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권위문제를 교리적으로 다루는 글입니다.
지난 번에 올린 강의안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갖고 있는 '역사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권위'의 문제를 교리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합니다.
참 권위를 아는 것, 참 권위를 얻는 법, 그리고 참 권위를 바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그리스도인의 권위
본문: 잠29:18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신앙은 역사적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기독교 신앙은 확실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겠다.
권위라는 주제는 내가 좋아하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글에서 그대로 베꼈음을 미리 말해둔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말이 있다. 기독교변증에서 제일 효과적인 것은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어제는 방어전을 치루었다면 오늘은 공격전을 할 차례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권위있는 복음의 도전을 막아보라.
I.서 론
(1)생활과 교회와 교계와 사회와 국가의 모든 문제상황에 대해 가장 근본 문제가 바로 권위의 문제이다. 즉, 개인과 교회는 그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지금의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세상은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고 말았다. 교회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열심히 찾아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해야 할 전부이다.
(2)사이비종교집단이나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닌 힘의 비결은 이 권위에 있다. 그들은 권위를 가졌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믿으려고 한다.
(3)요즘 사회분위기는 객관적인 권위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권위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오늘날의 모든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는 진정한 원인이다.
(4)교회역사를 볼 때 부흥이 일어났던 시기에는 언제나 권위가 있었다. 특히, 말씀의 권위가 있었다.
(5)이 권위의 문제는 개인이나 공동체에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등등의 문제들을 다룰 때 우리는 섣불리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그러나 원리나 기초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원리 없는 방법은 시행착오만 반복할 뿐이다. 나는 이것을 미리 알았다면 오늘 얼마나 좋았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변증이란 주제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신중하게 들어주기 바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6)권위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며,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권위의 문제로 내릴 수 있다.
(7)내가 오늘 강의를 요약하는 공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문제+권위=믿음. 권위는 문제의 원인이며, 해결의 원리라는 말을 마음에 새겨두기 바란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권위 3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개인과 교회와 사회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강의를 들으면서 이 권위를 점검해보기 바란다.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가 무엇인가? 참 권위가 아닌 다른 것에 권위를 두는 것이 권위주의다. 사람들은 권위주의가 싫어서 참으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권위마저 부정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자멸하는 지름길이다. 오늘날 교육, 학교, 가정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라. 이것은 권위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현상들이다.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강의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II. 본 론
1.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1)부단히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의 헛됨
인간은 만족하지 못하는 불쌍한 피조물이다. 인간은 개인적인 문제들과 사회적인 문제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그 내부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해왔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발견하는 길은 자신의 내부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들을 신비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람의 내부에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과학과 자연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들은 철학을 연구하고, 과학을 연구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이성과 경험)로 시험해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 궁극적인 지식,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사도바울은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영원하고 인간은 유한하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인간은 죄인이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 이성이 이룩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은 이성의 한계가 있음을 깨닫는 것과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2)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시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먼저, 인간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자신은 한낱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비하신 대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을 계시(revelation)라고 말한다. 기독교 복음은 이 계시에서 출발한다. 자, 그러면, 기독교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일을 하나님이 분명히 행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전에는 다른 노력이나 연구도 불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전부이다. 성경의 전부이기도 하다. 구약은 그분의 오심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다. 신약은 오신 그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히1:1,2참조)
(3)복음은 논쟁이나 논증이 아니라 선포이다.
사도바울이 전도할 때 세상 지혜로 논쟁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울은 논쟁함으로써가 아니라 선포함으로써 복음을 전했다. 우리는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 *변증학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는 변증학적 방법으로 세상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다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세상에 접근해야 한다. 사도 바울을 보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3:18)
(4)우리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장하고, 그를 선포하고, 그에게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면 그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는 우리 모든 것의 근거가 되신다.
