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43)
하늘찬양
본문: 계19:1~10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19: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19:4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본문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살펴본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처럼 길고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전체적으로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에는 ‘바벨론’으로 비유되는 세상뿐만 아니라, 사단, 짐승, 거짓 선지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세력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악의 세력을 구축하는 ‘축’인 것입니다. 성경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파고 있습니다.(계11:18)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의 축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죠지 부시는 악의 축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악의 축이 북한이나 이라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의 세력이 너무나도 뿌리 깊고도 포괄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처럼 자세하고도 길게 하나님의 심판을 서술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의 세력을 철저히 응징할 것이고, 악의 세력에고통 당하던 당신의 백성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처럼 완벽하고도 철저하게 악의 세력들을 응징하는 하나님의 큰 열심을 보면서 더욱 감격스러운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는지 다시 한 번 요약을 해봅시다. 12장은 사단의 출현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단의 적개심을 보여준 다음, 13장에서는 사단의 사주를 받은 두 짐승,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을 보여줍니다. 14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는 택한 성도들을 보여줍니다. 15장에서는 택한 백성들이 모두다 짐승의 수를 이기고 심판의 바다를 지나 구원의 감격으로 노래 부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이 장엄하게 시행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16장에서는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완벽한 심판을 의미하는 ‘일곱 대접’이 거룩한 천사들에 의해 부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7장과 18장에서는 16장에 묘사된 심판 중에서 특별히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부분을 확대하여서 보여줍니다. 17장은 바벨론이 멸망하게 되는 경위와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17장에서 우리가 주목해본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나라의 정체입니다(17:3-5) 교회에 대한 세상 나라의 적대성입니다(17:6) 세상 나라의 권력구조입니다(17:8-13). 세상 나라의 반 기독성향입니다(17:14). 세상 나라의 거대한 영향력입니다(17:15, 18).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 나라는 적그리스도와 왕들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17:16) 서로 공생하던 악의 축들이 서로를 파멸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결국 악의 자기 파괴적 본성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17:17)
이와 같이 17장에서 세상 나라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 다음, 18장에서는 세상 나라의 멸망을 좀 더 줌 인(zoom-in)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이 ‘확대경’을 자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개략을 진술했다가 어느 특정 부분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서술 방식을 이해하면 계시록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자, 18장은 세상 나라가 얼마나 더럽고 음탕했는지를 보여줍니다(18:2,3)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줍니다(18:6,7). 그리고 세상 나라가 얼마나 극적으로 망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18:8) 세상 나라가 얼마나 놀랍게 멸망하고 말았는지 기득권 계층을 대표하는 왕들(18:9,10), 땅의 상인들(18:11-16), 그리고 바다의 상인들(18:1719)이 부르는 애가(哀歌)를 통해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이 성도들에게는 무한한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8:20)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너무나 확고한 일임을 드라마틱한 행동으로 선언합니다.(18:21)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 번 더 언급하고 있습니다(18:22-24) 세상은 사치와 허영과 쾌락을 숭배하는 죄를 범했으며, 하나님보다는 기술 과학 문명을 더 자랑하고 신뢰했으며, 더 가졌다는 이유로 횡포를 부렸으며, 치부하고 권력을 얻는 신통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타락하게 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피를 흘렸을 뿐만 아니라, 무고한 자들로 하여금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게 했으며, 무죄한 피를 흘렸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제 19장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이 일 후에” 하늘 이곳저곳에서 감격의 찬양이 마구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19:1-5) 그리고 즐거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선포되었다는 것입니다(19:6-10) 그리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19:11-21) 오늘은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서너 가지 이유를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본문은 세상 나라가 망하게 된 일들을 보았는데 이제부터 본문은 이 일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반응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큰 일들에 대해 우리가 가장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가장 먼저 세상 나라가 망하게 된 일에 대해서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먼저,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누구를 가리킬까요? 하늘은 성도들의 소속감을 그려주는 위대한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들은 바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인 땅과 하늘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에서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하늘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십시오. 왜냐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감격에 찬 음성으로 노래 부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주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18장에서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와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십시오.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들이 노래 부르는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도하시며, 홀로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며,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심판하시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구원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구원을 이루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하십시오. 그리고 능력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구원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속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만약 내가 행위로 구원을 받거나 이루어간다면 오직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했다고 고백하면서 본문과 같이 찬양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그래서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며, 오직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십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할렐루야!”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라고 한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을 완전히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입니다. 그 일들을 보면서 아직도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행동하신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아직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요?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거리신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수긍이 가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래, 맞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신거야! 하나님께서는 지금 정당하게 행동하고 계시는거야!’