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본질적 정의와 기능적 정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교회에 대한 기능적 정의를 해보려 합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교회란 무엇인가 ?
김 광 락 목사
I. 들어가는 말
교회란 무엇인가? 이 질문만큼 우리에게 익숙해진 주제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늘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교회를 가리켜서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신부,’ 혹은 ‘새성전’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런 정의들은 교회가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설혹 교회의 역할에 대해 말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모호할 뿐이다. 교회의 정의(definitions)가 정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 망설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사실 기존에 가르쳐진 교회의 정의는 동적이지 못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역할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교회’를 새롭게 정의해보자. 그럼으로써 세상 한가운데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길이 열려지지는 않을지 희망하면서.
요지를 말하자면, 본질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기능상 교회는 나눔(sharing)과 섬김(serving)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나누어야 하고 섬겨야 하는 모임이다. 그런데 이 나눔과 섬김이라는 말처럼 교회 내에서 가장 왜곡되어 남용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성경본문에 입각해서 이 말의 성경적 의미를 배우도록 해보자.
II. 본 론
교회론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는 두 단어를 지적하면 ‘나눔’(koinonia)과 ‘섬김’(diakonia)이다.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을뿐더러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에 남겨진 영향은 실로 억울할 정도이다.
A. 나눔(koinonia)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나눔, 교제, 구제 등을 의미하는 말로 A를 B와 공유하는 것이다.
1. 교회는 자기 재산을 서로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재산의 나눔)
a. 행2:42-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때 하는 것과 같은 친목회가 아니다. 성도의 교제를 친목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문맥에 의하면 서로를 위하여 자기의 소유권, 재산권을 포기하는 자기희생을 의미하고 있다. 성도의 교제란 서로를 세우기 위해 자기 소유권을 포기함을 뜻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주장의지(self-assertiveness)를 포기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이므로 사도신경에 신앙고백의 내용으로서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
b. 행2: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물건을 서로 통용함은 공동소유를 의미한다. 이와같이 초대교회는 원시공산주의의 이념을 실현한 공동체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다른 것은 정치적 혁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대교회는 좀더 움켜쥐려고 하고 부자되기를 힘쓰고 있다. 부자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모순된 것은 없을 것이다. 기도원부지, 장지, 건물임차 등 교회가 소유에 힘쓰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역사할 여지는 없게 될 수 밖에 없다. )
c. 고후9:13-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코이노니아를 연보로 번역하고 있다. 문맥상 본문에 기록된 연보는 가난한 교회 또는 가난한 성도를 돕는 구제의 목적이 있었다. 현대교회 내에 구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나눔의 정신이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 나를 비워 다른 형제를 부요하게 하려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 자체가 좀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 )
d. 롬 15:26-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 이방인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준비한 구제헌금을 의미한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는 말씀처럼 긍휼은 물질의 열매로 연결되어야 한다. )
e. 롬 12:13-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
( 성도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실세계에서 어려울지도 모르나 나눔의 정신인 ‘내소유권포기’와 ‘하나님 소유권주장’이 가르쳐지면 될 것이다. )
f. 갈 6:6-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와 물질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장래 좋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고 사도는 가르친다. )
g. 히 13: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물질의 공유는 구약제사의 신약적 성취라고 말하고 있다. )
h. 빌 4: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나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 사도바울의 복음전도사역에 코이노니아한 것으로서 선교후원금을 의미한다. )
i. 딤전 6:18-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 문맥에 의하면 부자들이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과 반대로 재물을 나눌 것을 권면한다. 즉,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하나님 소유권을 주장하는 자가 되어 물질을 공유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오늘날 물질소유권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교회가 과연 몇이 되는가 ? )
2. 교회는 복음을 서로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신령한 나눔)
a. 롬 15:27-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 복음의 나눔, 복음을 전달받는 것이 영적인 나눔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영적인 것(=복음)을 나눠가졌으므로 그들의 육신의 것으로 유대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영적인 나눔은 육적인 나눔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진정한 복음의 선포가 상실되어가는 위기에 처해 있다. 복음의 순수한 선포가 단지 도덕적 교훈으로 전락해버리고 인지상정에 의해 육적인 나눔을 가르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교회구조에 새신자나 태신자가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교회는 도덕 교훈이 아니라 먼저 복음선포kerygma를 회복해야만 한다. 그리고 나눔과 섬김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운동에 참여해야만 한다. 그것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 그리스도의 코이노니아를 본받는 한 사람 혹은 한 작은 공동체의 헌신에서 시작할 것이다. )
b. 고전 1: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여기서 나눔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유함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동일하게 품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마음을 서로 품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빌2:1ff.를 보라. 자신을 버려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섬기는 자세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 주님을 섬기는 경외감이 없이 형제를 섬길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c. 고후 8: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d. 히2: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예수님의 성육신은 나눔의 진정한 모범이 된다.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피와 살을 가지신 것이 코이노니아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보좌를 버리고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는 자세로 낮아지심은 마귀를 정복할 권세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지 않고 마귀를 제어할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본받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능력있는 삶의 원천이 된다. )
