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42)
애가와 찬가
본문: 계18:9~24
18:9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8:10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18:11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8:12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18:13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18:14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8:15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8:16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8:17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18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18:19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18: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18: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18: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죄는 참으로 큰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하기보다는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목적을 삼는 것을 일컬어서 성경은 ‘교만’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교만의 결과 사람들은 사치를 추구하며,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웃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의 세상은 극도로 자기중심주의로 치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주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마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교만의 결국은 패망이라는 것을 입증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간 참고 견디었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될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가오는 그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의 문명이 갑자기 망한 것을 보고서 슬피 우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하신 하나님이심을 결국 깨닫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세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해줍니다. 첫째는 왕들의 반응입니다. 왕들은 땅의 통치자입니다. 둘째는 장사꾼들의 반응입니다. 땅의 상인들이지요. 셋째는 뱃사람들, 바다의 상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세상 문명이 멸망함으로 인해 슬피 울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탄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세상의 3대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이 믿고 의지하며 자랑했던 것들이 망함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직접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고 섬기고 자랑하던 우상들을 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랑했던 것들이 참으로 헛된 우상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주 하나님만이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취하시기 이전에 9번에 걸쳐서 그들이 믿고 섬기고 자랑했던 것들을 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주신 경고이자 회개의 기간이며 유예기간이기도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러한 일들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고 자랑하는 헛된 우상을 보여주시기 위해 당신의 강한 능력을 보여주실 때 우리는 신속하게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 그들이 애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왕들의 반응을 살펴봅시다.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9, 10절) 여기서 언급된 ‘땅의 왕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모든 권력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물질문명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맛보는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혜택으로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축적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불붙는 연기를 보고서 울고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불붙는 연기는 무엇을 뜻합니까? 세상나라의 영화가 사라진 것입니다. 세상문명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울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의지하고 공생하며 쾌락을 누렸던 대상이 망했기 때문이고, 가슴을 치는 이유는 세상나라가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기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한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제야 강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라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당할 종국을 생각하면 더욱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문명이 하루아침에 몰락한 그 현장을 지켜볼 것입니다. 세상문명이 몰락하면서 자기들이 머지않아 끝장날 것이라는 사실을 지켜본다는 사실만큼 무서운 것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그들이 의지함으로써 권력을 누리던 대상이 일시에 망하게 된 것을 지켜보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 소망을 두며 기득권을 챙기는 모든 권력자들, 통치자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들에게 본문은 진지하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연락하고, 그대들이 의지하고, 그대들이 권력의 기반으로 삼는 그것이 얼마나 견고한지 생각해 보라. 그것들이 그대들을 과연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자랑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쁨을 얻고 혜택을 누리는 근원이 과연 어디란 말입니까?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지켜줄 것입니까? 그것이 과연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인지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로 우리 자신의 근원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만약 살아 계신 주 하나님을 삶의 근원으로 두지 않는다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언젠가는 불붙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울고 가슴을 치며 다가올 고난을 무서워하며 애통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기억하십시오. 오직 살아 계신 주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고 자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피와 눈물로써 인내할 수밖에 없지만 반드시 그 믿음은 보상되고 남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 믿음의 토대는 과연 무엇입니까? 내가 소망을 두고 있는 곳은 과연 어디란 말입니까? 내가 기쁨을 얻고자 하는 대상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곳이 하나님의 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곳, 그 대상이 하나님 안이 아니라면 주의하십시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아픔을 보고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봅시다. 두 번째는 땅의 상인들입니다.