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이신칭의 교리의 의미와 중요성

등불지기 2012. 3. 21. 22:48

 

 

이신칭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중에서 핵심적인 교리입니다.

의외로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 교리를 오해하고 있거나 혹은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이번에는 모든 교리 중에 으뜸 교리인 이신칭의에 대해 한번 제대로 배워보는 것이 어떨까요?

예전에 종교개혁기념주일 세미나에서 강의했던 강의안입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훈련이라 생각하고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이신칭의 교리의 의미와 중요성

 

                                                                                                김 광 락 목사

 

 

 

  I. 들어가는 말

 

 

  II. 본론

 

     1. 칭의교리에 대한 복음적 프로테스탄트(개혁주의)의 견해

 

     2. 칭의교리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견해

 

     3. 칭의의 성경적 개념을 로마 카톨릭이 오해하게 된 원인

 

     4. 칭의교리에 대한 17,18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입장변화

 

     5. 칭의교리에 대한 타협

 

     6. 칭의교리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의 흐름

 

     7. 믿음과 행위의 관계

 

     8. 이신칭의 교리의 요약

 

     9. 이신칭의 교리의 현대적 의의

 

    10. 이신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삶

 

 

  III. 맺는 말

 

 

 

I. 들어가는 말

 

 

어떻게 죄인인 나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수 있는가? 자신의 불의함을 아는 자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교리가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only by faith)이다. 그러므로 이신칭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복음의 핵심중의 핵심이다. 이 시간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의 분명한 뜻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이신칭의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 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이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시작하자. 이신칭의란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으로 엄밀히 말하면 ‘이유신칭의(以唯信稱義)’ 즉,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해야 한다. 왜냐면 카톨릭도 ‘이신칭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루터가 “오직”이라는 말을 자신의 책에서 삭제했더라면 파문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이신칭의 교리가 개혁교회가 목숨 걸고 붙잡고 또 가르치고 선포해야 할 복음의 진수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신칭의’ 교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실천적 삶에 대해 간과하게 될 인간적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이신칭의’ 교리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이신칭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개신교와 천주교가 ‘오직 믿음’이란 이 단어를 사이에 두고 다시는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카톨릭은 ‘이신칭의’에 있어서 결코 만나지 못할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왜냐면 개혁자들의 신학이 파장을 일으키자 카톨릭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공식적으로 정죄 했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칭의의 은총을 얻는 일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협력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거든 누구든지 파문케 하라” 그러므로 분명히 이 교리는 개신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사안이 틀림없다. 루터는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일이 달린, 즉, 존립의 문제를 결정짓는 교리라고 했다. 루터는 1538년 시편130편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이 조항이 바르게 서 있다면 교회가 서는 것이고, 만일 그것이 타락한다면 교회 역시 타락하는 것이다” 칼빈 역시 “만일 이 교리의 순전성이 조금이라도 손상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것이며 파멸의 벼랑으로 몰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으며 “이 교리의 지식이 사라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소멸되며 종교는 폐지되고, 교회는 파멸에 이르며,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칭의 교리는 분명 기독교를 지지하는 주요 근거이다. 그래서 이 교리에 더욱 주의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디이며 하나님이 당신에게 내리시는 심판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면 당신의 구원을 떠받치거나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토대를 전혀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1556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화형 당한 영국의 개혁자 크랜머(Cranmer)는 “칭의는 기독교회의 강력한 반석의 기초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저자들이 인정한 교리였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잘 나타내는 교리이며, 헛된 인간의 영광을 경멸하는 교리이며, 이 교리를 부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며,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적자가 되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장식하는 자가 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존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이 복음이 위기에 처한 것은 칭의 교리와 관계되고 있다고 했다. 패커는 이신칭의 교리를 ‘거인 아틀라스’에 비유했다. 즉, 이신칭의는 구원의 은혜에 대한 전체 복음주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어깨라는 것이다. 어깨가 무너지면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물론 이신칭의가 신자의 삶에 전부가 아니지만, 신자의 삶에 기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는 16세기 교회사를 볼 때 종교개혁의 불씨는 다름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가 바르게 이해했을 때 비로소 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은 교회의 존립 여부를 결정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일어서게 하거나 혹은 넘어지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칭의가 분명 개신교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개신교의 정체성이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신학계, 그리고 교회와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무의미하고 건조하며 교조주의자들이나 추구하는 딱딱한 교리’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현대적인 흐름에 있어서 어쩌면 불필요한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신학교와 교회 강단에서는 더 이상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이나 설교는 희미해지고 있으며,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현대의 다원주의와 초 교파적 교류의 흐름과 관련하여 더 이상 이런 예민한 사안들을 언급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혹은 ‘화목’과 ‘통일’을 위해서 개혁자들의 노선을 스스로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순수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러한 흐름은 분명 사도 바울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던 그 저주를 스스로 자청하고 있는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협력과 선교의 명분 아래 복음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면 누구나 파문하기로 결정한 로마 카톨릭의 태도와 반응은 1546년 이후 지금까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변화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퇴보하거나 양보하는 쪽으로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만약 이신칭의 교리가 복음의 핵심이고 본질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며,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크게 잘못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이며, 복음의 본질이라면 개신교회가 스스로 다른 복음과 타협하고 있으며 스스로 저주를 자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이 교리를 선명하게 설명하고 재 천명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복음이 없으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온갖 미신으로 가득 찬 종교 집단으로 전락한다.

 

 

자,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는가? 로마 카톨릭의 주장과 개혁자들의 주장이 서로 극명하게 대치되고 있는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 서로의 주장을 비교하면서 어느 주장이 더 성경적인지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신칭의 교리가 루터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바울이 전한 것이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만일 이신칭의 교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본질적인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면 로마 카톨릭과 종교개혁 둘 중에 하나는 잘못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신칭의 교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 교리를 오해, 혹은 잘못 적용하거나, 혹은 인간적인 오용 가능성 때문에 수정한 자들에게 무지에 대한 책임을 돌려야 할 것이다. 본인은 논쟁을 피하는 것만이 점잖고 예의바른 것이라는 생각에 도전하고싶다. 진리를 수호하고 사수하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정면 돌파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은 허울좋은 교리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과 복락을 위한 일이며, 또한 동시에 우리 후대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중대한 목적을 위해서 본인은 이신칭의의 쟁점을 명확히 소개한 다음, 개념을 정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이 현대 교회에 매우 필요한 이유를 밝힐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맺어야 할 삶을 요구하고 있는 복된 교리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II. 본 론

 

 

먼저, 칭의교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카톨릭의 차이점을 서로 비교해보자.

 

 

(1)프로테스탄트

 

1. 칭의(稱義)는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로 이루어진다.

3.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받으실 만하게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시게 한다.

4.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신자를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7. 죄인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된다.

8.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마치 의인처럼 취급하게 하신다.

9. 신자는 대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드러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의 자리에 대신 서신 예수께서 의롭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다.

11. 칭의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심령에 중생과 성화(聖化)를 가져오게 하신다.

12. 죄는 칭의와 중생 후에도 인간의 본성에 여전히 남는다.

13. 신자는 하나님의 가능케 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선행에 대해서 어떠한 공덕도 주장할 수 없다. 선행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중보를 통해서만 받으실 만하며,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신자의 선행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류의 행함의 부족을 충족시킨다.

 

 

(2)로마 카톨릭

 

1. 칭의는 의롭다고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은혜의 유입(주입)으로 이루어진다.

3. 신자 속에 있는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4. 인간은 자신의 실질적인 의에 의해서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오직 중생한 자만을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중생 시키는 행위이다.

7. 죄인은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없고, 그의 심령 속에 부어진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있다.

8. 칭의는 죄인이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9. 신자는 은혜의 성령께서 신자를 의롭게 만드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실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11. 중생케 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롭게 하도록 한다.

12.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행을 행한다.

14.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서로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제는 사실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다.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근본 인식의 차이다. 진리는 그 성격성 두 가지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서술 역시 상호 충돌해서는 안 된다. 진리와 진리에 대한 서술 역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쪽의 진술을 버리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제 서로의 입장을 자세히 설명해보자.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카톨릭과 개신교의 교리적 차이점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각각의 상이한 주장이 서로 화해할 수는 없다. 분명 하나는 참된 복음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복음이다.

 

 

첫째,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칭의에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냐? 다른 행위가 필요한가?

 

둘째, 하나님의 의가 믿는 신자들에게 전가되는가 아니면 주입되는가?

 

 

1. 칭의교리에 대한 복음적 프로테스탄트의 견해

개혁자들은 새로운 교리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오래도록 말하고 있는 옛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1) 칭의(justification)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다.

칭의의 내용에는 죄용서 하심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imputation)하심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신분과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는 주입되거나 내재된 의가 아니라 ‘전가된 의’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증명되고 있다.

 

①“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동사는 법적 선언이다.

②구속이라는 단어는 ‘덮는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③칭의에 대한 그림언어로서 ‘옷’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창3, 눅15)

④범죄에 대한 결과로서 사람은 ‘헐벗음을 깨닫고 부끄러워’ 했다는 사실이다.

⑤그리스도의 옷입음(롬13:14)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전가된 의라는 것을 보여준다.

⑥언약의 대표성 원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 것을 입증한다.

⑦구약의 희생제사제도는 ‘전가의 원리’를 충분히 증명한다. (제물에게 안수함)

⑧고엘제도는 대속의 성격을 잘 설명하고 있다.

⑨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단번에 완성하셨기 때문에 ‘법정적 선언의 의미’는 성경적이다.

 

 

(2)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게 된 이 법적 위치는 완전히 그리스도 구속사역의 결과이다.

칭의는 우리의 의로운 어떤 행동(행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위임)되고,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고 의롭다고 선언된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은 일체의 허물도 없는 전혀 무죄한 분이지만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부끄러움과 욕을 친히 담당하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순결로 옷 입혀 주셨다”고 말했으며, 루터는 “주 예수여, 당신은 나의 의이시며, 나는 당신의 죄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 것을 당신 것으로 취하셨으며, 당신의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아닌 모습을 취하셨으며, 내게 나의 것이 아닌 당신의 모습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3)개혁자들은 또한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칭의의 근거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은총이다.

