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참된 회심의 징표는 무엇인가? (죠지 휫필드 설교)

등불지기 2012. 4. 5. 04:01

 

회심에 대한 설교, 회심을 위한 설교 역시 점점 희박해져가는 듯 합니다.

죠지 휫필드의 '참된 회심의 징표'입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참된 회심의 징표 (Marks of a True Conversion)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3절)

 

천국에 관해 설교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모두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며 심판의 결과에 따라 영원히 흑망의 어둠 속에 거할 운명인 자도 있을 것이고 승천하여 은혜로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방탕하고 버려진 삶을 살면서도 죽게 될 때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이라는 그 곳에 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압니다. 저의 마음은, 저의 간절한 바람은, 아니 여러분 모두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제 기도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 여러분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을 때 하나님 나라에 가기를 원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님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열매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사후에 축복된 그곳에 가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현재 그들의 삶에서는 그 길로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심히 우려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또 누군가 우리를 진정한 기독교인인지 의심하면 심한 모욕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인다운 것인지에 대해선 너무나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떤 이유로 천국에 대한 소망들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지금 유감스럽게도 분열되어 있는 이런 저런 기독교 단체에 자신들이 속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들의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졌다고 말할 겁니다. 세례를 받은 이래로 줄곧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적해 왔으면서 말입니다. 이들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도록 허용되었고, 이들 이름이 교구 명부에 올라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하늘나라의 생명책에도 자신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썩어버릴 것에다 구원의 소망을 두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우리가 그저 선량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들은 이웃들로부터 남을 해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으며, 의심하지 않고, 죽을 때 행복해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without any hands in their death" 라고 한 것처럼 이런 사람들을 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정직하고 도덕적이고 또 공평히 행하며, 세상적 기준으로 나름대로 약간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 있어 그 본성이 비교적 선량하여 가난한 자에게 구제의 손길을 뻗치며, 일 년에 한두 번은 성찬을 받고, 외적으로는 술취하지도 않고 정직한 자를 세상 사람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존중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에 대해 의심없이 호의적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사명들을 감당하느라고 바쁩니다. 전형적으로 열심인 사람들이죠. 이들이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잘 살펴보면 이들의 머리 속에는 그리스도가 있지만 이들의 가슴 속에는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사악하고 기만적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 문 바로 옆에서 지옥으로 가게 될지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나 천국 문을 간신히 기어올라 문을 두드릴 정도로 가까이 오지만 결국 “정녕 나는 너를 모른다.”는 소릴 들으면서 버려지게 될지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소망을 확고히 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위로부터 거듭나지 아니하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중 엄숙하지 않은 게 없지만 그 중에서도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야말로 가장 엄숙한 선언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 말씀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전후 맥락으로 볼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라는 구절이 1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의 다른 많은 구절을 보더라도 이 시점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밝혔으며, 제자들도 어느 정도 이미 회심한 상태라고 봐야 합니다.

이 본문 말씀을 엄격하게 받아들인다면 이 말은 비록 미약한 상태이긴 하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미 형성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이미 맛보았지만 그들의 심중에는 여전히 너무나 죄악과 부패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해 옛사람의 모습이 그들에게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보다 획기적인 변화에 이들 심령에 일어나 성화되지 않는다면 이들이 하늘나라에 속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하늘나라는 외적으로 장엄한 모습에 있지 않았고 영적인 세계로 바로 여기서 시작되어 이후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특별히 제자들에게 향한 것이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는 이와 비슷한 선언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합니다. 특히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그렇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성도와 죄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한 부류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요, 다른 부류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부류입니다. 회심한 부류와 회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아마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는데, 들을 귀가 있고 순종하는 심령을 지녔다면 성도나 죄인 모두에게 이 말씀이 나름대로 유익할 줄 압니다.

첫째,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어떤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말하겠습니다.

둘째, 어린아이와 같은 기질이 좀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셋째, 자신의 심령에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번과 관련하여 말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어떤 측면에서 이해할 것인지 논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특수한 상황을 상정해 봅시다.

