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균형잡힌 그리스도인, 균형잡힌 교회사역

등불지기 2012. 3. 10. 23:36

 

 

지금까지 영성회복학교란 이름으로 51주간 전했던 회복메시지를 올렸습니다.

메시지를 읽는 모든 분들의 마음과 삶 속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여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혹시나 치우치는 일이 일어날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very much worried,

균형balance을 잡기 위해 보충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적인 그리스도인spiritual christians]이란 표현보다는 [균형잡힌 그리스도인balanced christians]이란 표현을 선호합니다.

'영성,' '영적인,' '영성훈련,' 이런 단어들이 자칫 현실도피성 혹은 탈사회성으로 오해될까봐 걱정이 되어서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이 '영적이다'라고 했을 때는 그런 뜻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매우 특별한 지식'으로서의 영성을 뜻하는 현대 영지주의적 영성을 뜻하는 분위기가 다분히 있습니다.

실제로 영성훈련에 나름 내노라고 하는 이름있는 분들, 영성사역에 일가견이 있다고 광고가 등장하시는 분이나 그런 교회들을 보면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경향들이 제대로 된 영성사역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에 부흥사들이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요. 일부 긍정적인 영향도 없진 않지만 '영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교계 전반에 심어주었다는 부정적인 영향도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영성회복훈련을 해 보면서 느끼는 것도 더욱 더 그렇습니다.

영성회복훈련을 했는데 교회 안에서 덕을 세우고 유익을 끼치는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한 부작용을 보기도 했고요.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균형감각]에 대해서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균형잡힌 그리스도인], 혹은 [균형잡힌 교회와 목회]를 언급할 때 늘 참조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요구하시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정의justice이고, 둘째, 긍휼mercy이고, 셋째, 영성faithfulness or spirituality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요지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른 바 '영성'이 아주 중요하지만 그러나 영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에 올인all-in하는 '영성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많은 분들이 '영성주의자'를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대착각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이 영적인 그리스도인, 영성이 회복된 그리스도인이란 '온전한 삶, 균형잡힌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흔히 영성사역을 하시는 분들과 그분들의 교회를 보면 기도와 치유 등에는 관심이 많은 반면 사회정의나 빈민구제사역같은 데에는 소홀히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반면 몇몇 기독교 단체를 보면 사회정의나 영성 같은데 소홀히 하기도 합니다. 단체야 그 설립취지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더라도 교회는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영성회복학교에 들어오셔서 모든 메시지를 다 읽고 은혜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오늘 이 글을 읽지 않으셨다면 미안하게도 수료증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영성이 중요하지만 영성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이 엄청 중요한 것이고, 이에 대한 메시지가 중요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회의 약자가 억울함을 당하고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침묵하는 등 불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그들에 대한 긍휼로 실제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이 없다면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순전히 위선이요 거짓인 것입니다. 그들이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주장하는 말은 자기 만족이요 자기 의self-righteousness 이므로 굉장하다고 생각해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정의justice가 우선입니다. 정의가 실현되도록 그리스도인이 힘쓰는 것이 가장 먼저 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일(정의구현)에 힘쓰는 많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는데요.. 불의에 눈과 귀를 닫은 교회, 정의실천에 관심이 없는 교회, 오로지 영성에만 '올인'하는 교회, 영성에 치우치는 것을 영적이라고 자부하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정의의 실현은 부조리로 가득 찬 이 세상의 구조상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정의를 온전히 구현하는 것realization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불가능할 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정의를 행하는 것practice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를 실현realize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천practice하라고 하십니다. 불의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항하여 무엇인가 행동에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부조리한 세상에 실현한느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정의를 행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긍휼을 베푸는 일에 '올인'하는 것도 또한 아닙니다. 그러나 긍휼사역은 정의사역의 보완이지 대안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을 '사회주의자'니 '좌경화'니 색깔을 입혀서 부정하고 구제사역에 올인하는 "미국식 근본주의"에 많은 한국교회가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목회자가 세상의 불의에 대해 행동에 옮기자 라고 설교한다면 분명 '빨갱이'가 아닌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회의 불의, 세상의 불의에 교회가 침묵함으로써 많은 젊은이들을 안티 기독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는 것을 오늘날 교회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해 눈과 귀를 닫은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실천을 교회가 회복해야 할 중요한 사역이자 사명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정의를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교회 자체적으로 컨퍼런스나 말씀세미나를 열어야 합니다. 교회들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정의를 행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긍휼을 행하는 일에 조금씩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인간의 힘만으로 하려 하거나 또는 그러한 노력들을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인간의 모든 의와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자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면서 해나간다면 사회변혁은 그리 어려운 과업은 결코 아닙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 '토지문제를 위한 기독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사회적 불의에 대한 기타 세미나를 개최하려고 한다면 반발이 클 것입니다. 서서히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교육과 말씀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몇몇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지라도 시도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저는 서울에서 청년부사역을 하던 강도사 시절 때부터 토지문제나 사회정의문제 등에 대해 특강이나 세미나를 열려고 노력했습니다. 수련회 때에는 토지문제에 관련하여 강사를 초청하여 특강시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다들 지루해 하고 졸고 할지라도 저는 그러한 시도 자체가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의에만 힘쓰는 사람은 긍휼mercy이 부족할 수 있지요. 불의와 맞서 싸우다보면 사람이 공격적이기 쉽고 냉소적이기 쉽지요. 정의를 행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구제하는 일 또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에 집중하는 것 또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지요. 불의를 보면서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과제입니다. 불의를 보면 하나님께 원망스러운 마음을 갖게 될테니까요. 그러나 불의에 침묵하면 안 됩니다. 불의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구제사역에만 집중하는 것도 일종의 도피입니다. 사회에 만연한 불의를 보면서 침묵하는 교회를 보며 낙담하여 교회를 버리고 신앙을 버리는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젊은이들 탓을 하기전에 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은 교회가 젊은이들을 그렇게 내몰았습니다. 교회는 이제 안티 기독교로 돌아서는 다음 세대를 감동시켜야 합니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구한말 일본의 불의한 압제에 대항하여 교회가 저항할 때 유능한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지 않았던가요? 그러나 지금 교회는 다음 세대를 책임 질 젊은이들을 안티 기독교로 만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자를 사랑하는 것loving mercy이란 긍휼을 베푸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긍휼은 그가 나와 같이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그가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니다. 그러니까 긍휼은 인류애, 인간human being에 대한 동정sympathy에서 시작하는 베풂serving 행위인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긍휼사역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정의사역 다음으로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완이지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서울의 어느 큰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많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분인데 구제사역을 보완이 아닌 대안으로 제시를 한 적이 있어서 제가 미국식 근본주의를 엿보는 것 같아 씁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정의와 긍휼로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역시 정의를 행하고 긍휼을 행하는 것의 대안alternative이 아니라 보완complement여야 합니다.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겸손해져야 하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 이외에는 모든 자랑과 의를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나름 정의를 행하고 있다는 것, 불의에 대해 나름 분노하고 있다는 것, 어려움에 처한 가련한 이들을 위해 나름 봉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모든 자부심과 긍지를 하나님 앞에서는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정의와 긍휼을 행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정의와 긍휼을 행하는 지속적인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진정한 영성사역이라고 부릅니다. 정의사역, 긍휼사역, 영성사역은 교회가 함께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역입니다.

