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에 얽매이다보면 내용을 소홀히하기 쉽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삶의 공식입니다.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정작 중요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예배의 틀은 교육상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배의 형식을 강조하다 자칫 예배의 중요한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수십년 동안 주일성수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주일성수는 "교육상"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주일성수를 강조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삶으로서의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한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다른 한 쪽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질서가 무너졌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연스러운 삶이 사라졌는데,
주일성수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구약의 선지서들을 읽어보십시오.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은 삶이 무너진 상태에서형식적인 예배와 제물에 초점을 맞추는 그러한 모습에 대해서
역겨워하고 계십니다.
형식도 필요하지만 본질(내용)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삶이 무너진 예배를받지 않겠다고, 삶이 무너진 채 드리는 예물을 받지 않겠다고 가져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있다고 형식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생활예배만 참 예배라고 해서 공예배를 무시하여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가 필요한 메시지는 생활예배인 것입니다.
왜냐면 너무나 오랫동안 주일성수에 대해 강조해왔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삶의 질서, 균형, 영성 회복에 대해 말할 때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생 활 예 배
본문: 롬12:1,2
예전엔 사람들이 교회를 정할 때 흔히 어느 교회의 설교가 제일 좋은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예배가 좋은가라고 묻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설교보다는 예배의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만 해도 교회는 예배에 대한 관심은 적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배에 대한 책들, 세미나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설교자의 위치가 절대적이었지만 앞으로는 찬양사역자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소수의 사역자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예배가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성경적인 관점으로 예배를 배워야 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회중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예배의 갱신과 개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생각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단편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손을 든다든지 혹은 어떤 고백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고백과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는 것, 즉 설교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은 예배의 어떤 형식적인 요소나 음악적인 요소보다는 넓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으로서의 예배, 즉 생활예배란 개념인 것입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것입니다. 공동체의 예배가 회중들의 삶으로 연결되어졌는가? 우리의 고백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 것인가? 저는 이것이야말로 정말이지 참된 예배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배는 삶에 있어서 가장 높은 우선순위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삶에 또 없습니다. 단지 예배보다 급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왜 살아갑니까? 우리가 살아가야 할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근본 목적 또한 그분을 예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하신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목적은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구원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보세요. 계명의 초반부는 예배에 관련된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명과 정체성 또한 예배를 떠나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예배인 것입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렸듯이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또한 예배인 것입니다. 주기도의 첫 구절 또한 예배를 의미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먼저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도 ‘자신을 예배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예배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했으면 사단이 예배에 관련해서 유혹했겠습니까? 사단의 의도는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이 곧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다시 한 번 예배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걸까요? 지난번에는 우리가 예배할 대상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그러므로”란 이 단어는 앞서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열한 장에 걸쳐서 말하려고 했던 주제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이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떤 분인가를 알았다면 당연히 그리고 마땅히 그분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바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전인격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행하신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이 주일날 겨우 1시간에만 가두어둘 수는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예배가 반응이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반응이라면 당연히 예배는 마음과 행동이 같이 가야 합니다. 먼저 예배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행동으로만 하는 예배 역시 진정한 예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배는 마음에서 행동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하나님께서 예배를 거부하시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5:21-23) 절기와 성회와 음악을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와서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삶의 예배, 생활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는 예배의 형식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일은 요즘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높이는 것보다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가대가 음악성에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놓칠 위험성이 항상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섬기는 연주자들이나 심지어 설교자들조차 이런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강력하게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항상 잊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반응으로서의 예배가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선지자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불로써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과 물을 다 태우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백성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땅에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18:39)라고 고백했습니다. 예배는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그 행하심을 경험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반응하고 행동으로 반응하기 위해 항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여 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 중심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단되기 시작하면 삶의 예배, 생활로서의 예배 또한 중단되기 시작하게 되고, 형식으로서의 예배에 안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가 하나님의 모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반응이라고 한다면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하심에 대해 알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놓으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무엇인가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예배는 희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동물로 혹은 금전으로 값을 지불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열납되는 예배는 우리가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시간을 지불하고, 재정을 지불하고, 몸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부어드린 여인을 보시고 주님은 그 사랑과 대가를 동일하게 보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헌금시간은 매우 중요한 순서인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내 마음을 드리고, 내 삶을 주님의 도구로 바쳐 드리는 고백은 매우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예배, 우리의 몸을 드리는 예배,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는 예배,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자로서 당연히 반응해야 할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을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좀 더 살펴봅시다. 