 

 

(4)개혁자들이 칭의에 있어서 선한 행위가 아무런 공헌을 할 수 없음을 강조했지만, 그들은 선행이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얼마나 중대한 것인 지를 잘 보여주었다.

즉, 신자들의 선한 행위는 공로적인 것이 아니라, 칭의의 결과적인 열매(증거)다. 그러한 행위는 결코 구원에 공헌하지 못하며, 심판의 날에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칼빈은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어느 하나라도 그 자체로 볼 때 공정한 보상으로서 수치를 받아야 할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평생 한 일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선한 일을 볼 때도 부패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신자들의 칭의 이후 선행에 의해 주어지는 상급조차 ‘공로’에 의한 보상이 아니라 은혜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 한 후에 단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5)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자신의 능력이나 확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데서 생겨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보는 카톨릭은 칭의의 근거 혹은 수단을 칭의를 얻으려는 인간 자신의 행위에 두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속임수’나 ‘경건치 못한 착각’이라고 여긴다.

 

 

2. 칭의교리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입장

지금의 로마카톨릭이 칭의교리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한 적이 있었는가? 16세기 이후로 한번도 없었다. 로마카톨릭이 16세기 트렌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의 선언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철회하거나 수정한 적이 없었다. 로마카톨릭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첫째, 그들은 ‘오직’(sola)이라는 단어를 빼버린다. “오직”이란 단어 때문에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개혁주의가 갈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톨릭은 ‘오직 믿음’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주장은 ‘창안된 교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얼마나 성경에 대해 무지한 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무식의 소치에 불과하다. 둘째, 그들은 칭의를 단회적/법정적 선언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으로 본다. 즉, 지금 즉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날에 선포될 마지막 선언에서 끝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부정함으로써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는 신자의 행위에 달린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지금 즉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셋째, 그들은 ‘오직 믿음’이란 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에게 저주와 파문을 선언했다. 구체적으로 칭의에 대한 그들의 교리는 다음과 같이 세부적으로 서술된다.

 

 

(1)로마카톨릭은 칭의가 죄인의 내성을 변하게 만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칭의 그 자체가 우리 내부에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칭의는 우리의 신분, 지위에 대한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행위다. 로마카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혼동함으로써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종교의 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2)트렌트 공의회는 신자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독립된 의’라고 루터가 칭했던 자신의 외부로부터 오는 그 의(the righteousness)에 기초하여 죄인이 의롭다고 선언되어지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정죄하였다.

그들은 칭의가 ‘전가된 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공로가 신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부인한다. 결과적으로 로마카톨릭은 신자의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의 충분함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와 선행의 중요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가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칭의에 충분하지 못하며 그 믿음에 ‘적절한 행위’가 더해져야만 비로소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공로가 죄인들에게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더욱 절망하게 하거나 혹은 자기 의지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의 입장이 전가된 의인데 반해서 카톨릭의 입장은 주입된 의를 강조한다. 그래서 ‘오직’이라는 말을 생략한다. 또한 ‘믿음에 의한’ 즉, 칭의의 수단으로서 믿음이 아니라 세례와 성사를 가르친다. 세례와 고해성사를 통해 의가 주입되고, 선행을 통해 의가 증가된다는 것이다. 카톨릭은 믿음은 칭의의 도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믿음과 칭의가 상실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분명 여기서 카톨릭은 칭의의 수단과 근거를 혼동하고 있으며, 믿음은 단지 출발에 불과하다고 가르침으로써 행위에 의한 구원이라는 다른 종교를 제시하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칭의가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내적으로 주입된다고 가르침으로서 칭의가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주입이 우리의 칭의를 즉각적으로 완성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와 고해성사를 통해 완성되어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트렌트 공의회에서 교회 법규 제 11조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해서나 단지 죄의 사면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거나 우리를 의롭다 하는 은혜만이 오직 하나님의 선한 뜻이라고 하면 그는 저주받을지니라”고 단정하고 있다. 신학적인 논제를 던졌던 개혁자들은 ‘오직 칭의’만이 하나님의 선한 뜻의 전부라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이러한 카톨릭의 결정과 공포를 보면서 분명 카톨릭은 바른 복음을 거부하고 있다고 단정하게 된 것이다. 칼빈은 카톨릭의 이런 공식적 결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의롭다 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지만 독자적인 믿음이 의롭다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땅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오직 태양의 열만은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태양열은 언제나 빛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생의 전체 은혜를 믿음과 떼어놓지 않지만 의당 의롭게 하는 능력과 기능을 전적으로 ‘오직 믿음’에게 돌린다. 그러나 이 트렌트 교부들은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저주하고 있다. 이 바울 덕택에 우리는 사람의 의가 죄 용서에 있다는 정의를 가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3)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는 협동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카톨릭 요리문답서(1994)는 칭의에 대한 믿음의 장소를 묘사할 때 트렌트 공의회와 보조를 같이 한다.

 

 

(4)로마카톨릭에서 칭의가 취득되는 참된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례성사를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칭의가 승인되는 통로와 수단은 세례성사를 통해서라고 주장한다. 칭의는 ‘세례 안에서 수여되는 것’이며, 세례는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합치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카톨릭의 영향력과 비중을 필수적인 것으로 내세운다. 즉, 그리스도의 자리를 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카톨릭 교회가 성사를 집행하는 주체이고, 또 성사가 칭의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라면 교회가 구원을 주는 주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시14:3) 고 말한다. 따라서 성사는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은혜의 보증이요 증거일 뿐 칭의에는 전혀 관여할 것이 없다.

 

 

(5)소위 ‘고해성사’라는 것이 칭의와 관계 있다고 주장한다.

카톨릭은 칭의의 도구(칭의를 얻는 수단)가 믿음이 아니라 ‘세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세례 이후에 파멸에 이르는 범죄를 행함으로 세례적 은혜를 상실한 자들을 위해 제정된 것으로서 고해성사는 그들로 하여금 회심하게 하며, 칭의의 은혜를 회복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고해는 회개하고 고백하며 죄를 용서받기 위해 로마카톨릭 사제에게 가야하며, 이것은 죄를 속하기 위해 사람이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카톨릭교회에 완전히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상태에 처하게 만들었다. 요리문답서는 “로마카톨릭교회와 화해하는 것은 곧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과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자리를 강탈하고 있다. 교회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죄인들에게 의의 복음을 전함으로 중매자가 될 수 있어도, 죄인들에게 의를 수여하는 중보자는 될 수 없다.

 

 

(6)요리문답서가 면죄부, 연옥, 그리고 공적(공로)의 보고(the treasury of merit)와 같은 다른 비성경적인 주제들에 대해 다루는 것 역시 고해라는 주제 아래서이다.

“공적(공로)의 보고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자치가 무한하며 심오하며 순결한 마리아의 선행과 기도들, 성자들의 기도와 선행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신자들 혹은 성자들의 선행이 공적으로 언급한 적이 한번도 없다. 개혁자들은 선행이 칭의의 열매(fruit)요 표지(signs)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톨릭 요리문답은 아직까지도 면죄부의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요리문답서, 331,333쪽 참조) 즉, 요리문답서가 말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적을 언급하지만 실제론 죄를 위한 충분한 만족이나 완전한 만족이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에서 선언한 것 중에 두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회개한 죄인은 칭의의 은총을 통해 죄책을 용서받게 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징벌에서 놓여 이 세상에서나 연옥에서 일시적인 처벌을 당할 필요 없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누구나 파문케 하라” “얻은 의를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보존하고 더욱 향상시켜 나갈 필요가 없고, 선행은 다만 얻은 의의 열매와 표적일 뿐 의를 향상시키는 행위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거든 누구나 파문케 하라” 분명히 카톨릭은 ‘오직 믿음’을 전하는 개혁자 그룹을 정죄했다. 그리고 여전히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국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11:6)

 

 

(7)사람이 얻은 칭의가 상실할 가능성 때문에 결코 구원의 확신(assurance)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가운데 안식을 얻었던 개혁자들의 확신을 ‘불경건한 신뢰’라고 맹렬하게 비판했으며 복음의 이해가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 안에서 구원의 참 소망을 얻고 안식하며 확신 가운데 살았던 사도들과 많은 성도들을 비판한 셈이다. 결국, 칭의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입장은 철저하게 개인 자신과 로마카톨릭의 사제들에 절대 의존적이다. 로마카톨릭은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공로와도 관계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카톨릭교회에 의해 세례를 통하여 처음 시행되는 것이며, 고해를 통하여 다시 갱신되어지는 것이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자신들이 믿는 교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나, 사실은 인간의 교만을 자랑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교묘하게 가리우고 있는 것이다.

 

 

(8)칭의에 있어서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칭의를 얻고 유지하며 향상시켜나가는 일에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분이시며(롬4:4-6), 바울도 칭의에 대해서 분명히 말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8-9)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6-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믿음으로’ 앞에 ‘오직’이라는 말을 넣어 보라. 더욱 의미가 분명하게 살아나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이 어째서 루터가 창작한 것이 된단 말인가?

 

 

3. 칭의의 성경적 개념을 로마 카톨릭이 오해한 원인

그러면 로마 카톨릭이 칭의의 성경적 개념을 오해한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첫째, 로마 카톨릭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잘못 이해했다.

힙포(Hippo)의 어거스틴(354-430)은 인간의 의지과 공로를 강조하는,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효과적으로 반박했지만, 라틴어 성경의 ‘의롭게 하다’라는 단어(Justificare)를 ‘의롭게 만들다’라고 번역함으로써 이신칭의 교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내적으로 의롭게 만드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라틴어에서 ‘facare’는 ‘만들다’는 뜻이 있다.) 이것이 로마카톨릭 교회가 어거스틴을 카톨릭 신학의 대부로 부르는 이유가 된 것이다. 어거스틴 이후로부터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신칭의는 항상 개인의 내적 변화와 관계되었다. 그래서 카톨릭은 펠라기우스를 정죄했지만 동시에 개혁자들의 이신칭의도 거부하는 바람에 스스로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거스틴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펠라기우스를 거부하고 ‘오직 은총’만을 강조했던 어거스틴을 거부한 것이다. ‘오직 은혜’는 언제나 ‘오직 믿음’과 같이 간다. 그러나 카톨릭은 은혜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행위를 인정하려고 고집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은총론에서 벗어난 것이다.

