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예수님은 실존인물인가 (강의안)

등불지기 2012. 4. 5. 02:00

 

예전에 청년부 수련회를 인도할 때 전했던 강의안입니다.

변증훈련과 교리훈련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예수님은 실존인물인가?

I.서 론

(1)믿음은 어떤 것을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증거를 토대로 믿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역사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2)기독교신앙(믿음)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무시하면 신앙도 무너진다.

(3)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지식을 통제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는 보이도록 하셨으며 자신을 찾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호하게 하셨다.--Blaise Pascal

(4)성경을 읽을 때 철학적으로 읽지 말고 역사적으로 읽으라. 역사적으로 읽지 않고 철학적으로 읽으려고 하기 때문에 혼동이 생기는 것임: 예)복음서에 일치되지 않는 부분들은 역사적으로 읽으면 오히려 신빙성 있는 문헌이라는 증거가 되지만 철학적으로 읽으면 성경을 믿을 수 없는 책이 되고 만다. 역사적 안목이 결여될 때 오해와 혼동이 생긴다.

(5)

II.본 론

1. 예수님은 과연 실존인물인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도 알 수 있는가?

이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는가? 당연한 사실조차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도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품고 있는 질문들에 대해 오늘 다루고자 한다. 이런 시도를 변증학이라고 부른다. 오늘은 변증학의 진수를 보여주겠다.

(1)예수님에 대한 성경외 기록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생각해볼 때 그 이유는 당연한 것이다. 1세기 로마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하찮은 인물이었다. 외지고 별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지방에서 설교자와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약간의 지역적 관심을 끌었던,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의 총독의 명령에 따라 정당하게 처형을 당한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었던 사람이 로마의 주요 뉴스로 언급되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로마세계는 종교적인 랍비나 초자연적인 현상(기적)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무장한 세력이라면 아마 충분한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로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기독교의 확장 소식은 로마세계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기독교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요한 뉴스거리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못했다.

(2)기독교회가 1세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은 1세기 기독교회의 존재에 대해서 더더욱 의심해야 한다.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라고 할 수 없다, 즉, 성경외적인 증거가 부족하다고 예수님이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성경외적인 증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실존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성경 외에도 찾아 볼 수 있다.

(3)성경외적인 언급은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보도는 성경에 흘러 들어갔을 것이고, 반대로 부정적인 증거는 비신자들이 날조했을 것이다. 실존하신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자료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모호하거나 부정적인 표현은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4)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기록이 있는가? 물론이다!

① 주후 50여 년경에 활동했던 탈루스란 학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임했던 어두움을 태양의 일식현상으로 해석했다. 이에 대해서 3세기에 활동했던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란 사람은 이렇게 반대했다. “일식은 만월시에 일어날 수 없다. 왜냐면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만월 때에 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탈루스가 예수의 존재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실에 대해 부인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② 주후 140년에 쓴 플레곤의 연대기라는 작품을 보면, 십자가 사건에 동반된 어두움과 큰 지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는 넌크리스챤이지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달지 않았다. 예수님의 존재와 죽음을 이미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논쟁의 대상은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이지 존재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③ 요세푸스라는 유대인이 주후 93년경에 쓴 유대고대사를 보면 세례요한에 대해 여러 번 말하고 있다. 세례요한에 대한 언급들은 복음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또한, 요세푸는 자신의 책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아스가 산헤드린 재판을 소집하고 소위 그리스도라 불리우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몇몇 다른 사람들을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죄목을 씌워 돌로 쳐죽이라고 넘겨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당시 예수란 사람은 ‘그리스도(메시야)라 불린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대한 언급 역시 복음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쓴 유대고대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 당시에 예수가 살았는데 만일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한 것이라면 그는 지혜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 사람이었으며 기쁨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자신에게로 나아오게 했다.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들 중, 주요 인물들의 고소에 따라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형을 선고했을 때, 그 무엇보다도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죽은 지 사흘만에 그는 다시 살아나 그들에게 나타났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러한 일들과 그에 관한 그 밖의 셀 수 없는 일들을 예언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따라 이름이 붙여진 그리스도교인 지파는 오늘까지 소멸되지 않고 있다.”

