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44)
승리하신 그리스도
본문: 계19:11~21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9: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9: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9: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19: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19: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그 문맥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독특한 매력이지요.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승리하는 삶’에 대한 가장 멋진 환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16절까지 승리하는 자들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7, 18절은 패배하는 자들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 21절까지는 그들이 패배하게 된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 지난 시간에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허다한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내려지는 무서운 심판을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강조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거기에 대해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고, 오늘 여기 모인 목적이며, 앞으로 살아가야 할 참된 목적인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들의 힘의 원천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곧 승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한 계시의 사건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매우 중요한 계시를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앞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던 수많은 무리들이 어떻게 해서 그곳에서 그렇게 찬양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19장 1절에서 10절까지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예배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18장에 땅의 왕들과 상인들이 부르는 구슬픈 노랫소리를 들은 요한으로서는 19장에 기쁨으로 찬양을 부르는 허다한 무리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지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시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사도 요한은 “보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보라”고 외치는 요한의 가슴은 벅찬 감동으로 터질 듯 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만큼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 사도 요한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사도를 그토록 가슴 벅차게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그 누구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랑한 분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판단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11-13절)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사람 치고 ‘보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보다 더 잘 그려주는 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음서나 에베소서 혹은 골로새서와 같은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탁월하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 가운데 통치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은 정말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이 복된 책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축복을 받는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본 것을 우리도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도가 본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그분은 승리자이십니다! 백마를 탔다는 말은 고대세계에서 승리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백마를 탔다는 표현은 두 번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분은 요한계시록 6:2에 나오는 백마를 탄 자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6장에서 묘사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남을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러한 정복자들, 야심가들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그러한 자들을 통해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한 분이 승리자로 서 계십니다. 6장에 나오는 자와 달리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한 자로서 당당하게 싸우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기 전에 승리했다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완벽하게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죄를 이기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훗날 요한 사도 역시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5:4,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세상을 승리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충신’(faithful)과 ‘진실’(truth)입니다. 즉, 그분은 신실하시며 매우 성실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리 그 자신이십니다. 그분은 참되시며 조금도 거짓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결코 모순되지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세상에 그분만큼 믿음직하고 믿을만한 분은 없습니다. 왜냐면 그분은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이행하실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됨됨이를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그분과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의 뛰어나신 성품을 생각할 때 술람미의 고백처럼 허다한 무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 것입니다.(아1:4, 5:16) 누구든지 그분의 어떠하심을 알게 된다면 단연코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사무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단지 성실하시며 진실하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분은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모든 교만한 자를 일일이 찾아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 분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결박하고 하늘로 올리우신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 우편에서 가만히 계시지만 않습니다. 그분은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세상과 싸우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는 용사’로서 맹활약하고 계십니다. 구약성경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그 백성을 위하여 친히 싸우시는 용사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싸우시는 용사이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분을 대신하여 싸울 수 없고, 그분을 도와드려서 잘 싸우게 할 자도 없습니다. 싸움은 오직 그분이 홀로 하시며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의 눈은 불꽃같습니다. 그분은 모든 심령을 다 꿰뚫어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안보시거나 못 보시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의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 주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탁월하심과 그분이 하시는 탁월한 일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없는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는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보십시오. 또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과 명예를 보여줍니다.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분처럼 뛰어난 명예를 소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너무나 뛰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을 알 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 이름 쓴 것이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다는 말은 계2:17에 버가모 교회에 약속하신 상급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승리하는 교회에 약속하신 것은 주님 자신으로 참 평안을 누리는 것으로서 이 평안은 다른 사람이 참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평안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평안의 원천이 되십니다. 또 그리스도는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진다고 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었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주가 되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에 이런 분이 또 있습니까? 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 사람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행하신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벅차야 마땅합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소유하는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알고 사귀고 있는 어떤 친구가 세상에서 둘 도 없는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요, 탁월한 자선사업가라고 가정해보십시오. 비록 그가 내게 해준 일이 전혀 없을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친구를 알고 사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기쁨이자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물며 하늘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존 스토트가 최근에 쓴 책인 [탁월하신 그리스도]는 가장 탁월한 책입니다. 탁월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탁월한 인격과 탁월한 행사들을 한번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알고 섬기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질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스러움과 뛰어나심을 알 때 우리는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픈 마음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본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에 대한 엄청난 광경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영광입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14절) 이 말씀은 앞서 살펴본 대로, 세상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불이 마구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던 무리들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승리한 자들이 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 무리들이 누구일까요? 이렇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광경은 어느 시점을 나타낼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 광경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환상은 분명 아닙니다. 왜냐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이후에야 성도들이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라면 교회가 일곱 대접의 심판을 통과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 교회의 휴거는 일곱 대접 심판 직전에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결코 일곱 대접의 재앙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19절 이하에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과 싸운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이후에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하늘의 성도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재림은 공중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결코 지상재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불신자들이 군대를 조직하여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것은 외계인 침공을 다룬 SF영화들을 지나치게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시점을 현재라고 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 재림하시면 싸우시는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일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림은 싸움의 종결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즉, 천상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소속된 모든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이미 승리한 자들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낙담하며 세상을 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용사이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과 감정과 아무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군대로 간주하십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 백년 동안 노예로 생활해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해내실 때 하나님은 그들을 ‘내 군대’라고 부르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노예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애굽에 있을 때부터 그들을 ‘내 군대’라고 부르셨습니다.