 

 

둘째, 로마 카톨릭은 믿음에 대해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신조를 요약한 트렌트 칙령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의 신학은 성경적인 용어로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용어를 빌려와 서술하고 있다. 헬라적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히브리적 사고방식과 틀리다. 즉,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에서 ‘믿음’은 단지 ‘사물에 대한 인식’차원에서 이해되어진다. 그러나 성경이 기초하고 있는 히브리적 사고방식에서 ‘믿음’이란 ‘대상에 대한 전인격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철학적 언어와 범주에 묶여 있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에 사로잡힌 로마 카톨릭이 성경적인 사고방식에서 시작한 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철학으로 성경을 보려했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참된 복음의 본질을 바로 파악할 수 없었다.

 

 

셋째, 그들은 성경본문을 피상적으로 다룸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성경을 보고 있었지만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성경에 ‘오직’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을 공격했고 정죄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오직 믿음’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을 정죄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오직 믿음’이라는 단어는 함의되어 있다는 것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절규했을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대답함으로 ‘오직 믿음’을 말하고 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은 것은 믿은 다음에, 그 믿음을 확증하는 역할을 할뿐이다. 그들은 세례나 고해성사로 칭의 받은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복음서에서 행위로 의롭다함을 가르치신 적은 한번도 없으시다는 것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몇 가지만 예를 살펴보면 루터가 이신칭의 사상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카톨릭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①“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②“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기서 분명 행위를 강조하고 계시지만 이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무리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대답하신 데서 분명해진다. ‘오직 믿음’이 아니고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가?

③“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기서도 행위를 강조하고 계시지만 이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믿음의 열매로서 개혁자들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④“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예수님은 여기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26절에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심으로써 오직 은혜, 즉,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고 암시하신다. 카톨릭이 가르치는 것처럼 믿음과 행위로 칭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는 것’이 칭의의 조건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참된 믿음의 열매로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⑤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선언하신 말씀을 보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카톨릭이 가르치는 것처럼 죄인이 죄책을 제거하기 위해 연옥에서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⑥예수님이 행하신 치유기사를 보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심을 분명히 보이신다. 그리고 종종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다.(마9:22;막5:34;10:52;눅8:48;17:19;18:42)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들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입증해주고 있다.

⑦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보라.(눅18:9-14) 여기서 분명히 의의 전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또한 행위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명백히 가르치신다. 또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하심으로써 칭의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선언임을 분명히 하셨다. 세리가 가진 의는 자신에게 내재된 그 어떤 의가 아니었다. 그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였던 것이다.(롬4:9-11;빌3:9참조)

⑧“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더 나은 의’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에 도달하는 것은 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 구절들은 ‘행위’나 ‘선행’의 관점에서 보면 도리어 절망하게 된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였다고 확신한다.

 

 

넷째, 로마 카톨릭은 교황주의라는 전통을 지키는 것을 성경의 진리를 사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개혁자들이 제시한 성경적인 개념에서 출발한 ‘솔라 피데’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천년 넘도록 지탱해온 모든 관습(면죄부, 연옥, 미사, 고해성사, 성자숭배, 죽은 자 위한 기도, 등)이 일거에 무너질 뿐만 아니라, 교황 중심의 강력한 조직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카톨릭은 이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은 사실상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언제나 교황과 교회 전통 아래에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전통과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의 권위 아래 둔다. 그들에게 성경은 교황주의를 지지하고 교회의 오랜 전통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만 자유롭게 논의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런 점에서 “오직 믿음”은 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루터의 이 같은 교리적 도전은 이미 기존 질서와 기득권 세력인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므로 진지하게 진리를 고려할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진리의 핵심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4. 칭의 교리에 대한 17, 18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입장 변화

 

 

(1) 부정적 변화-알미니안주의와 백스테리안주의

그러면 칭의 교리에 대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강조가 17, 18세기에도 계속되었는가?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17, 18세기에는 칭의 교리가 가져올 위험성, 즉, 도덕폐기론에 대한 두려움이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이신칭의 교리를 무시한 두 가지 운동이 발생했는데, 첫째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로서 화란 신학자 야콥 알미니우스(1560-1609)에 의해 처음 시작된 운동이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배격했고, 구원의 확신,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그의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 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부인했다. 믿음은 자아의 실망 가운데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헌신으로 묘사했다. 이 운동은 18세기 초반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율법주의를 만들었다. 두번째는 신도덕폐기론(Neonomianism) 혹은 백스테리안주의(Baxterianism)으로서, 유명한 청교도 목사 리쳐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의 견해로 촉발된 운동이었다. 물론 대부분 청교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확실히 백스터의 견해는 종교개혁자들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는 달랐다. 그는 이신칭의 교리는 마땅히 혐오해야 할 도덕폐기론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보혈이라는 객관적 의 대신에 인간의 회개와 믿음의 주관적 의를 강조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알미니안주의와 비슷했다. 백스터는 그리스도의 형벌적 죽음을 믿었지만 제한 속죄를 부인했다. 패커는 백스터를 보면서 이신칭의 교리와 기독교 본질에 대한 청교도의 인식이 퇴보하고 있다고 했다. 백스터의 주장은 당시 대중적인 효과를 거두었지만 결국 기독교회와 복음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영향력 있는 목사의 사상이 남긴 치명타는 참으로 컸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이신칭의에 대한 수정교리들은 백스터의 교훈과 비슷한 점이 많다. 즉, 개인의 심령에 내재하는 죄의 세력이 경시되고 있고, 죄가 객관화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중심적인 사안이 아니며, 인간의 반역과 죄악에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맞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의 전가를 전적으로 배격한다. 백스터가 그렇게 주장한 논리는 다음과 같다: “만일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칭의가 단번에 그들에게 전가됨을 믿는다면 계속되어야 하는 도덕적 노력의 필요성은 경시될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불경건하고 방종스러운 생활을 하던 크롬웰 군대에서 군목생활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교훈을 도덕폐기론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신칭의 교리가 도덕폐기론을 지지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질 위험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칭의 교리 자체를 수정하는 것은 분명 적절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신칭의 교리가 오해될 위험성 때문에 그 교리 자체를 포기하거나 수정하거나 혹은 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마치 칼이 위험하다고 칼날을 무디게 하거나 혹은 칼을 아예 멀리 치워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질문했을 때 로마 카톨릭과 백스테리안주의자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면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죄에 빠져들게 한다는 가정과 위험 때문에 자신의 칭의 교리를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 이신칭의 교리가 오해될 위험성을 예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신칭의 교리를 경시하는 것은 더욱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이 ‘위험하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변색시켜버리면 결국 누가 좋아할 것인가? 교회는 복음을 복음 되게 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행위가 ‘어느 정도는’ 구원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하고픈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은 신자들의 삶(선한 행위들)은 칭의에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선한 행위들은 칭의가 아니라 성화와 관련되어 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은 그 설자리를 잃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칭의 뿐만 아니라 성화 역시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며, 오직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2) 긍정적 변화-18세기 부흥운동

그러나 영국의 대 각성(Great Awakening) 및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했으며 당시 성공회에 만연해 있던 도덕주의와 율법주의를 비판했다. 당시에는 믿음에 행위를 포함하는 사상이 성직자뿐 아니라 일반대중들에게까지 이미 확산되어 있었다. 당시 대주교 존 틸롯슨(John Tillotson)이 “칭의의 조건은 우리 마음과 삶의 실제적인 혁명에 있다”고 했을 때 휫필드와 웨슬리는 그를 ‘모하메드보다 기독교 진리를 모르는 무식한 자’로 비난했다. 휫필드는 겨우 20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함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이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의 여왕 메리의 통치시기에 죽임 당한 순교자들이 자신이 피를 바로 이 교리에 봉인했듯이 필요하다면 나와 내 형제들도 우리의 피를 이 교리와 봉인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18세기 뉴일글랜드의 대 부흥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이신칭의에 대한 논문을 썼으며, 거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에 충만한 사도들로 하여금 이 이신칭의 교리의 중대성과 경향의 참된 심판자가 되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가 사도의 뒤를 좇으며 사도가 표현한 교훈들을 충실히 견지하기만 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 어떤 오류의 치명적이고 무자비한 위험에서도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5. 칭의교리에 대한 타협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연합운동을 살펴보면서 개혁자들이 파문 당하고 목숨을 잃는 위협 속에서도 소리 높여 외쳤던 복음의 진수가 위협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1)복음주의와 로마카톨릭의 연합

1994년 복음주의권은 “복음주의 신자들과 로마카톨릭 신자들의 연합: 3천년시대의 기독교선교”란 일치 문서를 내놓았다. 여기에 서명한 복음주의자들로는 찰스 콜슨, 제임스 패커, 오스 기니스, 마크 놀, 빌 브라이트를 포함한 12명이었다. 이 문서에서 선언하기를 “복음주의자와 로마카톨릭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동일한 믿음을 나누는 형제 자매들이며 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의롭게 된 자들”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그들은 서로를 개종시키는 일과 양을 도적질하는 일 등을 정죄했다. 그들은 사회 문화적 사업 및 선교사업에 공동으로 협력하고 보조를 같이 하기로 했다. 이 문서에서 칭의교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기인한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 안에서 역동적이며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러나 카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사이를 분리시켰던 ‘칭의’교리와는 다르다. 문제의 핵심은 “오직”이라는 단어에 있다. 모든 차이점들은 ‘오직’이라는 단어가 은혜, 믿음, 그리스도, 성경에 포함시키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오직”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빼버린 “믿음”이 복음의 진정한 본질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만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진술이 성경에 명백하게 있고, 그것이 구원에 본질적이라면, ‘오직 믿음’을 정죄한 로마카톨릭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콜슨과 패커같은 복음주의자들이 말하듯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신칭의 교리”는 21세기의 문화 및 선교사역에는 중대한 문제가 아니며, 카톨릭과 개신교는 조금 다른 교단 정도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복음의 본질보다는 양보하고 타협하더라도 협력과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단 말인가? 만약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라면 이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이 복음의 본질이라면 이러한 연합은 분명 복음에 대한 중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다.