1. 이 말씀은 저나 여러분이나 가릴 것 없이 미래에 충분한 이유가 있는 성경적으로 합당한 행복한 상태를 소망하려면 먼저 어떤 눈에 띄는 엄청난 변화가 우리의 심령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온 어른들 중 단 한 사람도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 어머니 무릎 위에서 놀던 아이였던 때 이후 자신의 신체에 어떤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고 쉽게 고백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은 아닙니다만 그 변화라는 게 어떤 것입니까. 어떤 면에서는 과거의 자신과 동일합니다. 갈비뼈의 수가 같고 몸의 모양이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람에 있던 당신을 보았던 어떤 사람이 몇 년 동안 당신을 보지 못하다가 어른이 된 당신을 보았을 때 어릴 때의 당신 모습에서 너무나 많이 변해 있다면 당신을 거의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본몬의 말씀은 우리 몸이 어린아이 때부터 줄곧 큰 변화를 격게 되는 것처럼 천국에 갈 수 있기까지 우리 심령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물질적으로 여전히 과거와 동일한 상태에 있으며 어떤 철학적 변화가 우리 심령에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질이나 습관 그리고 행동양식 등과 관련해 보면 많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우리를 알던 사람이 어릴 때 이후 20년 동안 보지 못하다가 현재의 우리를 보면 알아 보지 못하고 우리의 변화된 상황에 그저 놀라 서 있게 되지요.

2.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좀더 다른 것을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은 아르미니아 교도 등이 강력하게 붙잡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악마가 성경 말씀들을 인용해 온당치 않은 원칙들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인용하는 까닭에 사탄 역시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온당치 않은 교리나 원칙들로 보다 나은 원칙과 교리를 폄하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열심히 부주의하고 불안정한 심령들을 공격합니다. 이들의 주장도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원죄의 교리는 하나님 말씀 중에 아주 쉽게 쓰여진 내용입니다. 달리는 사람도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정황을 보아도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빛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불명료한 이성의 희미한 빛을 받은 이교도들은 이 원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왜냐하면 그(원죄)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 뭔가 상처를 입고 있다고 느끼고 질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감히 원죄의 교리에 반대하고 또 인간의 모습을 암울하게 그리는 목회자들에게 본성이 못된 사람들이라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아담의 원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왜 그런가? 이들은 그 주장을 성경에서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 구절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저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태어날 때 텅 빈 백지 상태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 것이 된다. 아이가 사악한 피조물과 같다면 돌이키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회심도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친애하는 벗들이여, 이런 주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나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죄악의 상태에 있습니다. 죄악 속에 임신되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볼 때 명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합치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악 속에 잉태되었도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대해 말하면서 예레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기만으로 가득차 있고 절망적일 정도로 사악하도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같이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 구절 중 하나를 사도 바울이 인용합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가증스러우며 원래의 의의 길에서 전적으로 벗어나 있다. <본성상> 우리들 중 단 한 사람도 선하지 않도다. 단 한 사람도. (that we are altogether now become abominable, altogether gone out of the way of original righteousness, there is not one of us that doeth good (by nature), no not one." 지금 부모의 입장인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당신 자녀들이 세상에 태어난 그 순간 그에게서 원죄나 패역을 찾아낼 수 없고, 또 성인이 되어서도 특별히 자의식이나 선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없는데도 그런 아이들이 교훈에 대해 너무나 역겨워하고, 세상과 벗하는 관계로 선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성경에 근거해 볼 때 아이들이 원죄 속에 태어나고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진노의 자식임이 분명합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질병과 죽음이 왔습니다. 아이들이 병들거나 죽는 것은 하나님의 선함과 의로움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첫 범죄함이 아이들에게 덮씌워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의 죄를 아이에게 덮씌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 보라, 우리는 두 번째 아담을 갖게 되고 우리 자녀를 그 두 번째 아담에게 보내야 됩니다. (If any charge God with injustice for imputing Adam's sin to a little child, behold we have gotten a second Adam, to bring our children to him.)