라고 생각이 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여러분의 신분과 정체가 무엇이며, 여러분의 소속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결코 의롭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불공평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지극히 의로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왜 의롭습니까? 본문은 두 가지로 그 정당성을 입증합니다. 첫째,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 당신의 종들의 피를 흘리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땅을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 온갖 우상으로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온갖 우상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피 흘리게 한 죄를 보십시오. 그 죄의 심각성을 보십시오. 그런고로 세상 나라를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이 지극히 정당함을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큰 소리로 예배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처럼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찬양한 다음에 하늘의 성도들이 “할렐루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로 외치면서 시작했다가 할렐루야로 끝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서로를 격려할 때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구원과 영광과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할렐루야’라는 말을 너무 인색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단지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의로우신 일들에 대해 화답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로운 일들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반응할 책임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들이 가르치듯이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서 열심히 찬양해야 하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서 찬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한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충만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지극히 의로우시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드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결코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아십시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의로운 일들을 아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예배가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절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 있는 예배의 관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늘의 성도들이 두 번째 ‘할렐루야’라고 외쳤습니다. 다른 사람이 요구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열거한 다음에 스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에 이끌려서 강요되는 찬양이 결코 아닙니다. 이처럼 찬양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예배는 이처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어느 누가 찬양과 예배를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배를 주도하십니다. 저는 우리 예배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인도자에게 의존하는 예배는 참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집중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십시오.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에 찬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반응하십니다. 왜냐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연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정직히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나 성공이나 인정받음이 결코 아닙니다. 내 사업이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경험입니다. 보십시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옥문을 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고, 또한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서 찬양하거나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이 지극히 정당하시기 때문에 찬양해야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의 성도들의 찬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십시오. 따라서 여러분들은 적절하게 반응을 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도록 하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알도록 하십시오. 그럴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정직하게 반응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십시오.
성도들의 찬양에 이어서 두 번째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성도들의 ‘할렐루야’를 듣고 화답하고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여기 이십 사 장로들과 네 생물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모든 택함 받은 자들의 대표자들이자, 모든 피조물들의 대표자들입니다. 그들의 경배는 모든 택함 받은 자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보십시오. 그들은 단지 반응만 할뿐입니다. 찬양과 예배는 결코 어떤 목적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찬양과 예배는 무엇인가 받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켜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만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움직여서 무엇인가 혜택을 얻어 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거절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이방인들의 기도와 이방 종교의 예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에 예배 드려야만 합니다. 이 외에 다른 동기가 우리의 예배생활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받으려고 예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진리에 대해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칠 뿐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바른 동기에 의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에 예배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받으려고 예배합니까?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계속 무엇인가 받으려고 추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예배를 더욱 공허하게 할 것입니다. 대신 진리를 붙드십시오. 진리를 아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예배의 회복이나 내면 질서의 회복은 오로지 진리를 아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보좌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5절)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찬송과 예배를 통해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한다면 결코 의무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찬송과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의무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면 예배는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예배는 심각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하는 예배가 사람 중심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보다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적절히 반응하는 예배가 아니라 사람의 필요와 반응에 민감해지는 예배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감수성은 잘 건드리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에 대한 계시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인은 없고 단지 무엇인가 느끼고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배는 삶이요 삶이 예배여야 하는데 요즘 예배는 콘서트 공연 정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드리는 예배가 아닌 보는 예배로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없고 단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필요에 맞추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예배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변질되고 타락한 이유는 이 시대가 점점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통치하심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6-8절)라고 했습니다. 