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11절)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15-16절) 땅의 상인들이 애통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터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시장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윤을 내고 있는 이 시장이 과연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이 시장에서 지금 내가 많은 돈을 벌고 있는데 시장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회사를 경영하는 CEO라면 누구나 민감하게 고민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러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이윤을 보고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 물질문명은 반드시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인들이 자랑하던 시장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없게 될 날이 이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은 앞으로 이런 저런 사업을 구상하면서 여러분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상인들이 부르는 슬픈 노래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울고 애통하는 모습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으로 경영하고 이것저것을 하겠다고 말하고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칼자루를 쥐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경영하는 바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그분께서 친히 주도하시고, 친히 인도하시도록 하십시오. 때로는 그분께서 여러분이 기대하지 않은 길로 인도하시더라도 믿고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보다 더 지혜로우신 분이시며, 여러분보다 더욱 선하신 분이시며,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진정한 경영자로 모셔들이십시오. 그분 앞에 여러분은 단지 고용인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전폭적으로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오래 전부터 여러분이 알고 있었던, 그리고 성경에서 여러분이 너무나 자주 듣고 있었던 말씀이 여러분의 좌우명이 되게 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주가 되시고, 여러분은 그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 경영인들의 좌우명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상품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보십시오. 혹은 어떤 상품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구입하라고 광고할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품이 무엇인지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그것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상품과 사람의 관계, 그것을 ‘시장’(market)이라고 부릅니다. 상품과 시장이 과연 얼마나 영구적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의외로 기간이 짧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불과 5년 전만 생각해보십시오. 한창 벤처바람이 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5년 전에 유명세를 탔던 벤처기업 중에 지금까지도 잘 나가는 곳은 그리 얼마 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컴퓨터를 보십시오. 시장 주기가 얼마나 짧습니까? 최신형을 구입하자마자 금방 구형이 되고 맙니다. 그처럼 상품과 시장의 수명이 단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그 기간이 점점 짧아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시장이 사라지는 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처럼 짧은 주기의 시장성 때문에 대박을 터뜨린 사람이 울고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나라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무상하고, 참으로 안개처럼 일시적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여러분의 궁극적인 소망을 두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직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여러분의 영원한 소망을 두기를 바랍니다. 그곳에는 여러분이 영원히 사랑을 나누면서 섬기면서 기쁨과 행복을 얻게 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아니 여러분을 간절히 사모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수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자랑하던 상품들이 어떤 것인지 냉철하게 살펴보십시오. 본문에는 어떤 상품들이 열거되고 있습니까? 1세기 당시에 유명한 상품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거래함으로써 많은 상인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사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외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12, 13절) 본문에 나열된 상품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대부분 사치품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대부분 의식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각각의 상품들은 단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사치품들은 사람의 격을 결정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러한 사치품들로 자신을 단장하고 꾸미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구분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어떤 차를 몰고 다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질을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더 크고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차를 타고 다니면 나도 모르게 우쭐거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티코나 프라이드 같은 소형차들이 끼어들면 아주 우습게 보게 합니다. 제가 1500cc 아벨라를 몰고 가는데 차선이나 신호를 위반하지 않고 규정 속도로 가는데 뒤에서 빵빵거려서 돌아다보니까 엄청 큰 버스였습니다. 큰 차를 몰면 작은 차가 우습게 보이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치와 허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크고 좋은 것을 자꾸만 고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독 한국이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허영과 사치에 눈먼 사회가 될수록 실용적인 것보다는 이미지나 외관에 더욱 신경을 쓰는 법입니다. 가진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세상 속에서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세상을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으로 세상적 가치관과 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모든 상품이 다 수입품이라는 것입니다! 1세기 초대 교인이라면 본문에 기록된 상품들이 모두다 어디서 수입한 것인지 알 것입니다. 금, 상아. 기명, 값진 나무들은 북아프리카에서 수입했습니다. 보석, 진주는 인도산입니다. 계피, 비단은 중국산입니다. 향, 향유, 유향, 향료계통은 아랍산입니다. 밀, 고운 밀가루 등은 애굽산입니다. 그리고 말은 아르메니아산, 수레는 유럽 가울(Gaul)지방에서 수입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수입품에 눈멀어 있습니다. 본문에 나열된 상품 중에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수입품들에 자신들이 노예가 되어버렸고,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사치품과 수입품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종으로 삼습니다. 그러한 상품들이 없이는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한 상품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 로마는 과소비로 유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소설을 읽어보신다면 금방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옷만 보아도 강북인지 강남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젊은 청년들은 저마다 자기 핸드폰이 얼마나 세련된 것인지 자랑합니다. 타고 다니는 차종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합니다. 이 시대는 실로 사치와 허영에 눈멀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편승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노예 아닌 노예들을 보십시오. 세상이 거래하는 상품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사람도 상품 취급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쓴 [이 시대의 노예제도]란 책을 읽어보십시오. 