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과 신학이 서로 어떻게 관계할 수 있는가?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physics)은 지난 100년 넘게 발전해 오면서 21세기 문명을 꽃피우게 한 첨단 물리학의 분야이다. 그런데 2천 년 넘게 지속되어 온 기독교 신학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하나는 원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과학자들의 눈에 비친 신학은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즉 관찰할 수 없는 영역을 다루는 학문이 아닌가?
형이상학자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다룬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과연 진짜인가?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며, 과연 신은 있는가?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의식은 무엇이며 영혼은 있는가? 그러나 보이는 세계를 주로 다루는 물리학(고전물리학)이 보이지 않는 원자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론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이제는 과학자들도 자연스럽게 위와 같은 철학적인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양자역학이 형이상학과 고전물리학의 경계를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물리학과 신학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접촉점이 생긴 것이다.
영국의 성공회 목사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은 이 부분에 관하여 좋은 책을 썼다. 『양자물리학과 신학』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폴킹혼은 양자역학과 신학의 유사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학자가 되기 전에 오랫동안 입자 물리학자로 일했다. 물리학자로서 신학을 한 것이다. 그는 최신 물리학과 신학이 서로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과학과 신학이 서로 친구로서의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 ‘비교발견법’을 사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물리학이나 신학은 실재의 놀라운 특성에 관한 사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 새로운 지식을 더 깊이 있는 이해의 컨텍스트에서 설정하려면, 더 투쟁해야 합니다. 빛의 사례에서 보면, 디랙(Paul Dirac)의 통찰이 양자장이론(quantum field theory)의 발견을 가져왔을 때, 물리학자는 파동-입자 이중성을 보고 편안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장은 공간과 시간 내에서 퍼지기 때문에, 장은 파동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이 양자화되면 장의 에너지는 입자 같은 행동에 해당하는 묶음 속으로 들어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이중적 특성을 계속 지니는 특정한 사례를 검사할 수 있게 됨으로써 그 위협적인 패러독스는 사라졌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기독교의 사고는 그리스도에게 신의 위상을 인정하는 것으로만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위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근본적 위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혀야 합니다. 즉 신학적 탐구는 결국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믿음을 갖도록 교회를 이끄는 여정입니다. 양자이론과 신학 모두 다 새로운 발견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방법을 고려하면,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할 수 있고, 더 깊이 있는 이해가 매우 다른 종류의 주제를 다루는 두 형태의 합리적 탐구 사이에 분별 가능한 논리적 유사관계를 더 많이 추구하는 방법을 제공합니다. 유사성은 경험이 사고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발견법의 전략은 더욱 충분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 발전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과학과 신학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작업은 여러 사람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기독교 신앙과 카오스 이론』에서 저자 강성열 교수는 카오스 이론을 신학체계에 응용하였다. 나비효과로 널리 알려진 카오스 이론은 복잡성과 다양성 속에서 일정한 규칙성과 단순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안에 질서와 법칙을 감추고 있는 이른바 결정론적인 카오스 내지는 질서를 낳는 혼돈이라고 본다. 이 책은 카오스 이론과 성경의 다양한 가르침 사이에 있는 유사성을 발견하고 신학에 적용하고 있다.
비선형(non-linear) 이론 또는 복잡성의 과학으로 불리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은 1970년대 이후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학문 분야이다. 이 이론의 주된 연구 대상은 카오스 현상이다. ‘카오스’란 ‘혼돈’ 또는 ‘무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어떤 시스템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나타나는 양상이 너무도 복잡하고 불규칙하여 미래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지금까지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이러한 혼돈의 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대표하는 고전 과학은 단지 균질하고 매우 단순한 조건을 갖춘 자연 현상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른바 기계론적인 또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기초해서 말이다. …카오스 이론은 그것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려는 노력이다.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연한 질서를 찾아내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카오스 이론은 본래 수학이나 기상학, 천문학, 물리학 등의 과학 분야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 연구 성과는 심리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정치학, 의학, 문학 등 모든 학문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물리학자의 길을 걷다가 나중에 신학을 공부한 폴킹혼과 달리 나는 신학을 먼저 했고 나중에 양자역학을 접했다. 나의 관심은 양자역학과 신학을 1:1로 양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 원리와 용어들로써 신학을 재진술(re-write) 혹은 재구성(re-construct)하는 것이다. 즉, 나의 목표는 양자역학과 신학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신학을 재진술하기 위한 용어들(terms)을 제공함으로써 전통적인 신학체계에 또 다른 색을 입히는 것이다.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원자로 구성된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과 능력을 드러낸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한 세계를 멀리서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적극 개입하시며 다스리시며 지금도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원자의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실험하여 밝혀낸 결과를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신비를 당연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과학과 신학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해 주는 친구이다. 단지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로 자신의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양자역학 원리와 용어들을 가지고 신학을 재구성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이 반지성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다.
