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예전에 3박 4일 동안 청년부수련회를 인도하면서 [묵상수련회]란 이름으로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3박 4일 동안 네 가지 묵상의 영역을 가지고 강의도 하고 또 그룹을 나누어서 워크샵도 하면서 수련회를 인도했더랬습니다.
이번 시리즈 설교에서 네 가지 묵상의 영역에 관한 강의와 워크샵이 빠졌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영역별로 강의안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묵상의 영역route(말씀, 자연, 생활, 성품)이 아닌 묵상의 자리place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묵상의 자리로 나아오라
본문: 출33:7-11
지난 주간 우리는 3박 4일 동안 묵상의 원리에 대해서 공부하고 실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는 것이고 그것을 내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받는 채널은 네 가지가 있는데 기록된 말씀인 성경, 말씀으로 만드신 피조물, 생활, 그리고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영역별로 묵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면서 제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확인(confirm)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 알고 있었고 느끼고 있었던 것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보다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시련을 통과하고 있을 때 당신의 마음을 부어주길 원하신다고. 우리가 그분 곁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에도, 우리가 그분 곁에서 한결같이 충성할 때에 그러한 나에게 상 주지 않는다고 투정부리고 있을 그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요 선한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친밀감 속으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확신하게 된 것은 이 묵상훈련이야말로 정말 신앙생활의 기본기라는 것입니다. 선수들에게 기본기는 생명입니다. 기본기를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사람은 프로선수입니다. 아마추어는 기본기의 중요성은 잘 알지만 기본기를 연습하는 일에는 목숨 걸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경주자들입니다. 영적인 선수인 것입니다. 기본기가 탄탄한 선수들은 힘들지만 경기를 잘 풀어나갑니다. 그러나 아마추어는 기본기가 약하기 때문에 기복이 심한 것이지요. 신앙의 기본기는 바로 묵상인 것입니다. 묵상훈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기본기훈련인 것입니다. 저는 이 훈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 받아야 할 영적 훈련의 첫 단추라고 믿습니다. 묵상에 대한 저의 설교는 오늘까지 마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예배에 관해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묵상이 되지 않으면 예배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분 앞에 기쁘게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중보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묵상합시다. 묵상은 연습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연습인 것입니다. 연습은 처음부터 잘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일단 연습하고 연습하면 확실하게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내내 우리는 묵상이 무엇인가? 그리고 왜 해야만 하는가? 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수련회 동안에는 우리가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라는 측면에서 묵상을 다루었습니다. 저녁에는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묵상에 대한 마지막 설교로서 언제? 그리고 어디서? 라는 측면에 대해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7절을 다시 한 번 볼까요?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 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먼저 우리가 어디서 묵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서는 ‘회막’이라 하는 장소가 나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란 뜻의 천막입니다. 이 천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하던 보통 천막이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목적을 부여한 다음에는 매우 특별한 천막, 매우 거룩한 천막이 되었습니다. 그 목적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일상적으로 지내는 것을 하나님과 만나는 목적으로 명명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유심히 생각해보았습니다. 만약 나의 삶에 자리에 어떤 공간을 내가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로 인정하면 그곳이 곧 나의 회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배당에서 자기가 앉는 자리에 앉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잘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늘 앉는 자리에 앉아야 예배가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란 기대감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냐면 그곳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것이란 소망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더욱 더 마음이 잘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우리 삶 속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어디서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또 어디서나 하나님의 마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서 묵상할 것인지 결정하기 전에 먼저 그 자리를 주님의 보혈로 덮고, 그 자리를 주님을 만나는 자리로 선포한다면 그 자리야말로 오늘 나의 삶속에 진정한 회막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삶에는 아침 햇살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습니다. 유리로 된 현관 바로 앞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곳에 앉으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게 되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됩니다. 다른 어떤 곳, 이를테면 이불 안에서나 책상 위에서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으면 왠지 묵상이 잘 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는 잘 되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면 제가 그곳을 묵상하는 자리로 결정했고, 그곳에서 묵상을 몇 달 동안 즐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어느 장소를 ‘나의 회막’이라고 결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만이 아는 어떤 곳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믿음으로 선포하고 구별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곳에 주님과 앉을 때마다 더욱 쉽게 묵상이 잘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그곳에서만 묵상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어디서나 우리를 만나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것이 한 곳에 결정되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덮고 하나님과 만나기로 결정한 자리는 어디든지 회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산기도를 해야 기도가 잘 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와서 엎드려야만 기도가 잘 된다고 말합니까? 