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많은 한국교회들이 주일 공예배시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또 많은 목사님들이 사도신경을 강해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신경이 주기도문 강해처럼 과연 설교의 본문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공예배시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왜냐면 과연 사도신경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의 '표준'standard이 될 수 있느냐? 성경의 권위만큼 권위authority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경creed이 무엇이냐?(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하는 진리의 기준 혹은 신앙의 표준이란 의미로서 '신조' '신앙고백서'와 같은 말입니다.) 교회사에 어떤 신경creed이 있었느냐?(교회사를 보면, 이레니우스 신조, 로마 신조,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등 여러가지 형태의 신조 혹은 신경이 있었습니다.) 신경이 왜 필요했는가?(보통 세례교육을 위해 준비된 문답자료를 고백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특히 사도신경을 누가 언제 썼으며, 어떻게 발전해왔느냐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글이 너무 거창해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누구나 아는대로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닌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또 사도신경에 나와있는 내용대로 가르쳤다는 어떤 문헌적 역사적 증거도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그렇게 믿었을 것이라고 4세기 경 교부들이 교회교육을 위해 '신앙의 12가지 요점'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조금씩 수정되기 시작하다가 8세기 중반에 와서야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기독교 문서에서 ‘사도신경’이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곳은 390년 암브로시우스가 초안한 것으로 알려진 교황 시리키우스(Siricius)에게 보내진 밀란 공회의 편지라고 하네요.)
사도신경은 사실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고, 단지 사도 이후 교회 지도자들인 교부들에 의해서 정리가 되었고, 카톨릭을 거치면서 재차 수정되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종종 읽고 외우고 암송하는 '사도신경'이 가지고 있는 교리적인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사도신경은 우리가 공예배시에 암송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이며,
그 이유로서 '사도신경'의 표현상 치우쳤거나 혹은 오해할만한 여지가 많으며, 많은 부분에서 로마 카톨릭적 냄새가 많이 배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고백인지 새롭게 한번 볼까요?
과연 사도신경이 우리가 공예배시에 암송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의 표준이 될만큼 균형잡힌 교리를 담고 있는지요?
저는 세 가지 큰 문제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째, 저작권 문제입니다.copyright
'사도신경'이라는 말 자체에 담긴 교리적인 문제입니다. The Apostles' Creed란 말이 자칫 사도들이 직접 쓴 고백, 사도들이 가르친 고백처럼 들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쓰지 않은 책인데 사도들의 이름으로 쓴 것처럼 제목을 붙인 책을 '위경'pseudepigraphy이라고 합니다. 저작을 바로 명시하는 외경보다 위경이 훨씬 위험한 책입니다. 물론 일각에서 '사도들이 그렇게 믿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겠지만 과연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아래에는 "사도신경의 12가지 신앙고백의 핵심"에 대해 나열하며 하나씩 교리적으로 비평을 했습니다만 과연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렇게 가르쳤다고 말한다면 '사도신경'은 교회에서 읽을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위경'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66권만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일한 규범이라고 여긴다면 "사도신경"은 설교되어질 본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 계시록이란 책은 대표적인 위경인데요..그 내용이 경건하고 괜찮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설교되어질 수 있을까요? 베드로 계시록이 설교본문이 될 수 없다면 사도신경 역시 설교본문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 계시록이 공예배시에 읽혀지고 암송되어지는 것이 옳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사도신경 역시 공예배시에 암송되어지는 것도 불가합니다. 설령 '사도신경'의 내용이 경건하고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할지라도 사도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적어도 공예배시에는 거절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에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라고 이름붙이지 말고 '카톨릭 신경'the Catholics' Creed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것은 신조의 내용상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고백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둘째, 충분성 문제입니다.sufficiency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12가지 고백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친 신앙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는가? 혹은 개혁주의 정체성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는가? 고 할 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12가지 핵심고백이 12사도가 가르친 가르침의 정수essence라면 논리적인 '축소'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과 사도신경을 단순히 비교해보면 명확해집니다. 