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13)-중보기도

등불지기 2012. 3. 10. 19:26

 

 

선교사는 중보기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언어와 문화와 모든 것이 다른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합니다.

기도가 아니면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복음의 등불을 밝히도록 지속적으로 기도해주십시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본문: 마6:9-15

 

중보기도모임은 모든 교회의 심장입니다. 심장이 건강할 때 온 몸에 피가 원활하게 흐르듯이 중보기도모임이 살아 있을 때 비로소 교회가 성령의 운행하심이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자신이 설교할 동안 지하실에서 300여명의 성도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고 자랑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을 초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 없이 결코 하나님과 동역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첫 걸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를 위해 놀랍고 선하고 온전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비로소 일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중보기도사역이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중보기도사역이 활성화되는 것은 심장이 뛴다는 것입니다. 심장이 뛰면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우리 청년부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중보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부활주일입니다. 모든 주일이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경축하는 날입니다. 새벽과 오전 내내 여러분은 부활의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여러분과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실제적으로 우리 삶 속에서 느끼며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강조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꿔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아니하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문제의 패턴은 바뀌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아니하면 우리는 획기적으로 응답받는 기도의 능력을 충분히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의 세계를 결코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패러다임입니까? 바로 자기 문제를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나 중심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기적인 기도인 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원칙적으로 동의는 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했지만 정말 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의지는 인간 본성 밑바닥에 매우 강하고 견고한 진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허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강력한 능력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열매 중의 하나가 바로 중보기도라고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진심으로 남의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것은 견고한 요새인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면 왜 중보기도하는 사람이 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한분 중보자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진정한 중보기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성령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중보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보기도를 배우기 전에 먼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또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주기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의도하신 바는 기도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일까요?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기도의 패러다임이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 우리가 벗어던져야 할 패러다임 두 가지를 언급하셨습니다. 첫째로, 자기영광의 패러다임입니다. 5절 말씀은 자기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기 보다는 사람의 눈을 더욱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왜 어려워할까요?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몸에 배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는 것을 더욱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어떤 사람에게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벗어버리라고 도전하신 기도의 패러다임은 이방인들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설득시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패러다임은 기독교 밖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사발에 물을 떠놓고 손을 빌며 천지신명에게 간절히 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란 속담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정성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을 감동시켜보려는 수작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보려면 팔공산 갓바위를 한번 가보십시오. 또 이러한 기도를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능 시험일을 앞두고 교회의 새벽기도회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능 당일 교회 지하실은 기도하는 사람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입학하고 나면 언제 기도했냐는 듯이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하나님을 감동시켜보려는 식의 기도는 다 중언부언인 것입니다. 단지 했던 말을 또 다시 하는 것이 중언부언이 아닌 것입니다. 말을 반복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마음의 동기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면서 결코 하나님을 자신의 아빠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친밀감 속에서 기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마치 거래를 따내야만 하는 외국의 바이어 대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심술 굳은 이사회를 설득하여서 원하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프리젠테이션하듯 기도하는 것입니다. 옛날 책을 팔기 위해 집집마다 다니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자신이 팔려는 책이 얼마나 좋은지 구체적이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이번이 정말 좋은 기회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마치 물건을 팔기 위해 열심히 홍보하듯이 기도하는 것이 바로 중언부언식의 기도인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중언부언식의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기도의 패러다임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는 아빠이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빠이심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나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는 것에 급제동이 걸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빠되심을 깊이 신뢰하게 되면서 기도가 오히려 안 되더라는 얘기를 자주 들어보았습니다. 예, 맞습니다. 내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곧 나의 아빠께서 알고 계심을 진정으로 신뢰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우리의 기도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며 나를 진심으로 이해하시며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 걸까요? 바로 이러한 물음의 결과로 우리 주님은 주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늘 외우고 다니는 주기도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기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원리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향하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를 그냥 주문처럼 외우고 다닐 뿐입니다. 주기도의 원리를 따라 기도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패더라임으로서의 기도로 보지 않습니다. 주기도를 외우고 있지만 실제 기도할 때는 주기도가 말하고 있는 새로운 원리, 주님의 원리가 아니라 유대인의 패러다임이나 이방인의 패러다임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반복하며 강조했듯이 패러다임이 변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 삶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관이 변하지 않으면 주기도를 천번 만번 외워도 주기도는 실제로 아무 영향력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주기도를 기도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다시 한 번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기도는 기도의 순서가 아닙니다. 물론 순서란 관점에서 주기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 주일학교 다닐 때 기도의 순서에 대해서 선생님들이 가르친 것을 아직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ACTS란 순서에 대해 배웠습니다. 먼저 찬송하고(adoration) 그 다음 회개하고(confession) 그 다음 감사하고(thanks-giving) 그 다음 간구하는 것(supplication)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 5분을 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를 기도의 순서라는 차원에서 해보니까 몇 시간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기도만 가지고 1시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다보면 주기도의 순서대로 기도하면 논리적으로 6시간 기도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기도는 기도의 순서라기보다는 기도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어떤 원리일까요?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찬양으로 시작해서 찬양으로 끝맺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에서 시작하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고 끝맺습니다. 기도의 원리는 곧 찬양이며 예배인 것입니다. 기도는 내 문제를 아뢰고 해결 받는 수단이란 생각은 낮은 차원인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원리는 예배로서의 기도인 것입니다. 둘째 주기도의 원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란 단어가 있는데 실제로 주님은 아람어인 ‘아빠’란 단어를 사용하셨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감 속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의 아빠, 곧 하늘의 아빠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산을 따내는 식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부르짖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도는 내 문제를 이미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기도의 본질인 것입니다! 셋째 주기도의 원리는 나의 필요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먼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는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친밀감 속에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즉, 예배인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예배의 요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어려워하는 이유가 있다면 거의 대부분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기도가 쉬워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자신의 나라를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은 어떤 기도일까요? 마태복음 12장 28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는 것과 어둠의 영이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는 성령을 초청하는 기도이며, 또한 귀신들을 대적하는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성령충만함을 간구하는 것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 전투를 벌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를 위해 간구합니까? 그리고 어둠의 영을 대적하고 있습니까?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에 있어서 핵심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어둠의 영이 물러간 다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내 삶에 관철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지 않은 모든 영역이 바로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특히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한 중보기도에서 그 꽃을 피웁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 그리고 아직도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종족과 나라와 열방의 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 저는 이 중보기도야 말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라고 확신합니다.

