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6)-예배

등불지기 2012. 3. 10. 18:31

 

 

 

 

묵상회복은 자연스럽게 예배회복으로 연결됩니다.

예배회복을 외치는 설교자는 많지만 예배회복을 묵상회복에서 시작하는 분은 많지 않습ㄴ다.

묵상이 회복되지 않으면 예배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예배는 참 인상적입니다.

악기가 없어도 몸을 악기로 사용하여 예배드리는데 얼마나 탁월한지 모릅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온 몸을 사용하여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예배의 문제는 묵상의 결여로 인한 문제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열정적으로 드리면서도

예배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닌지 그들 조차도 의심한답니다.

자, 묵상회복에 이어 예배회복에 대해 공부해봅시다.

예전에 청년들이 주로 모이던 3부 예배시에 했던 설교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본문: 요4:21-26

 

금까지 저는 묵상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예배에 대하여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묵상과 예배는 매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을 아는 방법입니다. 예배는 내가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격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나는 반드시 그분을 예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데 어찌 예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바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묵상의 열매인 것입니다. 예배는 묵상한 결과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예배는 반응이다” 왜 예배가 되지 않습니까? 왜 예배가 지루합니까? 왜 예배가 재미가 없습니까? 열정이 없어서? 믿음이 없어서? 기도를 하지 않아서? 모두 아닙니다. 묵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반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반드시 예배하게 됩니다! 예배가 지루하고 어렵습니까? 그렇다면 예배하려고 하는 시도를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묵상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예배하는 것이 힘들다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느끼기도 했고 또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게 예배에 대한 어떤 편견이나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사고방식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저는 예배에 대한 이러한 편견을 다루기 원합니다. 예배에 대한 편견들은 우리 사고의 영역 안에서 견고하게 진을 구축하여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어려움을 주는 요소들은 사실 예배의 분위기나 악기를 다루는 인도자나 찬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배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예배를 은혜 받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은혜가 되지 않는다면, 쉽게 말해서 감동이 되지 않는다면 예배가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받음이 아니라 드림입니다. 받는 시간이 아니라 드리는 시간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배란 단어 자체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란 단어(worship)는 내가 무엇인가를 귀하게 여기는 행위란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내가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사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가 확증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예배는 나의 가치관을 표현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지 드러내 보이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에 최고의 경의와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지만 예배를 관람하는 무엇인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배의 조화나 분위기 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배 인도자나 찬양 사역자들이 종종 이런 함정에 잘 빠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배는 관람이 아닙니다. 예배는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인격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이라면 어떤 분위기나 악기 등은 별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는 콘서트가 아니다]라는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책 제목에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보이려고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예배를 콘서트로 만들려고 애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멋진 무대와 분위기 속에서 화려한 악기반주와 안무와 열정적인 인도가 있는 곳보다는 메마른 광야나 혹은 깊은 정글 속에서 혹은 캄캄한 감옥 속에서 고요히 부르는 찬송소리 가운데 주님의 임재가 더욱 강력하게 임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관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배 보러 가자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가자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반응하자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관람객이 되지 마십시오.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또 어떤 편견이 있을 수 있을까요? 예배에 대해 어떤 형식과 장소에 얽매여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는 이런 식으로 드려야 해!” “예배는 이런 분위기의 예배당에서 드려야 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는 어떤 형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어떤 장소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배는 심지어 설교도 아닙니다.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모태에서부터 한 저는 예배 시간에 설교가 없다면 앙코 없는 찐빵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설교가 곧 예배요 예배가 곧 설교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찬양하는 시간은 설교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찬양시간은 설교시간을 돕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저의 생각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1시간 동안 찬양만 드리는데 충분히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필요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교가 필요합니다. 묵상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설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묵상이 안 되는 분들을 위해 설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모두가 묵상을 할 줄 안다면, 그리고 모두가 그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반응하기로 결정했다면, 저는 찬양만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경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묵상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 제가 설교할 필요는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든지 참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준비찬양’이라는 용어를 우리 가운데서 영원히 지워버립시다. 찬양시간은 그저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예배의 고정관념을 만들지 맙시다. 예배는 어떤 형식이 결코 아닙니다. 예배는 어떤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날 예배당에서 예배드리지 않으면 주일을 어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최전방에서 밤낮 나라를 지키는 우리 형제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저는 그들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초소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배는 장소가 결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는 또 설교, 성시교독, 찬양대의 찬양, 송영과 같은 어떤 순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날마다 드리는 예배시간에 그러한 순서들이 있을까요? 아닌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천상의 예배는 설교도 없는 것입니다. 성시교독도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자들의 예배는 오직 밤낮 엎드려 절하는 것과 찬양하는 소리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들이 예배를 어렵게 하는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예배를 어렵게 하는 것은 예배 자체에 있기보다 내 생각의 영역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배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 속에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여러분들을 예배자로 세울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저의 관심은 우리 중에 탁월한 예배 인도자를 길러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일군을 길러내는 데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묵상하는 삶을 살며, 묵상을 통해 발견한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반응하기로 결정하게 된다면 저의 설교가 예배시간에 사라져도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예배자의 심령 깊은 곳에 친히 말씀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내 속에 당신의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가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서 미안하지만 예배 인도자도 없어도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친밀감 속으로 안내하실 것이니까요. 성령이 주관하시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에는 예배인도자나 찬양사역자나 악기를 주관하는 자나 설교자나 모두 덜 중요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예배를 꿈꾸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참된 예배자로 세우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절) 하나님은 일군(worker)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worshiper)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찾으신 까닭은 그가 신실한 일군이어서가 아니라 신실한 예배자여서 이었습니다. 다윗은 양떼소리만 들리는 한적한 빈 들판에서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다윗을 잠잠히 주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예배하려는 그 중심을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신실하게 반응하는 자를 하나님은 눈을 들어 찾고 계시며 찾으신 다음 잠잠히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내어 당신의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 사무엘을 예배자에게 보내셨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묵상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한 인생을 보셨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보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들이 있듯이 오늘 읽은 본문을 볼 때에도 어김없이 편견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편견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편견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4장에서 보게 되는 한 여인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아주 음란하고 부정하고 문란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여인이 갖고 있던 문제가 성적 방탕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이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 한낮의 시간에 우물가에 옵니다. 