 

예수님은 마태23:23에서 미가서를 인용하시면서 이 세가지를 율법의 본질, 율법의 정신이라고 소개하시면서 '의' '인' '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율법의 형식만 강조한 나머지 율법의 정신을 버렸다고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형식을 가지고 논쟁하고 씨름하다보면 본질과 정신을 놓치기 쉽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유럽의 더 중한 바 the more important matters of the law 정의justice 와 긍휼mercy과 믿음faithfulness은 저버렸도다neglected.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practice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not neglect 할지니라."

 

제가 영성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올렸지만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정 온전한 회복은 의, 인, 그리고 신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역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대다수는 영성사역에 관심이 많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온갖 예배와 모임 등은 영성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정의사역을 힘쓰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지요..그리고 정의사역과 긍휼사역(구제사역)과 영성사역..이렇게 세 가지 사역이 서로 조화를이루는 그런 교회를 찾기란 정말이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제가 수원에서 담임목회할 때였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는 작은 상가교회였는데 맞은 편의 큰 교회가 있어서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여러 위원회가 있었는데 주목할 것은 사회분과가 있어서 토지문제와 같은 사회문제 등에 대해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사회위원회가 주최를 하는 예배시간에 그에 맞는 강사를 초빙하여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긍휼사역을 잘 하는 교회도 찾아보면 많이 있지요. 예전에 감자탕 교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 멋진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큰 교회가 월 잔액을 100만원만 남기고 다 구제사역에 쓴다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또 세계 어디든 재난을 당하여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곳이라면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봉사단을 즉시 구성하여 구제품을 가득 싣고서 즉시 달려갑니다. 정말이지 인자를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그 목사님이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저 책으로 읽어 알았을 뿐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파송될 때에도 저를 파송한 단체에서는 저를 선교사라는 명칭보다는 '기아봉사단원'이란 이름으로 파송했답니다. 물론 그 단체는 저와 같이 목회자 훈련사역을 위해 말씀사역에 집중하는 일도 넓은 차원에서의 기아봉사사역으로 인정해주고 있지요.