3.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 고난의 나눔 )
a. 빌 3: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코이노니아는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는것인가? 그리스도의 일을 함으로써 고난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일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보좌를 버리는 것, 즉, 섬김이다. )
b. 고후 1:7-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고난받음을 어쩔수 없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신약성경은 필수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고난을 코이노니아해야 한다는 것이다. )
c. 벧전 5: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 그리스도의 고난을 공유하였듯이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도 공유하게 될 것을 약속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공유하지 아니하고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공유할 수 없다. )
d.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등으로써 하나님의 성품과 코이노니아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과 코이노니아할 수 있는가? 주신 약속을 따라 섬기며 나눌때 가능해지지 않는가? 그분의 약속이 무엇인가? 그의 섬김에 의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코이노니아하셨다는 사실이다. )
e. 벧전 4: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f. 고후 8:23-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코이노노스)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 진정한 동역자는 참으로 나눌줄 아는 사람이며 참으로 나눌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섬길줄 알게 된다. 무엇을 나눈다는 말인가? 자기를 비울줄 안다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줄줄 안다는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기둥이자 그리스도의 영광이라 불리울 수 있다. )
4. 교회는 성령의 교제하게 하심을 누리는 공동체이다. ( 성령의 나눔 )
고후 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성령의 교통하심은 사거리 교차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의 정확한 번역은 “성령의 교제케 하심”일 것이다. 성령은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성령의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하심을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교제, 그리고 성도간의 물질적 영적 나눔을 가능하게 하시며 주도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 내에 우리 스스로를 서로에게 얼마나 오픈하며 얼마나 성령의 임재와 내주하심을 느끼며 의식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예배와 성도의 생활 속에 성령의 코이노니아하심을 지각하는 예민함을 계발하는 법을 서로 생각해보자. )
5. 교회는 죄와 세상과 마귀와의 교제를 거부하는 공동체이다. ( 죄악의 나눔 )
a. 딤전 5:22-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에 동참하는 의미로서 코이노니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
b. 요이 11-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 적 그리스도의 메신저를 집에 받아들이거나 인사하면 악한 일에 코이노니아하는 자이므로 금지된다. )
c. 고전 10:20-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 제사행위는 귀신과 코이노니아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
※ 적 용 application
정당과 회사의 생존원리는 정권과 이윤추구이지만 교회의 생존원리는 정권포기와 이윤포기이다.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섬기는 것이다. 세상은 살아남을 것을 추구하나 교회는 죽어질 것을 추구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며,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며, 살아남음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성령운동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공동체 운동의 참 비젼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생명을 내어던지고 자기 소유물을 과감히 나누는 것이 초대공동체의 모습이었다.
나눔을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초대교회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의 현재화”이었다. 즉,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 삶의 영역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에 임하신 성령의 역할은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으로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주장하게 만드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토지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레위기의 희년법(레25:23)의 원리를 실천하고자 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자연, 등 모든 관계의 모든 벽을 이미 허무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성령의 조명에 의해 깨닫게 되는 자에겐 더이상 내것 네것이 의미가 없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이 인식될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해지자 재산까지 나누는 것은 당연한 열매였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자기의 것을 고집하며 자기벽을 쌓아감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는가 ?
당시 토지권을 교회에 내어놓는 것은 그 분명한 신앙고백의 표지였다. 그럼으로 초대교회는 구약의 희년법을 성취한다는 자아상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서 사회를 치유하는 공동체로 쓰임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공동체는 과연 이러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나 로마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는 다시 토지를 사유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중세시대라는 암흑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노동의 열매를 철저히 구별할 줄 아는 지식이야 말로 공동체의 비젼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것을 내것 네것 운운함으로써 성령을 슬프게 한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중세시대는 가장 종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복음적인 시대가 되고 만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 현대교회에서 이 나눔의 법은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인가? 첫째, 토지소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노동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의 모든 불로소득과 부동산 투기를 정죄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장해야 할 것이다. 셋째, 성도간에 내것 네것을 구분하는 것을 철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의미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B. 섬김(diakonia)
섬김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디아코니아(diakonia)는 하인이 식사시중을 드는 역할에서 복음전파사역, 교회직분, 선교사후원, 교회내의 다양한 봉사 등을 의미한다. 기본 의미는 종노릇을 의미한다. 디아코노스는 곧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A로써 B에게 종노릇함을 가리킨다.