몸을 드리는 예배, 내 삶을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세 가지 요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는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것은 두 번째 요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첫째 요점과 둘째 요점은 모두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즉, 우리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이 곧 예배란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것, 특히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것, 예, 그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할 삶의 예배, 생활예배, 곧 영적 예배, 신령한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령한 예배, 영적인 예배는 은사들이 마구 나타나는 그런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워진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사고방식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새로운 사고방식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을 가지고서는 결코 참된 예배,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관점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내 생각을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의 필수과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 25절을 봅시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다윗이 정말 주를 두 눈으로 보았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다윗의 생각과 상상력과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상상력이 깨끗해졌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다윗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예배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릴 때 ‘거룩한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 생각이 곧 예배라는 것을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거룩한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이 요즘 왜 점점 어려워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 텔레비전과 영화 등으로 인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제한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상상력을 이용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생각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활짝 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감격은 사라집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 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받아들일 때만이 내 마음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강조는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예배의 문맥은 하나님의 사랑(인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시36:7)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63:3) “대저 주의 인자하심은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시108:4)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마음을 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배를 통해 새로워짐을 경험할 수 있다. 충만함을 누리게 됩니다.
영적 예배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의 마음, 즉 관점과 사고방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새롭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영적 예배의 마지막 세 번째 요점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점들은 모두 생각, 사고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생각이 곧 예배입니다! 이것은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 생각에 무엇을 집어넣는가가 중요합니다. 내 생각에 쓰레기를 집어넣으면 내게서 쓰레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영광(아름다우심)으로 채우면 다른 생각들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낯,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27편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내 생각을 하나님께 요구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내가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예배는 하나님의 목적에 내 의지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주장하여서 관철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생각을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왜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못할까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께 강요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면 우리가 소원하는 것이 사라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소원에 “예”라고 응답할 때 우리는 최고의 예배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의 예배를 보십시오. 이사야는 예배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자 자신의 부정함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소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에 자신이 응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고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헌신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자신의 계획과 소원과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내 뜻, 내 생각, 내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과 생각과 계획을 진심으로 구하지 않는 이상 참된 예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시지 예배를 찾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배자를 그의 인격과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 우리의 삶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골3:23) 로렌스 형제의 책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생활예배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주님께 도구로 드리는 것이 곧 예배인 것입니다. “주님, 제 삶이 곧 예배가 되게 하소서” 어떻게 내 삶이 예배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내 삶이 곧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영적 예배요 신령한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간다고 할 때 흔히 놓쳐버리는 영역이 바로 공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며 의로운 일을 생각하십니다. 따라서 공의를 행하는 삶이 예배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정의가 바탕이 되지 않는 예배, 공의가 무너진 상태에서의 예배는 향기나지 않는 그림 속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사1:17) 아모스서를 보십시오. 공의가 무너진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 노래를 하나님이 거부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활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속에 공의를 회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예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참된 예배, 영적 예배, 신령한 예배, 살아 있는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까지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기쁨과 온전하심이 내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기쁨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즉 어떤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내 안에 없다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예배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예배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양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로 생각을 키우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으로 심상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를 헌신하는 것이다.” 내 영이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로 살아나고,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내 감정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열리게 되고, 내 의지가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되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의 예배, 생활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인 것입니다. 주일 아침에 한 시간 노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포함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를 도와주고 환난에 처한 자를 위로하는 삶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소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도, 그리고 내 말에 내가 책임을 지는 진실하고 성실한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시간 내 생각의 영역을 살펴보십시오! 내 사고방식이 예배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내 생각 안에 하나님의 생각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내 생각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기울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생각에 기울어져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내 사고의 영역 안에 있는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울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이 곧 여러분이 무엇을 예배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그분의 생각을 구하는 것보다 더 영적인 예배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내 마음의 계획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을 위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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