이 소리의 주체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큰 권능이 있습니다. ‘많은 물소리’와 ‘큰 뇌성’은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세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는 또 다른 이유로서 하나님의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정당하게 심판하시는 일 때문만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것 때문에 찬양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만물을 다스려오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는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악의 축들에 대해 전쟁을 벌이고 계십니다. 그들을 철저히 응징하실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전쟁사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악의 시퍼런 세력입니다. 그들의 적대적인 행동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고백하면서 찬양 드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통치하신다고 말입니다. 사단이 바벨론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일으켜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님은 그들을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지금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는 참된 이유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가 죽임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 나라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서나 에스더서는 그것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과정을 주목해보십시오. 그러면 지금도 살아 계시며 통치하고 계시는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부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다고 나중에 그것도 먼 미래의 어느 날에나 심판하신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만물에 당신의 주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요즘 들어 제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주되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주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예배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종들입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참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예배시 우리가 드려야 할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의 전부를 드립니다. 나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쓰십시오. 주님이 저를 뜻대로 처분하십시오. 저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저의 전부를 사용하십시오. 저를 마음대로 하십시오. 주님이 저를 어떻게 하시더라도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곧 예배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란 신앙고백적 삶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행위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한 대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나름대로 철저하고 진지하게 준비를 하고 추진했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실패하게 하시고 좌절하게 하시는 권리를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A라는 길로 가려고 계획했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B라는 길로 인도하시더라도 그분을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나의 문제를 나보다 더 잘 이해하고 계시며,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며,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하지도 않으실 것을 믿고 계속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제가 요즘 깨닫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문제들이 힘을 잃고 말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참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이것을 고백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주님이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도 통치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의 모든 상황을 과연 그분께서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파도를 일으키는 분도 되심을 인정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이지만 바로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 드려야 할 이유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예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찬양의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때문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통치하심 때문이며, 이제 넷째는 우리를 위해 혼인잔치가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즐거움을 압니다. 어떤 즐거움입니까? 결혼식을 앞둔 신랑신부의 싱글벙글 거리는 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뒤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신다”는 고백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우리가 지나가는 나그네요, 잠시 머물다 떠날 수밖에 없는 우거하는 자요, 또 저 영광의 고향을 향하여 전진하는 순례자로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험하고 거친 길을 지나면 주께서 만세 전부터 준비해두신 잔치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잔치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 소망이 있습니까? 이 소망을 잊어버리지는 않으셨는지요? 구주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시는 이유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저 하늘에 소망을 두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진정 바라보아야 할 목적지가 하늘에 있음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 기쁨을 얻는 것을 막으시는 하나님을 결코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훨씬 나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린양의 혼인 기약” 다가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아내로 여기며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정혼한 사이입니다. 진정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자신이 그분과 정혼한 관계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먼저 프러포즈를 하셨고,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그분은 영광스런 혼인잔치 자리에 우리를 영광스럽게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누군지, 그리스도께서 내게 어떤 분인지 정작 잊어버리고서 세상에서 헛된 기쁨과 만족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침체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반면 모든 곤함을 극복하는 힘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신다는 것과 또한 나의 약혼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즉, 승리의 비결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광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어떤 분인지,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에 있어 어떤 신분인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분과 정혼한 관계지만 그러나 분명 그분과의 성대한 혼인잔치가 곧 열릴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그러한 사실을 깨우쳐주는 스승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고 했습니다.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십시오. 개인에게 임하는 곤고한 일들을 보십시오. 그러한 일들을 행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가 되셔서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시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신부를 연단하셔서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임하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정결해지고 거룩해집니다. 고난의 불을 통과하면서 성도들은 비로소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불같은 시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는 은과 금을 가져야 행복해절 것으로 착각하지 맙시다. 사람은 무엇을 더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연단하는 데 관심이 많으십니다.(잠17:3) 삶의 문제가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힘듭니까?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지 마십시오. 문제의 뿌리는 내 마음에 놓여져 있습니다. 더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하지 못해서 힘든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이나 상황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인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구주께서 당신의 신부를 잘 단장하시려고 행하시는 일들을 보십시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구주께서 세마포를 입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주색이나 금색과 같은 화려한 색으로 자신을 꾸미고 단장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꾸미십니까? 