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제가 수원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때 멜 깁슨이 만든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시사회에 초대된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못하고 찜찜했었는데 영화가 끝난 후 집에 돌아오자 마자 영화를 본 소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교리] 란에 올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로카 카톨릭적 접근법과 개혁주의적 접근법이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비평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소 딱딱한 부분이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주간 금요일(Good Friday)을 맞이하여 적절한 듯 싶어 올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고 묵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리더나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평을 올립니다.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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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의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를 보고서...
영화 배우 멜 깁슨이 유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재 2,500만불을 투자하여 만든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종교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재의 수요일이라고 불리는 지난 2월 25일 전미에 개봉되어서 미국 전역에서 3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으며, 부활절까지 수입예상액이 4억불을 웃돌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춘 이번 영화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큰 호응과 지지를 받았으며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 영화를 보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영화에 대한 복음주의적인 비평이 한번이라도 제대로 내려졌는가에 대해서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맹목적인 수용과 찬사가 가져다주는 어떤 위험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수원 CGV에서 목회자를 대상으로 열린 시사회에 초대를 받아 아내와 함께 무료로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개봉하기 하루 전날에 시사회에 초대받는다는 것이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특권이라 생각하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주의 깊게 보면서 수많은 크리스챤 형제자매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릴 것을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고서 느낀 것을 정리하여 제 나름대로 보고서를 올리는 것이 필요하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짜로 영화를 본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하겠지요^^
우선 이 영화에 대해서 일반적인 소개들은 따로 하지 않아도 매스컴이나 신문에서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생략하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는 이 영화가 정말 ‘대단한 작품’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이 영화가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이 영화는 종교영화로서 드물게 ‘대박’을 터뜨림으로써 종교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이 영화를 보면 무엇인가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려하기를 ‘그리스도의 수난’이 상품화되는 것이 아니냐,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제가 볼 때 이것은 너무 지나친 비판인 것 같습니다. 분명 이 영화는 전도용으로 어느 정도 가치가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듯이 상술이 개입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해야 마땅합니다.
둘째, 이 영화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각성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장면이 극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데,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개념으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이 사실적인 신앙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랑 같이 영화를 본 아내가 본 후에 하는 말이 “이제 정신 차리고 바로 살아야겠어요. 주님은 고난을 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염려하고 무얼 먹을까 무얼 마실까 하고 있으니... 세상적인 것들로 염려하지 말고 주님을 바로 믿어야겠어요.”라고 하였습니다. 정말입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믿는 사람들, 지상 교회들로 하여금 세속화를 막아주거나 혹은 세속화에 대해서 경성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분명 큰 영향이 될 것입니다.
셋째,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사순절이나 고난주간 때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영화적 상상력이 주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비디오나 DVD가 나온다면 꼭 사서 소장할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이 영화는 주님의 고난을 상상하는데 분명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계속 이 영화는 장차 교회의 사순절 기간과 고난주간 동안 상영될 것을 생각하면 분명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장하겠지만 이것 때문에 교회가 고난주간 때마다 이 영화를 보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예수영화 중에서 이 영화가 제일 낫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결코 종의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영화 중에서 제일 흥행성적이 좋을 뿐입니다. 어떤 기준에서 '제일 낫다고 볼 수 없는가?'에 대해서는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교리적으로 놓고 볼 때 그렇다고 봅니다.