따라서 주님께서 “돌이켜 어린아이 같지 되지 않으면”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인데 어린아이가 완전히 무죄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또 상식적인 의미에서 어린애들이 더 순수합니다. 어른과 비교해 보면 어린이는 순수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어린이의 모습 그 자체로 판단해야 합니다. 어린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들 나름대로 감각있는 hearts를 지니며 그들의 정신은 세속적입니다. 저는 지금 이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는 겁니다. 만약 부모들이 이 문제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절대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게 됩니다. 아이들의 마음이란 기본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한다면 그런 부모는 절대 자식을 무도회장이나 어떤 모임들 또는 극장 같은 곳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런 곳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 결과 아이들을 악마의 새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부모가 확실히 알고 세례를 받기 위해 자식들을 데려오기 전에 더 많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세례를 단순히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자식들이 죄악 속에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차라리 이런 간구를 항상 드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선량한 아주머니께서 항상 이렇게 간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 지옥이나 악마의 자식을 배지 않게 하소서. 오, 두렵지 않습니까. 심판날에 수많은 어린애들이 하나님 앞에, 또 천사들과 어른들 앞에 등장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하길 자신이 이토록 사악하게 된 것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교육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두 가지 특수한 경우를 알아 봤습니다. 이제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의 본 뜻이 무엇인지 알아 봅시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렇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우리들 중 누가 국무총리가 될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하나의 왕국을 다스리는 일은 고사하고 고기 그물을 해변에 끌어 되는 방법도 잘 몰랐던 이 가난한 어부들이 생각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절에서 제자들을 조용히 시키고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앉게 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불쌍한 피조물들아, 너희 생각이 참으로 높구나.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크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니. 이 어린아이가 너희들에게 설교를 하리라. 아니면 이 아이를 비유하여 너희에게 내가 설교를 하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리 자체인 나는 어떻게 해야 내 종들이 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너희 성질은 내 왕국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구나.)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 같지 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비유해서 말하건대, 너희는 내가 지금 손을 잡고 있는 이 아이와 같이 가능한 세상과 떨어지고, 왕관이나 왕의 상징인 홀(笏)이나 왕국 그밖에 여러 세속적인 것들과 떨어지지 않으면) 결코 내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때의 어린아이 자체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세상에 대한 야망과 탐욕과 연관된 것이며 그런 뜻에서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 어린 소년이나 소녀 없습니까? 그저 말이나 할 수 있는 수준인 평범한 어린아이에게 왕관이나 홀이나 왕국에 대해 물어 보십시오. 이 불쌍한 피조물은 그건 것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습니다. 소년이나 소녀에게 갖고 놀 조그마한 것 아무거나 하나 줘 보십시오. 그 아이는 세계를 전부 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즉 어린아이처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벗어야 합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가게 문을 닫고 사업을 내팽개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은둔자가 되어 세상을 등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등져봐야 당신 뒤에 숨어있는 사악한 마음에서 떠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제 사악한 마음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려는 곳 어디든지 따라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종교는 사회적 종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더러 세상 밖으로 가라고 하지 않고 가게 문을 닫으라고 하지 않고, 너희 자녀들을 예수님이 이적으로 먹여 살리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았지만 올곧은 기독교인은 이 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심하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속에 참여는 하고 우리 자녀들을 위해 생업에 종사해야 하지만 또 무역이나 상거래를 따르고 대영제국에 기여하게 되지만 우리가 진정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인 동일한 수준의 영적 상태에 도달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돌이켜(회심하여)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해 봅시다.

