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는 교회가 되자!! (칼럼)

등불지기 2012. 4. 5. 03:53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는 한국교회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여러분은 10월 31일이 어떤 날인 지 알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날은 매우 가슴 벅찬 도전으로 기억 될 지도 모릅니다. 이 날은 개신교가 새롭게 거듭난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의 진정한 생일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때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한 무명의 수도사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교회 문앞에 95개조항의 성명문을 개혁의 깃발로 당당히 올린 후로 개신교회는 해마다 이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날을 모르면 개혁교회도 모른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기념비적인 날을 기념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지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하며, 주의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하며, 지금 우리는 개혁되지 않으면 안될 급박한 위기상황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힘찬 거보를 내딛기 전에 먼저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 지를 항상 확인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면 정확한 좌표인식이 없이 내딛는 모험적인 발걸음은 종종 우리를 치우치게 만들며 엉뚱한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절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교회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가 절기를 지키는 것은 교회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과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경험하는 것이 절기를 지키는 진정한 목적입니다. 이 절기의 중요성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늘 강조되고 있음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교회가 엄숙하게 지키는 절기를 교회력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교회력이라는 표현은 1589녀 루터교 목사인 요한 포마리우스(Johann Pomarius) 의 어느 설교집에 처음 나오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원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성만찬을 제정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사실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을 경축하는 엄숙한 절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교회 안에서 주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새롭게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참된 절기를 가질 특권이 있고, 거행할 책임이 있습니다. 신년절, 고난주간, 부활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많은 절기가 있지만 그 중에 가장 간과되고 있는 것이 저는 종교개혁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개혁 피로감에 젖어 있는 분명한 증거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요즘 신문에 ‘개혁피로’라는 말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계속 개혁을 시도해나가는데 웬지 힘이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다를까요? 개신교의 진정한 모토는 ‘semper reformanda’ 즉,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단히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이 땅에서 퇴출 및 워크아웃 등으로 구조조정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교회를 ‘부단히 계속 개혁되어야 할 주님의 몸’으로 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개혁이란 말을 꺼내는 것을 금기시한다면 무언가 잘못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루터는 필요합니다. 21세기를 열면서 교회는 500년 전 면죄부를 남발하던 그 때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면죄부 대신 값싼 은혜를 남발하지 않습니까? 영광스런 복음을 싸구려 신상품으로 전락시켜 세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직매매’는 수 십억의 돈을 뿌리는 총회나 교회세습의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 재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에 대해 우리 청년들은 과연 얼마나 분노하고 있으며 개탄하고 있으며 실로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주님께 울부짖고 있습니까? 이것이 내가 적응해야 할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전부일까요? 개혁의 깃발을 휘날리던 청년 루터의 기백이 오늘날 우리 청년부에 얼마나 찾아 볼 수 있을까요? 개혁은 거창한 운동성 모토가 아닙니다. 개혁은 우리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단히 자신을 개혁해야 할 엄숙한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절) 교회 역시 부단히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할 요청 앞에 서 있습니다. 개혁에 대한 부담감에서 해방하려고 시도하는 순간부터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한 한낱 평범한 조직체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 형제 자매 여러분! 개혁자가 되십시오. 스스로 개혁자로 간주하십시오. 그리고 개혁의 비전을 붙드십시오. 교회의 참다운 개혁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불쏘시게로 드리십시오. 자신을 먼저 개혁하는 일에 성공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그래야 남을 변화시키고 생명력 잃은 조직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런 주님의 교회를 탁월하게 섬겼던 개혁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전기와 사상에 대해 연구해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속에 불붙었던 개혁정신이 여러분 마음속에도 옮겨 붙도록 해보십시오. 개혁운동을 벌였던 선배개혁자들은 모두 위대한 영적 거인들로서 먼저 자신을 개혁하는 일에 탁월함을 입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자들입니다. 물론 한 사람의 개혁자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성급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영국에 위클리프가, 체코의 존 후스, 이탈리아의 왈도파가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루터 외에 쯔빙글리, 멜랑히톤, 부쳐, 불링거와 같은 개혁자들이 명멸했습니다. 바위에 계란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개혁자들의 도전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에 대한 일반 성도들의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고 루터는 단지 그 속에 불쏘시개로서 쓰임 받은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개혁의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기보다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개혁의 목표는 사도들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기초한 복음적 신앙 말이죠. 그리고 복음적 신앙이란 오직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우리의 구원이 보장된다는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의 삶을 주목하십시오. 그래서 지속적으로 개혁의 정신을 자신의 마음에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성과 감성과 영성의 칼을 부단히 날카롭게 갈아야 합니다.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챨스 스펄전과 같은 위대한 개혁 선배들이 말씀과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개혁 정신으로 무장했으며, 지성과 영성의 칼을 날카롭게 준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오직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알아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종교개혁주간을 우리의 진정한 절기로 삼읍시다. 우리는 이 절기에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만을 외쳤던 선배들의 외침소리를 다시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개혁교회의 현주소를 이해하고 우리의 좌표를 정확히 인식합시다. 우리에게 물려준 신앙의 유산들을 정확히 이해한 다음에 비로소 우리가 전진해야 할 미래를 함께 그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가슴 벅찬 부르심에 우리 함께 한 마음으로 응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