넷째, 이 영화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참 성공의 공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온갖 반대와 멸시를 무릅쓰고 사재를 다 털어 10여 년 간의 준비 끝에 ‘작품’을 만들어낸 멜 깁슨의 용기와 선택에 새삼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조급하게 성공을 엮어내려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개봉된 것 자체가 큰 도전을 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멜 깁슨은 흥행이나 수익을 계산하고 이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수익이나 흥행을 고려했다면 이 영화를 만들다가 중도에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멜 깁슨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기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결과를 예상하거나 예측하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고백과 우리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어떤 결과와 성적으로 평가되든 간에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다섯째, 종교적인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관념을 이 영화가 보기 좋게 깨뜨림으로써 앞으로 교회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영화라는 매체를 도외시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는 것만 해도 교회의 대문화적 사명에 대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이제 교회는 영상매체를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으로 대충 이 영화가 끼친, 그리고 끼칠 긍정적인 영향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떨치지 못했던 아쉬운 점들 혹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점들을 제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믿음을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리 위에 건설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첫째,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포커스였습니다. 다들 알듯이 멜 깁슨은 로마 카톨릭 계열과는 약간 다른 계열의 카톨릭 신자입니다. 어쨌든 카톨릭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마리아에 대한 과도한 집중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멜 깁슨은 내내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응시하는 모친 마리아의 얼굴을 클로즈업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모친 마리아는 요한과 함께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면서 가는 모든 길에 함께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분명 멜 깁슨은 마리아의 숭고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자칫 마리아 숭배를 정당화시키는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시선이 또한 동시에 모친 마리아에 대한 시선으로 옮겨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연코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의 시선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관람하는 내내 별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것들로 인해 저는 눈물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시신이 내려질 때 막달라 마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모친 마리아의 품안에 안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이 묘사하는 장면과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 의하면 분명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장면을 지켜본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마27:55,56에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도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즉, 막달라 마리아와 모친 마리아만이 아닙니다. 여러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은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시체를 만질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시체를 내려서 장사할 때는 모친 마리아와 요한은 없었습니다. 마27:61에,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것을 멀리서 지켜본 후 시신이 내려져서 장사되어지기 전에 요한과 함께 모친 마리아는 그 자리를 떠나가고 다른 여인들만 남아서 끝까지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병행구절로서 막15:40,41,47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만 등장하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또한 처음부터 요한 사도와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항상 함께 동행하는 것도 성경이 말하는 사실과 다릅니다.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핏자국을 닦는다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춘다든지 혹은 예수님의 시신을 안는 장면 등...아무튼 모친 마리아의 숭고함을 사실과 다르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신은 모친 마리아의 품에 안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적인 영화라기보다는 다분히 카톨릭적인 영화였습니다.
둘째, 이 영화를 보면서 멜 깁슨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사단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은 검은 옷을 입은 교활한 청년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그리스도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노중에서도 계속 따라다니며 십자가 처형의 장소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배반하는 장면에서는 매우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가슴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몇몇 관람객들은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볼 때 멜 깁슨의 의도는 사단에 대한 과도한 포커싱으로 그리스도의 숭고한 결단을 부각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볼 때 사단에 대한 두려움을 일부러 조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데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정말 리얼하게 묘사한 것은 일품입니다.) 사단이 나타나서 “너는 누구냐?” “네 힘으론 인류의 죄를 짊어질 수 없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실제 성경은 어떻게 이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눅22:43에 보면,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이 순간 사단의 등장이 아니라 천사의 등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단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 유발은 극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었지만 사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에 대한 관점을 흐려놓을 수 있다고 보입니다.
셋째, 이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고난에 대해 묘사하면서 세부적인 점에서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것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마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서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몇 가지 점들을 지적하자면(반복되는 것이 있지만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이 나타나서 유혹한 점.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2-베드로가 군병의 귀를 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성경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지만 대제사장의 종, 그리고 그 이름이 ‘말고’라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군인들 중 한 사람의 귀를 잘랐다는 것과는 분명 의미상 차이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라고 보낸 사람에게 매수된 성전파수병의 귀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잡으라고 보낸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3-예수님께서 끌려가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분명 사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시각을 봅시다. 예수님은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만찬을 드시는 도중에 가룟유다가 밖으로 뛰쳐나갑니다. 가룟유다는 이 만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가룟 유다가 이 만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시 확인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만찬을 다 마친 다음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시면서 상당히 길게 설교를 하셨습니다.(요13:31-17:26절) 그런 다음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 편으로 나가셔서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신 것으로 성경은 말합니다.(요18:1,2) 이곳에서 얼마 동안 기도하셨을까요?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비교적 상세하게 때를 묘사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하시면서 동일한 말씀으로 세 번씩 기도하셨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3시간 가까이 될 정도로 길게 기도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끝내시자마자 잡히셨는데(마26:47) 잡히신 시각을 추정해보면 자정을 훨씬 넘긴 때로 보입니다. 이 때는 모든 사람이 잠든 때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어린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고, 동네 사람들이 많이 길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많은 주민들이 재판에 참석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심지어 재판정에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다고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재판정에는 일반 주민들이나 심지어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가 참석한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마26:57에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상황을 추론해보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일반 주민들이 요동하지 않도록 매우 신속하고도 은밀하게 재판을 일사천리로 처리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재판이 시작된 시각이나 장소나 재판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분명 있습니다.