④플리니가 주후 112년에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불신자가 본 기독교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플리니는 자신이 기독교인들을 예수님을 신앙한다는 이유로 처벌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기독교도라는 죄목으로 체포당해 제 앞에 끌려온 자들을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아서 처벌했습니다. 소신은 먼저 피고인들에게 그들이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인가를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경우에는 형벌에 대한 경고를 한 후에 두 번, 세 번까지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경우에는 그들을 처형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본질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들의 고집과 꺾이지 않는 오만은 어쨌든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소신이 로마로 이송하여 그곳에서 재판을 받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 글을 계속 읽어보면 수많은 1세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너무나도 확신한 나머지 자기들이 받을 처형을 눈앞에 두고도 그 확신들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⑤ 주후 52년경에 태어난 타키투스는 베스파시안 황제 아래 원로원의 의원이자 집정관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주후 116년에 쓴 책에서 이런 글이 있다.

“...네로는 그 소문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그 악습으로 인하여 혐오의 대상이 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무리들을 범인들로 몰아붙여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들을 처형하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기초자인 ‘그리스도’는 디베료(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에 있던 행정 장관 본디오 빌라도의 선고로 처형을 받은 자이다. 이로 인해 이 유해한 사교는 한동안 주춤했으나 다시 새롭게 일어나 그 발상지인 유대에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도 잡스러운 것들이 모여 있는 로마에서도 번성하게 되었다. 그 후 맨 먼저 그 분파의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체포됐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들의 자백에 따라 수많은 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방화혐의 때문이라기보다는 인류에 대한 증오를 갖고 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이들은 군중들의 희롱과 오락의 대상으로 처형되었다. 이들은 짐승들의 가죽을 덮어 쓴 채 개에게 갈갈이 찢겨 죽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하였으며, 혹은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해 횃불 대신에 태워지기도 하였다. 네로는 이러한 구경거리를 위해 자기의 정원을 개방하였으며, 또한 사유 극장 안에서 이러한 참극을 연출하였고, 전차를 타고서 군중들 속으로 휩쓸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가장 극형을 받기에 족한 이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모든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야만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희생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글을 통해 우리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가 죽은 지 불과 30년 후에 예수가 자기들을 위해 살고,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확신을 인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확실한 역사적 증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존재와 죽음을 의심하기보다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외에도 예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출현에 대해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다른 많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하드리안, 수에토니우스, 루시안, 세라피온, 등) 불신자였던 이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지 16--30년 이내에 로마제국전체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즉각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날조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과장한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넌크리스챤으로서 과장하거나 날조할 아무런 동기가 없다.

⑥유대인 랍비들의 글에서도 예수님의 실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유대인들이 개입했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많은 기적들을 행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유월절 전날에 그들(유대인들)이 예수를 매달았다. 그리고 그에 앞서서 한 선포자가 나가서 40일 동안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는 마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미혹하고 오도하였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에게 유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와서 그를 위하여 변호하게 하라. 그러나 그에게 유리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유월절 전날에 매달았다.”

이 외에도 주후 70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바라이타라는 랍비의 글에서는 예수에게는 5명의 제자들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 수많은 초기 유대 랍비들의 글을 보면 예수라는 인물이 신화나 전설에 속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없다. 가장 초기의 랍비의 글에는 예수의 삶과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이름은 나사렛 예수였다. 그는 마술을 행했으며, 이스라엘을 미혹하여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다. 그는 현자들의 말을 조롱하였다. 그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였다. 그는 다섯 명의 제자들을 두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율법을 제하거나 더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우연히 안식일과 맞아 떨어졌던 유월절 전날에 거짓 스승과 미혹하는 자라는 죄목으로 매달려 죽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그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였다”

랍비들의 글에는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내용은 많이 있어도 예수님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든가 혹은 신화의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2. 그러면, 예수님을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신약성경)은 과연 믿을만 한가?(부정적 질문에 대한 답변)

(1)4복음서는 정말 그들이 기록했는가?

그렇다. 아니라면, 4복음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지어냈다면 ‘마태, 마가, 누가’ 보다는 베드로나 빌립, 야고보나 마리아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2)혹시, 4복음서를 그들이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①내용상 증거: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와 함께 세부적인 사항들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대의 다른 기록들에게 찾을 수 있는 미사여구나 신화적인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②내용상 증거(II): 복음서들이 서로 똑같았다면 서로 사전에 입을 맞추었다는 의심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사전에 합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서로의 글을 베낀 흔적이 없다. 이것이 역사가와 철학가가 글을 보는 차이점이다.