(5)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어떻게 증거 되고 있는가?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즉, 최종적인 권위로 소개하고 있다. 복음서를 읽어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 부활, 승천 모든 것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증거하고 있다. 세례요한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했는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의 음성이 어떠했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 신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께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6)주님 자신이 자신의 권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항상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1:27에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또 “나는 세상의 빛” “하늘로서 내려온 떡”라고 주장하셨다. 산상수훈에서 “옛사람에게 말한 바....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항상 귄위 있게 해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선언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
(7)주님은 자신의 권위에 대해 말로만 가르치실 뿐이었는가?
아니다. 주님은 단지 말씀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권위를 주장하셨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게 된다. 표적들은 주님 자신이 어떤 분이며, 어떤 권위를 말씀하고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해진 이적이었다. 오늘날 목적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간헐적인 초자연현상과는 다르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이 죄를 사해주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권위를 믿고, 그분의 권위를 전파하며, 그분의 권위를 늘 주장해야 한다.
(8)오늘날 현대교회의 전도방법을 보라.
요즘 전도경향을 보라. “기독교를 한번 믿어 보라. 그러면 그만한 대가를 얻게 될 것이다. 내가 그것을 경험해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불러내어 간증을 하게 한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해 주는 종교라는 생각 때문에 믿으려고 할 것이라고 여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이러이러한 것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전도방법은 아니다. 주님의 전도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궁극적인 권위를 전파(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주권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이다.
(9)예수님의 위엄과 권위를 보라.
예수님은 한번도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법이 없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 병사들조차도 예수님의 위엄 있는 태도에 눌려 함부로 잡아올 수 없었다. 심지어 귀신들마저도 멀리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권위를 인정하였다. “어찌하여 아직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오셨나이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치 연약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고 무덤에 매장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가 가장 영광스럽고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신 것이며, 무덤에서 부활하심은 예수님의 권위가 증명된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요20:24f.) 또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교회의 경배를 받으시고 계시며, 교회를 계속 세우시고 계시며, 교회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증거하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증거하고 계신다. (요16:8-1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최종적인 권위자가 되신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성령은 교회 위에 내려오신다. 마귀는 패배했고, 지금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0)예수님의 권위는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에 있다.
사도행전4:12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선포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 “주”란 명칭은 구약의 “여호와”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경배해야 할 하나님이시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종교이다. 히브리서 1장 서두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만이 역사의 주이시며, 성경의 주인공이시며, 구원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이시며, 책의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며, 모든 원수들을 최종적으로 굴복시키실 분이시다.
(11)자, 요약해보자.
기독교는 철학도 종교도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셨고, 구원하시되 그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살게 하시고, 죽게 하시고, 다시 부활하게 하셨다는 기쁜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우리의 중심이며, 우리 삶의 유일한 권위가 되신다.
당신은 이 복음의 유일성을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심, 그 인격, 그 생명,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다. 그것이 없는 기독교는 평범한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2. 성경의 권위
(1)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세기까지는 모든 교회들이 보편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성경의 계시와 별도의 계시를 권위의 원천으로 받았다고 주장한다. 즉, 성경과 교회를 같은 권위의 위치에 두고 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문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과학에 대한 발달로 말미암아 성경의 권위가 공격받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그냥 인간들의 책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영적 메시지, 교훈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옳고 그름, 타당하고 타당하지 않음의 기준은 오직 사람의 이성이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성에 부합되지 않고, 타당하지 않으면 참된 것이 아니라고 제외시켜버리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논리에 안맞으면 무시해버리는 태도인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게 적절하게 말씀하실 때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완전히 주관주의적인 견해이다. 즉,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성경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주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동등하며 밀접한 관련이 있다.
