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세속화, 그리스도인의 세속화는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주님, 저를 세상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요한계시록 강해(41)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본문: 계18:1~8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자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18: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18: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18: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18: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8: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종말론적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는 날, 그리고 모든 인생을 심판하시는 그 날을 의식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특별히 현대 도시문명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사치와 허영으로 가득 찬 문명생활 속에 자칫 정체성을 망각하고 삶의 좌표를 상실한 채 살아가기 쉬운 우리들에게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매우 강력한 능력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참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더 얻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순수해짐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의도하는 것은 부하고 번영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정결하고 순수하며 거룩한 교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실 우리에게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고서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존재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들의 정체가 어떤지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책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에 있을 일들이 요한계시록의 참 주제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주된 관심은 교회론에 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 것인지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복잡한 시대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비결인 것입니다. 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세상 속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어떤 신분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보여줌으로써 세상 속에 있는 교회로 하여금 과연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보다 더 적절하고 필요한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계시록이 보여주는 교회의 정체성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며, 세상을 살지만 세상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이며, 또한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교회는 세상과 같이 살지만 세상과 분명히 다른 족속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땅에 거하는 자들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로 구별되는 구도 속에서 본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이해하는 것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모른다면 교회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를 모르면 또한 세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운명을 아는 것은 곧 세상의 운명을 아는 것과 직결되어 있으며, 교회의 신분과 영광을 아는 것은 곧 세상의 정체와 그 결말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잘 안다고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결국에 대해서 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존재의 운명과 결과에 대해 모르고서 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왔으며, 왜 있으며, 왜 그리로 가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은 교회의 결국, 또한 세상의 결국에 대해서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 마지막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건의 나열이 요한계시록의 진정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종말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인기를 모으는 것을 보는데 그들의 말장난에 속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그러한 종말에 일어날 사건들의 퍼즐놀이가 결코 아닙니다. 대신 우리의 신분과 정체, 그리고 세상에서 어떻게 순결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나가는 것은 무슨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속에 있는 교회, 곧 우리 자신들이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 배우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주제는 바로 인류문명의 최후에 대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도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류문명의 최후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연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인류 최후의 순간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계획에 의한 일로 선언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종말론’과 다른 점이죠. 사람들이 노력하면 막을 수 있는 그런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일로서 너무나 확실한 사건으로서의 종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말합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혹은 연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인식하는 종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너졌다!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류문명의 최후 몰락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감히 ‘무너졌다’고 선언하는 데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너졌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노를 터뜨릴 것입니다. 사실 세상나라가 무너졌다고 감히 선언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만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한다고 해서 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감히 그렇게 선언할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선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 요한계시록의 표현에 의하면 땅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그렇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몰락해버렸다고 인정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자, 본문을 봅시다. 인류문명은 ‘바벨론’이라는 단어가 대변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바벨론’인가 하면 바벨론은 고대 역사 상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문명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며, 특히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심하게 대적하고 괴롭혔던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운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바벨론이란 단어로 세상을 먼저 설명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처한 곳은 바벨론이란 죄악된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계시록은 교회와 세상을 서로 화해할 수 없는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교회를 미혹하는 악의 세력이라는 겁니다.(계17:14참조) 계시록은 그러한 세상이 완전히 망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망할 것이 너무나 확실하며, 하나님의 계획상에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은 이미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선언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처음 계 14:8에,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라고 했고 오늘 본문 2절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하는 소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와 용기가 되는 말씀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이 이미 무너진 것으로 간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늘에 속한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선언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서 담담하게 주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선언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순수해지고 거룩해지도록 도와줍니다.