어떤 장소가 특별하게 주님의 임재를 끌어당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 장소가 어디든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과 만나기로 믿는 곳은 거룩한 회막, 즉,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을 실천하려고 할 때 이 ‘회막’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묵상할 수 있습니다. 버스에서, 택시 안에서, 그리고 지하철을 탈 때에도 자리에 앉아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갈 때에도 마찬가지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속에서 ‘회막’이라 이름 한 곳이 있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서 묵상하든 상관이 없지만 묵상하는 그 자리에서 묵상하기 위해 앉기 전에 먼저 그 자리를 주님의 보혈로 덮고 그곳을 회막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곳이 내가 하나님을 만날 자리이다”라고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바로 이곳을 주님의 보혈로 덮습니다. 이곳은 거룩한 자리입니다. 이곳은 주님이 임재하시는 자리입니다.”라고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든 회막이 될 수 있습니다. 묵상의 자리는 바로 그 회막 안인 것입니다. 어디를 회막으로 정하든 여러분과 하나님만이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를 회막으로 정하든 간에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묵상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더욱 좋은 것입니다. 저는 집 안 어디서든 묵상할 수 있고, 또 길을 가나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는 자리든 버스를 타든 어디든 묵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햇볕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현관 앞 거실이 저에게는 영광스러운 회막인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을 묵상하는 자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회막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바로 묵상의 자리인 것입니다.
묵상의 자리에 대해서 좀 더 말해봅시다. 지금까지 저는 어디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상하기 전에 먼저 그곳을 거룩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규칙적으로, 묵상할 수 있는 자리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묵상할 자리를 정할 곳은 어디인가? 바로 진 밖인 것입니다. 진과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진과 격리된 곳입니다. 어디서든 묵상할 수 있고 어디서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회막은 진에서 격리된 곳이 좋습니다. 진은 어떤 곳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그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그러나 회막은 진 밖에 있습니다. 우리가 묵상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분주한 마음인 것입니다. 바쁘고 쫓기고 그래서 여유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회막을 우리의 진 밖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나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큰 약점은 이러한 회막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특정한 장소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묵상의 자리가 있었을까요? 마가복음 1:35절을 보면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전날 예수님께서는 하루 종일, 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가르치고 치유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치유사역은 굉장한 에너지가 필요한 사역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의 상처를 경험해야 하고, 아픈 사람의 아픔을 같이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은 저와 우리에게 굉장히 큰 도전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은 사역보다 아버지와의 교제가 더 중요한 우선순위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 같은 경우도 솔직히 바쁘면 기도를 쉽니다. 지난 주 수련회 기간도 별로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긍휼이 많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묵상의 자리는 진 안이 아니라 진 밖이었습니다. 우리는 묵상의 자리를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 밖에 회막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는 자리는 진 밖에 설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회막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2:39절을 보니까, “예수께서 나가서 습관을 좇아 감란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거룩한 습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나아가 묵상하는 자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속에 습관적이고 정기적으로 나아가서 앉아야 할 묵상의 자리는 분주한 일상생활이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광야의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는 것은 광야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곳, 분주한 생각들이 끼어들 수 없는 자리, 바로 그곳이 최적의 묵상자리인 것입니다. 광야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체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다윗이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렸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아버지와 형들이 살던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양떼들과 함께 지내던 한적한 들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하기 시작했고 예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을 주목하셨고, 드디어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새의 집에 그 형들이 다 모였으나 그곳에는 다윗은 없었습니다. 다윗은 형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외로움을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견뎌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묵상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에게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에게 더욱 더 당신의 친밀감을 보여주기로 작정하셨을 때 하나님은 사울을 다윗의 대적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망 다닐 수밖에 없었을 때 다시 한 번 더 묵상하는 자리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피신하는 동안 다윗은 묵상의 즐거움으로 견디고 또 견디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강건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삶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삶에 광야생활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생활은 다윗에게 큰 사랑의 선물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로운 곳, 힘든 곳, 어려운 곳,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곳, 정말 인내가 필요한 곳, 주변에 재미난 것은 하나도 없는 바로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바로 묵상할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자리는 그래서 은밀한 곳입니다. 하나님과 나, 이렇게 단 둘이서만 대면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합니다. 