네 번째 주기도의 원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먼저 간구한 다음 자신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위한 기도 역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공급하심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에 어떻게 채우시는지 우리가 보고 알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의 욕망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기도하는 것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내가 간구하는 것이 정말 지금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인가? 그것이 혹시 나의 욕망이 아닌가? 지금 당장 없어도 괜찮은 것인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 그것을 구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자문해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욕망이 아니라 나의 필요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시급한 필요를 따라 채우시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나의 아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고 한다면 왜 또 다시 오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심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욕망이 채워진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용서하심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응답받는 기도의 핵심 원리는 이것입니다. 받고자 하는 대로 주어라!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싶으면 은혜를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용서의 은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받으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죄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날마다 죄사함과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사는 은혜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날마다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의 은총과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용서하십시오. 저는 용서하는 기도야말로 중보기도의 근본정신 중에 하나라고 믿습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만이 아닙니다. 나와 관계없는 사람을 위해서도 용서를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나라와 민족의 죄악을 위해서도 용서를 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기도! 그것은 중보기도를 가장 중보기도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셋째, 보호하심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총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은총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살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나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으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점점 악해져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총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보호는 인간의 근본 필요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두 가지로 임하는데 첫째는 내적인 보호하심으로서 마음의 보호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 마음, 내 속사람을 지켜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란 기도는 외적인 보호하심으로서 생활의 보호입니다. 내 육체, 내 일, 내 소유, 내 관계, 내 계획, 심지어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와 같이 구할 때 하나님은 더욱 효과적으로 나를 위해 응답해주실 것을 기대해도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의 주기도의 원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내게 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베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내게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가 남을 위해 먼저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나를 먼저 돌아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하고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된다면 한번쯤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삶에 있어서 풀어야 할 영역이 있지는 않는가? 라고 말입니다. 내게 죄사함의 감격이 없다면 혹시 내 안에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는가?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하는 나를 보시면서 내가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유심히 보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증오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서 정작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나에게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기를 진정 원한다면 내가 먼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은 내가 응답받기 위해서 반드시 점검해야 할 과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죠지 뮬러가 오만 번 기도 응답받았다는 것만 보고 그가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지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렸습니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오만 번 기도 응답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기도를 그냥 주문 외우듯이 하지 맙시다. 외어버리는 식으로 하지 맙시다. 도리어 우리는 주기도를 깊이 묵상합니다. 주기를 통해 기도의 원리들을 발견해서 그것들을 내 기도생활에 하나씩 적용해나갑시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생활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생활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내 문제에서 다른 사람의 문제로 기도의 패러다임을 전환합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내 영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합시다! 그리고 내 욕망이 아닌 내 필요에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생활의 폭을 한층 넓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중보기도에 중요한 원리로 적용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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