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을 이해시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왜냐면 예정론은 '이론'이 아니라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예정론은 구원의 확신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정론과 구원의 확신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카톨릭은 예정론 교리를 사단의 교리라고 정죄합니다만
예정론이야말로 개신교 교리에서 아주 중요한 교리이지요..
20여년 전에 쓴 강의안이라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많이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예정론
본문: 롬8:29,30, 엡1:4-6, 계20:15
“예정론”=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논술한 교리, 가장 영광스러운 교리!! 가장 복된 확신을 얻게 하는 주의 말씀!!
주의사항
구원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는 지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구원은 이러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원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개념 역시 바로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수많은 이단들의 장난과 거짓 영들의 역사 때문이다. 교회를 어둠의 영들과 온갖 거짓말로부터 보호하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른 믿음과 동시에 바른 믿음의 도(교리)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사실 구원론과 예정론은 사촌관계처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나 예정이나 마찬가지로 모두 철학이나 논리나 이성으로 이해되어질 것이 아니다. 왜냐면 구원의 영광에 대한 감격스러움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정론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곧 구원의 감격을 갖는다는 말과 동일하다. 구원의 영광스러움을 아는 사람은 예정론을 바로 이해한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예정론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구원의 영광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겠다.(벧전1:8참조)
예정론을 바로 이해했다는 증거들
구원론을 바로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는 크게 두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감사와 찬송의 삶
둘째, 복음전도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깨닫는 삶
만약 이러한 열매를 낳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예정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만약 예정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 두가지 열매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예정이란 무엇인가?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포함될(구원받을)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예정하신 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제한속죄)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인가?
예정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첫째, 예정론은 운명론이 아니다.
예정론과 운명론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운명론(힌두이즘, 이슬람주의)은 장래의 운명은 결정되었으며 그 종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예정론은 우리의 장래 운명과 종말에 대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운명론과 예정론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에정론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장래에 대해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
둘째, 예정론은 결정론이 아니다.
결정론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이며, 어느 대학에 진학하며, 누구와 결혼하도록 하나님께서 다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예정론을 앞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킬 자들을 미리 정하셨지만 구체적인 행동양식까지 다 기계적으로 결정하신 것은 아니다.
기타, 예정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들
첫째, 예정론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국한시키는 경우
둘째, 예정론을 칼빈의 ‘학설’로만 국한시키는 경우
셋째, 예정론을 부도덕한 삶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갈라디아니즘)
구속언약
예정론을 바로 이해하려면 구속 언약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구속언약이란 무엇인가?
※구속언약이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협정이다. 영원 전, 세상을 창조하시기 훨씬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의 보증으로 맺으신 언약이 있었다.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맺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이 아니었다. 성부와 성자 간의 영원한 협정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탁월한 위치를 부여하시려고 작정하시기 이전에 세우신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최고의 작품으로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시기 이전부터 사람이 타락하여 범죄 할 것을 미리 아셨다. 그리고 그 대책을 논의하셨다. 그 논의가 바로 구속언약인 것이다. 성부의 제안에 성자는 순종으로 답했다. 그리고 인류역사 속에서 성자는 자기의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다. 그리고 때가 되어 여자의 몸에서 나셨다. 그리고 때가 되어 자기의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런데 십자가에 막상 달리실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절규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실제로 버림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는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절규하셨다!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예정하신 자들을 대표하여 절규하셨다! 그러므로 이 절규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붙 붙는 하나님의 진노로 고민하시면서 토해내시는 예수님의 이 절규는 모든 버림받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이 택한(예정하신) 사람이라면 이 복음에 대해 감사와 감격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
예정의 핵심개념: 예정에는 구원의 전 과정이 포함된다!!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말은 이미 그를 완벽하게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이다. 만일 예정하신 어느 인생이 자신의 실수로 예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실패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예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예정과 우리가 받는 구원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 사도 바울의 글이다. 롬8:29,30-“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이 있다.
둘째, 하나님이 예정하신 의도가 있다. 그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
셋째,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은 반드시 부르신다.
넷째,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은 칭의와 영화를 한꺼번에 받은 것이다.
예정과 믿음의 관계는?
예지➜예정➜소명➜칭의➜영화(모두 과거완료된 시제임을 주목하라)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모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면 믿음은 어디에 포함되는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는가? 믿음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정직한 혹은 경건한 반응이다. 따라서 믿음은 소명과 칭의 사이에 존재한다. (반면, 회심, 중생, 성화는 사람의 반응이기 때문에 생략되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는가?