자, 이제 우리는 계시록 18장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17장과 18장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17장과 18장은 동일하게 세상의 몰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7장은 몰락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면, 18장은 몰락의 이유와 타당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7장은 사건의 기술과 나열이라면 18장은 사건의 결과와 평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본 17장에서는 세상나라의 진실이 어떠하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세상 나라가 망하게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세상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스스로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학이나 지구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구문명이 안고 있는 취약성을 쉽게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문명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에 바로 죄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와 탐욕 때문에 인간이 자랑하는 모든 문명은 망할 것입니다. 외계에서 유성이 날아와서 멸망하는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죄와 탐욕이 빚어낸 부조리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그러한 취약성은 바로 끝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타락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시록은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장에 들어와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의 죄악상에 대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악상의 결과에 대해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각성할 수 있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악의 결과로 세상문명이 몰락하자 그것에 의존하며 살았던 모든 인생들이 절규하며 탄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체를 분명히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장의 전체적인 흐름은 이렇습니다. 1절에서 3절까지는 바벨론의 몰락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 5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8절까지는 바벨론 몰락의 당위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 10절은 땅의 임금들이 부르는 슬픈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11절에서 16절까지는 땅의 상인들과 바다의 선장들이 부르는 애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하늘에 있는 성도들에게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최후에 부르는 슬픈 노래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이 마지막에 부르는 희열에 찬 노랫소리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도전을 받게 됩니다. 과연 나의 소속은 어디이며, 내 안에서는 어떤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21절에서 24절까지는 다시 한 번 그러나 새로운 방식으로 바벨론 몰락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서 본문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성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상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자신들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른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서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근거나 목적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 같이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히 다른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혼돈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는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비결은 자신을 세상에서부터 불러내신 하나님의 소망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1절) “이 일 후에”라는 말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의 몰락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본 다음에 바벨론의 몰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몰락의 결과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천사가 등장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은 계시의 점진적인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천사의 역할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의 등장은 계시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천사의 등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려고 하는지 기대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초점은 우리의 필요도 아니도, 천사의 모습도 아니라 오직 계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면 혼돈과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신 자들로 생각해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사에 대해서 이런 저런 명령을 내릴 권리가 없습니다. 천사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중간 통로를 맡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려고 하실 때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큰 권세를 자졌다는 뜻은 하나님의 큰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중요한 말씀을 주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권세의 크기는 계시의 중요성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가진 계시의 중요성 때문에 큰 권세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의 크기 때문에 천사가 큰 권세를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즉, 가지고 살아가는 메시지의 중요성에 따라 그 사람의 권위가 결정됩니다. 한 사람의 위대함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의 위대함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메시지를 안고 살아갑니까?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곧 사명입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높은 연봉을 받고, 저축을 해서 집을 장만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며, 기쁨도 아닙니다. 우리는 종말의 메시지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메시지의 크기가 우리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큰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큰 메시지를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권세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권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위대한 메시지를 위해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사의 등장으로 인하여 “그의 영광으로 인하여 땅이 환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아직까지 천사가 아무런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인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죄악으로 어두워진 땅이 환하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밝아지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계시의 말씀에 따라 어두운 세상이 밝아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비출 수 있을까요? 어떤 메시지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며, 그 말씀이 빛입니다.(요일1:5)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곧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개혁하고, 혹은 혁명으로 뒤바꾸는 것이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한, 그리고 세상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권력을 얻는다 하더라도 결코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과 경쟁하면서 세상을 개혁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세상이 품고 있는 세계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빚어진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의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전파될 때 비로소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보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천사는 아직도 그 말을 선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땅이 환하여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결코 어둠을 빛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의 등장으로 물러갈 뿐입니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은 다시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해야 할 일은 어둠을 빛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일이 아닙니다. 빛이 곧 빛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정체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우리 안에 온전히 비추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정체성을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천사가 전하는 위대한 계시가 무엇입니까?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무너졌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이며,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래 전부터 했던 방식입니다. 너무나 확실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엄중한 선언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세상나라는 이미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문명의 최후를 보십시오! 우리는 무너질 것인지 아닌지 불안해하며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미 무너졌다고 단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사람들에게 행복과 번영을 약속하던 기술 과학 문명의 최후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모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던 인생들의 최후는 귀신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생들에게 기쁨을 주던 곳이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결국 영들의 거처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에, 우리 모임에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져 있는가, 아니면 귀신들의 영으로 채워져 있는가 보십시오. 모든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들은 귀신들의 열매다. 우리의 말이 지저분하고, 우리의 생각이 지저분하고, 우리의 삶이 지저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다 정리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터전을 영적으로 청소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들을 청소하십시오. 모든 더러운 말들을 청소하십시오. 모든 더러운 습관들을 청소하십시오. 귀신들은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이 왜 이토록 더럽고 지저분한 곳으로 변하고 말았습니까? 왜 사람들에게 행복을 약속하던 세상문명이 이처럼 더러운 영들의 처소가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대신 음행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 아닌 것들에 마음을 주고, 자신의 영혼을 팔아 기쁨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을 즐기는데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세상은 유전자 공학의 눈부신 발달을 가지고 거만하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장수무병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한 유전자공학의 발달은 또 다른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래 사회를 그려주고 있는 모든 영화들을 보십시오.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밝고 긍정적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려고 하지 않자 자연스럽게 더러운 귀신들이 그 공간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곳에서 우리가 영원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서 우리가 영원을 살려고 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우리가 영원을 보낼 수 없습니다.