 

 

(2)루터교와 로마카톨릭의 연합

미국 루터교와 로마카톨릭은 6년간의 토론 끝에 1983년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제목으로 공동문서를 발간했다. 그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간의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들 모두 하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칭의에 대해 “버림받음과 불의로부터의 은총과 하나님 면전에서의 의로의 변환(transition)을 의미하는 칭의는 완전히 하나님의 사역이며, 칭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되어지며 실제로 의로워진다. 그러므로 칭의는 법적인 의제가 아니며, 하나님은 의롭다 하심으로 그가 약속하신 것에 영향을 행사하신다. 그는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정말로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불의한 자를 하나님 면전에서 즉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행위를 칭의라고 보았던 루터의 칭의개념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3)성공회와 로마카톨릭의 연합

[제2차 성공회-로마카톨릭 교회 국제위원회]가 개최되어 3년간의 토의를 거쳐 1987년에 합의문서를 발간했는데 칭의교리를 성화의 정황 속에서 논의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 근거로 고전6:11에서 찾는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 그러나 문맥상 거룩함과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할 때(이것은 분명히 완료시제다!), 점진적인 성화가 아니라, 법적인 지위(신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할 뿐 아니라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만드신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의와 우리의 선행이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믿음과 혼합되어 버리고 말았다. 급진 카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 역시 믿음을 단순한 동의로 생각하고 구원에 있어서 행위와 성사의 준행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믿음과 세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면죄부와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그냥 외면하고 있다.

 

 

6. 칭의교리에 대한 현대 수정주의 흐름

 

현대에 들어와서 칭의교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수정해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어왔다. 그 중에 중요한 두 가지 흐름만 지적하고자 한다.

 

 

(1)칭의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맥그라스의 견해

성공회 복음주의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는 바울에 의해 사용된 칭의 개념(consept)과 교회에 의해 형성된 칭의 교리(doctrine)을 구분시킨다. 그에 의하면 칭의개념이나 사상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인데 반해,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칭의교리는 프로테스탄트뿐만 아니라 로마카톨릭신학에도 역시 의미를 부여했는데, 그것은 성경적 의미와는 아주 다른 의미-즉, 칭의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수립되는 수단--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신의 저서인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Justification by Faith: What it means to Us Today?, 1988)에서 그는 이신칭의의 근본적 성경사상을 16세기의 언어가 아니라 현 세대의 필요에 맞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신칭의가 변혁의 경험을 의미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칭의는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동적 능력을 제공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부여하며, 칭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성전 삼으사 영주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맥그라스는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실존적, 윤리적, 경험적, 윤리적 측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칭의가 소외된 인간의 진실한 실존의 회복이라는 그의 주장이 과연 적절한가? 그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의 구절에 근거하여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실존주의와 경험주의로 설명하고 있으며, 칭의의 법정적 개념보다는 관계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둠으로써 분명 진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2)칭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라이트의 견해

복음주의 신학자 중에 영향력 있는 신약학자인 라이트(N.T.Wright)는 개신교나 천주교 모두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고 보는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라이트에 의하면 바울의 칭의교리는 1세기 유대교의 세계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했다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언약 안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르는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은혜에 대한 응답이지 의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1977년에 저술어 신학계에 큰 영향을 준 샌더스(E.P.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의 결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샌더스의 주장은 1세기 유대교는 ‘행위’의 종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말 자체에서 볼 때도 언약 안에 머무르는 방법이라는 말속에서 행위의 공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에 의하면 언약에 들어가는 일과 언약에 머무는 것 모두 모두 은혜로 말미암지 공로가 아니라고 했다.(갈3:3참조) 그러나 샌더스가 인용한 많은 고대유대문헌 속에서도 구원할만한 가치가 ‘경건’의 행위에 있다고 하는 구절들을 찾을 수 있다. 즉, 샌더스는 유대교에 대한 편견을 교정하려고 하다가 구원과 의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시도가 인간 본연의 본성임을 망각하고 단지 서구세계의 특징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하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일에 조력하거나 하나님의 인정을 얻기 위해 인간의 선행을 구하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나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존 스토트는 샌더스의 글을 읽고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는 아마 그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팔레스타인 유대교주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계속 자문하였다”(존 스토트의 로마서 주석, IVP) 행위에 대한 바울의 강조점은 그 어떤 선행도, 심지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갖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능하지 않지만 만약 율법을 완벽히 지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바울이 대적하는 것은 공로신학이다. 즉, 행위는 칭의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불경건하고 사악한’ 사람들을 향해 거저 주시는 은혜의 행동이다. 믿음에 행위를 첨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에게 바울은 “무릇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갈3:10)고 선언했다.

 

 

(3)이신칭의 교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수정하는 것이 초래하는 위험성

그러면 이렇게 이신칭의 교리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왜 위험한가? 그렇게 개혁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려고 몸부림치는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 그것이 진정 복음을 전하려는 충정에서 비롯되었는가? 여기에 사단의 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① 죄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의 위험성

현대의 모든 신학이 죄에 대한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영혼들을 세우고자 했던 개혁자들의 몸부림이 서구적 편견으로 무시될 수 있는가? 죄에 대한 피상적인 태도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죄의 심각성과 그 비참한 결과와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서야할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강조를 꺼려하고 회피하는 현대의 경향은 다분히 인본주의사상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② 하나님의 용납과 은총을 얻기 위한 인간 자신의 노력을 신뢰하는 인간성에 대한 경시의 위험

사도는 갈라디아서 3:3에서 은혜로 시작했다가 행위를 의존하는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종교적 헌신과 열심을 통한 자아만족과 인간의 성취에 대한 교만은 모든 세대 모든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본성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③ 이신칭의를 구원의 정황보다 교회의 정황으로 제시하려는 위험

이신칭의에 대한 현대적 수정흐름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된 인간신분을 강조하는 대신에 근본적으로 교회 안에서 죄인의 용납을 가능하게 한다. 즉, 칭의 사상을 개인의 구원문제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주장함으로써(라이트) 결국 카톨릭이 환영하게 되었다. 성경은 공동체에서 소외된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여 거역함으로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싫어하는 이런 경향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공동체 회원됨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분명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적인 신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④ 이신칭의를 법정적 측면보다 관계적 측면으로 제시하는 위험

이것은 칭의를 언약적 구조로 보는 현대적 인식에서 출발하는 가장 위험한 시각이다. 칭의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그에 반역한 피조물 사이에 존재하는 심판자-죄인의 상황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언제나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형벌과 지옥의 실재성에 대한 두려운 사법권을 전제하고 있다. 이신칭의는 우리 위에 놓여진 하나님의 진노가 옮겨지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다.

 

 

⑤ 새롭게 정의된 이신칭의의 신분에 그리스도의 생애의 전가된 의가 자리할 곳이 없는 위험

라이트를 비롯한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된 것(옮겨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전1:30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말하고 있으며,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으로 칭의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강조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의의 중요성이 약해지고 인간의 의지가 더 강조되고 만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행위를 부각시키고 그런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게 함으로써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⑥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복음적 중요성을 무시하는 위험

만약 칭의가 언약공동체의 회원 자격으로 묘사된다면 그리스도의죽음의 화목제사적 본질은 더 이상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못할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우리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 보복적 형벌을 당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기 꺼려한다. 즉, 그들은 죄속함을 강조할 뿐, 하나님의 진노를 만족시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한다. 그들은 화목이 아니라 대속만을 믿으려고 한다.

 

 

⑦ 이신칭의는 더 이상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조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위험