언제나 복음의 말씀으로 부르신다. 벧전1:22-25절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예정된 인생은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은 틀린 것이다. 복음전도가 없이 부르심에 응답할 인생은 하나도 없다. 이에 대해서 롬10:14절 이후를 읽어보라. 그러므로 복음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누가 예정되었는지를 스스로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해서 요10:4,5을 보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내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예정된 인생은 복음의 말씀에 감격으로 응답한다. 그러나 예정되지 못한 인생은 수없이 들어도 반응하지 못한다.(롬10장 참조)
두 종류의 인류: 양과 염소
누가 양인지, 누가 염소인지 어떻게 아는가?
양은 목자의 음성(복음)을 듣는다. 그러나 염소는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목자의 음성(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 그가 양인지 염소인지 알 수 있다. 당신은 양인가, 아니면 염소인가?
양이 염소가 될 수 없고, 염소가 양이 될 수 없다.
예정론을 다룸에 있어서 쟁점이 되는 문제들
하나님께서 왜 누구는 예정하시고 누구는 예정하지 않으셨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거할 자로서 모든 인생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일부만 선택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않고의 기준은 무엇인가? 예정하지 않은 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대한 책임이 없는가? 예정되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의 운명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손상이 가는가?
우리가 인정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않으신 인생들에 대해서 책임질 아무런 이유가 없으시다.
둘째, 하나님께서 기쁘게 얼마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셋째, 하나님께서 모두를 다 예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첫째, 선악과의 기능
선악과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훼손하는가? 아니다. 선악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즉 하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는 선한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선악과를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이 주가 되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 없이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은 죽음 그 자체임을 선악과는 가르쳐준다. 이를테면 부모가 길을 가는 어린 자녀들에게 이런 저런 말로 조심하라고 타이르는 것은 자녀의 자유를 손상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율법의 기능과 선악과의 기능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 가기 위함인가?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난 삶이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선악과와 생명나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자들은 ‘왜 하필 선악과를 만드셨는가?’에 집중한다. 그러나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창2:16절) 생명나무가 옆에 있다는 것은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에덴동산에 선악과만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충분한 이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생명나무뿐만 아니라 먹을 만한 유실수가 얼마나 많이 널려 있었는가를 생각지 않으려고 한다. 불공평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극히 공평하게 대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극히 선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꾀를 만들어내었다.
셋째, 마귀의 전략
뱀은 최초의 여자에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였다. ‘간교하다’는 것은 뱀이 동물들 중에서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 자들을 조심할지어다!! 마귀는 뱀의 육체를 빌어 여자에게 접근하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마귀는 여자에게 접근해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질문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에 대해 사람으로 하여금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케 만든다. 이 유혹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죄(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죄이다)를 범했다. 이에 마귀는 자신있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말했다. 마귀가 말한 것은 최초의 거짓말이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었다. 오늘날도 마귀의 전략을 계속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전략에 넘어가고 있다.
넷째, 선악과를 선택한 것은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스스로 영원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다른 동물들은 이러한 자유의지가 없다.) 하나님의 법에 자발적으로 순종할 의지도 있고 불순종할 의지도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고 선악과를 선택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곧 생명나무를 저버림이다. 인간의 의지는 순수하지만 인간은 많은 꾀를 지어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스스로 많은 꾀를 내어서 생명나무를 버리고 선악과를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를 묻기 이전에 인간이 왜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얼마나 불완전한가? 만약 내 의지와 결단과 행동이나 순간의 실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결정 나고, 영원한 운명이 판가름 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인간의 조건에 하나님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러한 구원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말은 인간의 조건에 달려 있지 않아야 참 구원이 된다. 내 행위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고, 내 행위에 따라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정은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아 창세전에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의 불완전한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대안이다. 인간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아시고 완벽한 대안을 마련해놓으신 다음에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예정하심은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속죄함을 받을 수 없다. 혹은 하늘의 비췸을 받고 말씀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의 제사가 없다고 했다. 만약 그가 양이라면 결코 이런 죄를 지을 수 없다. 염소라 할지라도 이런 ‘체험’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훼방할 수 있는가? 결코 없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 대해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정황을 보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힘입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있었던 바리새인이 성령을 훼방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 부지중에 성령을 훼방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훼방은 알고도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훼방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믿다가 타락하여 다시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떠한가?
분명 체험도 있다. 선지자 노릇도 했다. 직분을 맡아서 잘 수행도 했고, 귀신을 축출한 간증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경건의 모양’을 믿음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경건의 능력을 보아야 한다. 경건의 능력이란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믿음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 그물비유를 가르치셨을 때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 안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다수 포함될 것을 말씀하셨다. 예정 받지 못한 사람도 체험도, 직분도, 사역도, 간증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예정 받은 인생, 다시 말해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은 반드시 돌아온다. 반드시 참된 회개의 자리에 돌아온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심지어 저주까지 한 베드로가 회개의 자리로 돌아온 것을 보라. 그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룟유다를 보라. 그는 회개의 모양과 형식을 베드로보다 더 잘 갖추었지만 그는 실제적으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고, 돈을 돌려주며, 자신이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다고 양심선언을 하며 자백을 했지만 그는 결코 참된 회개의 자리에 오지 못했다.