③역사상 증거: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은 유대인으로서(마태,마가,요한) 유대적 배경과 유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라났다. 그들이 전혀 유대적이지 않는 다른 글을 무엇 때문에 만들어내려고 생각했을까?

④심리상 증거: 예수를 목격한 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모두 자기들이 믿는 내용 때문에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인격이 거짓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른 코란경이나 몰몬경과 같은 종교문헌들과 다른 점이다.

(3)과연 4복음서는 흠 없이 보존되었는가?

1)원본이 없다고 해서 지금 성경이 오류가 많다고 볼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는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원본에서 베낀 것이었다. 베끼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길 가능성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베낀 사본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크게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더구나 다른고대 원문과 사본들간의 간격은 500--1,000년의 간격이 있지만 성경의 사본은 원본과 시간적인 간격이 매우 좁다. 호머의 일리어드라는 글은 성경 다음으로 많은 사본을 가지고 있는데 약 650개를 가지고 있다. 원본과 사본들의 간격은 약 1,000년이 있다. 반면 신약성경의 사본은 약 22,000개 이상이 존재한다. 신약성경 중에 가장 오래된 사본은 요한복음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사본으로 연대가 주후 100년에서 150년 사이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200년경의 사본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런 많은 사본들을 살펴보면 다른 고대 문학작품들에 비해서 신약성경이 매우 충실하게 전해져내려 왔다고 확신할 수 있다. 사실 원본과 사본 사이의 시간 간격이 신약성경만큼 짧은 책은 없으며, 신약성경만큼 풍부한 사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만큼 믿을만한 문헌은 없다는 것이며, 성경이 정확하게 필사되고 번역되고 있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성경해석이 원문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신조나 교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이다.

2)사본상에 나타난 많은 차이점은 심각한가?

아니다. 고대문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사본상의 차이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국어나 영어에 비해서 그리스어는 단어의 나열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사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차이점 때문에 기독교 교리가 혼란에 빠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사본이 그만큼 순수하게 보존되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3)왜 다른 외경복음서들은 제외되었는가?

스스로 제외되었다. 첫째, 사도성이 있는가, 둘째, 복음의 권위가 있는가, 셋째, 교회가 일반적으로 인정했는가의 여부로 판단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의 내용이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인정되지 않았다. 교회지도자들은 교회가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을 공식적으로 공포한 것뿐이었다. 그만큼 성경은 매우 엄격한 심사와 기준을 통과했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4)성경에 기록된 것이 믿을만하다는 증거가 또 있는가?

① 있다. 고고학이 바로 그것이다. 고고학의 발굴작업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못했지만 성경에 기록한 내용(지명, 인명, 사건)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틀린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 것은 한번도 없었다.

② 호머의 일리어드에 나오는 트로이를 하인리히 슐리만이란 사람이 찾아내었다고 떠들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내용대로 발굴되었다고 해서 세상은 놀라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것에 더욱 놀라게 된다. 그만큼 세상은 성경의 진위에 대해 회의적이다. 세상은 고고학이 몰몬교를 쓸모 없게 만들었는데도 놀라지 않는다. 몰몬경에 나오는 어떤 도시, 국가, 인물도 발굴되지 못했다. 몰몬경은 날조된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성경보다 몰몬경을 더 믿는다. 역사적 허구를 증명해도 그들의 믿음은 확고하다. 왜 그럴까?

③ 특히 고고학이 공헌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많은 이론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사람이 만들어내고 조작한 날조된 이야기로 주장하는데 고고학은 그들의 주장이 오히려 신빙성이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만약 외경과 몰몬경과 같이 (성경이) 날조된 이야기라면 고고학적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고학은 그것의 허구를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복음서와 신화의 차이가 무엇인가? (복음서가 신화라는 주장에 대해서)

우선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어보고, 그리고 신화도 진지하게 읽어 보라. 그리고 서로 비교해 보라. 사람들은 서로 차이를 비교해보지도 않은 채 성경을 신화로 매도해버리고 만다. 왜 그럴까? 그들 마음속에 성경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자, 신화와 전설이 보여주는 특징이 무엇일까?

신화나 설화, 혹은 전설에 나타나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①자연의 주기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다.(성장, 소멸, 죽음, 재생이라는 과정에 큰 의미를 부여함)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요소가 거의 없다.

②뛰어난 인물의 우월한 특징을 설명하려는 시도(외경은 영웅담을 담고 있다.)