주님께서 우리가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 의미는 비유로 든 어린아이처럼 우리도 너무나 약하다는 점을 각별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린이를 볼 때 연약하고 불쌍한 창조물이라고 여깁니다. 매일 학교에 가서 새로운 내용을 배워야 하고 단순하면서서 순진하며, 음험하지도 않고, 위선이라 일컫는 그런 혐오스러운 인위적 작위행위도 모르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이런 모든 측면들을 다 고려하여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에 대해 민감합니까?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잡아줘야만 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넘어지나요? 그렇다면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가 돌이켜 하나님의 은총을 진정으로 마음 속에 담게 된다면 아무리 우리가 한때 우리 자신을 생각했고, 또 아무리 우쭐되며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하더라도 이제는 우리의 연약함을 민감하게 인식하고 더 이상 “우리는 부요하다. 재산이 날로 늘어난다. 부족한 게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린 내적으로 가난합니다. 우린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우린 가난하고, 비참하고, 눈이 멀었으며, 벌거벗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손을 내밀어 부모나 보모의 도움을 받듯이 진정으로 돌이켜 회심한 참된 기독교인인 사람은 세상에 이끌리던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이해능력과 의지와 자신의 감정을 주님의 섭리와 성령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말하면서 이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 자들이(이들만이) 하나님의 아들(자녀)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스스로 무지한 자라고 생각하듯이 회심한 자 역시 자신을 무지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에 대해 말할 때 요한은 기독교인들은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 어린아이들에게 편지했으니.” 그리고 기독교 무리를 작은 무리(little flock)이라 부르는데, 그 수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의 눈에도 어리게 보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요 수많은 심령들의 영적 아버지인 위대한 사람 사도 바울은 굳윈 박사의 의견대로 “영광 중에 있는 하나님에 가장 근접한 하나님-인간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합치한”자 인데 그 자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성도들 중 가장 작은 자라. 은총을 받아 그리스도의 무한히 풍부하심을 이방인들 중에 설교하노라.” 이 말씀을 읽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교만한 마음으로 바울의 마음을 판단하니 바울이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면 갈수록 거룩한 삶에 더더욱 깊이 참여하게 되고,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사악함을 더욱 직시하게 되며 자신의 눈으로 판단하는 일은 더욱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플래벨(Flavel) 씨는 그의 저서 「영적 영농」 (Husbandry Spiritualized)에서 젊은 기독교인들을 풋옥수수에 비유합니다. 옥수수가 성숙하기 전에는 하늘 높이 치솟고 속이 단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늙은(오래된) 기독교인들은 잘 익은 옥수수와 같습니다. 머리를 그렇게 높이 쳐들지도 않고 무게가 나가며 자르기 좋은 형태를 갖춥니다. 그래서 농부의 곳간에 쌓이게 되지요. 젊은 기독교인들은 또한 작은 시냇물과 같습니다. 개울물은 깊이 않지만 소리는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늙은 기독교인들은 깊은 강물처럼 시끄럽지 않고 부드럽게 큰 바다로 미끄러져 흘러갑니다.

어린아이들은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창조물이며 이 말은 대체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같이 되면 우리는 해롭지도 않고 음큼하지도 않은 자가 됩니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을 보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구나. 누가 이것을 보면 외치리라. “보라 참된 이스라엘사람이 있도다.” (As though it was a rare sight he gazed upon, and would have others gaze upon it “Behold an Israelite indeed.") 왜 그랬습니까? “그에게는 어떤 음험함이 없었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독교인들은 신중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신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미혹을 따르게 될지 모릅니다. 신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잘못 건드리게 됩니다. 어떤 위대한 인간은 다음과 같이 한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재능을 주셨지만 신중의 덕목은 주지 않으셨도다.” 그러므로 제가 기독교인은 음험하지 말라고 말할 때 자기를 드러내 모든 사람의 공격을 받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통상 실수와 신중하지 못한 행동을 통해 지혜를 배우지만 뱀의 지혜를 달라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중치 못함을 알기 전이라도 기독교적 신앙의 진전은 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어떤 철학자에 관한 다음 이야기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내 가슴에 창이 하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내 마음의 의로움과 의도를 알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어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회심하면 어떤 음험함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으며, 우리는 무해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가난한 기독교인이 그토록 자주 이용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And that is the reason why the poor Christian is too often imposed upon. 그는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에 비추어 판단합니다. 정직한 가슴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정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먹을 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나누려 합니다. It might enlarge upon each of these points. It is a copious and important truth. 하지만 많은 marks와 heads를 배가할 의도는 없습니다.