라이트를 비롯한 다수 현대신학자들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의 존립을 결정하는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칭의 교리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믿음이 서로 엄밀히 구분할 수 있을까? 만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지 않고서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을 수 있을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선포되지 않고서 올바른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을까? ‘오직 믿음’이 없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어디서부터 나오고 있는가? 그 생각이 성경에서 나오는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교만을 가장한 마귀의 속임수에서 나온다. ‘오직 믿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온갖 미신과 위선과 편견과 오해의 늪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주의’란 말은 ‘복음전도’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언제부턴가 전도하는 일에는 교회가 구호를 높이면서 정작 전해야 할 구주의 복음에 대해서는 점점 무지해져가고 있지 않는가?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탐구하거나 혹은 사수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언제인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역사적 기독교의 믿음과 교리를 거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최근에 이신칭의 교리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두고서 복음주의의 위기라고 평가를 내리고 신실하게 대처하려는 몸부림들이 있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주의 대변자로 잘 알려진 R.C.Sproul의 견해에도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칭의에 관한 복음주의의 견해를 매우 잘 설명했는데, “칭의가 법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의 변화를 의미하진 않지만 그것은 분명히 본성의 변화와 관계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칭의에 대한 경계선을 넘어가고 있다. 칭의는 필연적으로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관계되어 있다’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왜냐면 믿음 그 자체는 믿는 대상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본성의 변화’라는 개념은 칭의나 칭의에 필요한 오직 믿음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본성을 변화시키는 은총’에 대해서는 칭의 이후에 다루어야 한다. 필자는 적어도 칭의에 있어서 만큼은 그리스도의 의외에는 다른 모든 가치를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믿음 그 자체도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의 의를 벗어난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칭의는 본성의 변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면 칭의에 필요한 ‘오직 믿음’ 그 자체는 본성의 변화가 아닌가 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칭의 역시 본성의 변화와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칭의에 오직 필요한 믿음 역시 본성의 변화와 관계하고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믿음은 본성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죄인의 정직한 반응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를 믿음 뒤에 둠으로써 루터보다 더욱 철저하게 선을 그은 칼빈의 입장에 더욱 동의하는 바이다. 물론 스프룰이 고의적으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본성의 변화와 혼동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주입된 의’에 기울어지는 것이며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명백한 구별은 지켜져야 한다. 아무튼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 하심에 대한 진정한 개혁주의적인 의미가 약화되고 있다. 요지는 이것이다: 칭의 그 자체는 중생이나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내적인 변화를 통해서 죄인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신다. 즉, “그리스도+내적 변화”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으로”이다. 도덕률폐기론 때문에 이 교리를 수정하거나 타협하려는 모든 시도를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이것을 수정하고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복음전도’에 유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를 수정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 또한 화해와 화목(카톨릭과 혹은 알미니안주의자들과)을 명분으로 이신칭의 교리를 수정하고 변경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시듯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의 진술로 동일하게 순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진리를 타협하면서까지 화목과 연합을 추구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혹자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 이신칭의 교리의 예봉을 무디게 하는데, 그것은 분명 옳지 않다. 진리의 예봉을 희생함으로 얻어지는 화해와 연합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복음의 퇴보를 낳을 것이다. 아무리 동기가 옳다고 하더라도 진리를 왜곡하는 것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타협함으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지라도 그것은 실제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사단의 승리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7. 믿음과 행위의 관계 / 바울과 야고보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행위’에 대한 가장 오래된 논쟁을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경에서 바울의 주장과 야고보의 주장이 서로 대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을 ‘논쟁적 상황’ 혹은 ‘민족적 상황’으로 국한시켜버림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이 문제는 서로 상충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면 바울은 칭의에 관해서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칭의의 열매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위’는 유기적인 관계로서 뿌리와 열매의 관계와 같다. 루터는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을 가리켜서 ‘살아있는 믿음’(fides viva)이라고 잘 정의했다. 믿음은 개념적인 인식이나 지적인 동의나 혹은 자기 신념이 결코 아니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의 살아있는 관계에 대한 말이다. 야고보가 말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은 “행함을 낳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뜻이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분명 칭의의 방법이라는 문맥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야고보는 칭의의 진위라는 문맥에서 말하고 있다. 야고보는 ‘개념적인 인식’이나 ‘지적인 동의’ 혹은 ‘신념’으로서의 믿음을 이해하는 것을 대적하고 있다. 야고보는 분명 선행이나 열매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오직 참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것을 분명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으로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약2:18) 행위를 통해 참 믿음이 입증되는 것이지,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자랑하려는 모든 반율법주의를 대적하고 있다. 야고보의 진술은 참된 행위를 필연적으로 낳게 하는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진술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죽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카톨릭과 다른 것은 선행의 위치에 대한 것이었다. 분명 카톨릭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야고보의 의도를 분명 오해했다. 그래서 칭의의 도구는 믿음이 아니라 세례와 성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례를 통해 칭의의 은혜가 주입되고, 고해를 통해 칭의의 은혜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이 없으면 세례나 성사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례나 성사로 칭의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임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칭의의 근거와 수단에 대해 분명한 이견이 있다. 개혁자들은 칭의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의로, 칭의의 수단을 오직 믿음으로 분명히 구분하지만 카톨릭은 칭의의 수단을 믿음이 아니라 고해성사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점이자, 동시에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은 ‘으로’라는 전치사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본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칭의의 수단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첫째, 최초로 ‘칭의’를 말하고 있는 창15:6을 보자. 카톨릭은 이 구절을 ‘은총의 힘으로 선행을 함으로써 칭의를 얻는다’고 주장해왔지만 본문을 아무리 보아도 선행이나 공로를 찾아 볼 수 없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창15:6을 인용한다. 사도의 의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를 전가시키는 수단이자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행위가 칭의의 이유가 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런데 카톨릭은 약2:21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한 말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15장이 아니라 한참 뒤에 일어난 22장의 문맥이다. 즉, 15장에서 이미 ‘칭의’가 발생했고, 22장에서 아들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15장에서의 칭의가 더욱 분명하게 증명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의인으로 간주된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순종의 행위로 입증했다. 엄밀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의 행위를 한 것이다. 분명 순종의 사건 이전에 칭의 사건이 먼저 발생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이어지는 약2:22에서 분명히 밝혀진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것은 행함이 믿음의 필연적인 열매라는 개혁자들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행함+믿음⇒칭의”가 아니라, “믿음⇒칭의+행함”인 것이다. 야고보는 어디에서도 아브라함이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유기적인 관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야고보는 ‘오직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생산하지 못하는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의 행위를 생산한다. 그 순종의 행위는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 순종의 행위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열매는 칭의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지만 칭의의 근거는 아니다. 칭의는 모든 인간의 자랑을 배제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되어진다. 둘째, 갈3장과 롬4장에서 보면 창15:6에 사용된 히브리어가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번역되고 있다.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에게 전가된 다른 이, 즉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선언)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4-8) 셋째, 로마서 4:5,9,22과 같이 신약성경에 사용된 전치사 “에이스”(eis)라는 단어는 한번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희생에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제나 ‘안티’나 ‘휘페르’(--대신에)라는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안티’나 ‘휘페르’라는 전치사는 단 한번도 우리의 믿는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된 적이 없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종을 대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시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 그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근거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수단(도구)일뿐이다. 넷째, 비슷하게도 성경에서 ‘믿음으로’라고 할 때 사용된 전치사 ‘디아’는 항상 수단, 도구이자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지, 근거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면, ‘으로’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By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Through라고 번역할 것인가? 만약 by라고 번역하면 믿음이 근거라는 뉘앙스가 될 것이다. NIV 성경에서는 “믿음으로”라는 말을 “through faith"라고 번역함으로써 믿음이 근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ex.엡2:8)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믿음이 칭의를 얻는 공로나 근거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믿음으로’라고 할 때 ‘~으로’에 해당하는 ‘디아’라는 전치사는 목적격을 지배할 경우에는 ‘~을 근거로’ 혹은 ‘~ 때문에’ 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믿음이 공로가 되어버려서 믿음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 ‘믿음으로’에서 사용된 ‘디아’가 목적격을 지배하는 용도로 사용된 적이 없고 단순 여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것은 믿음은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오해하지 않도록 번역하려면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Through) 그리스도의 의(=은혜)에 의해서(By) 죄인을 칭의 하신다. 믿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는 눈과 같으며 그리스도의 의만을 붙들게 하는 손과 같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라고 할 때 오해하기 쉬운 것이 첫째로 그 ‘믿음’을 신념이나 지적 확신으로 간주하는 것과 둘째, ‘믿음+행함’으로 생각하는 것, 셋째,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신앙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폐기론과 선행을 부정하게 하며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을 폐지하고 부도덕한 삶을 정당화하게 하는 함정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함정에 빠지는 것은 칭의 교리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칭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칭의에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믿음의 도에 대해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동의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복음 안에서 ‘다른 의’ 곧 ‘그리스도의 의’를 제공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주어진다. 성경이 말하는 ‘산 믿음’은 인격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신뢰를 뜻한다. 우리는 ‘산 믿음’이 없이도 교리적인 지식만을 수용할 수 있다. 즉, 믿음 없이 믿음의 도를 가질 수 있다. 반대로 믿음의 도가 없이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건강한 것은 믿음이 있는 자는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은 ‘이신칭의’라는 믿음의 도(道)이다. 우리는 ‘이신칭의’를 이해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믿음과 믿음의 도를 구별할 수 있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둘의 분리는 교회와 개인에게 결코 유익하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참 믿음은 생명을, 참 믿음의 도는 개혁을 결정짓는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인가? 칭의에 필요한 ‘오직 믿음’은 어떤 것인가? 이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이 칭의의 유일하고도 중요한 수단임을 인정하지만 믿음 자체에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만 한다. 그래서 필자가 믿음 그 자체에 대해 자세히 분석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의 의의 영광이 상대적으로 흐려질 가능성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힘(의지)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알미니안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존 오웬은 알미니안 주의에 대해 “이것은 마치 소경 된 자에게 앞을 본다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다”고 풍자했다. 우리는 믿음 혹은 믿는 것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은 늘 불충분하며 늘 모자람을 느낀다. 우리는 언제나 신앙에 있어서는 경건치 못한 죄인이다. 그리스도의 의(義)외에는 우리의 최고, 최선의 의(義)는 항상 ‘더러운 옷’이다. 우리의 믿음은 설령 그것이 매우 강할지라도 자격도 아니며 근거도 아니며 조건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공로 외에 모든 허식과 자신의 의나 행위를 내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행위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에 비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전혀 없다! 하나님은 믿음 자체에 가치를 두고 계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이 구원의 참된 근거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믿음에 그 근거를 두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언제나 절망하고 넘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믿음에 구원(혹은 칭의)의 근거를 두려는 경향에 경계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도무지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믿음 그 자체는 항상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약한 믿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충분히 구원한다. 아무리 강한 믿음이라도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는 구원하는 것은 우리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은 ‘구걸하는 불쌍한 빈손’이며 ‘애처로이 바라봄’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온전히 주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오해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죄인의 자유의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접’의 본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영접이란 그리스도의 의라는 은총을 거저 받아들이는 행위일 뿐이다. 믿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믿는 대상이다. 믿는 대상 앞에서 믿음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모르고서 자기의 의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 만약 그리스도의 의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자기 의지로 영접했다고 한다면 그가 영접한 그리스도는 성경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이 지어낸 망상이며,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상에 대한 참된 신뢰가 없이 다만 대상에 대한 지식만을 얻음으로써 믿음이 있다고 주장할 지 모르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접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늘날 개신교 집회에서 복음에의 초청으로 “예수님을 나의 마음속에 영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일에 성공함으로써 영혼을 구원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진정한 복음에의 초청이 아니다. 왜냐면 성경은 죄인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복음의 초청은 홀로 죄인들을 위해 단번에 희생제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라고 한다. 죄인은 단지 믿고 신뢰할 뿐 거기에 다른 행위를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소극적으로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에게 전혀 ‘의’가 없음을 발견하고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절망하며 슬퍼하며 하나님의 처분에 겸손히 자신을 맡기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아는 참된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지 강요와 분위기에 못 이겨 ‘나는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구세주로 영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인가? 아니다. 자신의 전적 불의와 함께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만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의에 대해 절망해야 하고 자기 의를 전적으로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 외에 자신의 벌거벗음을 인정하며, 자신은 하나님의 의 심판으로 받아 마땅한 사실을 인정하며, 자신에게 아무런 공로가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무상으로 수여하실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참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집어 넣어주신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오해하는 것이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믿음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 집어 넣어주시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믿음을 집어 넣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을 갖도록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자신의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효과적인 계시’를 주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계시를 주시고, 죄인은 계시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정직한 반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고 하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을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입하시는’ 어떤 은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믿음은 계시에 대한 정직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되, 그것이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다는 식으로 믿음에 근거를 부여하는 것과 함께 믿음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신다는 식으로 믿음을 이해하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참 믿음은 자신에게 전혀 의가 없는 비참한 상태와 아울러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주목하는 것이지 그 자체에 다른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참 믿음은 반드시 참 행위를 낳는다. 행위는 참 믿음과 칭의의 진위를 가려줄 뿐 칭의에 아무 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위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행위를 낳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러나 행위로 구원(칭의)을 얻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믿음과 행위가 서로 협력해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또는 믿음 때문에 구원 얻는 것도 아니다. 또 신앙을 통해 성령의 증거나 행함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아니다. 또 믿음 없이 단지 예정만으로 칭의를 얻는 것도 아니다. 또 믿음은 실제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도 아니다. 참 믿음은 참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균형의 도를 강조해야 한다. 온전하지 못한 지식은 무식한 것보다 더 위험하다. 즉, 칭의의 목적으로서 성화를 아울러 강조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심는 대로 거두리라”(갈6:7)고 말했을 때 ‘행위로 말미암는 칭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문맥을 볼 때 분명해진다. 이 말씀을 할 때 사도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에서 시작해서 그것이 도덕폐기론으로 오해할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 균형을 잡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칭의의 문맥을 떠나 그 구절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그 구절의 참된 의미를 상실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칭의는 우리의 ‘심는 행위’에 전적으로 달린 것처럼 되어버리고 그것은 카톨릭의 공적 사상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온전한 진리는 균형 잡힌 진리이다. 균형을 상실하면 진리는 사악한 자들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강조하지만 칭의의 문맥을 떠나게 되면 행위주의가 되어버린다. 또한 삶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칭의만을 강조한다면 신앙주의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교리→실천] 혹은 [칭의→성화]의 순서를 잘 유지해야 한다. 로마 카톨릭은 자신들은 오직 믿음이나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진리의 순서와 균형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를 낳는 산 믿음(sola fide)이다. 즉, 성화를 근거로 하는 칭의가 아니라, 칭의를 근거로 하는 성화인 것이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는 전혀 아무 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칭의는 행위에 모든 것을 기여한다. 행위는 참 믿음을 입증할 뿐이지만 참 믿음은 건강한 행위를 출산한다. 행위를 낳지 못하는 산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고보가 말한 대로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위를 낳지 못하는 믿음’이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오직 믿음’은 ‘행위의 공로가 없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봄’이지, 믿으면 다 된다는 식의 신앙주의는 결코 아니다. 우리는 행위를 부정해서도 안되며, 또한 행위를 어떤 의미로서든지 공로로 인정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것을 롬8:30을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설명함으로 결론짓고자 한다: 예정→그리스도의 의(계시)→부르심→믿음→칭의→행위→상급. 이것을 구원의 서정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예정→구원의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의→효과적 부르심(복음전도와 성령의 감동)→[믿음→칭의→양자→중생(회심)]→성화→영화.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을 뒤섞어버리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 둘의 경계선이 명확하다. 복음의 본질은 이 경계선이 선명해질수록 잘 드러나게 마련이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한편으로 의롭지만 또 한편으로는 죄인이라는 루터의 진술은 항상 로마카톨릭에게 장애물이 되어 왔다. 최근 카톨릭 내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한스 큉(Hans Kung)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려고 시도했으며 트렌트 공의회가 이 교리를 어느 정도 왜곡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에 대한 교훈을 ‘다른 복음’이라고 강하게 정죄한 바 있다.) 사실 칭의와 성화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개신교의 특징이다. 루터와 칼빈은 이 둘(신적 선언의 사건으로서의 칭의와 중생의 과정으로서의 성화)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면 칭의 없이 성화는 불가능하고, 성화를 전제하지 않는 칭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는 없지만 별개의 독특한 교리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 구별이 사라진다면 그곳에 행위가 칭의와 관계되게 되며 복음은 왜곡되어 진다. 반면 로마 카톨릭은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 구원의 기초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지만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만이 아니라, 세례, 미사, 고행, 자선행위, 고해성사를 지키는 행위를 부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의를 가리우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불충분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개혁자들은 성화의 중요성을 과소평가 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성화를 칭의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열매로 파악했다. 그리고 거룩과 성장에 대해서도 루터는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노력과 의지와 선행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선한 행위에 좌우되는 죄인이라고 강조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얼마나 균형 있게 가르치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으로 보인다. 칭의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도덕폐기론과 신앙지상주의로 전락하기 쉬우며, 성화를 강조할 경우 율법주의, 금욕주의, 형식주의, 알미니안주의, 펠라기안주의 등과 같은 위험성에 빠지기 쉽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루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죄인으로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러한 거룩에 대한 열망을 조심하라.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과 그대 행위에 철저히 절망할 때에만,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평강을 얻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대는 그리스도로부터 그대를 받아주신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며 그대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대의 것으로 전가하여 주신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8. 이신칭의 교리의 요약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이신칭의 교리를 요약해보자.

