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리

The Passion of Christ (앤 캐서린 에머리히 저) 서평

등불지기 2012. 4. 6. 00:00

 

 

지난 번에는 멜 깁슨이 만든 영화 The Passion of Christ에 대한 영화평론을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그 영화의 원작이 되는 앤 캐서린 에머리히가 저술한 책인 The Passion of Christ에 대한 서평을 올릴까 합니다.

말이 서평이지 학문적인 가치는 별로 없을 듯 합니다. 저는 학자가 아니라 평범한 설교자로서 책을 평가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교리적 관점에서 책을 리뷰한 것이므로 저와 다른 관점을 가진 어떤 분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를 바로 감상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람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나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묵상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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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ssion of Christ(앤 캐서린 에머리히 저)에 대한 서평

 

 

제가 최근 개봉된 ‘더 패션’이란 영화에 대해 열을 내는 이유는 이 영화에 대해 열광하는 교회의 반응을 보면서 ‘개신교의 정체성 위기’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서 미국과 한국의 저명한 개신교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성경에 충실한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좀 더 '연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변찮은 서평을 영화와 관련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지난번에 올린 글에는 영화자체를 보면서 제가 제기한 문제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과 “사실을 다룬 작품”의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제가 볼 때 그리스도의 수난을 사실적으로 다루었다기보다 몇 가지 장면에서 ‘영화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란 것입니다. 즉, 이 영화는 사실적인 영화가 아니고 성경적인 영화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는 성경적인 영화가 아니라 지극히 "카톨릭적"인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의 주장에 대해서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주관과 관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영화는 영화감독의 주관과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람객이 어떤 주관과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든 그것은 관객의 몫이므로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냥 영화를 영화로 감상하는 것이면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화는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갖고 있으며, 만일 감독의 주관과 관점을 무비평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관객의 주관과 관점에도 상당히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관객의 몫으로 일임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특히 개혁적인 관점을 제시함으로서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멜 깁슨이 어떤 의도와 관점을 가지고 이 영화를 찍었는지 바로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이것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경의 권위를 유일한 삶의 규범으로 여기는 모든 이들, 즉 성경으로 모든 것을 개혁한다는 개혁주의자들에 국한시키고 싶습니다.) 어떻게 비평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우리의 기준과 관점을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멜 깁슨이 어떤 관점으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원작으로 삼았던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모든 영화가 원작이나 시나리오가 있지요. 그런 점에서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작자나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를 만든다고 보아야 합니다. 감독의 역할은 원작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는데 골몰하니까요.

 

최근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미국 역대 영화사상 6위에 해당하는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자 이 부분에 대해서 덩달아 읽혀지는 책들이 있습니다.

 

1.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 (존 파이퍼, 알리스터 맥그라스), 규장, (16,000원)

루터란 시각에서 십자가 사건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낯선 시각이 아닙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반유대주의적 시각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는 것이 돋보입니다.

 

2.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리 스트로벨, 개리 폴), 두란노, (3,000원)

새들백 교회에서 구도자 사역을 하고 있는 리 스트로벨은 [예수 사건]이란 책으로 유명한데, 그는 멜 깁슨이 초청한 영화시사회에서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고, 성도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해설서를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작은 책은 예수님의 죽음에 관련된 6가지 이유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으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3.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앤 캐서린, 에머리히), 집사재 출판 (11,500원)