And therefore, as I have something to say by way of personal application, give me leave therefore, with the utmost tenderness, and at the same time with faithfulness, to call upon you, my dear friends. 오늘 본문 말씀은 매우 경이롭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도 말씀하고 계시고, 복음 설교를 듣고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교회에 모인 자들)과 우리 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많은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회심했는지 살펴보십시오. 회심이라는 엄청나고 전능한 변화가 당신의 심령에 일어났는지 확증해 보라는 말입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또 말하건대, 여러분 모두 천국에 가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천국에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런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제 심정은 오로지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하기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제 안에서 피가 납니다. 때로는 설교할 맛이 싹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 말씀이 효력을 발휘해 자신의 불신앙으로 인해 누구에게라도, 아마 청중 대부분이 해당되겠지만, 저주가 증대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참으로 신실하게 당신의 심령을 제게 맡기십시오. 제 손에 사망 증명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점을 분명히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그걸 지킬 것입니다. 이것은 미디아와 페르시아의 법과 같습니다. 절대 변경되지 않습니다. 들을지어다. 남자여! 오 들을지어다. 여자여! 들을 귀 있는 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한 바를 들을지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은 토일일 밤이고 당신들은 내일 안식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안식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외로운 경우를 최근에 우리는 보았습니다. 한 여자가 어제 죽었습니다. 한 남자는 어제 그저께 죽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지붕이 무너져 그만 죽었습니다. 24시간 여만에 여러분 중 다수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라로 옮겨질지 모릅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 자신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의향이 있다면 또 영원히 불타는 곳에 있고 싶지 않다면 제가 더 이상 말하기 전에 조용히 기도를 올리십시오. 아니, 제가 여러분 입을 대신하여 올리는 기도에 아멘하고 화답하십시오. “주여, 저를 조명하시고 저를 시험하소서. 주여, 제 마음을 살피사 제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오, 제가 회심했는지 아닌지 알게 하소서!”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당신은 지금 어떤 대답을 하십니까? 죄인인 여러분 당신은 뭐라고 말합니까? 죄악에 물든 형제여, 당신은 뭐라고 말하나요? 하나님께서 축복된 성령으로 당신의 심령에 그토록 놀라운 변화를 이루어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천사로 만들어줬느냐고 묻는 게 아닙니다. 그런 질문은 온당하지 않지요. 제가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다고 확고히 생각할 수 있는 온당한 소망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본성이 새로워지고 변화되었습니다. 제가 추측건대,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동안 습관적으로 형성되었던 제 성질과 마음의 지향이 사악함으로부터 벗어났도다. 내게는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으며, 가게도 있고, 사업에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사랑합니다.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합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거두어 간다면 내 습관적 마음의 기질에 따라 according to the habitual temper of my mind, 주여, 준비되어 있나이다. 제가 아무리 이런저런 것들을 사랑한다하더라도 천국에서 주님 외에 누구와 함께 하겠습니까? 주님과 비교한다 하더라도 오 나의 하나님과 구세주여, 제가 천국에서 누구를 가지겠습니까? 피조물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동시에 그 피조물들이 나의 구세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전 여러분이 제 설교 방식을 아시다피시 쉬운 말로 말합니다. 웅변가처럼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학자로 인정되기 원하지 않습니다. 제 설교가 가난한 자의 가슴에 도달하기를 원합니다.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은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나요? 당신이 본질상 가난하고 비참하고, 눈 멀고 벌거벗어다는 사실을 느끼시나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 당신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당신의 정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인지(이해) 능력을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손에 이끌릴 때 자신의 손을 선뜻 내주듯 포기합니까?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자신이 보잘 것 없어 보입니까? 당신 자신을 별볼일 없다고 생각합니까?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습니까? (회심한 증거로) 이런 징표를 제가 언급한 이유는 저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많고 그 능력에 더 쉽게 의지하려하기 때문입니다. because I am apt to believe they are more adapted to a great many of your capacities. A great many of you have not that showing of affection ye somethimes had, therefore ye are for giving up all your evidences, and making way for the devil's coming into your heart. You are not brought up to the mount as ye used to be. therefore ye conclude ye have no grace at all.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하였다면, 당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직시하고 알게 하였다면, 그대가 비록 위로 향하지 못하고 아래로 향하고 있다하더라도 또 그대가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가슴이 점점 비어가더라도 결과적으로 서서히 (다른 것으로) 더욱 풍성히 채워지게 됩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저를 따라 나설 수 있는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위로(평안)를 받으십시오.

