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회복학교

회복(50)-위탁

등불지기 2012. 3. 10. 22:46

 

 

제가 YWAM에서 간사로 섬길 때 처음 듣는 용어 중에 하나가 위탁이란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YWAM과 상관없이 선교사로서 아프리카 현지인 지도자를 말씀과 신학으로 섬기고 있지만

위탁에 대해 들었던 메시지는 아직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충성, 그리고 위탁은 신실한 리더로 쓰임받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속 정치인이라도 위탁은 중요한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자, 함께 배워볼까요?

김광락 선교사 올림.

 

위 탁

 

본문: 삼하9:1-8

 

영성회복훈련(DTS훈련)은 관계훈련입니다. 관계는 관과 같습니다. 관이 깨끗하면 깨끗한 물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관이 더러우면 생수라도 더러운 물이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관이 막혀 있다면 저수지의 맑은 물이 필요한 논밭으로 흘러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생수의 근원에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수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통해 흘러오고 나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를 점검해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주 근본적인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DTS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묵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예배, 중보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등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관계는 나와 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할지라도 나와 나의 관계가 바로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수가 나에게 온전히 흘러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와 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 에 대한 것입니다. 나의 신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인 것입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내적치유, 다림줄, 정체성, 사고방식, 세계관 등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속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건강합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얼마나 일치한다고 확신합니까? 여러분의 속사람은 편견이나 온갖 상처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깨어진 바이올린으로 명곡을 연주할 수 없듯이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고서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거나 이웃과 교회를 건강하게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관계는 나와 원수 마귀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터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원수들에게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적극적으로 원수의 전략을 알고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었던 주제는 영적 전쟁과 영적 전투란 주제였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관계는 나와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운명으로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것을 다스리는 청지기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원리 원칙들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선교, 재정, 청지기직, 등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알아 가면 갈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원칙들을 많이 알아 가면 갈수록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더 많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DTS 훈련의 목적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데서 출발하여 속사람이 건강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원수들과 영적 전쟁을 벌일 줄 알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며 정복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가도록 돕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듣고 배운 말씀을 흘려보내지 않았다면, 주께로부터 온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여러분을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치유하며 다스리며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강조하고 DTS 설교를 마무리하고 싶은 영역이 바로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영역입니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넘어가기 쉬운 영역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관계 5가지를 살펴보았지만 좁은 의미에서 관계란 나와 너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왜냐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3-26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주신 다음에 강조하신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점검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라.”(마6:14,15) 그래서 사도 요한도 말합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2:9-1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이처럼 나와 너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하는가? 언약으로 맺어진 부부관계처럼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결혼반지를 끼는 것은 언약의 상징입니다.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언약입니다. 계약결혼은 불행하지만 언약에 의한 결혼은 축복입니다. 이 언약에 근거해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우리에게 나와 너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 질 잘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언약을 맺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정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사울왕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본 요나단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더불어 언약을 맺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18:1-4) 제가 오늘 설교제목을 ‘위탁’이라고 했습니다. 위탁이란 말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다윗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요나단에게 맡겼습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겉옷은 신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칼과 활과 띠를 주었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맡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에게 위탁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날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친밀한 관계와 같이 서로 사라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그래서 다윗은 훗날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게 되었을 때 매우 슬퍼하게 됩니다. 위탁된 관계에서 한 쪽이 고통이나 상처를 받게 될 때 다른 한 쪽은 같은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을 단지 슬퍼할 뿐만 아니라 요나단의 아들은 미비보셋을 자기 아들들의 반열에 두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을 찾은 것은 요나단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의 가문은 다윗에게는 원수이었습니다. 늘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다윗을 추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힘은 오직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가 다윗과 요나단과 같이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 서로에게 위탁된 관계가 되기를 주님이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찾았을 때 므비보셋의 나이가 17세나 19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므비보셋이 거한 곳은 로드발 암미엘의 집이었습니다.(4절) ‘로드발’이란 곳은 ‘풀이 없는 곳’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 아무도 거하려고 하지 않은 외딴 곳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므비보셋은 어릴 적 왕궁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목숨을 위해 황폐한 곳에 숨어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이 이제 와서 사울의 후손을 찾으려는 이유는 자신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가문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고대 왕들은 반역의 씨앗을 제거하는 데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어느 나라는 3족을 멸하였고, 어느 나라는 반역자의 씨앗은 9족을 멸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가문의 마지막 남은 후손을 찾은 것이 반역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므비보셋은 다윗을 만날 때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은 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전혀 반역의 의사도 없으며 반역의 능력도 없으며 또 자신을 죽일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실 때,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우리는 므비보셋과 같이 느낄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걸까?” “하나님, 저는 죽은 개와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죽은 개’와 다를 바가 없는 므비보셋을 자기 아들들의 반열에 놓기를 원했습니다. 