예를 들어 "사도신경"에는 '성경관'에 대한 고백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보여준 '성경관'은 매우 중요한 교리적인 뼈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에서는 '성경'에 대한 고백이 빠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에 대한 강조가 특징인데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이 매우 약하거나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거나 '성도들이 교통을 믿는다'는 식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에 대한 고백이 오히려 흔들리거나 위협받을 '위험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도들의 가르침이나 개혁자들의 가르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복음의 진수인 '이유신칭의'의 고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은혜' sola fide에 대한 고백을 '사도신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앞에서 말한 대로 '오직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을 암시하는 듯한 '오해할' 표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윤리적인 도전'도 꽤 많고, 특히 '세계선교'에 대한 도전도 두드러지는데 반해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고백'은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적인 동의를 '믿음'이요 '고백'으로 간주하는 듯한 인상입니다.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며 증인이 되자는 가르침은 왜 빠져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살아야 할 것(윤리, 정의, 책임, 선교, 등)에 대한 '고백'은 왜 없을까요? 사도신경을 '정경'처럼 간주하게 됨으로써 반대로 윤리적 신앙고백이 이상한 색깔로 비쳐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왜 반성이 없을까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정말' 중요하게 가르친 교리와 고백들일까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 걸까요? 혹시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의 핵심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요?
셋째, 오해가능성 문제입니다.vulnerability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12가지 고백을 개별적으로 볼 때 치우치거나 혹은 오해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이 12가지 핵심 교리를 담고 있다고 한다면 각각의 교리는 정확해야 하며 성경적이어야 하고 균형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공예배시에 모든 회중이 '아무 생각없이' 암송하고 있고, 또 언뜻 보기에는 '교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듯 하지만 사실 잘 들여다보면 교리적으로 문제투성이입니다. 이와같이 교리적인 오류로 가득찬 신조creed를 가지고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려고 한다면 이것처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러면 사도신경의 12가지 핵심 고백 12 essentials of confession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살펴볼까요? (아래의 12가지 고백이 과연 사도들이 가르친 본질이냐? 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습니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언뜻 맞는 고백인 것 같지만 사실 엄밀히 볼 때 전능하심과 창조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 역시 전능하심과 창조사역에 불가분의 위치에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요1:3; 창1:2 참조). 그래서 이 표현은 균형을 상실했기에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삼위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2)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그 외아들'이란 표현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어본문에는 'His only Son'이라고 했는데요 성경은 '독생하신 아들' the only begotten Son이라고 말합니다(요1:14,18KJV,ASV). 예수님이 '외아들'이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수 없습니다(엡1:5절 참조). '외아들'이란 표현은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외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란 뜻이지요. 바르게 고백하려면 '독생자' 혹은 '하나님에게서 유일하게 나신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동정녀 마리아'라고 할 때 사도신경의 영어본문은 the Virgin Mary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로마 카톨릭적 표현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한 처녀에게서'from a virgin 나실 것이라고 말하지 the Virgin Mary에게서 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사7:14KJV,ASV). the Virgin Mary는 마리아를 신격화시키는 표현입니다(이점에서 저는 NIV번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문자가 아니라 대문자로 쓰는 것이 로마 카톨릭이 마리아를 영원한 처녀로 믿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러나 성경을 잘 보면 마리아는 the Virgin Mary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았지만 예수님의 형제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말보다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한 처녀에게서 나셨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가야바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지 않고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지니는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되기에는 부족한 듯 보입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이 역사적인 고난이라고 가르쳤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죄 때문에 받으셨다고 가르쳤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맞습니다.
