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교리공부(47)-개인적 종말론: 죽음

등불지기 2012. 3. 9. 18:02

 

교회론에 이어서 공부할 교리는 종말론입니다.

교회의 최후 운명에 대한 교리는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 이렇게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종말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은 삶에 지혜와 분별을 줍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언제나 이단과 거짓선지자들은 본질과 핵심을 놓치게 하고 이상한 길로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개인적 종말론: 죽음

 

본문: 히9:27

 

지금은 올바른 종말론이 필요한 때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희망적인가 아니면 절망적인가? 영혼을 가진 사람만이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을 피해야 하겠다. 첫째는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과 둘째는 막연하게 두려움을 가지고서 회피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종말론에 심취한 나머지 현실 생활에서 도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어떤 이들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필요하게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우리는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대한 관심을 종말론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극단적 광신도적 종말론과 함께 종말론에 대한 회피와 혐오증도 배격하면서 올바른 종말론을 가져야 하겠다.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이다.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의 주된 과제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조차도 여러 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다. 성경은 어떤 부분은 명확하게 이야기하지만 어떤 부분은 모호한 부분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모호한 상태로 남겨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복음 안에서 왕노릇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종말론의 방향을 위해서 우리는

➀종말론이 중요하지만 종말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➁종말론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루지만 과거에 이미 성취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➂종말론이 “이미와 아직”의 긴장감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➃종말론과 함께 현실에 대한 책임(가정, 직장, 사회참여, 등)을 잊지 말아야 한다.

➄종말론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준비시키기 위해 각성하게 하는 유익이 있다.

➅종말론은 특히 지혜와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➆종말론은 신자의 삶이 순결하고 근면하며 성실하도록 해야 한다.

 

종말론의 종류

종말론은 크게 개인의 미래를(죽음과 사후문제) 다루는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의 미래를 다루는 (재림과 그 징조와 천년왕국 등) 우주적 종말론으로 나눌 수 있다.

 

개인적 종말론: 죽음

➀ 정의: 분리(전12:7절, 약2:26절 참조)

1)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지혜자다!

2) 죽음은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고후4:11,12절 참조)

3) 영의 죽음(창3장, 엡2:1절), 육의 죽음(창4장), 소외, 영원한 죽음(마10:28절, 계21:8)

➁ 원인: 죄의 결과(창3장, 고전15:21)

➂ 죽음의 결과:

1)의식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으나 영생의 기회와 하나님과 함께 살 기회가 사라지게 됨. 2)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나 죽음의 저주를 벗어날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음.

3)불신자들은 죽음을 끝으로 보고 그 자체를 혐오하고 두려워하지만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환영하는 존재이다.(빌1:20-23절 참조)

➃중간상태(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

1)수면(행7:60; 13:36; 고전15:6,18,20,51절; 요11:11절)-안식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님

2)의식의 활동(눅16:19-31; 23:43,46절) - 소멸이 아님

3)연옥의 문제-“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생을 떠났으나 아직 가벼운 죄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그들이 지은 죄에 합당한 형벌을 현세에서 충분히 받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일시적인 형벌의 상태”라고 천주교는 정의한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는 연옥에 있는 자들을 위해 즉 죽은 자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고, 죽은 자를 대신하여 자선을 베푸는 것에 대해 가르친다. 카톨릭은 연옥의 근거를 외경에서 찾지만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나 예배를 거부한다. ex. 추도 예배의 개념은 카톨릭적인 것으로 개신교에서는 합당치 않다!

➄장례문제-화장을 해도 되는가? 부활에 지장이 없겠는가? 비성경적이지 않는가? 만약 화장이 비성경적이라면 그러면 굴속에다 매장하고 돌로 굴입구를 막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겠는가?

➅부활의 문제

1)즉각적이고 순간적인 부활

2)재림시 부활

3)새로운 몸을 옷입음

➆지옥, 낙원의 문제

신자들은 죽음과 동시에 축복의 장소(안식처)로 가며, 불신자는 고통과 형벌의 비참한 장소로 가서 최후 심판을 기다리게 될 것임. *신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낙원’이며, 그곳에서 안식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시 영화롭게 될 날을 기다리며 쉰다. 그래서 신자들의 죽음을 ‘잠을 자는 것’으로 성경은 말한다. 잠은 깰 때가 있는 것이다. 복된 날을 기다리면서 쉬는 것이 신자의 죽음이다.

➇어린아이들이 죽은 후 그들의 영혼은?

➈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죽은 후 그들의 영혼은?

⑩부활이후에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

-女性과 男性, 부부관계, 가정의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마태22:23-33절을 읽을 것)

 

죽음의 정의, 종류, 성격

①죽음이란 ‘분리’를 뜻한다. 죽음에는 영적 죽음, 육체적 죽음, 영원한 죽음이 있다.

②죽음은 ‘멸절’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멸절을 의미하는 부분은 없다. (cf.여호와의 증인)

③십자가의 승리로 죽음과 죄와 마귀는 잠재적으로 정복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죽음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거절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공포 그 자체’로서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십자가를 수용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즐거운 경험’이다.(빌1장 참조)

④육체적 죽음 이후에 천상의 몸을 덧입는 데에는 인격적 존재가 있다.

