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에 관하여
형통 prosperity이란 단어만큼 세상적인 기준과 성경적인 기준이 다른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이란 남들보다 더 잘 되는 것, 남들보다 더 가지는 것, 자기 생각대로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철저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방황을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형통이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prospered (창39:2)
요셉이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노예로 팔렸을 때 자신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과연 생각했을까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반역자들만이 갇히는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이 정말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했을까요? 자신이 해몽해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도움을 받을 줄로 기대한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때 요셉은 자신이 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저 같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삶은 왜 이토록 많은 상처, 좌절, 불행으로 점철되어야 하는지..남들은 다들 잘 사는데..나는 왜 이렇게도 찌질하게 살아야 하는지..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그러한 요셉을 가리켜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가 아니라 그가 버림받고 노예로 팔려갈 때, 그가 친위대장의 집에 노예로 팔려갈 때, 그가 누명을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갇힐 때, 성경은 그를 가리켜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보다 더 형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가 지금 어떤 모양으로 사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그와 함께 하시는가입니다. 그의 상황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면 그는 형통한 사람이 된 것이고,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고, 번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는 인생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형통한 인생이란 그런 '일반적인' 함께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아래 있는 인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죽이려 하고 요셉을 버린 형들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창38장에 보면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형들을 대표하여 요셉을 해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함께 하셨습니다. 죄책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려 했던 유다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를 형통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아무게를 형통한 인생이라고 말할 때는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들어가 있을 때입니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 있었던 삶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형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도, 형들에게 상처를 받는 것도, 죽임을 당할 뻔 한 사건도, 노예로 팔려간 것도, 친위대장이 그를 노예로 산 것도, 그가 누명을 쓴 것도, 그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것도, 그가 도와준 사람이 그를 잊어버린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큰 계획, 특별한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형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일이 잘 풀려나가면 "형통"한 줄로 생각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이 살아가는 삶이 형통한 삶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도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다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일이 잘 풀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17세가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그래서 매우 특별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두 번씩이나 이야기한 것은 형들을 무시하거나 형들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 그래서 자신은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됨으로써 변화하게 된 그 특별한 은혜를 자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건을 통해서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분명히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이 계속 꼬이고, 설상가상의 고난을 연속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인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형통하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형통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과 계획과 소원대로 내 인생이 흘러가지 않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큰 계획을 믿는 것이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내 생각과 계획이 좌절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끝까지 붙잡는 것입ㄴ다.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3)" When his master saw that the LORD was with him and that the LORD gave him success in everything he did.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인지,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안에 들어가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셉의 삶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형통한 사람은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주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설명하고, 간증하고, 강조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하고 다니지 않더라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요셉을 노예로 산 친위대장 보디발이 하나님을 믿는다든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요셉의 삶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에게 간증하거나, 설득하였거나,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형통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변의 사람들이 무언가 신기하고 신비한 것을 보게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신비한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런 말을 한다고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omnipresence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를 가까이서 관찰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알게 되는 그런 그리스도인은 흔하지 않습니다.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그가 아무리 종이요 노예요 비천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그 신비로움, 비천한 삶의 모양에도 불구하고 결코 평범하지 않는 그러한 신비로움, 사람의 상식과 이성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특별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이 안다.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3)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창39:4)
요셉 그 자신은 자신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은 그가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에는 많은 상처, 슬픔, 안타까움,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신이 매우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매우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자랑하고 다니며, 설득하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에는 그가 진정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웃이나 친구가 없을 수 있습니다. 형통한 사람 요셉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요셉이 자신의 삶이 형통하다고 여기기 전에 요셉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먼저 그를 형통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관찰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요셉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형통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입는 사람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그 말은 요셉을 특별히 신뢰했다는 말이고, 요셉을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에게 자신의 아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요셉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만큼 그를 무한 신뢰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형통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비록 노예로 끌려와서 비천하고 비굴한 삶을 살지라도 우리의 정체성은 노예가 아니라 왕의 자녀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지라도 왕의 자녀라는 품위와 권세와 영광을 포기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우리의 정체성을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게 되고, 또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아무리 비굴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정체성과 고귀함과 품위와 권세를 유지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복의 근원이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애굽의 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 때문에 자신의 집이 잘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디발에게 요셉은 그야말로 '복덩이'입니다. 요셉에게 자신의 집과 모든 소유물을 맡길 때부터 자신의 집이 잘 되기 시작했음을 알았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요셉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던 날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보디발이 자신의 전권을 요셉에게 맡기는 그 날부터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열기 시작하셨습니다. 형통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왜냐면 형통한 사람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 그 자신은 자신이 복을 누리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못했지만, 요셉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보디발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디발이 그것을 보았고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형통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나는 여전히 내가 과연 복이 있는 사람인지, 내가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고민하며,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나로 인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서 후원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저로서는 이 문제가 항상 도전이 됩니다. 저녁마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올려드립니다. 이때 반드시 빼놓지 않는 것은 저와 저희 가정과 사역을 위해 늘 후원하는 분들과 교회들을 하나님 앞에서 기억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저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모든 후원자들과 후원교회들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힘들어한다는 소식이라도 들리면 너무 괴롭고 속상합니다. "하나님, 제가 복의 근원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저희를 후원하는 교회가 잘 되고, 개인들이 잘 되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간절한 기대와 기도입니다. 복의 근원으로 산다는 것은 반드시 잘 되고 잘 풀리고 큰 소리치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노예로 살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사회적 약자일 수 있습니다. 자세히 관찰하ㅣ 않으면 별로 알아주지 않는 소외계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으로 산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축복하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하고 믿어주고 모든 것을 맡겨주는 사람이 진정 잘 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집과 모든 소유물을 다 맡겼을 때에 어떤 사람들은 '도박'이라고 비방할 지 모르나, 보디발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멋진 결정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형통한 사람은 복의 근원이고 복의 근원을 얻는 것은 복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위풍당당합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창39:6)