 

 

(1)칭의란 무엇인가? (칭의와 비교하여)

칭의는 하늘의 법정에 소환되어 의로우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분의 진노에 직면하여 두려워 떨면서 자신에 대해 완전히 절망하고 있는 죄인이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바라볼 때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값없이 전가하심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다고 최종적으로 판결하시는 은혜로우신 행위이다. 따라서 칭의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법정적인 선포(선언)으로서 우리의 신분과 관련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의 진정한 개념은 불의한 자를 의로운 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불의한 자가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어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지만 죄에 대한 영향은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신 자비에 의해 칭의를 받았다고 주장하더라도 스스로 ‘죄 없다’ 주장하는 자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왜냐면 칭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죄 없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위다. 칭의는 죄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책임을 면제한다. 칭의를 얻었다고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즉, 칭의는 죄인의 신분에 영향을 주지, 조건이나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칭의는 죄용서와 함께 은혜로운 관계의 회복에 대한 선언이다. 그러면, 칭의가 성화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칭의가 죄책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그 신분에 속한 모든 복된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죄의 부패를 제거하며, 죄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점차 새롭게 된다. 둘째,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며 내적 생활을 변화시키지 않는 반면에, 성화는 인간의 내적인 삶에 일어난다. 셋째, 칭의는 단번에 일어나 완성되며 반복될 수 없으며 차등이 없는 반면, 성화는 지속적인 과정이며, 현세에서는 완성될 수 없다. 넷째, 칭의와 성화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칭의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며, 성화는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

 

 

(2)칭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칭의의 근거는 믿음(또는 회개나 세례, 고백과 같은 등등의 행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서, 믿음은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어떤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전가’ 혹은 ‘간주’되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우리 안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라고 믿는다. 그 의는 내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간주된 외래적/외부적 의다. 칭의의 근거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not by but through)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義)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바깥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옷’으로 적절하게 비유되고 있다.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 자신의 것이 결코 아니지만 믿음으로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간주하신다.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 칭의의 유일한 근거는 죄인이 믿을 때 은혜로이 전가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공로)’이다.

 

 

(3)칭의의 시기는 언제인가?

율법폐기론자들은 죄인의 칭의가 영원 전에 또는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믿기 전에 이미 칭의 되었고, 신앙은 단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영원 전에 주시기로 작정한 은혜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칭의의 사건은 믿음에 의해 발생한다고 공통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그 백성들을 ‘의롭다 하심’은 객관적인 선언이며, 이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된다고 가르친다. 롬8:29,30을 보면 칭의는 부르심과 영화 사이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가?

 

 

(4)칭의의 수단은 무엇인가?

성경은 분명히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롬3:25,28,30:5:1;갈2:16;빌3:9) 여기서 ‘의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dia)는 ‘~때문에’를 가리키는 목적격으로 사용되지 않고 언제나 ‘~에 의해서’라는 여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믿음은 칭의의 근거(~때문)가 아니라 수단(~에 의해, ~을 통해)이다. 믿음은 결코 공로가 될 수 없으며, 행위는 결코 칭의의 조건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점은 성경에서 분명히 증거되고 있다.(롬3:21,27,28;4:3,4;갈2:16,21:3:11) 단적인 예로, 아브라함은 칭의를 얻었을 때 어떤 행위를 했는지 살펴 보라. 아브라함 역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제외하면 믿음 그 자체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복음서와 야고보서의 ‘몇 구절’을 가지고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신칭의’ 교리와 양립시키려고 하지만 그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야고보가 예를 들었던 아브라함의 경우(약2:21)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약2:22에서 명확하게 설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칭의를 얻었고(창15:6), 그 아들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임을 증명했다.(창22:12) 그래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절)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카톨릭이 가르치는 “믿음+행위⇒칭의”가 아니라, 개혁자들이 가르친 “믿음⇒칭의+행위”와 맞다. 야고보가 대적하는 것은 ‘행함을 낳지 못하는 귀신의 믿음’ 즉, ‘단순한 지적 동의’를 믿음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믿음을 ‘자기 의’로 대체하려는 위험성인 것이다. 믿음을 ‘자기 의’로 여기는 자들에게 야고보서는 매우 적절한 말씀이다. 그러나 하늘의 법정에서 두려워 떨며, 자기에게 도무지 ‘의’가 없음에 슬퍼하며 재판장의 처분을 겸허하게 기다리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오직 믿음’은 유일한 복음이다. ‘오직 믿음’은 그러한 죄인들에게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고 열렬히 원하며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빈 손’일 뿐, 믿음 자체는 하나님 앞에 전혀 내세울 만한 공로나 가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여전히 붙잡고 있는 자에게 ‘오직 믿음’은 자신의 부도덕함과 거룩하지 못함을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위선과 교만을 강화시켜주는 ‘위험한 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포착한다는 점에서 믿음은 칭의에 앞선다고 볼 수 있지만, 믿음은 칭의를 얻는 방법이라기보다 칭의의 근거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를 얻는 유일한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을 거부하는 카톨릭의 가르침은 명백히 ‘다른 복음’이라고 분명히 규정하는 바이다. 세례 및 고해성사는 칭의를 인치는 표이지 결코 칭의의 근거나 혹은 수단이 될 수 없다. 또한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영이 없이 우리 힘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며,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집어 넣어주시는 어떤 것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요6:27~29참조) 이 일(믿음)은 계시와 상관없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전적으로 행하시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그러한 것을 계시하시며 부르시는 이에 대한 죄인들의 ‘적합한 반응’ 즉 응답일 뿐이다. 롬8:30을 보라. “도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정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부르심의 사건으로서 계시이며, 계시에 대한 죄인의 적합한 반응으로서 믿음이며,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로이 죄인을 즉각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의롭다고 간주하신 그들을 그리스도의 변화된 몸과 같이 영화롭게 만드신다.