세마포입니다. 세마포는 교회가 자신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어입니다. 이 세마포는 어떤 옷입니까? 세마포는 세상 사람들이 죽어도 입기 싫어하는 옷입니다. 세마포는 실제로 죽은 사람들에게 입히는 옷입니다. 로마당시 세마포는 가난한 자들이 입는 옷입니다. 세마포는 죽은 자들에게 입히는 것입니다. 세마포는 다른 색으로 물들이지 않았습니다. 세마포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모든 욕구에 대해 철저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세마포는 매우 단순합니다. 성도들에게 허락하신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든 것입니다. 이 세마포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입혀주신 것이지 사람들이 노력하여 만든 것이 결코 아닙니다. “허락하사”라고 하신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그런데 로마 카톨릭과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드는 옷으로 착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한 것은 사람들의 행하는 옳은 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의로운 행실을 그저 전가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인생이 하나님보시기에 ‘옳은 행실’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 아니고서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의롭게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성도들의 삶을 약화시키거나 부도덕한 삶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아는 사람은 결코 불의와 거짓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옳은 행실을 믿는 자들에게 그저 은혜로이 허락하사 입게 하신 것임을 아는 사람이 결코 부도덕하거나 방종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허락하사 입게 하신 세마포에 먹칠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스럽고, 이 깨끗한 의의 옷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셨고,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만들어진 옷입니다. 우리의 죄를 취하시고 당신의 의를 믿음 안에서 값없이 수여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의를 결코 냄새나는 누더기같은 행위의 의로 바꾸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입으려고 하는 그러한 옷으로 자신을 꾸미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서 예비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보면서 우리를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알게 되고 우리를 어린양의 잔치자리에 영광스럽게 세우실 일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우리들의 탐욕과 교만이라는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죄와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고난의 풍랑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그럴 때 생각하십시오. 나는 과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 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부름을 받았는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부름 받은 자임을 망각하고 살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영화롭게 꾸미려고 하듯 그렇게 나 자신을 그들이 추구하는 옷으로 꾸미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과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로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천사가 요한에게 하는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우리는 세상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드러날 것에 대해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나라의 멸망과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세상이 망하는 과정에도 교회는 자신의 순결을 지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자신을 예비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를 위한 하늘의 잔치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더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1:6)고 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 잠깐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잠시만 시간을 내어서 여러분 자신의 구원에 대해 묵상해보십시오. 그러면 더 크게 기뻐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이 임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지가 이 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저 영광스러운 날에 대해 소망을 갖게 해줍니다. 그래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롬5:3,4) 고난이 찾아올 때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할 그날의 혼인잔치를 생각하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정혼자는 그날에 영광스러운 신랑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날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참으로 하나가 될 날입니다. 세상나라가 멸망하게 된 일을 보면서 하늘의 혼인잔치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세상나라 때문에 더 이상 고민하거나 힘들어하거나 시험에 빠지거나 영적으로 자신을 더럽힐 일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고난을 당하는데도 오히려 더 크게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이 영광스런 소망 앞에 사도 요한은 감격하여 이 소식을 전하는 천사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소망의 메시지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위대한 소망 때문에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자신이 영광 받기를 거절합니다.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代言)의 영이라”(10절) 천사는 단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위치에 있을 뿐 결코 우리들의 경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달되는 영광스러운 메시지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메시지의 황홀함 때문에 천사에게 엎드려 절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천사가 요한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예수의 증거를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대언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진리를 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종이며, 누가 성령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가 요한에게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계시는 내가 처음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는 너의 동무들도 함께 이 메시지를 알고 있다. 성령이 임한 사람들은 이 메시지의 영광을 알 것이다. 이 계시를 너만이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나는 단지 전달자에 불과하다. 너와 너의 동무들도 나와 같이 이 영광스러운 계시를 전달하라고 부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오직 너는 이 계시를 주신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영광스러운 계시의 말씀 앞에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리라”고 결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철저한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빛이 꺼져갈 때에 두려워 마십시오. 더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둡게 하실 때 그것은 하늘의 빛이 임박했다는 전조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영광스러운 소망이 우리 안에 살아있는 고백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세상을 심판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날에 우리 앞에 나타날 혼인잔치는 역사상 그리고 온 우주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며 찬란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혼인잔치가 지금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초대되었음을 상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약혼자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에 순결한 신부로 서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날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며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 세
주님의 한없는 은혜로써 예비한 그 집에 나 이르러
거기서 주님을 뵈옵는 것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앞서간 친구를 만나볼 때 기쁨이 내 맘에 차려니와
주께서 날맞아 주시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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