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면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라고 할 때는 단지 외모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가 모든 가치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은 결코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는 그의 정체성에 대한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신분이 비록 노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은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 아버지 야곱에게 있어서 그 모든 아들들보다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삶이 비록 비참하고 비굴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결코 비굴하게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어떤 종들, 그 어떤 애굽의 귀족들 못지 않게 품위와 품격을 잃지 안핬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린 시절이 '사랑받는 아들'로서 성장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특별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사라간다면, 특히 하나님이 당신의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알려주셔서 내가 그분의 특별한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가 된 것을 알 게 된다면, 비록 지금은 내 삶이 노예요, 노예와 같이 비천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부어주신 그 특별한 꿈과 비전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분은 노예일지라도 우리의 생활은 왕의 자녀로서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든 꿈과 계획과 비전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아침안개처럼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릴 것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꿈과 계획은 고난과 역경이 점철될수록 더욱 더 또렷해지고 간절해지고 강렬해집니다. 마치 원석이 불을 통과할 때 불순물은 다 사라지고 정금이 되어가는 것처럼 요셉은 고난의 불을 통과하면서 인간의 꿈과 계획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꿈과 계획만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고난의 바다 한 가운데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 더욱 또렷해질수록 그는 더욱 더 왕자처럼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왕자와 같은 품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과 역경과 시련 가운데서도 위풍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형통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대로 잘 되지 않고 일이 꼬이기만 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품격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단지 외모의 수려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품격,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그 특별한 자부심, 그 어떤 시련과 고난도 앗아갈 수 없는 고귀한 정체성self-understanding에 대한 확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진가가 드러납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창39:2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형통한 사람은 홀로 있을 때 그 가치가 입증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독을 하고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야만 일을 제대로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열심히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은밀한 죄를 짓기 쉽습니다. 형통한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은밀한 죄를 잘 극복하는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아무도 그를 지켜보지 않을 때에도 자기 일을 성실히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사람의 삶의 목적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거이 아니라 자신이 모시고 있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줄 때나 무관심할 때나,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나 주목하지 않을 때나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형통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을 때 형통한 사람은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은밀한 죄를 극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주목하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내가 잘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때, 더욱 더 내 신분이 노예이고, 내 위치가 궁궐같은 곳이 아니라 냄새나고 더러운 감옥 안일수록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인지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잘 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73:3)"
우리는 형통에 관한 성경적인 의미를 마음에 분명히 새겨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형통이란 자기 생각대로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형통을 말할 때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일이 풀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자기 계획은 실패하고 좌절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면 우리는 분명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살고 있다면 비록 지금 우리의 삶에 걱정 근심의 풍랑으로 인해 정신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그 어떤 삶보다 안전한 삶을 살고 있고, 세상의 그 어떤 억만장자보다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려가는 것을 보고 시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참으로 형통한 삶을 살고 있구나! 그런데 나는 이게 뭐지?"라고 반응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의 거짓된 형통, 일시적인 형통, 순간적인 형통을 바라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영적으로 넘어지고 자빠진 것입니다. 마치 겨울철 얼음판에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쿵하고 찧은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빙판길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자빠지고 널부러진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영혼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침체는 겉으로 보이는 것을 가지고 형통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엉덩방아는 세상적 기준으로 형통을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바꾸지 않는한 우리는 일어나서 딤대히 주님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품으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거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7,8)"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형통한 사람이 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모세가 죽고 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험난한 가나안 전쟁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치를 것인가 고민하던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경험하지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보다 더 형통한 삶,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묵상'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용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밥먹듯이 먹는 것입니다. 암송하고 실천하고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신체의 일부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뼈와 살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묵상meditation이란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자신의 생각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을 체질화할 때 비로소 형통한 삶, 어디든지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시편의 서론과 같은 시편 1편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4)"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형통의 비결은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파도를 타라.
누구나 형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 형통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형통한 삶을 살기를 원하면서 내 손과 발은 세상적인 기준에서의 형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통한 삶의 비결은 내 사고방식을 바꾸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일으키고 계시는 거대한 파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바닷가에 가면 바다가 우리에게 스승이 되어 가르쳐줄 것입니다. 서핑(파도타기)을 즐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놀라운 영적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파도를 향해 헤엄칩니다. 어떤 이들은 파도를 타는 것을 즐깁니다. 파도를 향해 헤엄치는 것은 힘들지만 파도를 타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파도를 향해 힘들게 나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파도를 타면서 인생을 즐깁니다. 어떤 이들은 파도가 무섭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짜릿하고 흥분이 된다고 말합니다. 요셉의 삶을 관찰하면서 느끼는 것은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려나가는 사람이 형통한 것이 아니라, 비록 자신의 생각대로 잘 안되고, 자신의 계획이 좌절되고, 자신의 꿈과 소망이 물거품이 될지라도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거대한 파도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파도에 자신의 몸을 완전히 맡겨서 그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삶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어느 세대나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거대한 파도를 일으켜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거대한 파도는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복음이 땅끝까지 이르러 전파되는 그 날까지 계속 밀물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파도를 타는 일은 정말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파도에 몸을 맡기는 일은 언제나 성공과 형통을 보장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거대한 파도 앞에 위축당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통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내가 은혜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특별한 계획을 이루시기까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실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원대하고 위대한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낙심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안에 들어가 있는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품위와 품격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노예로 살지라도, 노예의 삶을 살지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복이 그들의 삶에 전반에 미치는 복의 근원, 통로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우리는 넉넉히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012년 9월 3일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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