⑤오직 하나님만이 본래적이고 절대적인 불멸을 소유하고 계신다.

⑥죽음과 회생과 부활은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⑦그리스도는 인생들의 경험인 죽음을 몸소 겪으심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대표자가 되셨다.

 

중간존재의 거처에 대한 비성경적인 이론들

 

①연옥의 단련:

고린도전서3:15에 대한 이상한 해석 때문에 일부 교부들이 죽은 신자들이 연옥의 순화하는 불을 겪음으로써 그들의 성화의 과정을 완성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쳤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러한 교훈을 더욱 발전시켜 죽은 자들을 위한 네가지 거처(Limbos)를 주장했다: ①탁월하게 거룩한 그리스도인들ㄹ 간주된 성도들을 위한 곳, ②불완전하게 성화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곳, ③세례받지 않은 유아들을 위한 곳, ④이방인들을 위한 곳. 그래서 카톨릭은 불완전하게 성화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미사와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면죄부 판매도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연옥교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이러한 연옥교리가 주는 폐해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시급한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은 곧 복음의 긴박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이것은 복음에 중대한 도전인 것이다.

 

②벧전3:18-20과 4:6에 대한 해석의 어려움들:

해석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앞서서 죽었던 사람들에게 적용되며 노아의 시대를 언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마도 정확한 해석은 복음의 전우주적 선포에 대한 위엄을 강조하는 본문으로 보는 것이다. 앞으로 죽을 불신영혼들을 위한 중간거처를 인정하는 본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본문은 복음을 듣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는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거부하거나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단호한 경고들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히2:1-3, 마12:32, 고후5:10, 히9:27 참조) 이러한 말씀들은 현재의 구원의 기회를 받아들이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미루거나 등한시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고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죽음이후의 장소에 대한 성경적 견해들

①스올(음부): 구약성경에서 지옥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단어이다. 이말은 히브리어인데 ‘하데스’라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단지 ‘무덤’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낙원(눅23:43)과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스올, 혹은 하데스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눅16장을 읽어보라. 하데스의 형벌은 불사람, 분리, 외로움, 죄에 대한 자각, 갈증, 떨어짐, 악취 등이다. 큰 ‘구렁’이 낙원과 하데스를 가로막고 있다. 그 너머 구원받은 자들이 거하는 곳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더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②게헨나: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2회 정도 등장하며 ‘지옥’으로 번역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11회나 사용하셨다. 이 단어의 원래 유래는 힌놈 골짜기이다. 아하스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몰렉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제무롤 바치곤 했다. 이 몰렉이라고 하는 우상은 황소의 머리를 하고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인데 그 복부에는 불길이 타올랐고 벌린 팔 위에 어린아이가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이 제사는 요시아 왕의 개혁시대에 금지되었고 그후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의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가 되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된 곳이다. 따라서 주님이 ‘게헨나’라는 용어르 f사용하여 열벌의 장소로 묘사하신 것은 그곳이 쓰레기와 악취가 나는 장소이고, 연기와 고통의 장소이고, 불과 죽음의 장소를 의미하신 것이다.(마5:22; 18:8,9; 23:33; 요5:36)

③불못: 사도요한은 ‘불못’(계20:5)이란 말로써 지옥을 지칭하고 있다. 지옥의 특징은 무엇보다 불꽃이다.

④‘세째 하늘’의 개념(고후10)

⑤모든 시대의 반역하고 거절하는 영들은 ‘음부’(Hades)에서 심판을 기다리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낙원(Paradise)에서 그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이다. 지상에서의 고통에서 면제받고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편히 자는 것처럼 쉴 것이다.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인격적으로 존재하는 중간존재의 성격

①사후의 영혼은 분명히 의식이 있다.

②성경에서 ‘잠잔다’고 하는 표현은 영혼이 잠자는 말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③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라: 벧전3:18, 빌1`:22-24, 계6:9-11

 

부활의 상태

①그리스도의 부활

②그리스도인의 부활

③구체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게 될 것이다.(부활체는 결혼하지 않는다. 신체의 특성이 있다. 새로운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불멸의 몸을 가질 것이다. 현재의 죽을 몸과 관계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심판

①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 상급의 정도 (도덕폐기론자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함)

②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심판: 형벌의 정도(창18:25, 마11:24참조)

③심판의 기준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함과 거절함이다.

④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들의 경우는 그들이 가졌던 지식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롬1:19-23; 2:14,15절 참조)

⑤부편구원론자들(universalists)과 영혼멸절론자들(annihilationists)에 대한 주의

 

만물의 완성: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인간과의 언약은 반드시 완전하게 성취할 것이다.

 

정리하는 말

➀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다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에 합당한 준비의 삶을 살아야 한다.

➁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시작이다. 이생은 학교와 같고, 죽음은 그 졸업식과 같으며, 졸업 이후 더 오랜 세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같이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한 것이다. 그 삶은 이생의 학교에서 보여준 ‘성적’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➂죽음은 인간의 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음은 극복되었고, 따라서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죽음을 환영하고 기다리는 존재가 되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의 저주가 신자들에게는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➃죽음 이후 부활을 기다리면서 거하는 임시처소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안식할 것이고, 불신자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고통할 것이다.

➄연옥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 유무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