신화에는 신과 여인들의 동거가 나오지만 신약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신화적 출생과 동정녀탄생은 다르다.

③신비로운 의식과 절차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비밀스러운 의식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없다.

④역사적 근거가 결여됨(...전해진다....알려진다....라고 말해진다는 식의 표현)

그러나 신약성경은 애매모호한 표현이 없다.

⑤교리적인 관심보다는 감정적인 관심을 강조함

⑥신비적인 경험을 제공해줌

신약성경은 단지 십자가에서 죄를 위해 예수님이 치른 대가를 어린아이같이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

⑦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부활사상이 어느 외경에 있다고 외경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우기는 것은 억측이다. 우리는 반대로 보아야 한다. 외경이 성경에서 영향을 받아 날조된 이야기일 뿐이다.)

4. 성경의 기록들이 믿을만한 이유가 무엇인가?(긍정적 질문에 대한 답변)

(1)20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고고학적 발견들이 신약성경 사본들의 정확성을 입증해주었다.

①고고학은 우리에게 신약성경 본문이 정확하게 전달되었다는 증거들을 제공해준다.

②고고학은 신약성경이 주후 8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은 주후 40년에서 80년 사이의 세례 받은 유대인들이 기록했다.

③어떤 사람들(양식비평가들)은 구전의 기간이 길어 전승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하지만 전승의 변화를 일으킬 정도로 시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설이나 신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0년에서 5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려야 한다. 그러나 복음서가 한 세대 안에 기록되고 수집되었다는 것을 볼 때 이해가 안 된다. 신약성경은 부활사건이 발생한 후 수년 안에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20-40년 사이에 예수님의 말씀들이 구전으로 전달되면서 변형되거나 가감되거나 왜곡될 여지는 거의 없다.

④신약성경은 문헌의 정확도와 신뢰성이 모두 검증되고 검사된 치밀한 기준을 통과한 책들이다. 어떤 문서들을 믿으려면 그 신빙성을 검사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믿을만한지 검사도 해보지 않은 채 성경을 신빙성이 없는 책이라고 우기고 다른 외경을 더 신빙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 무엇을 보고 그렇게 믿는걸까?

앞서 말했듯이 신약성경의 사본들은 22,000개가 넘지만, 일리아드의 사본은 겨우 650개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성경의 권위보다 호머의 글을 더 믿을만한 것으로 인정하려고 한다. 왜 그럴까? 무엇을 보고 그렇게 보는걸까?

(2)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사건들의 목격자라는 사실이 신약성경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진리를 말하는 능력’은 증인이 기록된 사건들에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신약성경의 기록(내용)들은 그들 스스로가 증인들이거나 증인들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다. (눅1:1-3; 벧후1:16; 요일1:3; 요19:35을 찾아보자)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은 그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살던 동안에 회람되었다. 이것이신화화나 왜곡된 보도를 막아주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들은 틀림없이 그 기록들의 정확성을 확증하거나 부인할 수 있었다. 사도들은 복음에 대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할 때 예수님에 대한 상식에 호소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이것을 보았다” 혹은 “우리가 그것을 들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비난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여러분 역시도 이 일을 알고 있소. 여러분도 그것을 보았소,”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 행2:22과 26:24-28을 보라) 만약 거짓을 기록했다면 즉시 폭로될 것이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거짓을 기록할 수 없었다. 증인이요 목격자들이 하는 말이 날조된 이야기라면 즉시 교정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신화와 전승과 다른 점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문제가 되는 사건들의 증인들이 성경이 완성될 때까지 생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제자들이 편견과 선입견으로 내용을 날조했다면 숨겨야 마땅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즉, 사도들이 길에서 서로 다투었던 일, 예수님이 체포될 때 도망쳤던 일,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한 일, 예수가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말에 대한 언급, 자신의 사역에 대한 예수의 초기의 불확실한 태도, 미래에 대해서 무지한 제자들의 고백,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순간들, 십자가상에서의 절망적인 부르짖음 등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적을 부인하며 성경의 기록을 신빙성 없는 것으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그렇게 신약의 이야기를 날조한 사람들이 한 시대에 가장 도덕적이고 영감 넘치는 글을 기록했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이 굉장한 기적이 아닌가?

(3) 성경이 믿을만하다는 증거는 성경 밖에도 많이 있다.