(2)이 두 권위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렇게 질문해보자. “당신은 어떻게 주님을 압니까?” “성경을 떠나서 당신은 주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잇습니까?” “성경이 아니고서 어디서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주님에 대해 믿고 있는 바가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주님과 직접 교통하여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었고, 주님의 권위를 믿게 되었는 가에 대해서 만약 성경과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을 믿고 있을 다름이다.(참고로,성경을 볼 때 주의할 점: 먼저 전체를 보고 나서 세부적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작은 부분에 집착하는 나머지 전체 큰 그림을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진리를 대할 때에도 그렇다. 그래서 먼저 성경을 전체적으로 통독한 다음에 한 권씩 정독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3)성경의 권위문제는 논증이나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 자체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비극 그 자체이다. 성경의 권위문제는 곧 신앙의 문제이다. 이것은 논증의 문제나 설명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성경이 믿을 수밖에 없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증하고 증명하여도 여러분은 성경의 권위를 믿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설득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배워서 지적으로 동의할 수 있듯이,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과 믿고 신앙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믿거나 순종하지 못한다. 성령의 감화가 없이는 성경을 읽을 때 이것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한다. (고전2:14참조)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성경의 권위를 믿는다. 즉, 다시 말해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결코 성경의 권위를 믿을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신앙을 기대할 수 없다. 논쟁하거나 논증하려는 시도는 모두 시간낭비일 뿐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의 권위문제는 논증과 논쟁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이다. 성경의 권위는 최종적인 권위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신앙도 무너진다.
(4)성경의 권위는 변호할 문제가 아니라 적극 주장해야 할 문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권위는 변호하고 지켜야 하는 성격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스펄젼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자가 공격을 받을 때 당신이 사자를 지킬 필요는 없다. 다만 문을 열고 사자를 우리 밖으로 내 보내는 일을 하면 된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파수하려고 하기보다는 성경의 권위를 적극 주장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바르게 해석해주는 것은 오직 성경 밖에 없다. 성경의 세계의 기원과 인간의 본질문제에 대해 분명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 세계와 인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여전히 믿지 않는다. 교회의 문제는 그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환경이나 인간 본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성경의 권위를 믿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 변호할 것이 아니라 적극 주장하고 확신해야 한다.
(5)성경의 권위는 성경전부가 권위를 가졌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가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선언해야 한다. 일부에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성경은 스스로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 하나의 통일체로서 우리에게 전해준 것이며,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도 신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구약에도 권위를 신약과 같이 부여하는 이유는 주님게서 구약의 일부분만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전부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6)성경은 스스로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나타내시고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진리성, 정직성, 성실성, 무한함과 광대함을 발견하고 감명 받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완전하며, 그 자체로 충분하며 더하거나 뺄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은 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그 자체로 가지고 있다. 성경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여도 진실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의 진실성을 허물어뜨리지 못했다. 구약과 신약은 뚜렷한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다. 1600년 동안 각기 다른 인격과 개성의 40여명의 저자들이 쓴 66권이 서로 완전히 얽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스스로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혹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란 표현이 3,808회나 나온다. 이것은 구약성경이 자신의 생각에서 지어낸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유대인들 역시 성경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
(7)예수님이 성경의 권위 아래 사셨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그 생애 동안 성경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으셨다는 것이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말씀하시는가? 주님은 사단의 시험에 맞서실 때에도 “기록되었으되”라고 외치셨다. 예수님은 요10:35에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신약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게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성경이 권위를 띄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감동하셨기 때문이다. 벧후1:20,21에서 베드로 사도는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했다. 이것은 혼자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 말은 인간들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가 우리 믿음의 견고함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베드로 사도는 역설하고 있다.
(8)신약의 권위는 구약의 권위와 동일하다.
구약은 그렇다 치고, 신약은 어떤가? 신약의 권위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신 사도들의 권위에 근거한다. 구약은 예언자의 반열을, 신약은 사도의 반열을 중요한 정경의 기준으로 생각했다. 사도성의 유무로 우리는 정경과 외경으로 구분한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하더라도 사도성을 가지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도들 자신이 기록했거나 사도들의 동역자가 사도의 인준을 받아 기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도들의 권위는 바로 주님께로부터 왔다. (요16:12-14을 참조) 사도들이 누구인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요, 주님으로부터 복음증거의 사명을 직접 받은 자이다. 이것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사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은 자신의 가르침이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바울의 글을 사도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준했다.(벧후3:15,16참조) 초대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이 사도권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했다. 그들은 사도들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의 결정을 존중했다. 사도들의 권위가 없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겠는가?