4-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긴 시각이 영화상에는 밝은 때에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하는데 성경에는 새벽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27: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기니.” 즉, 백성의 지도자들은 군중들이 소동하지 못하게끔 일사천리로 은밀하게 강행한 것입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기 전에 사건을 종결지으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예수님의 서신 재판정에 너무 많은 유대주민들이 등장해서 소란을 피우더군요. 법정에서 매를 맞으실 받으실 때 조롱하고 비웃은 많은 유대인무리들,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욕하는 유대인들, 이러한 장면들이 과연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반유대주의적 색체가 전혀 없다고 볼수는 없다고 봅니다. 유대인들 중에 갈릴리에서 따라온 사람들은 대부분 안타까운 심정으로 자기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 일부, 그리고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사주받은 하속들과 소수의 패거리들이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외쳤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유대인들 전체에 대한 어떤 편견이 전혀 배제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멜 깁슨이 그것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복음서를 자세히 주석해볼 때 영화는 분명 유대인에 대한 주관적인 편견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5-빌라도가 손을 씻는 장면이 영화상에는 그리스도가 매를 맞은 후라고 나옵니다만 실제 성경에는 빌라도가 손을 씻은 다음 총독의 군병들이 채찍질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멜 깁슨은 빌라도가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만, 성경은 빌라도의 인간적인 고뇌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아무 느낌도 없이 냉정하게 이 일을 단순 처리한 것으로 보아야 정확할 것입니다. 인간 빌라도에 대한 포커싱은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영화적 장치이지 사실과 다릅니다.
6-그리스도가 채찍질을 당할 때 막달라 마리아와 모친 마리아가 지켜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를 수건으로 닦아내는 장면은 분명 성경에서 말하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것은 분명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카톨릭적입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보시면 의외로 카톨릭적인 시각이 곳곳에서 보일 것입니다.
7-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해 영화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으로 영화는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란 여인은 일곱 귀신에 들려 고생하다가 예수님께 치유 받은 여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이라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편견입니다.
8-예수님의 부활 장면에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각은 해가 한참 뜬 아침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실제 부활이 일어난 시각은 해가 뜨기 훨씬 이전이었으며, 돌이 옮겨지고 나서 예수님이 벌거벗은 몸차림으로 걸어 나가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성경은 돌이 옮겨지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 있었다는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볼 때 느끼는 것은 돌이 옮겨지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빠져나가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기 위해 오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9-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이 어수선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성경에는 매우 차분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영화상에는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있다가 얼떨결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영화에는 다른 제자인 요한은 언제나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성경은 다릅니다.)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18:15-18)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경황이 없는 중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 많은 중에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또 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세 번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번역문제일 수도) 그러나 성경은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막14:30절)
10-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을 묘사할 때 항상 모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특히 모친 마리아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는 것은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고백하는 말 중에 “내 몸에서 나온 아들, 내 영에서 나온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말도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도 않았는데 요한 사도가 모친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여러 번 부르는데 이것 역시 카톨릭적입니다.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칼이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분명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영화는 과도하게 마리아에게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두 여인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합니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마리아가 오늘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인 양 묘사하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모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완전히 제외되고 있는 것으로 성경은 그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카톨릭은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을 낳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마리아의 ‘성모’이미지에 금이 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영화에서도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마리아의 품에 안겨진 장면은 전혀 성경적이 않으며 오히려 카톨릭의 어떤 벽화를 연상케 하더군요. 이런 카톨릭적 묘사에 대해서 너무 과민하다고 저를 비판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으나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이 영화를 봤더라면 손수건을 가지고 눈물을 훔치면서 관람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불쾌하게 영화를 관람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분들은 영화를 보지 않아도 성경을 보면서 충분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다가 오히려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은 평소 성경을 읽을 때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고 밋밋하게 보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는 증거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화만큼 감동을 받지 못하는걸까요?