이 자리에서 제가 비평하고 싶은 책은 이것인데, 이 책은 멜 깁슨의 영화가 개봉된 이후 무려 160만부가 팔린 책입니다. 영화의 배경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이 책이 어느 날 멜 깁슨의 다락방에서 자신의 집 선반에 떨어졌고, 이 책을 집어든 멜 깁슨은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이 책을 영화화 하기로 결심했고, 10년을 준비한 끝에 최근의 영화가 개봉된 것입니다. 따라서 영화의 원작이기 때문에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이 책의 저자인 앤 캐서린 에머리히는 아우구스티노 수녀외 소속의 독일인 수녀로서 1774년에서 1820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독일 북부 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하녀로 일하다가 28세에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수녀가 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병상에 계속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몸에는 ‘성흔’이 생겼고, 자주 예수의 삶과 고난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시인이었던 클레멘스 마리아 브렌타노가 그녀가 본 환상을 듣고 기록하였고, 그녀가 죽고 난 후 3권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성모 마리아의 삶’ 그리고‘그리스도의 삶’입니다. 멜 깁슨이 원작으로 삼은 책은 첫 번째의 책입니다. 나중에 카톨릭 교회는 에머리히에게 성인 반열에 오르는 고급단계의 칭호인 ‘가경자’란 칭호를 수여했다고 합니다.

 

멜 깁슨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참고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제가 지금 이 책을 사서 읽어보고 있는데, 이 책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 이 책은 카톨릭 수녀가 병상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모 마리아에 대한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병상에서 에머리히가 자신이 본 환상을 진술하고 있고 당대 뛰어난 작가가 그것을 받아서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이것입니다. [앤 캐서린 에머리히의 묵상 기록] 즉 성경이 아닙니다. 머리말에서도 이 책은 한 수녀가 묵상한 내용이며, “그녀의 묵상을 통하여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을 역사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멜 깁슨의 영화는 성경에 기초한 영화가 아니라 한 수녀가 본 환상에 기초한 영화라는 것입니다. 멜 깁슨은 전혀 성경을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책만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같은 분들, 시사회에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은 몇몇 한국교회 이름난 목사님들을 압니다-- 이 영화를 ‘성경에 충실한 영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이 아니라 환상에 충실한 영화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 책을 한번 읽어 보고나서 그 다음 영화를 한번 보시지요. 멜 깁슨의 영화는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는 이 책에 충실하게 그려내었지 결코 성경에 따라 그리지 않았습니다.

 

둘째, 이 책은 독실한 카톨릭 수녀가 자신이 본 환상을 진술한 것을 책으로 만든 것인데 이 책의 맨 처음에 기록된 헌사에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군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며, 하늘과 땅의 여왕이시며, 매괴의 성모이시며, 기독교인에게 도움을 주시는 성모이시여, 죄인의 피난처이시며,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께 이 책을 바칩니다.”

 

즉, 이 책의 의도는--이것은 멜 깁슨의 의도이기도 하겠지요--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훌륭하게 감내해낸 ‘성모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볼 때에 이 영화는 멜 깁슨 감독이 그러한 관점과 의도에서 연출했다는 점을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영화를 한번 보시면 아시듯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리아의 시선,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시선에서 보게끔 유도합니다. 영화의 초반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격정의 휩싸여 기도하실 때 역시 마리아도 괴로움에 잠을 못 이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지요. 그런데 제가 보는 이 책에 영화의 그 내용이 그대로 나와 있군요. 제가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너무 과민했나 싶었는데, 이 책을 사서 읽어보고 있으면서 확실히 카톨릭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수난이 어떤 것인지 조금 이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 누구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분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영광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책과 멜 깁슨의 영화는 그분을 잉태하고 기른 마리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셋째, 이 책은 카톨릭적 명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묵시적 묘사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이를 테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이 나타나서 온갖 환상과 위협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공포분위기 조성은 카톨릭적 명상의 특징인데, 이 책에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예수님을 위협하고 비난하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는 고통의 성배를 마지막까지 다 비우심으로써 사탄이 예수의 숭고한 인간애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사탄은 예수를 비난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예수께서 나사로에게서 받으셨던 막달라 마리아의 재산을 막달라에서 탕진한 일을 두고 예수를 질책하였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뇌와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한 마리 애처로운 벌레처럼 온 몸으로 괴로워하셨다. 사탄이 예수께 비난을 퍼붓고 있는 동안 나는 간신히 화를 참고 있었는데, 사탄이 막달라 마리아의 재산을 예수께서 팔아넘겼다는 말을 하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가 어찌 예수께서 그 재산을 파신 일을 범죄라고 말하며 예수를 비난할 수 있느냐? 은혜로운 일에 써달라며 나사로가 예수께 드린 돈을 예수께서 디르자에 감금되어 있던 스물여덟 명의 빚진 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을 나는 분명하게 보아서 알고 있다!”] (70,71쪽)