(9)사도적 권위는 유일하며 모방할 수 없다.
이 사도권은 계승되지 않는다. 사도는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다. 카톨릭이나 영국 국교가 가르치는 사도적 계승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다. 이 시대에 사도는 있을 수 없다. 오직 사도들이 남긴 성경의 권위만이 있을 뿐이다. 이른바 자칭 사도라 하며 권위있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성경의 권위에 가감한 죄로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새로운 계시는 있을 수 없다.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구원의 계시가 성경과 함께 주어졌다. 우리는 새로운 계시나 첨가된 계시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사도들의 권위, 성경의 권위에 충실함으로써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다.
(10)자, 생각해보자: 사도적 권위(=성령의 권위)와 오늘 우리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성경의 권위를 믿는가? 성경의 권위를 어느 정도로 인정하고 있는가? 당신은 성경의 권위 아래 있는가?
성경이 당신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가? 체험하는가? 당신은 성경의 권위를 활용할 줄 아는가? 어떻게 하면 성경의 권위를 내 삶 속에 적용할 것인가? ①성경을 믿으라. ②성경을 사랑하라. ③성경을 읽고 묵상하라. ④성경을 암송하라. ⑤성경을 인용하라. ⑥성경을 연구하라. ⑦성경을 관찰하고 고민하고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라. ⑧문제가 생겼을 때 성경으로 돌아가라. ⑨성경을 가지고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예배하라. 성경이 당신의 인생을 인도하는 지침서와 가이드가 되게 하라.
3. 성령의 권위
(1)이 문제는 개념의 문제가 아니다. 경험의 문제이다.
우리는 성령의 권위를 경험해보기 전에는 우리 삶에 사실과 동기가 될 수 없다. 지적인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권위를 마음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위를 경험해야 한다. 경험적인 지식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오직 성령의 권위 아래 우리 자신을 둘 때 비로소 주 예수님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적용될 수 있다.(히브리어의 ‘알다’는 동사는 경험적인 지식, 인격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2)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권위를 구분할 수 있는가?
17세기 청교도들 사이에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권위 사이에서 성령의 권위를 주장한 사람들이 나중에 ‘퀘이커교도들’(the Society of Friends)이었다. 이들은 내적 증거, 내적 체험, 내적 능력만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과소평가 하였다. 심지어 성경은 필요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3)어떻게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권위가 조화되는가?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감동하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경의 기록을 스스로 위반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시금석이다. 성경에는 영들을 시험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면 악한 영들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험하고 조사해볼 수 있는가? 유일한 길은 성경말씀에 의한 방법뿐이다. 성령님은 통상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성령은 성경을 위배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성경의 기록과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신다. 오히려 성령은 성경의 기록을 보증하신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을 서로 대립시켜 생각하는 경향을 물리쳐야 한다.
(4)오늘날 성령의 권위가 어떻게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권위만큼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취약점의 근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광신도가 되는 길이라고 여기고 두려워하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권위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다른 곳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있다. 다른 곳에서 권위를 회복하려고 한다. 그 결과 교회는 스스로 무력감과 안 된다는 패배감에 절어 있다.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그냥 안주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 하지만 성령의 권위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5)교회역사를 통해 이 문제의 중요성을 살펴보자.