(5)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 표현은 언뜻 맞는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죽음을 택하셨지만 부활은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과 능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났다'고 할 때 예수님의 죽음이 '위장 죽음'을 암시할 수 있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원문에는 '그가 지옥에 내려갔다'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했는데 한글에는 명백히 생략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벧전3:19에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but made alive by the Spirit through whon also he went and preached to the spirits in prison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볼 때 prison과 hell을 과연 동일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면 20절에 감옥에 갖힌 자들을 설명하기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볼 때 "감옥에 가서 전파하셨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은 특정 이들에게도 선포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심을 받으시고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식과 능력이 옥에 갇힌 영혼들에게도 선포되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6)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어판에는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라고 했는데 왜 한글판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이라고만 했을까요?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교리적으로 문제를 삼으면 얼마든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고 해야 맞습니다. 또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곧 내게 일어난 사건으로 고백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할 때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시는데 그분안에 우리의 생명이 숨겨져 있고 보호되고 있음을 믿는다'라고 해야 더욱 맞습니다(엡2:6; 골3:3참조).
(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라는 말은 올바른 번역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거기서부터"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산 자와 죽은 자'라는 표현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라고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부터" 혹은 '하늘로 올라가심과 같은 모습으로'(행1:11) 다시 오셔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8)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은 너무 막연한 표현입니다. 카톨릭도 개신교도, 심지어는 무슬림도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성령을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보다 교리적으로 맞습니다(딤전4:1; 계2:20참조).
(9) "거룩한 공회와"
여기서부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거룩한 공회"가 성경적인 표현인가? 그리고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고백이 사도들이 가르친 바인가? "거룩한 공회"가 과연 믿음의 대상인가? 사도들이 과연 그렇게 가르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부분에 대하여 영어판에는 "카톨릭 교회the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보편적인 교회" the holy universal church라고 살짝 바꾸어 놓았지만 그게 그겁니다. 이것은 다분히 로마 카톨릭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왜냐면 로마 카톨릭의 고백은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거룩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카톨릭이든 어떤 교회든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믿으라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들은 교회를 믿음의 대상으로 가르치지지 않았습니다. 사도신경에서' 공회를 '믿는다'고 할 때 사실 교회와 구원의 관계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공회'가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only by faith 구원받습니다. 그것이 사도들이 가르친 본질입니다. 더욱이 성경에서는 '공회'라는 단어보다 '교회'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공회'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는 '재판정'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지요. 어떤 이들은 '공회'를 '교회'로 바꾸어서 설명합니다만 그럴지라도 "교회를 믿는다"는 표현에는 교리적인 문제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교회가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거룩한 공회 혹은 교회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쓴 성경 어디에서도 '교회를 믿으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교회를 신앙의 대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서 믿음의 결과요 구원의 열매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관련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부득히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한 교회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는 거룩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단히 개혁되어야 할 교회인 줄로 알며"라고 해야 옳습니다.
(10)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 표현 역시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성도의 교통"이 성경적인 용어인가?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는 고백이 성경적인가? "성도의 교통"이 믿음의 대상인가? 사도들이 정말 그렇게 가르쳤는가? 사도들이 "성도의 교통을 믿으라"고 한 적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도의 교통"에 대해서 영어 원문에는 the communion of saints라고 했습니다. 제가 볼 때 fellowship이라고 하지 않고 communion이란 단어를 쓴 것은 다분히 카톨릭적인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흔히 생각하는 fellowship의 의미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communion의 의미는 다릅니다. 성찬식을 영어로 communion service라고 하지요. 카톨릭에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성인과의 교통'을 의미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죽은 성인saints와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죽은 성도들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거나 혹은 죽은 성도들과 교통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하는 것이며, 교통과 교제 역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하는 것입니다(요일1:3참조).