(출6:26, 7:4, 12:17, 12:51) 내가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실로 전혀 다릅니다. 어느 것이 사실일까요? 내가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사실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아십니까? 내가 보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가 진실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현실이요 사실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잠시 동안 내 눈에 보이는 안개나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참된 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여기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천상교회’ 혹은 ‘승리적 교회’로서 하나님의 면전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총회입니다.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우시므로 그분을 머리로 모시고 있는 교회 역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여기 시점은 먼 미래의 시점만이 아니라 무시간적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실존적 시점인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지상 교회가 가져야 하는 참된 자화상인 것입니다. 지상 교회는 스스로 승리한 교회임을 인식하고 전투적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취지입니다.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하늘의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지금 교회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백마를 타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패배의식을 멀리 던져버려야 합니다. 또한 의의 복음을 견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교회의 자화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신칭의의 복음으로 무장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 세마포는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옷입니다. 이 옷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거저 입혀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자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이 행하신 일들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써 믿는 자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에 대해 분명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면 교회가 승리할 길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요즘 세상에는 리더십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한때 김우중씨의 리더십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젝 웰치의 리더십이 유행하다가 요즘에는 히딩크 리더십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서점에서 리더십에 관한 책들은 언제나 스테디 셀러의 항목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세상은 ‘이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더십에 관한 책들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이끌려고 테크닉을 배운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이끄는 요령을 배웠다고 해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관리자가 될 뿐입니다. 참 리더의 특징은 사람들을 이끌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 사람들을 원하는 목표로 매진하게 하는 요령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 리더는 다른 사람을 이끌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참된 가치를 알고 따라가는 자입니다. 참 리더는 이끄는 자(leader)가 아니라 따라가는 자(follower)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싸워 이기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죄와 싸워 이기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지만 죄를 이기려고 애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따를 때 절로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참 승리자는 지배하고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앞서가고 하나님보고는 따라오시도록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한 결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내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원수 마귀를 이기는 삶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아는 것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0,11) 그래서 다시 한 번 본문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세히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15,16절)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검에 대해서는 이미 1장에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으로 만국을 친다는 것은 만국을 정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철장(쇠몽둥이)으로 다스린다는 말은 모든 교만한 인생들을 낮추시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에 따라 세상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잔이 결정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주목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지는 여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행하시는 그 일 때문에 모든 왕들의 왕이며 또한 모든 주들의 주가 되시기에 충분하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심되심에 대해서 저는 여러분의 정직한 반응을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고 혹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현실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중심되심에 대해 굉장히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왜냐면 이 위대한 교리는 그들의 교만을 가장 잘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자신이며,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반응 때문에 위축될 필요도 없고, 결코 진리를 부정하거나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한 부분이었습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도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2:8,9) “그가 여호와를 겅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11:3-5)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지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사63:1-6) 유대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그 영광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육신의 눈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누구나 다 승리하는 자들이라고 말한 다음에 본문은 자연스럽게 철저하게 패배한 인생들의 처참한 모습에 대해서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17,18절) 여기 한 천사가 해에 섰다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개적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공중에 날아간다’는 표현은 공개적이고 보편적인 선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들에게 외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은 전쟁에서 패배한 자들에 대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죽임을 당하게 되면 시체를 공중의 새들에게 뜯기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거역한 인생들은 정죄 받음의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시체와 같습니다. 그들은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고, 공중의 새들에게 뜯기는 신세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들을 새들에게 뜯기는 시체들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기 정죄 받음의 잔치에 참여할 인생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왕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기를 선택한 자들입니다. 또 그들은 장군들입니다. 그들은 싸워 이기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장사들입니다. 이익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말들과 그 탄 자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닌 것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입니다. 또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모른 대소하고 모든 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모든 자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이십니다.
이제, 본문은 그러한 패배자들이 그렇게 처참하고도 비극적으로 패배한 이유에 대해서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19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패배한 원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패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패배하게 되었는가 한번 보십시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들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20,21절)고 했습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결국 그 권세를 빼앗기게 됩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을 본문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함”으로 불신영혼들을 미혹하여 적그리스도를 숭배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했습니다. 이제 권세를 잃어버린 악의 축은 불붙는 지옥불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던 모든 인생들은 그리스도의 정죄를 받아 영원한 패배자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새가 그 고기를 배불리 먹는다는 말은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가리킵니다. 고대세계에서 매장 당하지 않은 채 새들에게 고기를 뜯기는 죽음은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인생들의 종말은 영원한 수치를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참된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되는 것이며, 영원토록 그 수치를 안고 지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러한 수치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 그러한 수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나타나시는 그날에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현실을 깨닫고 절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영광스럽게 승리하는 자들과 처참하게 패배하는 자들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어디에 속했으며,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무리들 가운데 끼여 있습니까? 아니면 새들에게 살점을 뜯기는 시체들 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영이 살아 있는지, 혹은 죽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바라볼 때마다, 그리고 그분이 지금 세상에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바라볼 때마다 삶에 충분한 힘과 능력을 얻고 있습니까? 그분의 영광을 아는 데서 힘을 얻는다면 승리하는 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심정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면 승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복된 약속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여러모로 힘들 때마다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고백으로 싸워나가십시오. 오직 주님만을 섬기리라 고백하심으로 부딪혀 나가십시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만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승리의 열매들을 충분히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우리 앞서 싸우십니다. 그분의 용맹함과 능력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용기 백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싸우시는 그분을 바라보는 자마다 자신을 전사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서 자신을 드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따르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분이며 우리 전 생애를 걸어도 부족할 만큼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분이 영광스럽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분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자는 단지 그분을 따르기만 하는데 승리의 열매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뒤따르면서 전리품을 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진지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왜냐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대적할 것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아니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받아 우상에게 경배하는 무리들과 함께 할 것인가? 지금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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