17세기 후반부터 불어닥친 합리주의와 과학주의의 발전으로 교회는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상실하여 있었고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 없어 갈팡질팡하였다. 우선적으로 성경과 복음의 권위를 회복하고 기독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입증하려고 노력히였다. 그래서 변증학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를 회복한 것은 그러한 변증학의 발달이 아니었다. 바로 영국의 죠지 휫필드, 존 웨슬레,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 등의 사람들 속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들의 사역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로 강력한 복음주의 부흥이 18세기에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또 다시 무기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18세기 복음주의적 부흥은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고, 교회는 다시 그 권위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국교회는 성직자에게 가운을 화려하고 엄숙하게 입히게 함으로써 권위를 회복하려고 했다. 강단을 회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했다. 강단을 높이 세웠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육이나 학문적 발전이 교회의 권위를 되찾아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9세기 교회로 하여금 다시 권위를 되찾게 해준 것은 19세기 중엽에서 일기 시작한 부흥을 통해서였다. 교회의 권위를 회복시킨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간섭과 역사이었다. 20세기는 또 다시 교회의 무기력함을 느낄 때 20세기 초 미국과 한국의 부흥을 일으키셨다. 20세기 말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지금 21세기 초는 어떠한가?
(6)왜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가?
어떻게 그들과 접촉하여 영향을 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말에 귀기울이게 만들 것인가? 어떻게 하면 교회가 권위를 회복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이나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좀더 광고해야 하며, 마케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광고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에 교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컴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이런 것에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에 대해 보다 합리적으로 지적이고 과학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지금 교회는 성령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교회사를 통해 성령님의 권위를 연구해야 한다.
(7)이 성령의 권위는 예수님의 생애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성령으로 충만하셨다. 하나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부으셨다.(요3:34) 요6:27에서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을 때 인치심은 언제나 성령님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면서 자신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했다고 선언하셨다.(눅4:17f.) 예수님은 자신이 맡으신 사명을 위해 성령님의 특별한 기름부음과 권위를 받으셨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다면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8)이 성령의 권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발휘하는가?
①회심에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
복음을 믿는 일은 단순한 깨달음이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하다. 성령님의 조명과 능력이 없이 복음을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행16:14) 고전12:3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성령님의 역사와 권위와 능력이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②확신에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궁극적 확신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다. 물론 진리를 믿고 적용함으로서 우리는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안전한 형태의 확신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 일을 성령이 하신다. (롬8:15-17을 보라) 이것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증거이다. 성령께서 스스로 나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확신이 있다.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고후1:22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했다.(엡1:13,14을 참조) 구원에 대한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확신은 성령께서만이 주시는 것이다.
③깨달음에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
요일2:20,27에서 사도요한은 기름부음이 우리를 이단의 속성에 대해 가르친다고 말하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구원과 진리에 대해 달리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는 진리를 생각나게 하시며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④진리를 수호함에 있어서 성령님의 사역
유1:3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했는데 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는 것은 변증학에 의해서 하는 경향이 있다. 변증학도 중요하지만 변증학은 영혼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더 떨어지지 않도록, 더 악화되지 않도록 지탱하는 효과는 있다.) 영혼을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힘은 변증학이 해낼 수 없다. 변증학의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는 성령의 권위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진리를 수호하는 길은 오직 성령의 권위를 의지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6:9.10에서 스데반이 어떻게 진리를 수호하는지 보라. 성령의 권위로 말하는 것을 세상은 당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고전4:20에 사도바울은 비록 자신은 풍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는 말에 의해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그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어떤 능력인가? 죄를 정복하는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도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고전10:3-5에서 성령의 권위임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⑤전도에 있어서 성령님의 권위