양자역학은 원자의 세계를 기술하는 물리학의 한 분야이다. 모든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의 몸, 심지어 의식까지도, 돌, 식물, 동물, 우주의 수많은 별들 역시 원자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이론가들이자 실험가들이다. 그들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들을 만들어 내고 그러한 이론들을 실험과 수학 공식을 사용하여 검증하려고 한다. 과학자들은 실험과 수학 공식으로 교차 검증하였을 때 비로소 그러한 이론을 ‘진리’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일단 보류한다. 그러한 연구 결과로 나온 탁월한 지식으로 인하여 인류가 많은 혜택을 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과학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자들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반박되고 뒤집히는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뉴턴(1643-1727)은 빛이 입자라고 굳게 믿었다. 그를 따라 많은 과학자들이 빛의 입자설을 믿었으나 100년이 지나서 빛이 파동이라는 주장에 힘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결국 아인슈타인이 등장하여 빛은 입자이자 동시에 파동이라는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 이론을 발표하여 1921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진리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굳게 믿었으나 만유인력의 법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무릎 꿇어야 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역시 양자역학의 등장에 반대하고 공격하다가 결국 양자역학의 이론에 양손 들어야 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실험과 수학 공식으로 교차 검증하여 발표한 ‘진리’라고 믿어졌던 것들이 반박되고 뒤집히는 것을 수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언제까지 진리일 수 있을까? 과연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실험과 관측으로 입증된 ‘진리’라고 하지만 과연 그것은 영원불변의 진리인가?
과학자들은 실험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관해서는 개인마다 ‘신념’을 가질 자유의 영역으로 넘겨버린다. 그들에겐 오직 실험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머릿속에서 혹은 실험실에서 검증하려고 한다. 반면, 기독교 신학의 출발은 실험과 검증이 아니라 ‘계시’이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은 신적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물론 어떤 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과학의 지위를 계시와 동등하거나 혹은 계시 위에 두기도 한다. 나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에서 모든 학문과 인간 이성과 경험이 계시 아래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여기서 세 가지 요점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과학과 신학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 둘째, 과학자들이 실험하여 밝혀내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또 다른 실험에 의해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기독교의 계시론에 의해 세워지고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교리 역시 모든 시대에 완전한 진리일 수 있는가 항상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세 번째 요점에 관해 오해가 없도록 좀 더 설명을 해야겠다. 이것은 내가 믿는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불변의 진리이지만 그것을 당시 신학자의 언어로 진술하는 과정에서 과장 혹은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진리이고 그 계시를 기록한 성경은 진리의 책이다. 그러나 진리를 교리화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람의 한계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과학자들이 실험으로 증명되었으니 불변의 진리라고 믿어 왔지만 또 다른 실험에 의해서 반박되고 뒤집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서술하는 인간의 언어가 오염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은 항상 그 시대의 언어로 재진술(re-write)되어야 한다. 과학자들도 겸손해야 하고,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겸허해야 한다. 우리가 이 겸손의 미덕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과학과 신학은 서로 보완해 주는 든든한 친구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과 독선은 과학자나 신학자에게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오만과 독선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이 전부이고 다른 것을 내려다보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갈등과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나 상대방에게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화가 가능해지고 나아가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친구로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만과 독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있다. 또 다른 학문의 영역도 열린 자세로 탐구할 것이다. 신학을 가르치지만 신학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신학자들은 물리학을 공부해야 하고 물리학자는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신학은 늘 개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를 설득할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진리가 효과적으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언어로 항상 다시 진술되는 신학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양자역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신학이 양자역학을 배움으로써 흑백에서 총천연색이 더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토록 재미없었던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 이제는 너무나 재미있다. 양자역학의 언어와 원리로서 인간의 몸과 구원과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려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그리고 양자역학과 신학은 서로 너무나 가까운 친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물질세계를 지으신 분이다. 따라서 양자세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의 모든 물질세계가 그 만드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이제 우리는 먼저 간략하게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양자 물리학자를 위해서가 아닌 일반인들을 위해 최대한 쉽게 정리해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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