 

사단이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비난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성경에서 과연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단이 그리스도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도무지 성경에서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노려보고 비웃는 사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장면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라 분명 카톨릭적이지요. 저는 이 영화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카톨릭적 묵상이 교회 안에 들어올까 우려됩니다.

 

넷째, 이 책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일종의 편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18세기 독일인 수녀입니다. 독일에서 나찌즘이 발생한 것은 다 아시지요? 이 책에서는 예수님을 해치려는 유대인들의 간계와 조롱이 매우 경멸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반유대주의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성경책보다 유대인을 더욱 교활하고 악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에 대해서만 나쁘게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 드리고 두려움 없이 공공연하게 그분의 가르침을 수상해왔으며 예수님의 성스러운 임무에 의심을 품지 않았던 성녀에 대해서도 악담을 해댔다....나는 증오와 광포한 감정이 예루살렘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불꽃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 불꽃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다른 불꽃들과 합쳐지면서 시온 방향으로 나아갔다. 크기는 매순간 점점 저 커져서 가야바의 법정 앞에 멈춰 서 머물렀을 때는 완전히 거대한 불꽃의 소용돌이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로마 병사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보초를 늘리고 보병대를 정렬시킨 후 엄중하게 경계태세를 취했다] (121,122쪽)

 

멜 깁슨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의식한 것은 분명 아니지만 멜 깁슨이 영화의 원작으로 삼고 영화를 찍은 것은 성경책이 아닌 이 환상책이며, 이 책에서는 분명 유대인들의 분노와 증오심을 과장하고 있으며, 이것은 영화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영화나 이 책에서나 마찬가지로 잔인한 유대인과 성녀의 모습에 대해서 대조적인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잔인한 유대인들의 독기어린 말과 득의양양해하는 태도에 성녀들의 마음은 심하게 상처 입었으며, 그들 귀에 친절하거나 동정심이 담긴 말이 들려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123쪽)

 

[안나스의 집은 가야바의 집에서 300걸음이 좀 못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길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횃불과 등 때문에 환하게 밝았고, 흥분하고 성난 수많은 유대인들이 서 있었다. 군인들은 군중 때문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안나스의 법정에서 예수께 너무나도 부끄러운 짓을 했던 자들이 예수께서 가야바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동안 내내 그분에게 모욕을 가하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130쪽)

 

이 외에도 제가 일고 있는 에머리히의 책에는 유대인들과 제사장들을 포악하고 간악하며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는 동안 “그 사람의 피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올 것이오.”라는 유대인들의 소름끼치는 외침을 듣고 있다고 상상할 때면, 언제나 그 저주의 결과가 내 눈 앞에 기묘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나는 피색깔로 물든 구름에 덮인 어두운 하늘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을 마음에 그려본다. 하늘에서는 불타는 검과 화살이 쏟아져서 고함치는 군중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불러들인 저주는 그들의 골수까지, 아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들의 자손에게까지 파고드는 것처럼 보인다....](233쪽)

 

자, 멜 깁슨의 영화는 과연 성경이 묘사하는 법정장면과 일치하는가? 물론 감독의 주관과 관점으로 독창적으로 성경을 영화화했다고 하겠지만, 제가 볼 때는 멜 깁슨은 에머리히의 환상책의 내용을 충실하게--성경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기보다는--영화화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 책에서는 ‘성녀’의 숭고한 모습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와 영혼의 교감으로 서로 결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성모께서는 그로 인해 괴로워하셨으며, 예수가 살인자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할 때 함께 하셨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어머니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죄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또한 아들인 예수가 끔찍한 고문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혼신을 다해 기도했다...](150쪽)

 

이 책에서는 제자들이 마리아를 향해 이야기할 때마다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카톨릭적 신앙고백인데 이것은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옵니다. 이 책에서도 영화와 같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끌려가시는 곳마다 항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시고나서 영화를 평가하시지요?