 

제가 서울에서 부목사로 오래 섬겼던 어느 교회는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중고등학교에 차별없이 전달하는 장학금만 수 억이었고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에게 매주 반찬을 만들어 전달하는 일도 활성화되었지요. 이러한 사역들은 모두 긍휼사역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 선행을 많이 행하면 나중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에도 훨씬 수월해지는 것입니다. 지역사회에 전도지를 가지고 전도하다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지를 볼 수 있지요? 그들의 반응을 보면 그 지역사회에 속한 교회가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지요. 사람들이 차갑게 반응하고 전도지를 거절한다고 그들의 완고함을 비난만 할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무조건 씨를 뿌린다고 다 30, 60, 100배로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잘 기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영성회복에 대한 메시지가 중요하고 또한 영성에 관한 매우 실제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지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재삼 재사 강조하면서 제가 제안드리고자 하는 바는 교리훈련과 변증훈련 등을 함께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영성회복메시지를 적용하려고 한다면 개인의 차원에서 적용하는데 그치지 말고 교회가 정의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긍휼사역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지 '균형잡힌 교회사역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서 준비하면 어떨까 제안해봅니다. 교회 안에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젊은 집사님들과 청년들이 분명 있을테니 그들을 중심으로 '사회위원회'를 구성하면 어떨까요? 선교위원회가 있는 교회는 많아도 사회위원회가 있는 교회는 아마 많지 않을 겁니다. 교회는 그런식으로 정의를 행하는 일에 조금씩 실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식으로 안티 기독교로 돌아선 '의식있는 청년들'을 교회 안으로 다시 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격려받고 위로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최고"라고 자랑할 것입니다. 지상교회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고 조금씩 실천하려고 몸부림치는 모습만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안티 기독교라 자처하는 젊은이들을 다시 감동시킬 것입니다.

 

영성회복학교를 졸업하면 자신이 영적으로 꽤 뛰어난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회복의 메시지를 들었을뿐인데 회복한 것처럼 생각이 들지요..

제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주 야간 제자훈련학교를 섬겨보았는데요..6개월에 걸친 훈련학교를 수료하면 나름 영성이 충만한 것처럼, 나름 영적으로회복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을 가르치려 들게 되지요. 가르치는 사역은 귀하고 거룩한 사역이지만 가르치려는 태도는 아주 나쁜 것입니다.

영적회복에 대한 메시지에 의해 새로운 변화를 감지함에 따라 흥분하게 되고, 새롭게 알게 된 경건의 지식에 우쭐한 기분도 들 것입니다. 그럴 때 제가 방금 올린 이 글이 꼭 필요합니다. 균형에 대한 제 글은 자신을 추스리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균형에 더하여 겸손이란 성품도 중요합니다.

겸손해져야만 영성회복이 진정으로 완성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는 속성이 있지요. 제 경험에 의하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제일 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DTS를 은혜중에 수료했을 때가 또한 제일 교만했고요. 지식은 우쭐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배울수록 자기절제self-control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나쁜 것을 참는 것이고 절제는 좋은 것을 참는 성품이라고 예전에 말씀드렸지요. 남을 가르치고 싶을 때 일단 참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지식을 남과 나누고 싶을 때 일단 참아보는 것입니다. 지금 배운대로 당장 가르치는 것보다는, 지금 내가 정의를 실천하고, 긍휼을 실천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을 행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회복을 위해 올바른 지식이 필요하지만 지식만으로 당장 회복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메시지는 회복을 시작하게 돕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회복이 일어나려면 오랜 세월 동안 반복연습이 필요하고 때론 시행착오도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영성회복학교에 '올인'하지 마십시오.

하나에 올인하는 것보다 여러가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굳이 비유로 말하자면..

영성회복학교에서 전한 메시지는 성도의 살과 같고,

변증설교는 성도에게 옷을 입히는 것과 같고,

교리설교는 성도에게 뼈와 같고,

복음설교는 성도에게 뜨거운 피가 흐르게 하는 심장과 같습니다.

 

그리고 정의사역과 긍휼사역은 그리스도인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마당을 깔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영성이 회복되어도 뛰어놀 마당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 메시지를 다 이해하고 적용한다 할지라도 정의와 긍휼로써 세상에 영향impact을 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개인의 회복에서 더 나아가 교회의 회복에까지 연결되고,

사회의 회복, 땅끝의 회복까지 연결되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런 나라가 될 때까지 회복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한 것입니다(엡1:10).

 

그래서 교회가 영성사역에 집중하고, 개인이 영성회복을 간절히 사모할 때에 어느 한쪽만을 강조함으로써 치우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영성회복만을 외치고 불의한 세상, 죽어가는 세상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리만을 강조한다면 뼈대만 앙상한 해골과 같은 섬뜩한 모습만 남게 될 것이 아닙니까? 교리가 중요하지만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를 보면 해골같은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영성회복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훈련학교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수료한다 할지라도 영성회복에만 치우치면 뼈도 없고 단지 살만 흐물거리는 문어가 연상됩니다. 영성회복학교가 중요하지만 이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교리설교도 필요하고, 변증설교도, 복음설교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균형감각sense of balance은 모든 지도자들에게, 모든 건강한 교회들에게 필수적인 지식입니다.

   

 

 

이상 영성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일단락하겠습니다.

이후에는 보충강의를 올릴까 계획중입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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