노예제도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을 종으로 매매하는 일들을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참 영광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14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탐하던 과실을 떠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추구하던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빛나게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의 영광을 빼앗아 가심으로써 인생들로 하여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아침 안개처럼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영광을 좇아서 시간과 힘을 낭비하다가 나중에 후회하며 깊은 회한에 잠기는 불쌍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아야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해 아래 모든 것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저 하늘의 도성과 같이 영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하늘에 해보다 더 밝은 영광으로 빛나고 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세상의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는 그날에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찬란한 영광이 아니라 불붙는 연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난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 영광을 보는 순간 세상의 모든 영광은 사라지고 불붙는 연기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에 모든 인생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인정하게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는 회개하고 싶어도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날에 인생들은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며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자기들이 얼마나 허영과 사치에 눈이 멀었는지 깨닫고 비탄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탄식하게 될 인생들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으로 입히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습니다. 그렇게 입히고 꾸민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자기 자신과 자신을 꾸민 것을 동일시하다니! 그러나 이러한 일은 요즘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고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보다 잘 보이기 위해서 어떻게 자신을 꾸밀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게 세 딸이 있습니다. 큰딸이 이제 겨우 7살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와서 제게 업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큰애를 데리고 시내를 나가보았습니다. 1시간 동안 시내를 걷는데 다리 아프다길래 업자고 하니까 하는 말이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왜 부끄럽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애기처럼 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벌써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부터 배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어떻게 치장하고 꾸밀 것인가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잘 꾸미면 자신이 그만큼 나아진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은 세상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흘러가면 수치와 부끄러움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루아침에 빛을 잃고 날아갈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 자신을 가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영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여러분을 가리도록 하십시오. 지금 자신을 무엇으로 단장하려고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오직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시는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제발 부탁하는 것은, 좋은 옷과 장신구로 자신을 꾸미면 삶의 질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깨뜨려 버리십시오. 예를 들어 더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삶의 질이 더 좋아질 것이란 것 말입니다. 더 좋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면 삶의 질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 말입니다. 최근 몇 달 동안 핸드폰 없이 살아보니까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환상만을 추구하다가 결국 환상이 깨어질 때 찾아오는 슬픔과 고통에 빠져서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겉모양만 신경 쓰다가 우리의 속사람이 망신창이가 되는 것을 결코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비록 겉 사람은 썩어 들어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이 더욱 새로워지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겉모양에 신경 쓰지 마시고 제발 속사람의 아름다움을 가꾸어나가는 일에 마음을 쓰도록 합시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 보다는 주께서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더욱 마음을 두도록 합시다. 부디 세상을 살면서 겉모양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합시다. 이런 점에서 교회 역시 회개해야 할 점이 참 많습니다. 물질주의와 물량주의에 치우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바다의 운반자들 역시 탄식하고 있습니다. 해운업자들 역시 무역할 내용이 사라졌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권력, 특권, 재산증식의 통로, 수단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17-19절) 보십시오. 여기 세상 사람들이 세상 나라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그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바벨론을 ‘큰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벨론은 어머니의 품과 같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나라에서는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얻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권력과 부를 약속해주는 곳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물질문명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성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컸기에 실망도 큰 것입니다. 그들을 부자 되게 만든 바벨론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망해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슬픔도 큰 것입니다. 여러분, 이래도 세상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이래도 세상을 의지하겠습니까? 이래도 세상에 무엇인가를 기대하시겠습니까? 두고 보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을 철저하게 기만할 것입니다. 세상이 약속해주는 보배로운 상품들에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한 상품들이 우리의 영혼을 윤택하게 하리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삶의 질을 높일 것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겉으로 여러분을 화려하게 꾸며줄 지는 몰라도 여러분의 수치를 진정으로 가려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모든 부끄러움에서부터 가려줄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그렇습니다. 온 천하를 얻는 일에 주력하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을 얻는 일에 주력하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시간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부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영생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황홀하고도 찬란한 장신구는 우리의 수치를 결코 가려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의지하던 자들의 입에는 애가가 울려 퍼지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며 살던 자들의 입에는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20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소식에 여러분이 즐겁습니까? 세상 나라가 망했다는 천사의 선포가 여러분에게 진정 즐거움을 가져다줍니까? 