 

[...성모 마리아께서는 자주 무릎을 굻으시고 예수께서 쓰러지신 땅에 입을 맞추셨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깊은 슬픔에 젖어 두 손을 꽉 쥐고 괴로워하였다. 요한 역시 눈물을 억제할수 없었지만, 간신히 힘을 내어 두 여인을 위로하며, 계속애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에 대한 최초의 신성한 헌신이며, 수난이 완성되기도 전에 예수께서 겪으신 수난의 신비에 대해 최초로 경배를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무결한 순수의 표상인 성모 마리아께서는 바로 예수에 대한 교회의 깊은 숭배를 최초로 나타내신 분이셨다. 이처럼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눈물로 종교적인 오점을 적시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고 위안이 되는 일이다....이처럼 감동적인 방법으로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는 헌신의 반석을 세우시고 예수의 고통으로 표시된 각 지점마다 그리스도 수난의 무한한 공로를 마음속에 쌓아서 이를 값진 돌과 달콤한 향이 나는 꽃으로 모아 모든 참된 신자들을 대신하여 영원하신 하나님께 선택의 제물로 바치셨다...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귀한 향을 발라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그녀는 예수께서 배신을 당하시고 고통을 겪으시며 그녀가 지은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시리라는 것을 보았다...요한은 그가 깊이 사랑했던 선생인 예수의 어머니를 부축하여, 그녀가 십자가 길의 각 지점을 따라 최초의 성지순례를 하시도록 도왔고, 예수의 수난 이래로 기독교 교회 신자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헌신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을 보조하였다.](184,185쪽)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 책의 25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영화에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핏자국을 수건으로 닦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책의 25장에 자세히 묘사하고 있네요.

 

제가 영화를 보면서 이상하게 여긴 장면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졌는데 어떤 여인이 우아한 모습으로 포도주잔을 들고 예수님께 나와서 마시게 하려고 했다가 로마군병에 의해서 잔이 깨어져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 여인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운반하기 시작한 지점으로부터 200발자국 정도 전진했을 때 길 왼쪽 편에 있는 아름다운 집의 문이 열리더니 위엄 있는 풍재를 지닌 어떤 여인이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리고 행렬의 맨 선두로 걸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세라피아였는데, 화가 나 있는 예수의 적들과 대담하게 맞선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성전에 속한 의회원 중의 한명인 사람의 부인이었다. 이날 세라피아가 행한 용감한 행적을 기녀하기 위해 ‘vera icon’(참된 모습이란 뜻)이라는 라틴어에서 나와서 훗날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세라피아는 향기나는 훌륭한 포도주를 준비했다. 이 포도주는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고난의 길에서 예수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경건히 바치려고 준비한 것이었다...그녀는 용감하게 군중과 군인과 궁수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 앞에서 무릎 꿇고 베일을 건네주며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얼굴을 닦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왼손으로 베일을 받아 피 흘리는 얼굴을 닦으신 후 감사하게 여기시며 다시 돌려주었다. 세라피아는 베일에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옷 아래 그 베일을 두었다. 그때 소녀가 두려워하며 포도주를 내밀었으나 잔인한 군인들은 예수께서 그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257,258쪽) 카톨릭에서는 세라피아, 즉 베로니카는 세례요한의 사촌이라고 합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피가 묻은 이 베일을 죽을 때까지 간직했으며 나중에 그것은 성모 마리아에게 넘겨졌으며, 성모 마리아는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이 베일을 교회에 넘겨주었다고 합니다.(259쪽)