1. 교회는 예수님을 섬기는 공동체이다. ( 주님위해 생명을 내어놓음 )
a. 요 12: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제자가 되지 않고서 예수님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이다. 눅 22:27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을 섬기는 자로 선포하고 계신다. )
b. 골 1:7-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 바울은 신실한 일군을 ‘디아코노스’라고 표현하고 있다. 식탁을 시중드는 하인의 역할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라 할 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필요를 채우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필요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강건하게 함이다. 그리스도의 이 욕구를 채우는 것이 섬김이고 채우는 사람은 일군이다. )
c. 딤전 4:6-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 여기서 디아코노스란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들을 깨우치고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역할로 제시된다.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그의 몸된 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터 위에 굳게 세우는 것이다. )
2. 교회는 지체를 섬기는 공동체이다. ( 지체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음 )
a. 눅 22:26-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는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한다. 어떻게 섬기며 무엇으로 섬기는가는 예수님의 섬김이 대답해주고 있다. )
b. 막 10;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예수님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섬김의 내용은 하나뿐인 ‘생명’이었고 섬김의 방식은 ‘버림’이었다. )
3.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 복음전파 = 섬김 )
a. 행 6:4-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말씀의 섬김이라고 한다. )
b. 행 20: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여기서 복음전하는 일을 사명 곧 섬김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
c. 행 21: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 바울사도는 자신의 선교사역을 섬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
d. 딤후 4:5-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는 섬김을 다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
4.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동역자들의 모임이다. ( 동역자 = 섬기는 자 )
행 19:22-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는 자로서 섬기는 자로 표현되고 있다. 진정한 동역자가 될 때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다. )
5. 교회는 나눔으로 섬기는 공동체이다. ( 나눔 = 섬김 )
a. 마 25:44-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 음식, 음료, 쉴 곳, 의복, 약, 위로를 주는 주는 행위는 섬김의 행위이다. )
b. 고후8:19-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보내는 물질적인 부조를 섬김으로 표현하고 있다. )
6. 교회는 식탁공동체이다. ( 음식준비 = 섬김 )
눅 17:8-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 종들은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어야 했다. 그것은 음식을 요리하고 나르는 식사시중이었다. 성도들이 교제하기 위한 공적인 식사준비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섬김의 일부였었다. 식사준비자체가 자기것을 포기하고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 6장에서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을 식탁준비에 참여시키지 않음으로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
7. 교회는 섬기는 자들에 의해 유지되는 공동체이다. ( 직분 = 섬김 )
a. 딤전 3:10-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할 것이요.
( 원문에서 ‘섬기게하라’는 단어가 개역성경에서는 ‘집사의 직분을 행하게 하라’고 번역되었다. 다시 말해서 집사란 교회를 섬기는 자로서 임명된 직분이다. 섬김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이지만 모범적으로 섬기는 자를 교회에서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직분인 것이다. )
b. 롬 11: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섬기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사도직은 권위의 상징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도직을 강조할 때 그것은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섬김의 특권을 맡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
c. 고후 6:3-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 섬김이 직책으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복음전파의 섬김이 모독받지 않게 하려고 몸부림쳤다. 즉,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처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란과 궁핍과 곤란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참고 견디었으며, 깨뜻함과 지식과 오래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을 감당하였다. 오늘날 섬김이 비난받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섬김을 섬김답게 할 수 있는가? )
※ 적 용 application
예수님께서는 섬기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섬기는 자로 사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자신의 섬김을 극적으로 시위하셨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요13;34)고 명령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의 섬김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알라딘의 램프에 나오는 거인처럼 제자들 앞에서 항상 노예와 같이 저자세를 취하였다는 말인가? 제자들의 요구를 항상 채우시기만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섬김의 내용과 방식은 ‘주인님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섬김은 십자가지심이었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었다. 이처럼 섬김이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사람들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신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도 이와같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기 운명, 자기 팔자를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십자가도 섬김도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섬김의 내용이자 방식이었던 것이다. 참 섬김은 예수님처럼 자기 보좌를 버리고 자기 생명을 내어놓음으로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도 마찬가지다.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요구하셨던 섬김이고 형제사랑의 모든 내용이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내에 지체들 때문에 서로 상처받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는가? 그것은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려는 제자도가 실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교회가 세상내에서 힘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자 하는 순교자적인 결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개인주의적인 신앙, 개교회중심주의 목회야 말로 교회공동체를 약화시키는 지름길이 아닌가?
