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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리

The Passion of Christ 성경적 의미

by 등불지기 2012. 4. 6.

 

 

앞서 올린 두 편의 아티클은 멜 깁슨의 The Passion of the Christ에 대한 영화평론과,

멜 깁슨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원작으로 삼은 책인 The Passion of Christ에 대한 북리뷰였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로 묵상하기를 원하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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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

 

 

오늘은 고난주간 금요일로서 교회마다 기도모임을 가질 것입니다.

어쩌면 멜 깁슨이 만든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전체 혹은 일부 상영하는 교회들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영화에 대해서 비평을 했으니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묵상하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비판의 정신만 남으면 안 되겠지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영화가 묘사하는 바와 달리 성경이 말하려는 것을 대충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묵상하여야 할 성경적인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멜 깁슨의 메시지도 아니고, 앤 캐서린 수녀의 메시지도 아닌 성경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고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최후 12시간이 아니라 그분의 오심과 생애 전체가 고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12시간만 고난인 것처럼 묘사하는 듯합니다.(예수 역의 카비젤이 식탁을 만들 때 보여준 태도를 보십시오.) 좁은 의미의 고난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 가시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속죄일(욤 키푸르)에 시행되는 아사셀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담당하고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며, 그러한 사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명의식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의 사명의식이 최고로 드러난 순간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가 분명하게 선포됩니다. 그러데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약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중에서도 능동적이셨고 위풍당당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영화와 같이 ‘리얼하게’ 묘사하기보다는 최대한 절제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의 3분의 1이 넘을 정도로 고난주간 때 일어난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매우 자세한 진술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겪으셨을 인간적 고통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한 묘사를 일부러 꺼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 의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분명 그 까닭은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들보다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재판장이나 빌라도 법정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매우 당당하며 위엄이 넘칩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진정한 의도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폭력에 대한 절제가 전혀 없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영광과 위엄의 구주라기보다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겨우 말씀하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 아무런 느낌이 없군요. 그리고 말 그대로 사람잡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묘사되는 예수님의 모습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같은 위엄으로서 당당하게 고난을 “선택하신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영화는 예수님의 수난을 ‘수동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능동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연약한 몸"으로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으로 당당하게 "선택하신 것"입니다. 영화적 묘사와 성경적 묘사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님의 영광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을 자기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대속적 희생제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제사의식은 매우 거룩하고 장엄하게 진행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그렇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멜 깁슨의 영화는 무지막지한 폭력에 대한 연민의 정, 그리고 무저항주의의 고상한 정신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사의 거룩한 의미는 사라지고, 오직 제물을 잡는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합니다. 예수님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복음서의 진정한 의도를 놓치게 만듭니다. 이 영화를 보고 찬사를 던지는 많은 목사님들이 폭력이 난무한 시대에 화해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라고 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불신자들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멜 깁슨의 연출 의도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동과 눈물’이 일시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자신의 죄를 정직히 들여다보는,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해서 바라보는 계기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복음서의 묘사를 살펴보아도 폭력과 인간화해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는 매우 찾아보기 힘들다고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속적 희생제사이므로 성경은 매우 장엄하게 당당하고 거룩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독자의 감성을 건드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절제"한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에 대한 과장된 묘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끔찍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성경은 “거룩하고 장엄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매조키즘적’ 관점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장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거룩한 제사의식이며 따라서 매우 영광스럽고 엄숙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거룩한 의식이었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이 사건의 엄숙함과 장엄함,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영광과 거룩-그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바로 묵상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고로, 존 머레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분을 목격하고 영원토록 그치지 아니할 찬양과 영광을 그에게 돌릴 것이다. 그는 영광의 주님이시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시자 인간이시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잔을 마신 분이시다. 그 잔은 재앙의 잔이요 형용할 수 없는 고뇌의 잔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기가 두렵지만 반드시 해야 할 말이다. 저주받은 나무에서 부르짖은 절규는 다름 아니라 죄의 대가로 버림받은 것(유기)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은 천사장이나 위대한 성도들이라도 재현할 수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다. 가장 거룩한 사람과 가장 강력한 천사라도 이 고난을 약간만 흉내 낸다면 박살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인간적으로 고통을 겨우 견디시며 몸부림치는 육체를 바라보면서 매조키즘적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장엄하며 또한 당당하게 이 고난의 잔을 드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적 감동의 연민의 눈물을 흘리도록 의도적으로 연출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에서도 기뻐하며 당당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려주고 있는 바 그리스도의 수난은 모든 폭력에 대한 무저항정신의 숭고함을 가려주기보다는 모든 종류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당당해지도록 만들어준다고 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예수님이 당하시는 처참하고 리얼한 고문장면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한 연민이나 혹은 보여주신 인내와 용기 때문에 ‘감동’을 받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장엄하고 거룩하심과 견고한 사명의식 때문에 ‘감동’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완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냅니다. 이때 엿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식--그것은 감정적 '카타르시스'는 없을지 몰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 당당하게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 삶을 살도록 충분한 능력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고난의 잔을 홀로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도 역시 그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분이 겪으신 고통이 아니라 그분이 고난 중에서도 잃지 않았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는 '연민'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보여주신 순종,의연함, 영광스러움이 아닐까요?

 

soli deo gloria!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