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에 빠진 한국 기독교
저는 지난주 경북 영덕에 다녀왔습니다. 여러 교파를 초월한 목회자들이 모여 매월 독서토론회를 갖고 있는데 그 모임에서 저를 초청하였기 때문입니다. 최근 제가 쓴 책 [퀀텀신학]과 관련하여 간단하게 강의도 하고 장시간 수준 높은 질의응답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만 집중하지 않고 교단을 초월하여 함께 모여서 다양한 주제로 택을 읽고 서로 마음을 열어 대화를 나누는 열린 시각을 가진 분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서 신학뿐만 아니라 역사,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주제에 관련하여 책을 읽고 있었고,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며 연합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는 교회에만 집중하느라 독서할 시간도, 지역복음화를 위한 연합회 활동에도 시간을 잘 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국교회를 관찰하면서 느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가 반지성주의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생각하는 힘이 커져가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이 땅에 시작된 지 200년이 되었으면 교회들마다 신학의 깊이를 자랑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를 보고 있으면 그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탄식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관하여 적절합니다. “때가 이ㅁ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5:12)
반지성주의적 기독교라고 보는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여러 교회들을 다녀보고 있는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이나 교회 중직자들은 더 이상 신학에 관하여 관심도 없고 연구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지난 1년간 어느 교회에서 일반 교인들을 대상으로 신학강좌를 열고 신학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역자들이나 장로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목사의 설교를 보면 교인들로 하여금 생각 또는 분별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없고 오직 ‘봉사’ ‘헌신’ ‘헌금’ ‘전도’ 등 인간의 열심과 행위에 대한 강조 뿐입니다. 설교자 자신이 본문을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설교자는 더 이상 본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연구나 해석을 통해 깨닫게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회적 의도’를 따라 본문을 인용하고 이용할 뿐입니다. 목회자들의 설교에는 ‘이해’와 ‘깨달음’보다는 무조건적인 아멘과 순종에 대한 요구만이 있습니다. 아멘 소리가 약하다고 핀잔을 주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가스라이팅이 설교시간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반지성주의에 빠진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반지성주의에 빠진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막연한 꿈 즉 ‘망상’을 주입합니다. 그것을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말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해야 한다 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새로운 율법주의, 체험과 경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와 은사주의, 그리고 끊임없이 행사와 이벤트를 만들어 교인들로 하여금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바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교회가 되려면 행사를 줄여야 합니다. 설교시간에 ‘아멘’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철저히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시간을 주어야 하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묵상하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는 다양한 신학강좌와 성경연구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관한 깊이 있는 대화와 토론의 장이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반지성주의적 기독교의 네 번 째 특징은 정치제도의 경직화에 있습니다. 생각을 가로막는 리더가 있는 집단의 특징은 자연스럽게 권위주의 조직문화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을 하고 분별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언로를 차단하게 되고 결국 일방적인 소통으로 조직을 이끌게 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 중에 하나가 교회의 경직된 조직문화입니다. 일방적인 소통, 지시, 결정으로 조직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에 반항하여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장로제도가 특징입니다. 장로는 정치제도로 보자면 대의민주제도의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를 보면 대의민주제도를 이해하고 있는 장로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대부분의 교회를 보면 행사결정 및 집행, 예산 및 결산 결정, 인사 결정 및 사임을 목회자 한 사람이 모두 결정합니다. 장로들은 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그런 모습을 ‘장로다운 모습’ ‘좋은 장로’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보다 못한 조직문화, 정치제도에 관해 지성인들이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권위주의적인 조직문화를 쇄신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개혁은 항상 외부에서 왔습니다. 내부에서 참된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우물 안 상황에서는 자신들이 어떤 세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 또는 개혁에 대한 시도에 대해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고 분노하며 공격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답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혹시 문제를 알더라도 스스로 문제를 풀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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