당신이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었다면 전 당신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귀중한 식구로 환영합니다. 전 당신을 귀중한 우리 구세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자녀로 환영합니다. 오, 그대 소중한 영혼들아, 세상은 비록 그대 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여러분과 다른 사람 사이에 외적인 차이점은 없지만 저는 다른 시각에서 여러분을 바로 보노니, 그대들은 왕의 아들들이요 딸들이라. 모두 환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가 내 심령에서부터 오는 기쁨이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모두는 왕 중의 왕이신 분의 아들들이요 딸들입니다. 지금부터 어린아이와 같은 기질을 발휘하지 않으렵니까? 당신의 은밀한 죄악들 때문에(그 죄악은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지옥으로 보내야 하지만,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여러분을 저주해야 할 상황이지만 자신의 사랑을 여러분에게 덮씌우셨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녹아 내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남자, 이 여자를 살리라. 내가 그 죄값을 치르었다. 오, 당신은 울부짖지 않으렵니까? 왜 저인가요, 주님? 만약 조지 대왕(영국의 왕)이 사람을 보내 당신 아이들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면 그 소리를 들은 당신은 당신 아이들을 무척이나 명예롭고 자랑스럽게 여기겠지요? 바로의 딸이 파리루스 나무곽에서 발견된 모세를 취하여 그를 자기 아들로 삼아 키웠을 때 그 행위는 얼마나 겸손한 일이었던가요? 그렇지만 한때 마귀의 자식이었던 당신이 이제 회심의 은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당신의 경우와 비교해 본다면 모세의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당신은 회심했습니까? 당신은 어린아이같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일을 해야 하죠?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임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모두 사악하고 불순종의 아이를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십자가인지 알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 자녀가 당신에게 불순종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불순종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라면 그 분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라면 그 분께 예배하십시오. 전심을 다해, 모든 심령을 다해, 모든 힘을 다해 그 분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일에서 떠나십시오. 당신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걸으십시오. 회심하여 어린아이같이 되었다면 어린아이같이 행동하십시오. 그들은 어머니의 젖가슴을 찾고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당신은 새로 태어난 아기입니까? 그렇다면 잘 자랄 수 있도록 신실한 말씀의 우유를 갈구하십시오. 아르미아 교도의 외형이 여러분을 타락시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왕의 아들들이요 딸들입니다. 보다 더 세련된 향취를 누리십시오. 여러분은 은혜의 교리를 마땅히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신실한 말씀이 너무나 쉽게 설교되는 그런 나라에 거하는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있기 바랍니다. 당신은 어린이 입니까? 그러면 은혜와 여러분의 주님이시오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십시오. 여러분 중에 자라지 않은 자녀를 두신 분이 있습니까? 그런 아이 때문에 당신은 울고 애통하지 않습니까? 당신 아이는 이 세상에 전혀 적응하지 못할 것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자라지 않는 아이를 보면 당신은 슬퍼합니다. 그렇듯 당신이 너무나 작은 것을 그리스도께서 본다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언제까지나 어린이로 있을 작정입니까? 기독교의 초보적 교훈만을 늘 배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매한 소명이라는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이정표mark로 향해 절대 나아가지 않을 겁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당신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 제가 자라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더 배울 수 있도록 도우시고, 저의 진보를 모두 알게 하소서!”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회심하여 어린아이처럼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당신에게 하듯이 당신도 하나님께 하십시오. 무엇을 원하든 말하십시오. 만약 누군가 아이들을 해치려하면, 그 아이는 곧바로 자기 부모에게로 달려갑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그렇게 하십시오. 정녕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악마가 당신을 괴롭힙니까? 세상이 당신을 괴롭게 합니까? 가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직접 하나님께 가서 불평을 토로하십시오. 아마 말을 하되 세련된 말을 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당신 자녀가 세련된 말을 하리라 기대하는 분이 있습니까? 당신 자녀들이 울며 와 반쯤 얼버무리며 말해도 당신 마음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어떤 신호만 보내도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불쌍히 여기듯이 주님께서도 주님을 경외하는 자기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be gold with your Father이기를 기도합니다. 사탄이 절 괴롭힙니다. 세상이 절 괴롭힙니다. 제 모친의 아이들(형제들)이 저에게 화를 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제가 하는 일이 옳다 변호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회심하여 어린아이같이 되어 하나님 가족으로 들어갔습니까? 그러면 스스로 확증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나 저제나 당신을 단련시킬 것입니다. “어떤 아들에게 아버지가 징계를 가하지 않는가. 너희 모두는 징계를 받는 자라. 징계를 당하지 않는다면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라.”다음은 라티머 주교에 관한 기록입니다. 