 

여섯째, 이 책에서 묘사하는 여러 장면, 이를 테면 유다의 배신, 자살, 베드로의 부인하는 장면, 빌라도의 인간적 고뇌, 등은 세세히 묘사하면서 당시 상황을 잘 연상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것인가 생각할 때 지나친 상상이라고 보입니다. ‘지나친 상상력’ 이것은 환상문학의 특징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세세한 묘사를 두고 ‘성경에 충실한 영화’라고 개신교 지도자들이 평가를 내린다면 참으로 어이없기 그지없습니다. 사실은즉슨 멜 깁슨은 독창성을 발휘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원작에 충실하려고 한 것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찾아보지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성전의 초박살나는 것을 보는데 저는 영화를 볼 때 좀 과장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요. 왜냐면 성경에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만 했지 성전이 깨어져 박살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 책을 보니까 영화적 장면이 그대로 있네요.

 

[이때 성전의 모습은 사람들이 돌을 던진 개미집과 같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누군가 막대기를 개미집의 중심부에 넣고 쑤셔 대어 개미집 안에 일대 혼란을 야기시킨 것과 같은 상태였다. 돌이 떨어지거나 또는 막대기로 들쑤셔진 지점에 있던 개미들은 혼돈과 공포에 빠져 이리저리 헤매고 달아나려 애를 쓰지만 침입을 받지 않은 위치에 있던 개미들은 조용히 노동을 계속하면서 손상된 부분을 수선하려 하는 것이다....지성소의 입구에는 기둥이 두개 서 있고 거기에는 휘장이 장엄한 모양새로 드리워져 있었다. 토대가 흔들려서 왼쪽에 있는 기둥이 남쪽으로 쓰러지고 오른쪽 기둥이 북쪽으로 쓰러지자 ...지성소 입구에 있는 벽에서 거대한 돌들이 느슨하게 빠져나와...떨어졌고 아치문이 부서져버렸다. 당이 솟아오르면서 성전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여러 개의 기둥이 쓰러졌다.](307,308쪽)

 

책에서 묘사하는 대로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 예수님의 죽음이나 시신이 내려지는 장면, 기타 등등 이 책에서 묘사하는 장면에 충실하게 영화는 재현해내고 있더군요.

 

자, 정리해볼까요?

 

제가 이 책을 보면서 확신한 것은 멜 깁슨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성경책"을 원작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18세기 말 독일의 아우구스투스 수녀원의 병상에 누워있던 에머리히 수녀가 본 "환상책"을 원작으로 삼고, 이 원작에 충실하게 화면에 담아내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은 18세기말 독일 카톨릭의 전형적인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멜 깁슨 감독을 카톨릭 근본주의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멜 깁슨 자신은 현재 로마 카톨릭을 자유주의적 카톨릭으로 비판하고 있지요.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이틀이 지난 오늘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제공한 이 책을 읽어가면서 비로소 영화가 어떤 관점에서 만들어졌는지 훤히 이해가 되더군요.

 

여기서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말을 인용해보면...

 