함께 있어야 안정감을 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침묵하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분주하고 바쁜 일상생활을 일부러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요한 것은 견디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사실 하나님을 묵상할 자리는 바로 은밀한 곳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밀한 곳에 좌정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좌정해계십니다. 하나님은 시끄럽고 요란한 곳이 아니라 은밀하고 고요한 가운데 좌정해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기도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제하거나 금식하는 것도 은밀한 곳에서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6:4, 18)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온갖 시끄러움과 분주한 곳은 묵상할 자리로서 적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묵상의 자리는 바로 은밀한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함께 모여서 묵상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묵상하는 것은 더욱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함께 모인 곳이라도 은밀성이 있는 곳이 있고 없는 곳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분주하고 모인 목적이나 동기가 다양하든지 하면 은밀성이 확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네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신 것은 묵상을 혼자만 하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함께 묵상하는 것은 안 된다는 그런 뜻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라는 그런 뜻인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응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있는 장소! 예, 저는 이것이야말로 최적의 묵상의 자리라고 믿습니다. 다른 것이 자꾸만 신경 쓰이고, 다른 것에 자꾸만 마음이 가는 환경 속에서는 결코 묵상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내게 묵상하는 삶을 가르치시기 위해, 묵상의 즐거움을 보여주시려고 가끔 광야의 자리로 몰아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한적한 곳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서는 강력한 손으로 나를 떠밀어서 고난이나 고독과도 같은 환경이지만 오직 주님 한분밖에 인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으로 나를 인도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골방의 의미를 잘 이해하십시오. 주님은 결코 문자적인 의미에서 골방을 얘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 마음이 분주하다면 문자 그대로의 골방이라도 묵상의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고난과 고독 가운데 오직 주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응시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 속에 있다면 바로 그 자리야말로 최고의 묵상의 자리, 곧 여러분의 골방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곳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에게 당신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당신의 계획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까? 보편적으로 우리가 묵상할 때는 이른 아침이 가장 좋습니다. 아침에 묵상하는 것은 생각의 고지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제가 해보니까 점심과 저녁에 묵상하는 것이 아침보다는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까 분주한 마음과 생각이 방해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생각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기 전에 묵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른 아침에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묵상하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만약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마음이 분주하고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마음이 바쁘고 분주하면 아침이라도 묵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잠들기 전에 기도하십시오. 내 마음의 분주한 생각들이 잠에서 깬 후에도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잠에서 깰 때에는 주님의 얼굴을 보고 기뻐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잠자리에 드십시오. 그러면 아침에 일어날 때 마음이 가볍고 상쾌한 상태에서 묵상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묵상의 때는 이른 아침만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께서 묵상할 힘을 주실 때, 그래서 묵상의 자리로 초청할 때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앙모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앙모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은 묵상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신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든, 혹은 특별한 일들을 삶 속에서 경험하든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느낄 때 언제든지 주님께서 묵상할 힘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서 묵상의 자리로 초청하신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가 온갖 시련을 겪으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바로 그때에 묵상할 힘을 부어주십니다. 또는 일상적인 삶 한 가운데 나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멈추어 서서 잠시 생각해보라고, 묵상해보라고 감동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갔다” 이와 같이 주님의 초청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묵상의 자리로 나아갈 때에 주님은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만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대면한 것이 아니라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 묵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친밀감을 느끼며 하나님의 얼굴과 대면하여 하나님과 즐거운 교제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회막, 곧 묵상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여 그 자리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그곳에서 주님은 당신의 친밀하심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 묵상의 자리가 우리 삶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묵상할 힘을 부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묵상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시다.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 분명 연습이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여 조금씩 연습하여나갈 때 조금씩 쉬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곳에서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당신의 친밀감을 부어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선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양의 보혈로
주님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곳 은혜로 들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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