왕자의 신분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왕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은 개’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 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언약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기까지 충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언약과 위탁의 관계는 아주 밀접합니다. 서로 언약을 맺지 않고 관계할 수 있지만 그것은 ‘위탁된 관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위탁된 관계란 언약을 통해 맺어진 관계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와 같이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를 여호수아서 9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 중에서 기브온 족속이 있었습니다. 기브온 족속은 매우 큰 족속이었지만 자신들이 이스라엘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방법을 사용하면서까지 이스라엘과 화친언약을 맺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에게 속아서 서로 언약을 맺게 됩니다. 여호수아서 9장 1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언약은 둘로 가른 동물 사이를 두고 맹세를 함으로 맺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동물처럼 심판하여도 죄가 아니라는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위장에 속아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거룩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가나안 족속들이 기브온을 괘심하게 여겨서 기브온을 치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을 위해서 가나안의 큰 연합군과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브온은 가나안 족속이고 이스라엘의 종이기 때문에 기브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가?”라고 말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기브온이 곤경에 처했을 때 기브온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주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거룩한 언약을 위반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연합군과 싸울 것을 결정했고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은 언약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훗날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사울은 민족주의 정책을 따라 기브온 거민을 학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언약을 어기면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큰 재앙이 닥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브온 거민들에게 용서를 구했을 때 기브온 거민들은 사울의 후손들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은 므비보셋은 아끼고 기브온 거민에게 내어주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 역시 다윗이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청구하는 영역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보호를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는 사람은 사단이 결코 건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21장 6, 7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여러분, 언약의 중요성에 대해서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언약에는 축복의 기능도 있고, 저주의 기능도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녹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상하고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보혈을 의지하여 다시 나아가면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요 복음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기브온 거민들이 다 내어달라고 요구했을 때 므비보셋은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요? 사단이 우리를 정죄하며 내어달라고 청구할 때 우리 마음은 얼마나 조마조마할까요?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또 하나의 언약을 봅시다. 룻기 1장을 보세요. 룻은 모압여인입니다. 모압사람은 율법에 의하면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모압 사람 룻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모압 여인 룻이 어떻게 해서 다윗왕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그것이 가능한 것은 룻이 언약에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와의 관계에 언약을 두고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시모인 나오미에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신을 위탁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두고 시모인 나오미와의 관계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 언약을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룻기 1장 16, 1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자신을 시모인 나오미에게 위탁했습니다. 언약을 두고 나오미에게 자신을 맡겼습니다. 위탁은 충성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탁 때문에 모압 여인 룻은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룻의 고백에서 ‘어머니’란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란 곳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고백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과 맺은 나의 언약이 되기를 원합니다. 룻이 어머니에게 위탁되어 있는 이 언약을 통해 다윗왕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언약에 충성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유다지파를 선택하셨을까 생각해보셨습니까? 시편 78편 9절을 봅시다. “에브라임(=요셉)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하나님은 이 에브라임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78편 67, 68절에,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충성스럽게 양들을 돌보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맡기셨습니다. 아비인 이새는 몇 명의 양들을 다윗에게 맡겼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맡기셨습니다. 다윗이 아버지의 양들을 지키고 있었을 때 그 모든 형들을 아버지와 함께 잔치자리에 있었습니다. 충성은 작은 것 앞에서도 큰 것을 맡은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불평하지 않고 충성할 때 하나님은 큰 것을 맡기십니다. 세상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볼지라도 하나님은 큰 것을 맡길 수 있는지 작은 것으로 우리를 저울질하십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는 매우 큰 지파요 힘이 있는 지파였지만 위기의 날에 물러갔습니다. 자기 몸을 사린 것입니다. 위탁된 관계에 헌신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위탁이 없었던 에브라임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언약에 충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언약을 두고 위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에 이러한 언약이 있습니까? 나와 너의 관계 안에 이러한 소금이 있습니까? 므비보셋은 “절뚝발이”였습니다. 원래 다윗은 절뚝발이를 혐오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다윗은 절뚝발이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무엘하 5장에 보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예루살렘에 살던 여부스 사람들이 절뚝발이라고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날부터 절뚝발이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삼하5:8)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이 얼마나 강했으면 속담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므비보셋이었지만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자기 왕자들의 반열에 두었슶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와 너의 관계에 있어야 할 은혜입니다. 나의 ‘므비보셋’이 누구입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특별히 싫어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그런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에 언약이 있습니까? 나와 너의 관계 사이에 소금이 있습니까? 소금을 두고 관계합시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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