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그러니까 제가 신대원 2학년 시절에 써두었던 소논문을 요약해서 올립니다.
성경을 더 깊이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풍랑 기사에 나타난 예수님의 책망 비교 연구
I. 들어가는 말
공관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각 저자들은 그 사건을 각기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말씀을 집중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 말씀은 세 복음서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Mk.4:40--"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2)Mt.8:26--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Lk.8:25--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마태는 믿음이 "적은 것"에 대하여, 마가는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하여, 누가는 믿음이 "어디 있는 가"에 대하여,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셨다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같은 사건인데 다르게 표현한 까닭이 무엇일까? 무엇이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게 했을까? 각각의 표현들에는 어떤 다른 의미들이 내표되어 있을까? 필자는 먼저 각 표현들이 지닌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일차적으로 전후 문맥을 검토하고자 한다. 여기서 해석상 많은 논란이 되는 역사적 시대 배경을 이차적으로 언급함으로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II. 문맥을 통하여 나타난 저자의 편집의도
A. 마가의 문맥:
마가의 경우 4장 1절에서부터 풍랑기사 직전까지 줄곧 하나님 나라 비유에 관한 말씀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마가의 이 풍랑기사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을 예수께서 직접 행위로써 확증해보이셨다는 의미가 된다. 제자들은 충만한 신성을 가진 창조주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시러 오신 예수님의 실체와 능력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5장 43절까지 보면 계속하여 귀신들린 자, 그리고 사망을 극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이 세 가지 기사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력을 심판하시는 창조주의 주권과 통치를 예증하기위해 마가에 의해 하나로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B. 마태의 문맥:
마태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호수를 건너가기를 명하신 후 제자도(discipleship)을 강조하는 두 사건을 삽입한다. 이것은 마태가 단순한 설화의 전달자가 아니라 해석자임을 보여준다. 즉, 마태는 제자들이 폭풍 가운데서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며 예수님이 그 폭풍을 잔잔케 하신 그 기사를 제자훈련 혹은 제자도와 관련시켜 해석한 최초의 신학자라 할 수 있다. 마태는 여기서 예수님이 폭풍과 같은 상황 속에서 그의 제자들이 마땅히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다루시고 있다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태가 마가나 누가의 순서를 의도적으로 바꾸었으며 또,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라는 교훈을 새로이 첨가했다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 만큼 예수님의 행동의 역사적 선포보다는 믿음의 성격에 대한 메세지가 마가에 있어서는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C.누가의 문맥:
누가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비유와 풍랑기사 사이에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누군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삽입하고 있다. 그것은 마가복음서에 는 하나님 나라 비유 직전에 나온다. 마가의 기사가 하나님 나라의 행위적 선포 라는 긴장된 분위기라면 누가의 시기는 이미 역사적으로 종말론적 위기가 약해진 때이었었고 또 교회의 헬라 선교적 관점에서 그런 긴장감은 다소 누그러뜨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오히려 마가의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긴장보다는 주님의 모친과 형제 즉, 예수님과의 관계성 속에 자신의 풍랑기사를 이해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III. 예수님의 책망의 의미
A. 마가의 "믿음이 없느냐"
마가는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도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나(예수님)의 권세의 비밀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4장 11, 34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비밀에 대한 어떤 통찰력을 얻었으며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제자들과, 그 비밀을 단지 수수께끼로 이해한 군중들과 사실상 똑같이 여전하게 눈먼(blind) 상태에 있으며 오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그것을 확증해 보이시는 창조주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능력의 과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적인 계시(epiphany)였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강력한 위험 속에서 하나님 아들이신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마가에 있어 마태와 누가보다 심각할 정도로 비판적인 표현으로 나타났어야 했는가? 그 이유로서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복 수 있는데 첫째로, 가장 그럴듯한 이유로서, 마가의 배후에 베드로의 뼈아픈 실패의 경험이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마가의 신학은 사실 베드로의 경험이 그 바탕이 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열정적으로 따른 수제자였으나 십자가 직전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베드로는 오순절이후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체험하지 않은 신앙은 참 믿음이 아님을 많이 설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었지만 십자가 이전 까지는 진실로 그것을 깨닫고 믿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가능성은 논쟁점이 되는 문제인데 이 마가의 비난조의 책망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특히 성전 파괴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다. AD 70 년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그 때까지 성전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왔던 많은 로마의 유대계 교회 지도자들이 신앙적인 회의에 빠졌다. 제자들의 원망조는 그러한 낙심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시려 오신 예수님은 성전 중심이 아니라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셨으며 그 백성에게 배척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마가는 예수님의 책망을 위의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마가공동체에 동일시하여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날카로운 책망은 마가복음에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중의 처음이다.
