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쇼가 아닙니다.
예배는 사건입니다. 그것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입니다.
오늘날 예배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까닭은 예배 안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보러오는 교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목회자들에게 일종의 '경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최소한 목회자 자신이 예배를 인도하면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여야 합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 자신조차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재앙입니다.
예배회복에 대한 저의 메시지가 목회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 되기를 바라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본문: 시73:16-28
저번에 예배에 대한 편견들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알게 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우리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고정관념들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세 가지 정도만 지적하였습니다.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는 것,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 예배는 어떤 외적 형식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배에 관련된 이러한 잘못된 인식들은 매우 심각한 것들입니다. 예배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예배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역시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예배의 회복을 위해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가지는 의식적인 예배는 거룩한 것이고, 그 외의 생활은 별로 거룩하지 않다는 생각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배라고 하면 우선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의식적인 행위”라고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 예배가 하나의 의식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입니다. 예배는 삶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특정 공간과 시간에 가두어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만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예배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잘못된 인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하나님과 나의 수직적인 관계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5:23,24) 형제와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강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1장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말라기서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아모스서와 미가서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공의가 무너진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 삶이 무너졌다고 해서 예배드릴 수 없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것은 공적 예배에 안주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어떤 공간과 시간 안에서 어떤 형식을 가지고 드리는 것으로 스스로 한정해놓고 그런 예배를 드렸다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삶을 돌아볼 때 만족스럽지 못하고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같고 또 주님 앞에 나설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우리가 예배에 물러서거나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상태에 집중한 나머지 예배를 포기하는 것은 자격지심으로 선물을 걷어 차버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예배는 예배를 율법화시켜 버리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율법이 아닙니다! 예배는 이렇게 저렇게 드려야 한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어떤 공간, 시간, 그리고 형식으로 고정시켜버리고서 그 안에서 안주하는 것은 정말이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많이 부족하니까 “나는 예배드릴 수 없어! 왜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거부하실테니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예배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선물인가에 대해서 여러분이 분명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왜 만드셨을까요?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예배자로 만드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왜 에덴동산을 만들어주셨을까요? 에덴동산은 사람에게는 성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임재하실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기적으로 사람과 교제하기 위해 에덴동산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발로 걷어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보세요. 하나님은 범죄함으로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범죄한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과 두려움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에덴동산 안에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사람에게 지어입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을 짐승을 잡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희생의 제물을 통한 제사가 필요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서 벌거벗은 사람에게 입혀주신 일이 바로 모든 제사제도의 뿌리였고, 오늘 기독교 예배의 근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똑 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렸는데 하나만 받으시고 하나는 거부하신 것입니다. 왜죠?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는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 드리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희생의 제사가 필요하다고 이미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으로 그 제물을 선택했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가 형식이 아니라고 제가 강조한 이유인 것입니다. 예배는 결코 율법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형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예배의 원리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 자신의 생각,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으로 예배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큰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열납하신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관계회복을 선언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관계의 정상화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안에서 하나님은 이 예배의 원리와 방법을 이미 사람들에게 계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당신께 나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사람들에게 선물이요 보물인 것입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어주셨고, 또 성전을 짓도록 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참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 인생들에게 보내신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제물을 지정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마땅한 제물이 없다는 이유로 낙망하고 예배를 포기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발로 차버리는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사단은 얼마나 자주 이것을 가지고 우리를 미혹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상태에 집중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과 상태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왜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고 우리의 제물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가 있고, 허물이 있고, 마음상태가 도무지 예배드리고 싶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배는 하나님이 범죄한 인생들에게 주신 기회인 것입니다. 예배는 사람들에게 보물인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대상이 누굽니까? 하나님? 예, 맞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지난번에 우리가 읽었던 본문을 다시 한 번 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에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구약시대에는 자기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완전한 제물이 되시어서 단번의 제사를 드리시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당신의 의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오늘날은 우리가 구약과 같이 그렇게 예배드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 앞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즐거워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복음에 합당한 에배인 것입니다. 어떤 권사님의 기도와 같이 마치 엄격한 시아버님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과 같이 하지 마십시오. 구약시대의 예배와 같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전지전능하신 우주의 하나님 앞에서만 예배드리지 마십시오. 바로 여러분 자신의 아빠에게 기쁨과 감사로 반응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예배임을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아빠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감정과 내 삶의 상태에 집중한 나머지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예배에 대한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인식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배를 율법으로 규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공간과 시간에 제한하지 마십시오. 예배는 여러분의 아빠 하나님의 넓은 품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안기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기에 예배는 우리의 특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보물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예배하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물이 되시며 동시에 예배를 중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또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목합시다. 오늘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태에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요 우리가 누려야 할 보물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율법으로 규정하고 형식과 장소와 시간과 인간이 정한 어떤 생각과 방법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분명 예배는 우리가 누려야 할 보물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73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아삽입니다. 이 시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에서 16절로서 아삽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 28절까지 아삽의 변화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삽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굉장히 시험에 든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을 2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아삽은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3절부터 그 원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악인의 모습에 대해서 12절까지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삽은 왜 힘들어합니까? 13,1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여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이제 아삽이 시험에 들만한 지 이해가 되지요? 주변에 수많은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도 형통하고 잘 사는데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애쓰는데도 힘든 삶이 계속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은 깊이 낙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아삽의 마음 상태는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하며 감사할 상태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아삽은 하나님이 주신 예배란 보물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아삽은 우선 자신의 감정에 힘들어하면서도 생각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16절이 그것입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상태에 그냥 집중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먼저 영적 사고를 회복해야 합니다. “내게 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것을 어떻게 속 시원하게 풀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이것은 아삽의 삶에 대반전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바로 예배를 통해 이러한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것” 예! 바로 이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는 이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행위이다!” 여러분, 아삽은 자신의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예배를 아예 그만두기로 결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얽매여서 예배를 멀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이 회복되고 난 후에야 성소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삽에게서 배울 수 있는 예배에 대한 놀라운 진리가 이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상태에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이 준비될 때 성소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지한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것임을 마음 깊이 새겨둡시다.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와 대면하심을 참으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든 간에 예배의 자리를 멀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럴수록 커다란 물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으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의 모든 고민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놀라운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아삽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을 때 그의 심경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시며,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18절)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20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는 바로 그런 열매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롭고도 놀라운 발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의 특징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예배가 바로 그런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 하시는 일에 관해서, 그리고 장차 행하실 일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예배 중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아삽은 드디어 악인들의 최후를 보게 됩니다.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19절)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비전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는 또 다른 열매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삽의 경우를 보십시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으셨나이다.”(21-23절)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 오른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을 계속 그와 같이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실 것입니다.”(24절)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는 참된 사랑의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아삽의 가슴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얼마나 흥분하여 뛰고 있는지 상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흥분하여 감격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는 참된 결단이 뒤따르게 됩니다.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27,28절)
여러분, 아삽의 삶에 있었던 놀라운 예배의 경험을 마음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아삽은 자신의 힘과 노력과 깨달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삽은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중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외면하고 성소로 들어간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큰 의문과 정직한 고민을 안고서 하나님의 임재가 머문 성소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내가 깨달았나이다.” 예,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과 상태와 상관없이 우리는 예배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임재만이 내 마음과 내 삶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어떤 혼란이 있습니까? 마음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곳으로 달려갑시다. 우리 힘과 우리의 의를 의지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이미) 얻었습니다.”(히10:19) 오늘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기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선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양의 보혈로
주님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곳 주님의 그 은혜
범죄한 우리가 어찌 서리요
어린양의 보혈이 깨끗케 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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