참 믿음과 가짜 믿음을 구별하라.
우리는 참 믿음이 있는지 늘 점검해보아야 한다. 참 믿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간이나 함께 있었고, 그분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며, 많은 군중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결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참 믿음은 어떻게 갖는 것인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경건한 반응이라고 정의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은 언제나 말씀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겉모양(경건의 모양)만 보고 우리가 잘 믿는다고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경건하게 반응하는데서 생겨난다. 말씀이 없이 임의대로 만든 것은 다 불법이다.(마7:23절) 하나님의 부르심(복음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한가? 날마다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한다.”(마7:25)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은 언제나 참된 믿음을 소유한다. (주의할 것은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정되지 못한 사람은 믿음의 모양은 가질 수 있지만 결코 믿음의 내용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믿음의 내용이다. 말씀에 대한 그의 반응과 태도를 점검해보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구원이 없는가?
우리가 함부로 있다고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복음의 말씀이 그에게 전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롬10장 참조) 그래서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다운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사람을 통해 복된 소식을 전하게 하심으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신다.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구원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틀린 것이다! 전도 없이 구원은 없다! 전도 없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가? 말씀을 듣지 않고 어떻게 참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예정에 대한 손쉬운 예: 대기업 사장과 길거리 노숙자들!
남들로부터 인격적으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는 대기업 사장이 있었다. 그는 진실로 가난한 자들을 향한 애정과 긍휼이 있었다.(레미제라블을 보라) 그래서 그는 자기 회사 내의 종업원들을 시켜서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게 지시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회사의 카운터에 오면 연봉 3000 만 원짜리의 직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길거리로 나간 종업원들은 만나는 노숙자들마다 제안을 했다. 그러나 겨우 몇 명의 노숙자들만 반응을 했을 뿐, 대부분은 코웃음 치거나 비아냥거리거나 손가락질하거나 자기들의 현재 삶이 더 편하고 좋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말을 믿고 회사의 카운터를 찾아간 노숙자들은 그 경력과 실력에 아무런 상관이 없이 연봉 3,000만원의 직장을 보장받았다. 어느덧 몇 달이 지났을 때 새롭게 고용된 예전의 노숙자들 중 일부가 회사의 사장에 대해서 불만을 품게 되었다. “왜 자기들만 부르고 다른 노숙자들은 부르지 않는가?”
그의 옛 죄를 깨끗게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1:9)
이 비유는 마태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들은 시장에서 놀고 섰던 노숙자들이었다. 포도원 품군으로 들어간 자들이 ‘왜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느냐?’는 이유로 그 주인을 향하여 불만을 품는 것이 정당한가? 직원이 된 예전 노숙자들이 그 회사의 사장에 대해 법원에 고발할 수 있는가? 혹은 고용되지 못한 다른 노숙자들이 그 사장을 법원에다 고발할 수 있는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왜 진작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기 꾀에 배부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망각한다. 포도원 품군들을 보라. 먼저 와서 오랜 시간 동안 땀 흘리고 수고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한 것만 생각하고 자기들이 한때 노숙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들을 은혜로이 불러준 주인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불평 원망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이러한 타성에 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처음될 자가 많으리라는 주님의 경고를 우리는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한다. 죄사함의 감격을 잊어버리면 예정론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
예정론은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더 드러낸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두 번째 경우는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벧후1:10,11을 보라.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하심과 부르심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정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이 책임질 일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다 지옥에 보내실지라도 하나님은 아무런 책임도 없으시다. 아무도 하나님을 탓할 자는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지 않으시고 단 한 두 사람만 예정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다. 그리고 버림받는 자들은 하나님을 탓하거나 원망할 수 없다. 지옥에 들어가는 자들은 하나님 탓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죄를 탓할 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순간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발이 미끄러지는 순간’ 즉 실족하는 순간이다.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인간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평하고 있을 때 마귀는 교묘히 다가와서 우리를 유혹한다. 마귀의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게 되어진다. 최초에 아담과 하와가 말했던 것을 보라. 그런 다음에 거짓말을 우리 귀에 집어넣어준다.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거짓말이 내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탐심에 사로잡히고 정욕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본즉...”
어떻게 살아야 하라 것인가?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ㅔ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1:5-9)
기억하라.
➀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에는 예정에서부터 영화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다 구원을 받는다.
➁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불신자들 중에서 누가 예정되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십자가의 강도가 회심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➂당신이 예정된 사람이라면 그분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 확실히 다를 것이다. 당신이 예정된 자임을 분명히 하면서 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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