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the communion of saints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번역을 했지만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fellowship with believers라고 하지 않은데는 다분히 카톨릭적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성인과의 교통'으로 의도된 표현이란 것입니다. 저는 죽은 성인과 교통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성도'를 '다른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교통communion을 과연 믿음의 대상으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fellowship 대신 communion이란 단어를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카톨릭에서 말하는 "성인과의 교통"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자들과의 교제fellowship with other christians라고 설명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도들이 서로 만나 교제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과연 성경적인가? 사도들이 "신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으라"고 가르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신앙의 대상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고 할 때when we say we believe in something,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여기고 신뢰한다'는 뜻 I believe it could save me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는 말과 '성인과의 교통'을 믿는다는 표현은 교리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뿐입니다. 성도의 교제fellowship with other believers는 믿음의 대상content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result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서로 형제 자매로 교제하는 것이지, 형제 자매로 교제하는 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며) 믿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신자들과의 교제를 신앙하는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죽은 성인들과 교통한다는 것은 더욱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들의 교통'을 믿는다는 고백은 교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사도들이 그것들을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라고 가르쳤다고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인들과의 교통을 믿습니다"란 고백을 다른 적절한 표현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성인들과의 교통을 믿습니다"란 표현을 굳이 바꾸자면 "주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형제 자매요, 한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11)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사하여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 완료형이냐, 아니면 진행형이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사함이 완료가 아니라면 우리는 죄사함을 받기 위해 선행 등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죄사함이 있으며(행2:38), 그리스도인들은 죄사함을 받은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요일2:12절 참조-"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because your sins have been forgiven on account of his name) 물론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요일1:8,9). 우리는 계속해서 용서를 받고 있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엡1:7절 참조-"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특히 히9:12,14; 10:10등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완료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2)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마지막 고백은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엄밀히 보자면 성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다시 입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죽은자가 다시 사는 것'애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몸이 다시 사는 것'은 올바른 고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날에 나의 몸은 다시 살지 않습니다. '나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그러하셨듯 우리는 전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고전15장 참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새로운 몸으로 덧입게 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것' 역시 신앙고백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불신자도 영원히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원히 사는 것은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가 가르친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과 천사들과 믿음의 선배들과 동료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결론으로..
사도신경은 성도의 고백에 표준이 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이단과 정통을 구분할만한 교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정말 가르쳤던 것, 가르침의 본질로 여겼던 것들을 살짝 왜곡시키거나 혹은 빼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심, 그분의 영광스러움, 그분의 순종과 승리, 그리고 다시 오심, 오직 그분을 믿음으로 거저 얻는 구원의 영광과 복된 확신 그리고 소망,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인의 삶, 세계선교...등 사도들이 가르치고 고백하게 했던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은 성경의 권위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설교의 본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을 위한 '표준'이 될 정도로 충분히 교리적이지 못합니다.
치우쳤거나 혹은 오해할만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사도신경을 교회에서 공예배시에 암송하는 것을 재고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대신 시편을 함께 읽거나 혹은 성경본문을 정해진 순서를 따라 함께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한국교회는 유달리 사도신경에 대한 강조가 큽니다만
실제 개혁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신경쓰고 있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여러 교회들을 돌아보며 살펴볼 기회가 많은데..
아프리카에 있는 침례교회나 개혁교회 등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책에나 찬송가에는 '사도신경'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국어로 쓰여진 성경책과 찬송가에만 인쇄되어 있답니다..사도신경을 예배시에 사용하는 것 역시..
