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분명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것은 두 개의 입자가 서로 얽힌 (혹은 맞물린) 상태로 만든 다음 각각의 입자를 매우 멀리, 예를 들어 하나는 지구에 하나는 해왕성에 두었을 때 두 입자는 시간과 공간의 힘을 초월하여 상대방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지구에 있는 전자의 스핀 방향이 위(up)로 관측이 되었다면 해왕성에 있던 전자의 스핀은 아래(down)로 즉시 결정된다.
위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고전물리학자들의 ‘국소성의 원리’ 즉 자연세계는 떨어진 곳의 환경과는 별개로 정해진다는 신념을 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뛰어넘는 속도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35년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국소성과 양립하지 않는 양자역학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과학자들의 이름 머리글자를 따서 EPR 패러독스라고 한다.
그러나 약 30여 년이 지난 1964년 물리학자 존 스튜어트 벨은 양자역학의 이론이 맞는지 틀렸는지를 검증할 실험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벨 부등식’을 제안하였고 1975년부터 1982년에 걸쳐 프랑스 물리학자 알랭 아스페가 진행한 실험 결과 양자역학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결과적으로 양자역학이 시사하는 기묘한 특성을 자연계의 본질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즉 양자의 얽힘은 시공간(time-space)을 초월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양자 상태가 확정되는 것과 정보가 전달되는 것은 다른 개념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었다. 양전하를 띄는 양성자와 전하의 성질은 없지만 질량을 주는 중성자가 더 작은 입자들인 쿼크(quark)들로 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각각의 쿼크(quark)는 글루온(gluon)이라는 힘 운반 입자(force-carrying particle)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지금은 쿼크(quark) 역시 ‘끈’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 제시되어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화학반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전자의 상태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서 현대 디지털 문명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확실히 양자역학은 21세기 문명의 핵심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 연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을 응용하는 기술들은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강대국들은 양자연구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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