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안에서 성령론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성령충만과 성령세례
본문: 행1:1-8
1. 성령론 공부는 지식공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복음의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다. 왜냐면 성령은 계시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2. 아볼로의 한계: 성경지식은 많은데 성령에 대한 체험은 없는 사람
-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아볼로아 같지 않는가?
3. 오순절 성령운동이 중생이후에 방언을 수반하는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것은 존 웨슬리가 중생이후에 두 번째 은혜의 사역을 강조했던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불완전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야 했다는 논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잘 모르는 것이다.
4. 성령세례는 무엇인가? 중생이후에 받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중생자체가 곧 성령세례이다.(바울신학의 중심)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을 성령세례라고 함은 부당하다. 중생을 성령세레와 동일하게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역과 증거를 위한 기름부으심이 누가행전의 묘사인데, 이것은 성령세레가 아니라 성령충만으로 불러야 더 타당하다고 본다. 만약 중생이후에 성령세례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세례의 성경신학적 의미를 망각하는 것이 될 것이다.
5. 성령은 그리스도의 증인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증인이 되게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중심은 성령운동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즉, 죄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따로 받아야 한다는 것은 복음에 대한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6.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한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성령은 그 사실을 입증하실 뿐이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뿐이다.
7. 참된 성령운동은 성령중심운동이 아니라 예수중심운동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의 증인되심을 다시 자각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8. 성령은 진리선포와 관계하여 역사하신다. 진리가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복음의 진리가 깨달아지게 된다. 성령은 결코 복음의 진리 위에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신다. 왜냐면, 성령은 증인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무엇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9. 성령충만은 성령을 충만히 소유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성령에 의해 완전히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으실 때,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10. 성령의 내재하심과 성령의 임재하심이라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있다:
성려의 내재하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받는 증거로서 받는 보편적 은혜이며, 성령의 임재하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위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으로서 사역자가 받는 축복이다. 성령의 내재하심은 구원의 필수조건이지만 성령의 임재하심은 구원의 충분조건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기 위해 성령의 임재하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사역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필수적 은혜이다. 몇몇 극단적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능력의 은사,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임재하심을 ‘성령세례’라고 부르면서 구원의 절대조건으로 내세우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
11.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은사는 karismata, 즉, 성령의 나타나심이다. 이것은 성령의 주권을 가리키는 말이다.
12. 성령의 주권적 선물이 은사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사를 사모하지 않아도 되는가?
13. 가장 위대한 은사가 무엇인가? 사랑으로 역사하는 은사이다.
14.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개인의 믿음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다.
15. 성령운동이 자칫 십자가복음의 중요성을 간과해버리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16. 특정 은사를 강조하는 운동의 위험성을 조심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은사와 다양한 은사가 어우러져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해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특정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17. 누가의 성령체험과 바울의 성령체험이라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해결될 수 있다.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오해가 왜 발생하는가? 누가의 성령체험 기사를 바울성령론의 용어로 설명하거나, 반대로, 바울의 성령론을 누가의 성령론의 용어로 설명하려고 할 때 혼돈이 발생하는 것이다.
18. 성령세례를 중생이후로 간주하면 교회내에 엘리트의식이 발생한다. 그러나 사역과 섬김을 위한 축복으로 설명하고 가르친다면 오히려 교회는 더욱더 견고해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을 “성령세례”로, 중생이후 받는 능력의 기름부으심을 “섬김을 위한 성령충만”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
19. 성령세례는 강한 체험이나 방언과 같은 가시적은 현상을 수반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론적, 세계관적, 근본태도의 변화, 주인의 뒤바뀜, 가치관과 관점의 근본적 변화를 가리키는 은밀한 성령의 사역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회개와 영접, 그리고 주권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에 따라서 반드시 가시적인 체험을 동반할 필요는 없다.
20.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심은 능력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냄받음]과 [섬김]이다.