유독 한인교회에서만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순서를 볼 수 있는데요...정말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혁교회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는 한국교회만이 이상하게도 '사도신경'에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성경'과 같이 간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성경이 아니고 성경과 같은 권위도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저작권을 위반한 위경이며, 교리적인 충분성이 결여된 다분히 로마 카톨릭적인 신조일뿐이며, 사도들이 가르친 것의 본질과는 더욱 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정확한 교리적 분별이 없이, 그렇게 암송해야 하는 이유도 없이, 단지 그래왔고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맹목적으로 (성경과 같은 권위로) 붙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도신경을 공예배에서 없애자고 하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기존교회를 대적하는 이단이나 사이비처럼 보이는지요? 사도신경을 마치 성경의 일부분인것처럼 신성시하는 것은 한국교회만의 기현상임을 아시는지요? 세계의 그 어느 개혁교회도 "사도신경"을 거들떠 보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라는 말보다는 '카톨릭 신경'the Catholics' creed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도신경'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게 간주하며, 사도신경으로 이단과 정통을 구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봅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교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사도신경'은 교리적으로 훌륭하지도, 균형잡히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교리적인 허점과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성경의 권위 아래 있으며, 교회는 말씀으로 부단히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사도신경'을 공예배시에 빼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만 모든 성경책과 찬송가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 (카톨릭 계열 출판사에서 인쇄된 성경과 한글출판사에서 출판된 성경과 찬송가에만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그 어떤 '신경'도, 교회도, 성경의 권위보다 높거나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성경의 권위 아래 두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우심을 입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엡2:20). 그리고 사도들이 전하여 준 믿음의 도가 아닌 것을 가르치거나 전하는 것은 하늘의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행위임을 알아야 합니다(갈1:8).
"사도신경"을 공예배시에 암송하는 것을 지금까지 중요한 예배로 아무 생각 없이 간주해왔다면 한번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바울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공예배에 참석하여 '사도신경'을, 아니 '로마 카톨릭 신경'을 고백하는 것을 본다면 그들은 어떻게 느낄까요?"
남아프리카에서,
신학과 성경을 가르치는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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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수없이 사도신경을 고백해왔고,
한국교회에서 20년 교역자 생활을 할 때에도 사도신경을 아무 생각없이 암송하곤했습니다. 공예배, 새벽예배 등...
심지어 선교사로 나와서 사역하면서도 제가 가정예배를 인도할 때에는 아무 생각없이 사도신경을 가족들과 함께 암송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2012년 4월 1일) 정말 '거짓말'같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선교지에 있다보니 교제하는 사람도 없고 적적하고 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페이스북을 즐겨 찾는데..
어느 목사님이 사도신경을 강해한다고 하는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스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러나라를 돌아보았고, 선교지에 와서도 사역의 특성상 여러 지역을 다니며 여러 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많습니다.
제가 사는 이 나라는 전체 인구의 6% 정도가 네델란드 후손계 백인들인데 그들의 교회는 대부분 정통개혁교회입니다.
그런데 저를 잠시 멍하게 만든 생각은 제가 본 어느 개혁교회에서도 사도신경 암송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의 성경 찬송가에서조차 인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몇몇 현지 침례교회 예배를 참석한 적이 있는데 사도신경은 없었고 대신 정해진 순서를 따라 성경본문을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사역하는 것이 흑인목회자신학훈련사역입니다만 흑인들의 예배시에도 사도신경 암송은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흑인들이 갖고 있는 성경에도 인쇄된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작은 타운에는 얼마전만 해도 30여명이 모여 예배드리는 한인교회가 있었는데
한인교회 예배에는 어김없이 사도신경 암송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인교회를 가나 사도신경 암송은 예배의 중요한 순서였습니다.
간혹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 대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사용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들어보았습니다.
세계의 어느 개혁교회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도신경'을 왜 유독 한국교회는 중요한 고백으로 여길까?
백인교회나 흑인교회나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는 '사도신경'고백이 한인교회를 가면 있는걸까?
만약 '사도신경'이 정말 개혁주의 신앙의 표준으로 가르쳐질만한 것이 아님에도 그것이 '전통'이기 때문에 그저 '습관'을 따라 의미없이 '고백'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에 다다르게 되자 정신이 번쩍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사도신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목회할 때에도 '교리공부'를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었고
선교지에서도 흑인 목회자들에게 건강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지만
솔직히 한번도 '사도신경'에 담긴 '신앙의 표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의미없이 뜻없이 그저 암송하던 '사도신경'을 사도들과 개혁자들의 눈으로 찬찬히 살펴볼 필요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교리적인 틀"에서 사도신경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제 하루종일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도신경"과 씨름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나름 내린 결론은 우선 우리 가정예배에서 '사도신경'을 빼자는 것이었습니다.