세상이 왜 이토록 지저분한 곳으로 변하고 말았는지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다시 말해서 음행 때문입니다. 음행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로부터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맛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행의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주는 기쁨의 특성이 술과 같다는 것입니다. 일단 맛을 들이면 취하여 분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치고 남을 잘 섬기는 사람 보셨습니까? 술취한 사람의 특징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즐거움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섬김과는 거리가 먼 것이 술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도취되어 있고, 자기만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 정신없는 것, 바로 이것이 음행의 포도주에 도취된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가까이 하고 세상을 즐기며 세상에 안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여러분, 영적 음행에 대해서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음행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으려 하는 모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과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짝이 되십니다.(잠2:17) 음행이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유익과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종말의 특징이고,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로 인하여 마지막 때의 사람들은 더욱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이 고통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 때문에 생기는 고통인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1-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는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만족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누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 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3-8)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법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음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것만큼 부조리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돈을 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저는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자 되려고 애쓰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을 부자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의로운 부자가 되십시오. 남을 섬기는 부자가 되십시오. 많은 물질을 받은 것만큼 많은 섬김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다시 한 번 더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서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돈을 생각해봅시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부자들이 다 죄인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돈을 벌되 왜 벌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시라는 겁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돈을 쓰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돈을 벌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 쓰는 법을 배우기 전에 버는 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지체가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제 마음은 제발 사업에 실패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불을 가슴에 품고 화약고에 자신을 집어던지는 자살행위인 것입니다. “당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세상이 놀랍게 치부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치부하려고 결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자녀라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여러분을 실패하게 하실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구별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4,5)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창19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고, 그 불의한 일들을 하나님이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진상을 파악하시기 위해, 아니 어쩌면 진상을 노출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오직 한 사람 의인 롯만이 하나님의 천사인줄로 알아보았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해들였습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천사들의 외모를 보고서 그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소돔 성에는 동성애와 혼음 등이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천사를 볼 때 소돔 사람들은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정욕에 따라 생각하는 것, 그것이 소돔의 죄악이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7)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영의 일이 아닌 육의 일을 자꾸 생각한다면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영혼을 보지 못하고 외모만 본다면 아직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멸망할 소돔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면서 하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이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려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창19:12-13) 그러나 롯이 그 딸들과 사위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경고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실로 냉담했습니다.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설교하고 있는데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제 말을 그냥 농담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그냥 감상하고 있습니다. 롯이 지체하고 있었을 때 천사들이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계속 지체하자 천사들이 그들의 손을 붙잡아서 강제적으로 성 밖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말합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19:17) 동일한 외침이 오늘 본문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4, 5절)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떼어져서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되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처와 같이 세상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귀를 막고 세상으로부터 저 천성을 향하여 신속하게 도망해 가야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떠나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말씀이면서,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머무르거나 안주하지 않고 계속 떠나가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고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우리는 지금 어떤 곳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정체, 세상의 운명을 훤히 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자행한 그 더럽고 불의한 일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 나오는 삶, 떠나는 삶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정착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은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흔들어서 새끼로 하여금 정신 나가게 하듯이 하실 겁니다.