유창하게 말하는 것과 증인으로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아니라 할지라도 기독교를 주장할 수 있고, 가르칠 수도 있다. 변증학을 가르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셨다. 성령님이 그 권위를 가지고 하는 일이 우리를 증인으로 만드시는 일이다. 주님 자신도 하나님 나라 일을 하시기 위해 성령의 권위를 필요로 하셨듯이 오늘 우리도 필요하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까지는 증거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권위를 오순절날에 받았던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행4:23-33) 행4:33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으니라”고 하였다. 성령님의 권위가 그 비결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갔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감과 확신과 권위의식으로 다가가거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해 몇 마디 농담을 던지지도 않았다. 왜? 바울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가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자신이나 자신의 무엇이 청중의 영혼들과 그에게 맡겨진 놀라운 메시지 사이에 끼어 들지 못하도록 두려워하며 참으로 심히 떨었던 것이다. 바울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계속해서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려 하였다”고 말했다. 사도바울이 진정 의지하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 즉, 성령의 권위였다. (살전1:5, 벧전1:12을 보라) 성령의 권위 없이 메시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권위를 떠나서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 헛수고이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자신에게 권위와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사역자를 지치게 만드는 일인가! 성령의 권위가 없이는 우리의 지혜와 지식과 학식과 과학과 변증학적 노력들이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⑥교회에 있어 성령님의 권위
성령님은 교회에 은사들을 나누어주신다.(고전12장참조) 성령님은 자신의 뜻과 주권대로 이 일을 하신다. 따라서 교회가 “지금은 우리가 병 고치는 은사나 이적의 은사를 구해야 할 때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성령님은 성경이 정경으로 형성되는 과정에도 밀접히 관여하셨다. 부흥은 조직되거나 준비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부흥은 ‘개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준비하려고 하는 시도는 오히려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부흥은 성령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마귀와 세상이 교회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교회가 침체되어갈 때 성령님은 주권적으로 교회 안에 역사하심으로 당신의 권위를 세상에 행사하셨다. 우리에게 이 성령의 부으심이 얼마나 갈급한 지 모른다. 교회사를 읽어 보라. 1907년 평양 대부흥사를 연구해 보라. 우리가 모든 조직이나 운동이나 집회들로 지쳐있고 사정은 설상가상으로 악화일로에 있을 때 하나님은 인간이 예기치 못하는 때와 장소에서 기대하지 않은 인물을 통해서 갑자기 성령을 쏟아 부으셔서 교회의 영광과 능력과 권위를 회복시키신다. 성령님께서는 교회에서의 권위를 부흥에서 나타내시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지식과 변증학으로 우리자신을 준비시켜야 하지만 결코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성령님의 권위가 없이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그런데 진정한 부흥을 위해 진지하게 사모함으로 기도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조직과 사업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많이 본다. 그러나 하늘의 창을 여시고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성령님의 권위를 망각하는 죄를 범하지 말자. 우리 자신과 우리 활동에만 관심을 쏟은 나머지 우리의 힘의 근원 되는 성령님의 권위를 은연중에 무시하지 말자. 교회와 목사님들과 예배를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더 절실한 것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자. 부흥이 일어나면 100년 동안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단 하루만에 할 수 있다. 부흥!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며,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나님께서 죽어 가는 교회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임하여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부으시고 우리를 생명과 승리의 새시대로 인도하시는 일을 지금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팔은 짧아지지 않았다. 그 능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9) 성령의 권위와 오늘 나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이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가?
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가?
기도할 때 성령의 권위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는가?
문제를 만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III. 결 론
세 가지 권위로 자신을 점검하자.
당신에게 이러한 권위가 있는가?
이러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참된 일이다.
이러한 권위가 당신의 삶을 지탱하며 붙들어주는가?
잠29:18을 참조하여 복된 사람이 누군가를 점검해보자.
“그때에 왕이 없으므로 백성이 각기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시대의 불안과 혼돈의 원인이 권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 삶의 문제는 이 권위를 얼마나 회복하는 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혼돈에 빠지는 것은 전적으로 이 권위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 이제 원인분석은 끝났다. 그리고 처방도 끝났다. 이제 이 처방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성을 상실하면 무너진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권위를 상실하면 힘을 잃는다. 역사와 권위는 기독교 신앙의 양대산맥과 같다. 성전에 두 기둥이었던 야긴과 보아스와 같다. 또 다른 공식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면서 강의를 마치고자 한다: 역사+권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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