 

 

결국,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적인가? 아니면 몇몇 개혁자들이 의도적으로 창안해낸 것에 불과한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명백하다. 우리는 ‘오직 믿음’은 복음에 본질적이며 동시에 기독교 구원에 본질적이며 이 복음의 부인은 명백한 배도(背道)의 행위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오직 믿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을 더럽고 냄새나는 자기의 영광으로 가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믿음’이 아닌 인간의 행동이 부가되거나 첨가되어야 하며 보완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분명히 바울 사도가 정죄한 ‘다른 복음’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진지하게 복음의 본질에 대해 토론을 제시한 개혁자들을 정죄하고 파문한 결정(1521년 보름스 국회, 1546년 트렌트 공의회)을 취소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들 스스로 복음의 본질에 대해 문을 닫아놓기로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믿음’만을 외쳤던 개혁자들과 그 후손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언했기 때문에 우리는 가부간 태도를 분명히 밝힐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타협하고 온건히 대하면 그들의 저주가 옳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성경적 복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들이 내린 저주는 당연히 자기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9. 이신칭의 교리의 현대적 의미

이신칭의 교리는 지금도 중요한가? 이 문제에 관해서 성공회 복음주의자 신학자인 앨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가 쓴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라는 책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현대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새롭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이 교리의 중요성을 현대신학자들을 비롯하여 독자들과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신학의 공룡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한 신학자들의 책임이라고 규정하면서 저자 맥그라스는 16세기 언어가 아닌 현대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20세기 서구인들이 인간의 운명을 주로 ‘목적’ ‘실존’ 그리고 ‘의미’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복음은 이런 술어로 구상화해야 한다”(p.13)다고 했다. 이것은 R. Bultmann이 ‘부활’과 같은 성경적 언어가 현대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으므로 ‘신화’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 본인은 저자의 목적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현대인들과의 접촉점을 만들기 위해서 이신칭의 교리를 16세기 사고에만 국한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신칭의 교리를 오늘날의 현대적 경험언어로 서술하는 것은 이신칭의 교리의 원래적 의미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현대적 사상과 언어가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은 그 본래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현대적 언어로 성경을 각색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언어가 현대적 언어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많은 현대신학자들이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적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참된 적용이란 복음이 세상의 흐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길고 그 임무는 신학교수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라 사실 모든 교사와 설교자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교리가 중요하며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1)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므로 여전히 이 교리는 중요하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에 가치와 공로를 부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종교적 교만과 위선과 자기 자랑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경향성이 있다. 그러한 경향을 부정하면 분노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우리를 세우기 때문에 우리를 진정으로 겸손하게 만든다. 물론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칭의교리와 칭의는 다르다는 점이다. 칭의교리에 대한 인식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교리와 칭의는 구별되어야하지 분리될 수 없다. 칭의는 칭의교리에 대한 지적 수납에 의해서가 분명 아니지만 칭의교리를 사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분명 필수적이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온전히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만으로 은혜로이 주어진다. 우리가 공을 세우지만 그것은 전혀 자랑할 것이 못되며 ‘구속 못할 죄인을 오직 예수님만이 홀로 속하신다’고 찬양하게 만들어준다. 언제나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세우기 때문에 또한 우리를 진정으로 경건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든다. 우리는 세리와 같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는 다른 의가 필요했고,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를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 믿음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은 인자와 성실로써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신다. 우리는 앞으로도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2)신앙이 타성에 젖을 가능성(형식화의 위험) 때문에 이 교리는 여전히 중요하며 강조되어야 한다.

특히, 교회에 은밀하게 파고 들어오는 온갖 미신, 악습, 그리고 오류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교리라는 점에서 이 교리는 지금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연옥과 고해성사, 교황권, 면죄부, 성자숭배 등과 같은 오류의 진정한 뿌리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무지라고 루터는 보았다. 칭의의 메시지를 교회가 버릴 때 교회는 온갖 미신과 오류투성이의 종교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예수와 기독교를 믿는 것은 결코 우리의 참 구원을 보장해주지 못할 것이다.

 

 

(3)죄인의 비참한 현실 및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라는 엄연한 현실 때문에 이 교리는 매우 중요하며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소환된 죄인의 비참한 현실--두 눈을 부릅뜨고서 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모든 정직한 자가 걸어야 할 정로(正路)다. 이신칭의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의 신분과 위치에 관한 한 이 교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4)무엇보다 성경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복음의 선언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며 가르쳐져야 한다.

이것은 비단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원사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신약성경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임을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성취에 관한 모든 역사의 핵심이 바로 칭의교리가 쥐고 있는 것이다. (예; 아브라함을 의롭다하심-창15:6)

 

 

(5)개신교회의 정체성 위기라는 최근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이신칭의 교리는 매우 중요하며 주의 깊게 가르쳐져야 한다.

개신교의 위기는 바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신칭의 교리는 교회가 얼마나 복음에 충실한 가를 분별하고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6)구원의 확실한 보증을 위해 이신칭의는 매우 중요하다.

칭의는 헛된 모든 소망과 참된 복음의 소망을 구별시켜 준다. 또한 이신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참된 자족, 참된 평안, 참된 소망을 약속해준다. 이것은 도덕폐기론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다분히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경향은 칭의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참으로 칭의의 의미를 깨달은 신자라면 더욱더 의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왜냐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칭의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셔서 의의 열매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위하여 구원을 받았다.(엡2:8-10, 딛2:11-14) 만약 카톨릭의 가르침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는 우리의 구원이 충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늘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대 앞에 누가 감히 설 수 있겠는가? 이 두려움을 온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이신칭의는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미신과 오류와 위선과 자기 자랑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완벽한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진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온전히 자유하여 하나님을 새로운 심령으로 섬길 수 있게 된다. 종교개혁은 교황주의, 미신, 마리아 숭배, 성인숭배, 면죄부 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낳게 만든 참 원인, 즉, 복음의 참된 의미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혼동에 의의를 제기했다. 싸움의 중심은 ‘오직 믿음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었다. 사실 지금 우리의 싸움의 본질도 ‘오직 믿음’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7)지체들 간의 신실한 교제를 위해서도 이신칭의는 매우 중요하다.

이신칭의는 성도간의 교제를 진실하게 해 준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진정으로 깨닫고 고백하게 되는 것은 성도들 간의 생명력 있는 교제를 위해서 필수적이다. 이신칭의 교리가 무시되고 타협되는 가운데서 참된 교제는 있을 수 없다.

 

 

(8)이신칭의는 신자의 삶의 근거이자 토대로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위해서 이신칭의는 매우 필요하다. 즉, 진정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이 교리는 중요하다. 왜냐면 ‘이신칭의’ 교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신칭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겠는가?

 

 

(9)이신칭의는 우리를 오류에 빠질 위험에서 보호한다.

청년의 혈기와 열성이 방종(도덕폐기론적 경향)이나 갈라디안식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이신칭의 교리는 제대로 가르쳐져야 한다. 청년의 심리적 특성상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고 싶고, 안정을 확보하려는 욕구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의 청년들에게 개혁자들이, 아니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바르게 선포되어질 필요가 있다.

 

 

(10) ‘솔라 피데’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에 교회에 참된 개혁과 부흥을 가져다준다.

교회사에 나타났던 참된 부흥, 참된 영적 대각성의 시대를 살펴보면 오직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영광이 탁월하고도 놀랍게 선포되었다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신비한 체험이나 기적은 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을 지 모르나 복음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하고도 풍성한 영광을 인식함으로 누리는 축복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참된 부흥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카톨릭적 탐구에서 ‘내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절규로 옮겨가지 않으면 참된 부흥을 경험하기 어렵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데 열심을 내었고 많은 복음전도사업을 벌였지만 진지하게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는 게을러왔다. 그것이 부흥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사실 진정한 부흥을 누리지 못한 참 원인이다. 현대교회는 이 점에서 각성하도록 도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강조되고 높아지는 곳에 그리스도의 영이 화답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야 할 부흥이다. 이 부흥을 위해 우리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진지하게 추구해야 한다. 교회의 각성과 부흥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풍성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오직 믿음’만이다.

 

 

10. 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신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오직 은혜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위한 견고한 토대임을 확신한다. ‘오직 믿음’이 삶의 전부가 아니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임을 믿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의 ‘칭의’교리는 어떤 삶을 요구하고 있는가? 삶의 근거로서 ‘칭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1) 칭의의 목적은 성화이다.