이제 세상이 행한 불의한 일이 무엇인가 살펴봅시다. 바벨론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어떤 죄 때문에 이처럼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7절)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죄악은 자기를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치를 추구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인 모습으로 자기영화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삶의 태도로 인하여 나타난 모습이 사치스러운 삶입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자들의 생각을 보십시오.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자들의 마음은 교만과 거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황과 과부는 대조적인 인생관을 대표합니다. 여황은 남을 부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명령을 내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절대 빈자입니다. 요즘과 달리 로마시대에 과부는 참으로 가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과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애통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 것은 결과적으로 남을 환난을 당하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에 남이 애통을 당하는 것을 볼 때 기뻐하며, 남이 애통을 당하는 것을 고소해하는 것입니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6-9) 여러분은 혹시 결코 애통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인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남이 애통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남이 애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애통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심으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자기행복을 위해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여황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과부라고 생각합니까? 유대와 로마시대의 과부는 철저히 의존적인 존재였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치욕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교만한 마음의 근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여 그 모든 사상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10:4)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자들과 함께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울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마음을 높이면서 살아가는 위치보다는 마음을 낮추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훨씬 아름답습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의 방향입니다.
이렇게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심판은 갑자기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또한 심판은 철저히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심판은 강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이를 것입니다.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하나님의 강하심이 입증되는 것이 곧 심판입니다. “네가 여황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교만하게 살았고, 자기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고, 남이 애통하든 말든 고난을 겪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그러나 이제는 네가 이처럼 약하고 무능한지 알았느냐?”고 하시면서 “나보다 더 강한 자가 누구냐?”고 외치시면서 일어나시는 하나님의 큰 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아무도 하나님을 당해낼 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보다 강한 자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갑자기 인정하게 될 날이 이를 것입니다. 그토록 강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을 높이며 살았던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날에는 이미 때가 늦을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 교만하고 거만하며, 남을 돌보지 않는 것 이것이 그토록 심각한 죄라고 세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큰 죄가 되냐고 세상은 이구동성으로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를 못 느끼고 ‘여황주의’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바로 자기중심주의, 즉, 교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살지 못한다는 ‘과부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애통하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을 같이 하며 함께 애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남이 잘되어도 기뻐 축하해줄 수 있으며, 친구가 잘못 되어도 함께 슬퍼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여황’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고아’나 ‘과부’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의 시금석은 여러분의 친구가 잘 되거나 못 될 때 여러분의 반응을 살펴보시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은 ‘여황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다들 골몰해 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일에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어제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해서 큰 물난리를 겪고 깊은 고통 속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무관심해서야 되겠습니까?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세상에 동화되지 마십시오.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는 부자들을 부러워 부러워하지도 마십시오. 세상이 성공하는 방식을 모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디, 세상에 정착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의 고향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소속은 저 하늘나라입니다. 세상에 닻을 내리지 마십시오. 세상은 정함이 없습니다. 멸망하기로 작정된 곳에 보금자리를 틀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어떤 필요가 생겼을 때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하나님께 그것을 아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은 반드시 실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산에서 세상으로 내려가는 것은 작정된 실패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하나님의 산을 떠나 세상의 번영의 들판으로 내려갔을 때를 기억하십시오. 결국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지만 가진 것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 세상을 가까이 하는 것은 스스로 패배를 향해 걸어가는 꼴입니다. 세상은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니 세상은 이미 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삶의 희망을 두지 마십시오. 세상을 의지하면서 권력을 얻고, 치부하였던 모든 사람들이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슬피 우는 노랫소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따라서 자기만족을 위해 많이 벌려고 노력하는 것의 허무함을 아십시오. 차라리 적게 벌더라도 가치 있게 쓰는 것이 많이 벌고 사치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세상에 뿌리를 내리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안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부름 받은 자는 계속 세상에서 나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되 세상 속에서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보배로운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 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세상에서 나오라! 그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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