라티너 주교가 하숙을 하려고 어느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 주인이 하는 말이 자신은 평생동안 단 하나의 십자가도 지지 않았다는 것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라티머 주교는 ‘오 이런 여기에 머물러선 안 되겠군.’했답니다. 제 믿는 바로는 하나님의 자식은 온전한 삶 속에서도 큰 겸손을 위해 줄곧 기도하고 큰 믿음을 위해 줄곧 기도하고, 큰 사랑을 위해서도 줄곧 기도하고 성령의 모든 은총을 위해 늘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할 때 주님께선 큰 시련들도 보낸다는 사실을 압니까? 당신이 큰 믿음과 겸손과 사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큰 시련을 주지 않으시면 당신이 큰 믿음과 사랑과 겸손을 지녔는지 그렇지 않은지 긴가민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대부분 큰 시련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을 때 많은 경우 시련은 하나의 유혹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즉 회심하여 어린아이처럼 되었다면 하나님이 바보스러운 부모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여 자기의 회초리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미리암을 바르게 고쳤습니까? 어떻게 모세를 세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를 통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녀들을 바르게 세우셨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이 회심하여 어린아이같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식이나 다른 소중한 것을 가져간다고 해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십시오. 만약 친구들이 당신을 버리더라도 또 당신이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더라도 주여,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하십시오. 내가 완악한 자식이라 하나님이 아니라면 나를 이토록 자주 이토록 엄하게 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비난하지 말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부드러운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 고통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을 때 관목 숲에서 말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모세, 이 관목 숲은 내 백성을 나타낸다. 이 숲이 불로 타듯 내 자식들도 고통으로 타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숲에 있나니, 이 숲이 타면 나도 더불어 타리라. 내가 용광로 속에 저들과 함께 있으리라. 내가 물 속에 저들과 함께 있으리라. 물이 저들에게 넘쳐 올지라도 저들을 삼키지 못하리라.”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당신은 회심하여 어린아이같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집에 가서 당신의 하나님 아버지를 뵙고 싶지 않은가요? 오 당신보다 앞서 집에 이른 자들은 행복하도다. 저기 천국에 올라간 자는 복되도다. 이 갈등의 땅에서 승천한 자는 복되도다. 여러분은 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로선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이 기쁘게 역사한 심령들은 영광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슬픔으로 가득차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본향 집에 가지 못하게 하니까요. 하나님의 백성 중에 그런 냉정함을 어찌 볼 수 있습니까? How can you see so much coldness among God's people? 기우는 달과 같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How can you see God's people like the moon, waxing and waning? 누가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때가 곧 오리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주님이 올 것이며 지체하지 않으리라.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에 맞춰 여러분을 본향으로 데려가십니다. 지금 당장의 보상이 부족하다고, 또 현 상황이 힘들다고 푸념하지 마십시오. 노랗게 구운 빵을 가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너무나 풍요롭도다 a God, and the gospel of Christ, with brown bread, are great riches.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충분합니다.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어도 점차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천사가 그대를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비록 이곳에서는 나자로에 불과하지만 그대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길 것입니다. 지금의 내 심정대로 말하라고 하면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편안하게(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 하나 더 말하고 싶은 당신이 회심하여 어린아이같이 되었다면 하나님을 위해 아이들이 자주 하는 짓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서로 싸웁니다. 오 제발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이 실족할 위험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떠날 때 “fall not out by the way"라 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동일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같은 곳으로 갑니다. 왜 서로 다릅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대적할 거리가 많고 마귀도 우리에게 대적할 거리가 많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오, 사랑 안에 걸으세요. 제가 더 이상 설교할 수 없다면, 내 설교의 끝을 마무리지을 수 없다면 요한이 했듯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요한이 늙어 설교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끼리 서로 다른 점들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날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 우리가 천국에 갈 때가 가깝습니다. O hasten that time, when we shall either go to heaven, 더 이상 다투지 마세요.