칭의만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은혜로운 행위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우신 행위는 그리스도의 전 삶에 걸쳐 임한다. 칭의는 다만 시작일 뿐이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오직 믿음’이 카톨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지적 동의’나 ‘개념 인식’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칭의 역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인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선언하시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화를 목적으로 칭의하시는 것이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죄인을 칭의 하신다. (여기서 카톨릭은 거룩하게 만든 다음에 칭의하신다고 주장한다) 성화의 삶은 칭의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성화의 삶을 향한 부담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그 은혜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 은혜를 육체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카톨릭이 우려하는 칭의의 위험성, 즉, 칭의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과 선행의 삶을 무시하게 만들 것이라는 경고는 카톨릭이 생각하는 것처럼 칭의 교리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칭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방종과 부도덕한 삶을 정당화하려고 이용하려는 몇몇 무지한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는 칭의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삶은 시작된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를 오직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왜 칭의의 은혜를 주시는가? 칭의의 목적은 바로 성화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2) 칭의 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조심해야 할 부분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이’ 거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행하는 삶’을 늘 강조하되, 항상 행함의 원동력이 되는 ‘오직 믿음’을 동일하게 강조해야 한다. 롬 1:5과 16:26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는 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순종은 역시 ‘오직 믿음’으로 가능케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연히 살아야 할 삶, 혹은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 역시 사람의 노력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놓쳐버려서는 안 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이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내 의지와 노력으로 해낸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처럼 은혜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는 함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오직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며,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가? 그것은 ‘칭의를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뿐이다. 왜냐면 선행 혹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오직 능력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의 의’를 진정으로 깨닫고 신뢰하는 것이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 인생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고,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더 나은 의’를 행한다고 자랑하거나 공로로 내세울 수 없다. 왜냐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줄 아는 데서 그러한 선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본인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능력이 된다.

 

 

(3) 칭의 교리는 개혁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

개혁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진정한 개혁인가? 잠시 루터의 삶을 살펴보자. 1517년 10월 31일, 대사면을 받기 위해 순례자들이 몰려오는 절기인 할로윈(All Saint's Day)전야에, 마틴 루터가 저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붙인 것은 자신의 지적 탁월함을 자랑하거나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혹은 교회에 대한 소란을 피우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루터 자신이 95개조 반박문을 민중언어인 독일어가 아니라 신학언어인 라틴어로 기록했다는 데서 루터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루터가 생각한 개혁은 ‘온건한 개혁’으로서 조직이나 구조나 관행을 송두리째 뒤엎자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잘못된 관행을 용인하게 만든 진정한 원인이 바로 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 또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파악했기 때문에 신학적인 토론을 제의한 것이었다. 루터는 바른 교리를 정립할 때 비로소 잘못된 관행과 미신들이 타파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특히 루터는 로마 교회가 안고 있는 모든 도덕적 미신적 관행과 부패가 칭의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교리를 바로잡으면 그러한 것들을 타파할 줄 알았다. 그러나 상황은 루터의 의도와 다르게 돌아갔다. 몇 가지 사회적인 이유로 인하여 루터의 반박문은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진정한 개혁이란 구조나 관행 자체를 향해 도전하는 시위라기 보다는 그러한 것의 배후에 놓여있는 비복음적인 사상들을 성경적인 교리로 대체함으로써 봄눈 녹듯이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다가서는 사상 전쟁이요, 교리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구조적인 악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외적인 구조나 잘못된 관습에 대해 시위적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이 개혁의 전부가 아니다. 개혁은 본질을 건드리는 것이다. 본질에서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다. 잘못된 관습의 철폐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을 위한 시위적 행동이 정치적으로 역이용 당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본질을 모른 채 비본질을 향해 개혁의 소리를 외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치우치거나 정치적 논리로 매도당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오늘날 개혁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많으나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자는 드물다. 참된 개혁은 구조와 미신과 잘못된 관습 타파를 그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하지만 사상과 세계관과 교리를 바꾸는 데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사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원리에 강해야 하고, 복음사상으로 무장해야 하며, 복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하며, ‘다른 복음’을 분별하여 교리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교회를 ‘다른 복음’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파수군의 심장으로 살아야 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1:27,28)

 

 

(4) 교리와 삶이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교리가 삶의 근거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신앙고백적 삶’(confessional life)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만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고백이 우리 삶으로 증거되어야 하며 삶으로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이신칭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자. 이신칭의에 대한 발견은 우리 모든 삶의 영역에서 삶의 활력소가 되게 해야 한다.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설명은 이신칭의 교리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오직 칭의 사역에만 국한시킴으로써 도덕폐기론에 빠지는 것과, 둘째,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대신 섞어버림으로써 구원의 과정에서 신자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과정에서 본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칭의를 성화를 위한 근거이자 견고한 토대로 설정한다면 그 두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로 비유하자면 칭의는 기초요, 성화는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직 믿음으로 칭의가 주어지는 것처럼 역시 오직 믿음으로 성화의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고(합2:4),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1:170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입술만의 신앙고백만으로 그치지 않고 삶으로서의 신앙고백이 되게 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분명히 답해주고 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마찬가지로 빌립보서2:27에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나 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받은 복음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우리가 받은 복음진리(교훈)가 무엇인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위나 공로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산 믿음이다. 이 믿음에 대해서 바울은 골2:8-23까지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의를 추구하는 적극적 믿음(9-15절)이자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다른 복음’을 허용하지 않는 소극적 믿음(16-23절)이다. 우리는 참 본질 되신 그리스도의 의를 주목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지 않을 때 우리는 자칫 다른 의(이를테면, 형식주의, 체험주의, 율법주의, 도덕주의, 등)를 추구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다른 의를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해야만 한다.

 

본인은 골2:7에 근거하여 우리의 삶이 신앙고백적 삶이 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첫째, 교회는 교리공부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교리의 회복)

둘째, 교회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 정기적으로 자주 점검해야 한다.(복음의 회복)

셋째, 교회는 복음 진리가 우리 삶의 다양한 국면들에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도록 삶 속에서 묵상한다.(묵상의 회복)

넷째, 교회는 복음 진리를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넘치게 감사드린다.(감사의 회복)

다섯째, 교회는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들을 늘 경계하기 위해서 서로 권면함으로 서로를 세워준다.(교제의 회복)

 

 

III. 맺는 말

 

16세기 개혁자 선배들이 외쳤던 ‘이유신칭의’(sola fide)는 그들만의 교리가 결코 아니며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소수에게 열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은 신학자들만의 점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영원한 복락과 구원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모호하거나 그릇되게 가르치는 교사나 설교자들에는 엄청난 재앙이 임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서 성경 전체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구원의 메시지와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에 대한 “심장”과 같다. 물론 교리를 믿는 것과 교리의 주가 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현실적으로 다를 수 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로마 카톨릭과의 협력을 지지하기 위해 패커 역시 이 논리를 사용한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칭의와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믿음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어떤 진술을 믿는 것과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신칭의 교리를 실제로 듣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부름 받고 신앙하는 그분은 성경에 계시된 분이다. 우리가 그분을 알고 난 후 즉 그분을 신앙하는 일에 그분을 믿는 것과 그분에 관한 진술을 엄밀히 구분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은혜로 믿음을 받은 후에 믿음의 도를 위해 당연히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그리스도를 믿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신앙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이 성경적이지 않아도 그것이 협력과 연합, 또는 전도를 위해서라면 괜찮다는 말인가?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복음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단 말인가? 두 가지 복음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선지자들이 예고했고, 예수님과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수용하려는 다원주의적 시도에 교묘한 함정이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해야 한다. 카톨릭도 이신칭의 교리를 수용한다고 말하지만 ‘이유신칭의’ 교리는 저주하고 배격하고 파문한다. 그들이 저주를 퍼붓고 파문을 선언한 이상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인지, 아니면 ‘행위’ 혹은 ‘믿음+행위’로 되는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할 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의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비하면 다 냄새나는 옷과 같으며, 더러운 걸레와도 같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의만을 바라보며 자랑하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선언을 받고, 칭의 이후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거룩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에 들어간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며, 또한 오직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이것에 대한 다음의 소식은 분명 좋은 소식이다. 자기 안에 도저히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한 ‘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절망한 자에게 ‘전혀 다른 의’ 곧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다! 그것 말고는 참으로 하나님 법정에서 자신이 자랑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이 은혜의 복음, 모든 죄인이 들어야 할 참되고 유일한 복음은 주도 하나이시오 그리스도도 하나이시듯이 오직 하나뿐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믿음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무상으로 그에게 이전시키신다. 그리스도의 의를 얻는 방법은 ‘오직 믿음’(sola fide)뿐이며 이것에 다른 ‘의’를 첨가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는 이른바 ‘다른 복음’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를 얻는 것만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라,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시작으로서 칭의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을 믿도록’ 성령으로 부단히 이끄신다. 필연적으로 성화를 낳는 칭의의 복음처럼 죄인들에게 복된 교리는 없다 복음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 복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도 없다. 만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이 영광스런 교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놓았다.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이 진리이며, 교회의 생명이자 자신의 생명을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여기 자신에게 전혀 ‘의’가 없음에 절망한 한 평범한 수도사가 복음 안에 나타난 전혀 새로운 다른 ‘의’를 발견한 기쁨을 발견한 경위를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단순한 이 발견이 로마 카톨릭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충분한 의미를 주고 있다.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하나님의 의“라는 한 가지 표현 외에는 방해하는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구절을,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불의한 자를 처벌하실 때 의롭게 처리하신다는 뜻의 ‘의’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흠 없는 수사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양심으로 괴로워하는 죄인으로 서 있었고, 나의 공로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래리라는 확신이 전혀 없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의롭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을 미워하고 그분께 불평했다. 하지만 나는 친애하는 바울에게 매달렸고 그의 말뜻을 알려고 간절히 열망했다. 밤이고 낮이고 나는 묵상했으며 급기야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빋음으로 살리라’는 표현의 연관성을 알았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은혜와 순전한 자비로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그 의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거듭나고 낙원으로 열린 문에 들어갔음을 느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내게 미움으로 가득 차게 했지만, 이제는 훨씬 큰사랑으로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되었다. 바울의 이 구절이 내게는 하늘로 가는 문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