B.마태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첫째 마태는 제자도에 대해서 말한다. 마태는 마가의 순서를 바꾸는데 그 목적은 믿음의 성격에 관한 교훈을 먼저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 교훈은 풍랑 과 같은 상황 속에서 제자는 마땅히 믿음으로 내적 두려움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은 가졌지만 내적 두려움을 다스리는 큰 믿음은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적 두려움을 다스릴 때 비로소 큰 믿음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가능성으로 그 풍랑과 같은 상황은 마태 공동체에서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교회의 파괴로 말미암아 팔레스틴 지역 교회 내에서 야기된 두려움 내지 혼돈 상태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그 혼돈 상태를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교회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믿음은 진정한 율법의 해석자이시며 약속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여전히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심을 바라보는 것이다.
C.누가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는 마가와는 달리 제자들의 무력감에 반대되는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런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라는 말은 제자들의 믿음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럴 때, 마태의 '적다'는 것과 '어디 있는가'의 표현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분명히 히브리적 사유와 헬라적 사유의 차이일 것이다. 마태는 유대인, 누가는 이방인이었다. 크기 개념에 관한 한 히브리적 사고방식은 동적이며 질적인 크기이며 헬라적 사고방식은 공관적이며 양적이다. 즉, 히브리인은 이미 주어진 전체 속에서 헬라인은 개체적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누가 역시 믿음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책망은 믿음을 다시 찾아야한다 는 것이다. 그것은 책망이기 보다는 오히려 권유에 가깝다. 그 권유는 어떤 제자 공동체를 향한 것이기 보다 이방 선교적인 목적이 있다. 이제 세상 속에 놓인 교회는 이방 선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근본적인 해결의 열쇠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모든 악한 세력의 위협을 극복하는 것은 인간 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인간은 무기력할 뿐이다. 예수님은 홀로 강하시다. 사람들은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IV. 맺는 말
결국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또는 믿음의 본질)에 있어 주님 자신의 고난이 핵심이며 따라서 그 고난에 다다르기 까지는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믿음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또 마태는 내적 두려움을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이겨야 하는 제자도를, 누가는 모든 악의 세력은 극복하는데 있어 인간 자신의 힘이 아니라 모든 문제 해결의 근본 열쇠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 풍랑과 같은 상황, 그리고 악의 세력 들은 각 저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었는가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들에 대한 유일한 답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메시지의 약간의 차이는 예수님이 각각 다르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본래 말씀을 진정으로 제각기 다른 청중 에게 바르게 전하려고 하는 저자들의 신앙과 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자의 고유한 인격을 성경영감에 그대로 사용하시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마가는 베드로에게 영향을 받았고, 마태는 예수님께 직접 부름받은 제자였고, 누가는 바울 선교사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마태는 유대인, 마가는 그레코로만 문화 속에 사역한 유대인, 누가는 안디옥 출신 이방인으로서 신실한 복음의 전승자였다. 그러나 각 메시지들은 모두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전하려하는 신앙의 본질 면에서 서로 나눌 수 없다. 저자의 고유한 인격, 신학, 신앙, 그리고 제각기 다른 공동체의 상황 등이 전혀 무시되지 않음으로 각 메시지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생동감 있게 되며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V.요약 도표
마가복음 |
마태복음 |
누가복음 | |
메시지 배경 |
베드로의 고난신학 |
마태의 제자도 |
사도바울의 선교신학 |
믿음의 정의 |
주님의 고난에 대한 진정한 이해 |
임마누엘 신앙으로 극복하는 적극적 자세 |
악에 대한 대산 승리는 오직 주께 있음을 인식함 |
메시지 핵심 |
진정한 고난 이해 |
적극적 제자 정신 |
문제 해결의 원천 |
공동체 상황 |
고난에 대한 몰이해와 그에 따른 원망 |
환경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사로잡힘 |
인간의 힘으로만 악과 대처하려 함 |
기 타 |
고난의 도리 |
제자의 도리 |
선교의 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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