하나님께 (지금 말하고 있는) 이 편안한 언어로 여러분 모두에 대해 말하고(증거하고) 싶지만 주인은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러니 지금 제가 편안하게 말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결국, 특히 후반부 이야기는, 자녀된 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속해 있습니다. 여러분 중 누가 은혜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고, 회심하지도 않은 피조물이라면 이 말씀을 건드리지 말라고 당신을 막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울타리를 쳐 지키겠습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돌이키기 전에는 이 생명의 떡에 당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불타는 검이 모든 방향으로 빙빙 돌며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사람이 회심하지 않았고 은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집으로 가십시오. 골방으로 물러나 당신의 그 완고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낮추십시오. 이전에 그러지 못했으면 오늘밤에 하십시오. 아니,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지금 시작하십시오. 여기 서 있는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대 가슴에서 나오는 말 그대로 나오게 하시고, 주님이 당신을 돌이키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 날 어린아이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 주 예수님이 주님의 왕국에서 나를 추방하지 않도록 간구하십시오. 친애하는 벗들이여, 오늘 본문 말씀에는 겉으로 표현된 것 이상으로 함축된 것이 많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은 곧 “너는 분명히 지옥에 가리라, 너는 분명히 저주받으리라, 영원히 흑암의 어둠 속에 거하라리, 벌레도 죽지 않고, 불길도 꺼지지 않는 그 곳에 너는 가리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이 의미를 여러분 심령에 각인시키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이 최근에 제게 보낸 편지에 쓰여진 내용을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담긴 화살이 회심하지 않은 모든 죄인의 가슴에 이르기를 간구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여기 모인 여러분 모든 심령에 본문 말씀을 이루시길! 이걸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분 뿐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서 떠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영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당신이 가 오, 주여 나에게 돌이키소서, 라고 말하게 된다면! If you will go and say, turn me, O my God! 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돌아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제 설교로 당신을 하나님께로 오게 할 수 있다면, 논쟁으로 당신을 유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 이야기는 한 밤중까지도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이유도 없이 절 미워할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모임에 온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나 자신은 이런 여러분에 대해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 내 머리가 온통 물이고, 오, 내 두 눈이 눈물의 샘물이라면 회심하지 않고 은혜도 없고 사악하고 간음하는 세대를 위해 울고 또 울어주련만. 너무나 소중한 영혼들이여, 회심하지 않고 당신이 죽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혼인 예복도 없이 죽게 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말없이 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면전에서 영원토록 추방당할 것입니다. 영원한 불과 함께 당신은 거할 수밖에 없다는 걸 저는 압니다. 그럼 보십시오. 제가 그 불을 피할 방법을 당신에게 보여드립니다. 예수님이 그 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당신을 회심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영으로 회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 모두에게 성령을 주어 당신을 회심시키고 그리하여 우리 모두 그의 천국에서 만나 절대 다시 헤어지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바로 그대로 될지어다. 우리 주 예수님이여,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