사도신경을 가족이 함께 암송하는 것 대신에 시편을 읽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고민하고 살펴본 것들을 블로그에 올리게 된 것입니다.
새삼 돌아보니 사도신경에 대한 아무생각없는 집착은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기현상이란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사도신경'이 한국교회 전통tradition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또한 '사도신경'안에 사도들과 진정한 개혁주의자들의 가르침의 본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사도신경'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카톨릭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유일하신 그리스도'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하심을 받는 은혜' '말씀으로 부단히 개혁되어야 할 교회' 혹은 '성경의 권위' 에 대한 고백 등이 빠져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중요하게 가르치신 '삶'의 문제, 그리고 '세계선교'의 문제도 빠져 있고요..
이런 '고백'을 "사도신경"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아무 생각없이 고백해왔던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혼자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수 십 년간 암송해온 저의 '전통'을 과감히 버리기로 작정하고 고민한 것들을 글로 올린 것입니다.
선교사인 저에게 이런 결정은 쉽겠지만 전통을 소중히 하는 한국교회로서는 제 글이 '도전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요..
우선은 사도신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연속시리즈설교'를 하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사도신경을 설교본문으로 하지 말고 사도신경이 말하는 12가지 핵심고백을 따라 적절하게 성경에서 본문을 잡으면 되겠지요. (저는 20년간 교역자생활을 하는 동안 한번도 사도신경을 설교본문으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만 지금도 사도신경이 설교본문이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다음 새벽예배, 심방예배 등에서 조금씩 빼는 것으로 시작하고, 나중에는 공예배시에 시편읽기나 다른 본문낭독하기 등의 순서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갑작스런 변화보다는 함께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단계적으로 개혁해나가는 것이 어떨까요?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차라리 온 교회가 함께 머리와 마음을 맣대어서 사도들의 가르침의 핵심과 개혁자들의 가르침의 진수를 담아(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u,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등),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사명에 대한 고백을 담아 교회 나름대로 '고백문'을 만들어서 예배시에 함께 낭독하는 것도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후자가 더 교리적으로 건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만의 '신조(교리적 고백문)'를 갖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의 본질, 혹은 요점이 '사도신경'이 잘 담고 있다고 한다면 카톨릭 교회나 우리나 무슨 다를 바가 있을까요?
'사도신경'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표준이라면 개혁교회나 카톨릭교회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왜 유독 한국교회만이 개혁교회라고 자부하면서 '사도신경'에 그토록 의미와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지요?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고작 '사도신경'이 전부인가요? 정말 그런가요?
'사도신경'이 진정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그런 교리고백문이라고 믿는 것인가요?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진정 사도들이 가르친 것을 따르고 있는지요?
오직 말씀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을 외쳤던 개혁자들의 정신을 따르고 있는 것인지요?
우리의 고백이 진정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제가 확신하건데 결코 '사도신경'에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신조'creed는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사도신경'을 우리 신앙의 표준standard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우리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이 무엇인지 혼동하고 있다는 뜻이거나 혹은 신앙의 정체성이 카톨릭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개혁자의 후손이라면 저와 같이 '사도신경'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바의 요점과 본질을 '사도신경'이 다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 아래 모든 전통과 교회의 질서를 복종시켜나갈 때만 교회는 진정 교회다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도 수없이 고백했었고요..사도신경을 공예배시에 고백하는 교회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
또한 사도신경을 예배 중에 사용한다고 개혁교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충분히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제 자신도 그랬듯이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사도신경"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암송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사도신경을 본문으로 삼아서 가르치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요..
여전히 조국교회를 사랑하는, 조국교회가 말씀의 터 위에 견고하게 서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한 무명 선교사의 글입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는 모든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2012년 4월 2일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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