십자가를 짊어짐, 다시 말해 섬김은 어쩔수 없는 상황으로 체념해버리고 감내해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님의 필요를 위해 내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내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내 생명까지도 내어놓는 것이다. 형제의 영적 소생을 위해 주님처럼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형제의 생명을 위해 내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내 소유권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소유권포기를 의미하지 체념이나 자기비하가 결코 아니다.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거룩한 행위가 바로 섬김이다. 자기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한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기주장의지를 포기함, 생명의 버림, 소유권을 포기함, 마땅히 주장할 자기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함이 곧 섬김이다. 교회는 이러한 섬김의 행위로 말미암아 비로소 살아있는 유기체가 된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라고 말씀하신다. 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약의 섬김은 구약의 노예해방법인 희년법의 원리를 성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신 후에 안식일 법, 안식년 법, 희년법을 제정하심으로 노예를 쉬게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영속적인 노예가 있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치유와 축사사역으로 노예해방을 행동으로 시위하셨다. 죄와 질병과 귀신들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풀어놓아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고 희년운동이었다. 그리고 형제들 간에 용서못함과 상처와 문제와 거리감을 체념하는 ‘샤마니즘적이고 수동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형제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자발적인 십자가’를 질 것을 명령하심으로 교회 공동체 내에 ‘노예관계’가 없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를 용서못함은 형제를 나의 노예로 만드는 행위로 보셨고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천부께로부터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셨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은 자신을 종으로 형제를 주로 섬기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형제의 종인 것같이 섬김으로써 형제를 나의 노예로 만들지 않게 하는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상대방을 나의 노예로 만드는 세상나라의 구조적 모순에 도전하게 하셨다. 이러한 섬김의 공동체를 만드시는 것--이것이 당시 예수님이 생각하신 사회변혁의 전략이었다.
하나님나라와 관련해서 우리 주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어떻게 이 불을 댕기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의 잔을 마심으로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이것이 섬김의 원리이다. 불을 붙이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보좌를 버림), 생명을 버리는 일이 곧 섬김이다. 이 섬김에 따라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주어진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심으로 불을 붙이는 운동에 참여할 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주님의 섬김을 배운 제자들은 주님의 섬김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지만 노예를 자유케 하는 일에 스스로르 종으로 드리게 되었다. 그들의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불길은 전세계로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이 운동에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다.
※ 실천방향 life directions for community movement
① 꼼보엄마 이야기
② 생명을 위한 삶
③ 교회의 본질로서 나눔과 섬김이 회복되기를 위한 기도
④ 초대교회의 식탁공동체 원리
⑤ 교회치유하는 작은 공동체운동
⑥ 선교는 섬김이다
⑦ 보이지 않는 노예제도 근절
⑧ 토지소유권 내어놓기
⑨ 불로소득 공동체로 환수하기
⑩ 노동의 즐거움 회복하는 교회활동
III. 결 론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자기 재산을 서로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복음을 서로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성령의 교제하게 하심을 누리는 공동체이다.
죄와 세상과 마귀와의 교제를 거부하는 공동체이다.
예수님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공동체이다.
서로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공동체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나라를 위한 동역자들의 모임이다.
나눔으로 섬기는 공동체이다.
식탁공동체이다.
섬기는 자들에 의해 유지되는 공동체이다.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성도와 나누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의 재산, 시간, 소유권, 복음, 그리스도의 고난, 등 전인격적인 모든 것이 포함된다. 나눔의 주체가 강조되면 섬김이 된다. 나눔과 섬김이 없이는 교회가 교회다와질수 없다. 참된 나눔과 섬김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 소유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결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해질 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Thy Kingdom come !
'기독교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정론 (강의안) (0) | 2012.04.05 |
---|---|
하나님의 주권 교리 (조나단 에드워즈) (0) | 2012.04.05 |
그리스도인의 권위 (강의안) (0) | 2012.04.05 |
예수님은 실존인물인가 (강의안) (0) | 2012.04.05 |
정경이란 무엇인가? (두번째) (0) | 2012.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