11-십자가를 구레네 시몬과 예수님이 함께 짊어지고 가는 것으로 영화는 그리고 있는데 성경이 말하는 사실은 이렇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눅23:26절) 예수님이 앞서 가시고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 것입니다.
12-또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겟세마네에서 시신이 내려지는 때까지를 12시간으로 정하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시간을 적어도 저녁 9시라고 잡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신 시간은 20시간으로 보아야 정확하다고 봅니다.
13-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항상 예수님의 수난에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왜 다른 많은 여인들은 빼놓습니까? 그리고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할 대 입고 있는 옷은 다분히 카톨릭적입니다. 마치 수녀의 복장을 연상케 합니다.
14-영화에는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백부장이 놀라서 도망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성경에는 이 순간 “이는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최초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백부장의 고백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슴에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장면-그리스도의 임종의 순간-을 설교할 때 영화적으로 묘사할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적으로 묘사할 것입니까? 백부장의 고백을 빼버리고 그 자리에 마리아를 놓은 것에 대해서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성경이 세밀하고도 상세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칫 그 시네마적 리엘러티에 압도당한 나머지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볼 때에는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고 홍보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실과는 상당부분 동떨어져 있다고 보입니다. 개신교 지도자들조차도 이 영화를 보고서 이 영화를 ‘성경적’이라고 추켜세우는데 저는 그러한 평가에 대해서 실망스럽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극히 일부분(한두 가지 장면정도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성경적’으로 만든 영화라기보다는 이 영화는 다분히 ‘카톨릭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제가 볼 때 그리스도가 매 맞는 장면에 대해 대충 그리고 만 ‘벤허’라는 영화가 멜 깁슨이 만든 이 영화보다 덜 ‘카톨릭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성경적’에 가깝다고 봅니다. 과연 어느 장면이 과연 ‘사실적’이며 또한 ‘성경적’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은 채 단지 리얼한 구타장면만 가지고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우습지 않습니까?
자, 이 영화를 보는 많은 분들이 "아,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엇이 '사실'입니까? 저는 오히려 성경에 비추어볼 때 전혀 사실과 다른 묘사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단지 '리얼하게' 채찍에 맞는 모습, 고통에 못이겨 얼굴이 일그러지고, 온 몸이 채찍자국으로 가득 찬 묘사가 '사실적'입니까? 단지 몇몇 장면에서 리얼하게 묘사했다고 해서 사실을 다룬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더 많은 부분들 때문에 저는 이 영화는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영화라고 단정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분명히 이 영화는 일견의 가치는 있다고 하겠으나 이것이 단지 영화일 뿐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설교하는 데 있어 주된 위치를 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나 연출 감각이나 주제의식, 카메라 앵글, 영상과 음향의 감각적 조화, 영화적 상상력 등의 가치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영화 이상의 가치를 두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영화보다 성경이 더욱더 사실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와 세상에서 양 다리를 걸치면서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보면서 묵상할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는 그런 사람들, 성경을 보는 것보다는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일견을 추천합니다. 주께서 이런 영화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불신자나 초신자들이나 낙심이나 시험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신다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생각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입니다. 그들의 입과 마음에서 한번이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리도록 만든다면 이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할 줄 아는 사람들에는 그냥 일견(一見) 그 이상의 가치를 두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단지 영화일 뿐입니다.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사실, 성경이 말하는 대로의 사실은 아닙니다. 전도용으로 활용할 수는 있어도 양육용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우려되는 것은 교회가 이 영화를 양육적 차원에서 의존할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영화는 다분히 카톨릭적 신앙고백이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가 앞으로 이 영화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을묵상하는데 이용할까 두렵습니다.
이 영화는 묵상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감상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일에 성경이 아닌 영화에 의존하는 것은 유치한 단계의 신앙수준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영화는 단지 영화로서 감상해야지 영화 이상의 묵상적 교리적 성경적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이 영화를 보신다면 루터와 칼빈의 심장과 눈으로 "감상"해보시라고 권하고 싶군요. 그리스도의 수난은 성경을 보면서 제대로 "묵상"하시고요.^^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
부족하지만 영화를 감상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4년 4월 1일 고난주간을 앞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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