21. 성령이 왜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지에 대해서 잘 배워야 한다.(섬김과 증거사역을 위해)
참조: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행1:5 -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서 중생의 약속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한 후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증거와 섬김의 사역을 위해 성령충만받는 약속까지 포함하고 있는 말씀이다.
행1: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서 성령의 임재는 [성령충만] 혹은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서, 권능을 주시는 목적이 있으며,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성령의 임재에 대한 약속은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을 위한 약속이다.
행2:17 -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드은 꿈을 꾸리라”
예언,환상,꿈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는 표지이다. 즉, 사역, 특히 증거사역을 위한 기름부으심을 의미한다. (계시록의 두 증인은 구약과 신약의 기름부음받아 복음을 공개적으로 담대하게 증거하는 사역자들을 의미한다) 결국, 신약에서는 구약의 특정 하던 예언자의 증거사역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감당할 수 있는 성령충만의 약속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육체’란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개한 자들 즉, 성령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부어준다”는 약속은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을 이미 포함한 성령충만의 약속을 가리킨다.
행2:38 -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중생의 복음)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성령의 인치심으로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약속을 포함하고 있음)” 중생할 때, 모든 거듭난 자들이 성령세례를 선물로 받는 것이며, 성령충만까지 약속되고 있는 것이다.
행4:31 -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순절 성령강림시에도 [성령세례]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라는 바울의 주장과는 조금도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누가의 성령론과 바울의 성령론이 서로 다른 것처럼 몇몇 신학자들이 말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가의 [성령으로 세례받음]은 성령의 내주(인치심사역)와 성령의 임재(권능사역) 둘다 포함하는 약속이다.
행8:15 - “그들이 내려가서 너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성령세례라 하지 않고 성령충만을 가리킨다. 이미 중생한자, 즉, 성령세례받은 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아 성령의 증거하게 하시는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사도들이 기도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증거하는 삶을 위해 성령받도록 기도하였다.
***성령세례=중생, 성령충만=능력의 기름부음,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아래 독특한 은혜이며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그리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동시에 역사할 수 있다. 행10:47,48을 보면, 성령세례받은 후 물세례받는 case가 있다. 고넬료의 가정은 이미 성령세례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그 후에 받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물세례받게 되었다. 성령세례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고 영접하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중생한 자가 다 받는 은혜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사역을 위해 받아야 하는 증거사역을 위한 은혜이다. 물론,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증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성령충만은 예언사역의 계승을 의미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역을 위해 부름받음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는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세례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선물, 혹은 성령충만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에 유의하라. 만일 성령세례가 중생이후 받는 은혜라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세례의 원래 구속사적 의미가 없어진다. 거듭남의 역사가 바로 성령세례의 역사이다. 세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행19:2 -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믿을 때는 바로 중생의 은혜를 받을 때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부어주심의 약속까지 포함되어 있다. 성령이 믿는 모든 자들을 인치실 때 부어주실 것이라는 약속도 함께 주시는 것이다.
행19:5,6 -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곧 성령세례를 받는 조건이며 성령을 부어주시는 약속으로 연결된다. 즉, 중생한 자들(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자들)은 곧 성령세례를 받으며, 성령세례를 받는 자는 성령충만의 약속으로 이어진다. 주예수이름 세례와 재사함은 성령세례의 조건이며, 성령충만의 약속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을 때 곧 성령충만 받을 수 있고, 또 시간이 경과된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세례 자체가 성령충만이 아닐 수도 있다.
※요점정리
①성령충만-그리스도의 친밀하심 속에 온전히 거하는 (지속적)사건,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안에서 온전히 확립되는 사건, 그리스도의 성품이 온전히 나를 지배하는 사건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으로 성령충만의 상태를 사모하여야 한다.
②성령세례-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세움 받는 (단회적) 사건(누가적 관점),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접붙임을 받는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바울적 관점) 이 둘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③성령의 열매-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를 온전히 주장할 때(충만), 우리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성품
④성령의 은사-그리스도의 몸을 견고하게 세우기 위하여(덕을 세움)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신자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시는 현상으로서,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허락하시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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