그렇다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반면 세상이 망했다는 소식에 여러분들도 왕들과 장사꾼들처럼 슬피 울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꾸며주었던 장신구들이 하루아침에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임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본문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살던 자들로서 이 땅에서는 모두 순례자요 나그네로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저 찬란하게 빛나는 시온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다들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너무 피안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한다고 비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례자의 영성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세상을 등지거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분명 신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순례자의 영성이야말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빛과 소금이 되게 해준다는 것에 대해 왜 생각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서 안주하려고 하고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려고 하면서 어떻게 세상에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모든 소망을 두려고 하는 것을 끊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을 주님의 뜻대로 개혁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 참 소망을 두지 않고서 어떻게 세상을 복음으로 비추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고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는 나그네요 순례자임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이미 망했습니다. 이미 망해버려서 불붙는 연기를 내뿜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세상을 사십시오. 세상에 무엇인가 좋은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부를 축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좋은 집을 지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늘나라에 여러분의 좋은 것을 모으도록 하십시오. 도적이나 동록이 결코 해할 수 없는 그곳에 여러분의 집을 견고하게 지으십시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자기 집을 짓는데 열중하며, 이웃의 아픔은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이웃의 아픔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맛보려고 하는 세상과 한 패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당한 모욕과 비웃음과 조소와 조롱과 핍박과 힘들고 어려운 삶을 하나님께서는 다 기억하십니다. 그들이 억울하게 당한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되갚아 주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치중하던 모든 자들에게, 세상문명에게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울고 슬퍼할 수 있어도 나중에는 웃고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 웃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나중에 반드시 울게 하십니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우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젊었을 때 고생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젊었을 때 한없이 울어보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웃는 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최후에 웃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1-25)
본문은 현재 웃는 자의 장래 울음과 현재 우는 자의 장래 웃음을 서로 비교해서 보여준 다음에 힘센 천사가 등장하는 장면을 연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한 힘센 천사의 등장하는 데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음성의 형태로 들려지기도 하지만 행동의 형태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극적인 행동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보여주었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말로 해서 잘 안되니까, 혹은 말로 하기에는 너무나 하나님의 일이 크고 오묘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극화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서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맷돌은 바벨론, 즉 세상나라를 가리킵니다. 큰 맷돌이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다시 떠오를 가능성이 전혀 업습니다. 세상나라는 다시 회복되지 못할 상태로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나라는 회복불가능의 상태로 떨어지는 순간을 향하여 점점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 깊은 곳에 빠져서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할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세상나라에 여러분의 인생을 담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의 닻을 내리지 마십시오. 세상과 운명을 같이하지 마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여기서 본문은 다시 한 번 바벨론이 멸망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세상이 망할 수밖에 없는가? 첫째는 사치와 허영의 죄입니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묘사된 모든 표현들은 자기만족을 추구하고, 쾌락과 유희를 즐기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한 죄임을 기억하십시오. 술과 세상노래와 마약에 탐닉하는 것은 죄입니다. 고통 하는 이웃의 신음소리를 외면하고 잊어버리기 위해 술 취하는 것은 죄입니다. 술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술 먹는 것이 죄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언제 먹지 말라고 했느냐는 식으로 궤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술을 마약과 같은 종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술은 일종의 약품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속병을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 써도 된다고 했습니다.(딤전5:23)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에게는 술은 보지도 말아야 할 것들 중에 하나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잠31:4-9) 남을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 원한다면 술을 가까이하는 것은 분명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술을 금하는 이유는 경찰관이 음주운전자를 단속하는 이유와 똑 같은 것입니다. 법을 지키고, 공의를 행하며, 고통당하는 이웃을 돌보아주며,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억울한 송사를 해결해주기 원한다면 음주는 분명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나라를 한번 보십시오. 온 나라가 술에 취하여 있습니다. 맥주를 비롯한 주류소비가 천문학적인 액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현실을 잠시 잊어버리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에 취해서 이웃의 아픔을 돌보지 못하는 모습에 우리는 분개를 금치 못합니다.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 가운데서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에 우리는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