1,2세기에는 성경의 기록을 정확하고 신빙성 있다고 증거 하는 문헌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성경이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고대의 다른 문헌들을 다 버려야 할 것이다. 성경이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조사한 후에 결론을 내려라. 사본의 증거, 역사적 증거들을 제공하는 다른 고대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증거들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은 증거들을 조사해보지도 않은 채 얄팍한 편견을 가지고 그렇게 맹목적으로 비판한다. 왜 그럴까? 왜 역사적 허구를 더 믿으려고 할까? 진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4) 성경이 믿을만하다는 증거는 증인들이 자기들의 증언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독교에 대해 도전하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여준 변화이다. 내가 만일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살았는가?”라고 묻거나 “세종대왕이 실존했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비웃듯이 “믿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라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증거를 통해 믿는 것이다. 결국 믿음이란 증거에 의존하는 것이다. 결국 어떤 증거가 더 신빙성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이순신 장군이 실존인물이라는 증거를 더 믿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더 믿는가? 분명한 것은 신약성경의 증거가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에 대한 증거보다 더 많고 더 확실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거가 믿을만한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2사도 중에서 최소한 11명이 예수님의 부활과 그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대한 믿음으로 순교했다는 사실을 보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마태는 칼에 맞아 죽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십자가에, 빌립도 십자가에, 시몬도 십자가에, 다대오는 화살에 맞아,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돌에 맞아, 도마는 창에 찔려, 바돌로매는 십자가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칼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에 의해서 죽어갔단 말인가? 물론 다른 종파에서도 순교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사건의 증인이라 주장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죽어갔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일이다. 자신들이 거짓말을 지어내 놓고선 그 거짓말 때문에 죽음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성경의 기록자들은 모두 목격자들임을 기억하라. 더구나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의심하고, 저주까지 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예수의 형제로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요7:5참조) 그는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가 신앙을 이유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기독교를 핍박하고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을 자청해서 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예수님의 부활신앙으로 순교하였다. 만일 부활이 거짓이라면, 신약성경을 기록한 자들은 그것을 마음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1세기 문헌에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순수하고 엄격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부활의 주님이 의심하고 낙심하고 슬퍼하고 비난하고 도망가던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제자들의 담대한 행동을 보라. 그러한 행동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간 다음에 일어났음을 볼 때 그들이 위선적으로 행동하거나 사기행각을 벌인다고 볼 수 없게 만든다. (베드로의 담대함을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죽음과 갖은 위협에 담대히 맞설 수 있었겠는가? 제자들이 사기꾼이라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문제가 더 꼬이는 것을 볼 것이다. 십자가 사건 시에 흩어진 자들이 무슨 이유로 다시 며칠만에 다시 십자가의 피가 마르지 않은 곳에 다시 모일 수 있었단 말인가?

(5) 성경이 믿을만한 이유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들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그들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만 해도 그들은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에게 ‘죽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전혀 없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그를 버리고 도망갔던 이유이다. 그들은 메시야가 자신의 원수를 정복하는 자라는 생각에만 너무나 철저하게 물들어 있었던 나머지 그가 빌라도의 손안에서 채찍질을 당함으로 찢기고 피를 흘리는 무능력한 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가 일반 죄수의 한 사람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모습을 보았을 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모든 메시야적 희망을 산산히 흩어져 버렸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것ㄱ만을 들을 뿐이라는 것은 심리학적 사실이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들은 귀머거리들의 귀에 떨어졌다. 제자들은 예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제자들은 그들이 이전에 품었던 의심하는 태도와는 반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구원자이자 하나님, 그리고 메시야로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고전15:5의 “보이시고....”란 구절이다. 이 사실 이외에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이 낙심한 제자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메시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음을 감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 때문에 죽어갔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합당한 이유가 그들의 죽음을 통해 분명히 역사 속에서 입증되었다.

(6) 성경이 믿을만한 가장 큰 이유는 성경 스스로가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1)딤후3:15-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2)벧후1:20,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3)기록되었으되

(4)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5)“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다가 망하느니라”

(6)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니라

III. 결 론

(1)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인 증거 위에 기초하고 있다.

(2)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과 무오성에 근거하고 있다.

(3)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4)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만큼 확실한 역사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자기주장이 실로 엄청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가장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대해 어떻게 하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말이 더 신뢰할만한가? 아니면 예수님의 말인가? 당신은 그 역사적 신뢰성을 보고 판단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안고 있는 역사적 증거들을 살펴보고, 다른 것과 비교해보고 판단해보라.

그리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당당하고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