분명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분명 그녀에게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녀에게는 남에게 나타내고 싶지 않는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자, 여러분, 이 사마리아 여인을 부정하고 음탕한 여인이란 관점에서 보지 말고 상처 많은 여인, 한 많은 여인으로 한번 바라봅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있습니다. 만약 그녀가 5번이나 남편을 바꾸고 지금 6번째 남자와 사는 것이 7계명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녀는 분명 주민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이스라엘에 갔을 때 예루살렘을 여행하면서 들은 얘기입니다. 지금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적은 수의 소수민족이라고 합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닭을 잡아서 유월절 행사를 하는데 이들은 양을 잡아서 제대로 유월절 의식을 치른다고 합니다. 지금도 율법적으로 엄격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현장에 가서 보니까 한 여인이 5번이나 남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유대인 사회나 사마리아 사회에도 그런 자유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만약 이 여인이 음란하고 부정한 여인이라면 나중에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와 보라”고 외쳤을 때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믿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그녀가 죄가 아니라 중대한 상처를 안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아픔을 노출하기 싫어 한다는 것을 사마리아 주민들이 알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어느 날 모든 주민들이 알고 있는 기구한 여인, 한 많은 여인, 마음의 깊은 슬픔과 상처를 안고 있다고 여기는 그 여인이 자기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친다고 할 때 더욱 설득력 있게 여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요? 요한복음 문맥은 분명 사마리아 주민들이 여인의 말을 듣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음탕한 여인의 말을 누가 귀 기울여 경청하겠습니까? 말하기 전에 돌에 먼저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39절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제가 이스라엘 땅에 가서 알게 된 것은 5번씩이나 “결혼”하게 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형이 후사가 없이 죽을 때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야 한다는 율법인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다말의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관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6형제의 집안에 맏아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은 후사가 없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동생과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생도 죽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5번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자녀도 없이 죽고 맙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마침내 함께 살고 있던 남편을 자기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을 때 그녀가 “나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것은 그녀 입장에서는 진실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첫 번째 남편만 진짜 자기의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기구한 삶이 남에게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다니던 그녀가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변화된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경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의 삶에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그녀의 일생일대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은 그녀의 삶 속에 친히 예수님께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그녀를 찾아가셨던 것일까요? 그것이 오늘 제가 말하려고 하는 예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한번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 여인은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이미 잃은 지 오래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여인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께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털어놓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간절히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을 보면 여자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이 “어디서 예배드려야 하는 때는 이제 지나갔다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예배할 때가 도래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물가에 있던 그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물가에 있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가 무엇일까요?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너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여인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갈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기를 갈망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찾으시면 잠잠히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그 여인에게 보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4절 말씀을 볼까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여러분, 이 짤막한 구절 속에 놀라운 진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왜 사마리아로 통행해야 하겠다는 강력한 부담감을 느끼셨던 걸까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삶의 원칙은 항상 아버지를 주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고,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대원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해야 하겠다는 강력한 부담감을 갖게 되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 그 여인에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면 그 여인을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갈망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여인을 찾아내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동네에 오신 것은 바로 그 여인 한 사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그녀는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아들이신 예수님은 큰 부담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여러 사람들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갈망하고 준비된 영혼에게 찾아가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에 대해서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놀라운 예배의 진실이 우리 마음속에 새겨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예배인도자 때문에 그 회중에 임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식을 보시고 예배에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설교를 보고 예배에 찾아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위기나 장소를 보고 임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진실한 예배자를 보시고 예배에 영광으로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전도단의 찬양집회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정말이지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그 설교시간이 없다는 것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손을 들고 찬양하는 것도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제 생각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주 열방대학에 있는 찬양과 대구지부에 있는 찬양모임을 비교해보았습니다. 솔직히 찬양의 기술이나 테크니션은 대구지부가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는 제주 열방대학에 있는 찬양모임에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인도자나 악기나 분위기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배자였던 것입니다. 대구지부에서 운영하는 화요찬양모임에 여전히 수백 명의 학생들과 청년들이 운집합니다. 그러나 한번 보러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람객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제주도의 열방대학에서 운영하는 찬양모임은 관람객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DTS학생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하기로 결정하고 예배에 옵니다. 한쪽은 예배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많고, 한쪽은 예배하기로 결정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악기와 분위기나 기술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이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지금도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과거 우물가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고 어디로 가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 것인가 갈망하던 한 여인을 찾아내셨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친히 보내셨던 바로 그분께서 오늘도 진실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배를 갈망하는 사람, 예배하기로 결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을 위해 당신의 보혜사를 친히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비밀들을 계시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한 많고 상처 많은 한 여인을 기쁨과 환희에 찬 인생으로 바꾸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예배 중에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슬픔 대신 희락을 안겨주시고, 상처를 지우시고 대신 화관을 씌워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치유, 이 놀라운 자유, 이 놀라운 회복이야말로 참된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반응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또한 신실하게 인격적으로 다가가셔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그 모든 아픔을 치유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치유의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는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진실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를 진실하게 만나주셔서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내 찬양 받으실 주님.

내 맘을 주께 활짝 엽니다. 내 찬양 받으실 주님.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대신 찬송을 찬송의 옷을 주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