두 번째는 교만과 자만의 죄 때문에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고 했습니다. 상인들은 사실상 땅의 왕족이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들은 기득권자들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더 가졌다는 이유로 거만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 한 것입니다. 좀 더 가졌기 때문에 남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비웃고 함부로 대한 것이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만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졌기 때문에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가졌다는 이유로 힘 있는 척 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의 풍요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변질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월세를 한번 얻어보십시오. 가졌다는 이유로 집주인이 얼마나 하대하는지 모릅니다. 가진 것이 왕노릇해도 된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데 그들은 좀 더 가졌다는 이유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죄인 취급합니다. 큰 차를 운전한다는 이유로 작은 차를 타고 가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보세요. 이 땅의 부자들이 부리는 횡포를 보세요. 이것이 그들이 범한 죄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한 항목입니다. 이렇듯 물질의 풍요가 사람에게 주는 영향력과 지배력은 막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그것을 당해낼 자가 세상에 없습니다! 부유함은 사람을 거만하게 또는 교만하게 만듭니다. 가졌다는 이유로 목에 힘을 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가진 사람 치고 목에 힘주지 않는 사람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거나 위선일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만국을 미혹한 죄 때문입니다.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23절) 세상은 자신의 죄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는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까? 치부하는데 마술과 같은 비법을 자랑합니다. 불로소득을 모으는 일에 모든 불법과 편법을 다 동원하는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러한 방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에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치부하는 비상한 방법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현혹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법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가로채기 때문에 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숭배하는 죄, 곧 맘모니즘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옵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서도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실 리가 없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수없이 경고하십니다. 그럼에도 계속 완고한 마음으로 버틴다면 결국 그들이 자랑하고 의지하던 것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생명을 경시하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사치와 방탕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돈 앞에 인격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서 생명을 해치고, 생명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일에 도움이 되는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합니다. 돈이 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듯 생명을 경시하는 죄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땅위에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은 인생들의 모든 피 흘림을 아십니다. 요즘 의문사규명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불의로 얼룩진 나라일수록 의문사는 더욱 많은 것입니다. 타살을 자살로 꾸미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죄인 것입니다. 설령 자살한 사람이라도 나라를 위해 일하는 가운데 그러했다면 일단은 나라가 책임을 져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약자 편에 서있어야 할 법이 강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생명을 무시하고 인간의 기본 권리를 압제하는 것은 중대한 죄입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죄는 곧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권력과 부에 눈에 멀게 되면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법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알아야 합니다. 왜 사람의 생명이 귀합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와 개인이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법을 알 리가 있겠습니까? 오로지 돈이 되느냐, 내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평가할 뿐입니다. 요즘 우리는 폭력 게임이나 비디오가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경시여기는 태도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은 작은 억울함도 풀지 못하고 직접 원수를 갚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제 세상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설명할 이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성경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이상 이 사회는 더욱 악해져갈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랑과 섬김이 아니라 오직 출세와 성공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의 피 흘리는 죄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죄의 대표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남의 피를 함부로 흘리는 죄를 범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냉철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운명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함 없는 세상, 반드시 망하고 말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다리시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세상은 어떻습니까? 편리하고 편안하고 즐길만합니까? 억울하게 흘린 피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지 않습니까? 무죄한 자들이 흘린 피가 하늘을 향하여 심판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억울하게 당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에 서야하겠습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고 풍유와 퉁소를 부는 자들 사이에서 연락을 즐기며 자신을 높이는 자들과 함께 자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마음을 높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어깨를 같이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분이 상승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즐기며 안락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며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이 하며 마음을 함께 낮추는 것이 훨씬 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치와 허영과 번영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오히려 사치와 허영을 죄악시합시다! 그리고 세상이 바다에 처박힐 멧돌이라고 여기고 살아갑시다! 세상의 노랫소리에 취하지 맙시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하려하게 꾸미는 자들 앞에서 결코 주눅 들지 맙시다. 그들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경고합시다. 그리고 그날에 웃고 기뻐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슬퍼하며 애통하는 자들의 편에 섭니다! 주의 은혜는 언제나 낮은 곳으로 임합니다. 고통당하며 울고 슬퍼하는 자들의 자리로 우리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먼저 겸손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낮은 곳에 내려가십시오. 그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강해(44)-승리하신 그리스도(계19:11-21) (0) | 2012.03.03 |
---|---|
요한계시록 강해(43)-하늘찬양(계19:1-10)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41)-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계18:1-8)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40)-큰 음녀의 받을 심판(계17:1-18) (0) | 2012.03.03 |
요한계시록 강해(39)-일곱 대접 심판(계16:1-21) (0) | 2012.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