[이 영화는...선과 악의 극한 대립을 통해서만 관객을 주인공의 심리에 극적으로 감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할리우드의 오래된 믿음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을 축으로 악인으로 묘사된 유대인과 로마 군인들의 면면이 지독하게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임을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선악의 대립적 도식 위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의 몸을 더 한층 걸레처럼 망가트리기 위해 온갖 업그레이드된 폭력묘사를 마다하지 않는 이 영화의 감독 멜 깁슨은 우리의 가련한 육신을 저버리는 것을 통해 영적인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완고한 근본주의적 신념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이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붙이는 이 영화의 "마력"은 사실상 선과 악의 극단적 대립 속에서 피가 난무하는 과도한 폭력미학과 거기에 전혀 대조적으로 시종일관 차분하게 관조하는 이른 바 "성녀"들의 눈물어린 시선을 서로 대조하는 능력, 선악 이원론 구조 속에서 음향과 영상의 강렬한 임팩트로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 연출력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임팩트가 너무 강한 나머지 우리는 절제된 감동이 아닌 강요된 감동에 포로가 되어서 정말 정신차리고 보아야 할 부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구속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절제되지 못한 폭력과 모성애와 여성적인 섬세함에 호소함으로써 인간의 감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웬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눈물을 쏟아내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것...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할리우드식 장치와 선악 이원론적 구도 속에서 우리가 받는 감동과 눈물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이 진정 성령이 주는 감동일까요? 파이퍼 목사가 말한 대로 "오감에 일방적인 폭격을 가하는 이 영화"가 진정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신 수난의 거룩한 목적을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까요? 이 책과 영화에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하늘 아버지의 영광"보다는 아들이 겪는 고통을 보면서 견뎌야 했던 "마리아"와 그리스도를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읽어가면서 참으로 혼란함과 답답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논의해야 할 문제의 핵심은 계시의 권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과연 한 수녀가 본 환상의 내용을 성경의 권위처럼 받아들어야 옳은가? 수녀가 본 환상을 기초로 영화를 충실하게 만들었는데 우리가 “아, 멜 깁슨은 참으로 성경을 독창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잘 그려냈구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볼 때 멜 깁슨은 독창적으로 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것이 아니라, 캐서린 에머리히라는 한 수녀가 남긴 환상책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충실하게 그린 영화라는 것입니다.(책에서는 에머리히 수녀가 1823년 2월 18일부터 4월 6일까지 본 환상의 내용이라고 밝히고 있다. 398쪽) 즉, 멜 깁슨은 독창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영화를 만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멜 깁슨의 영화는 18세기 말 한 독일인 수녀의 환상책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긴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성경책에 충실한 것, 혹은 성경을 감독의 주관과 관점으로 독창적으로 영화화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카톨릭적인, 그것도 단지 환상책에 충실한 것입니다. 결코 성경책을 근거로 만든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멜 깁슨의 감독적 의도와 관점을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다시 보면 더욱 더 잘 관람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감독의 독창적 재능을 운운하면서 영화에 감탄을 연발하는 일보다는 영화는 영화로서 보는 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멜 깁슨! 그는 전혀 독창적인 감독은 아닙니다. 다만 원작을 ‘하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10년간 고집스럽게 준비해온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개신교의 정체성 위기에 와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개신교의 열렬한 환호와 찬미를 보십시오. 심지어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조차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개신교의 교리수준입니다. 여전히 교리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라니!! 성경을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수난을 카톨릭적 방법으로 묵상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은 말씀의 권위를 최고로 믿는 프로테스탄트입니까? 여러분은 개혁자들의 자랑스런 후예들이라고 생각합니까? 누군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성경적으로 묵상하며 개혁주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성경이 말하는 대로 힘써야 할 일이 우리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환상책을 가지고 공포와 슬픔을 극적으로 다루는 묵시적 장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기보다 성경책을 가지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기독교 포털 사이트에는 이 영화에 대한 홍보 도우미 '서포터스'가 결성되어서 수천 명이 회원으로 가입하여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고난주간마다 이 영화를 교인들과 함께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계에서 꽤나 유명한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서 "이 영화는 정말 성경에 충실하게 묘사한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글쎄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말로는 오직 성경! 을 외치면서, 개혁자의 후예들이라고 자처하면서 멜 깁슨의 이런 영화를 보며 찬사를 보내다니 우리가 가진 개혁의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동안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대체 어떤 의미였습니까? 우리가 가진 교리적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서는 아무런 감동을 못 받고 성경이 아닌 환상을 기초로 만든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 우리는 누구입니까?

 

부족한 서평이지만 여러분들의 개혁주의적 관람과 감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4년 4월

 

그리스도 안에서,

김광락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