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refinement에 대해 묵상해보려 합니다.
성경은 연단refinement을 '불'에 비유를 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연단은 우리를 잠시 힘들게 하지만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존귀하게 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성경역사에서 많은 왕들과 지도자들을 봅니다. 그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연단을 받은 지도자, 연단을 받지 못한 지도자...지도자가 연단을 받았을 때 그 백성은 평안하고 축복을 누렸지만, 지도자가 연단을 받지 못했을 때 그 백성들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다윗과 사울을 비교해보십시오.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해보십시오. 그 차이가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연단 받은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의 차이는 '의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은 연단을 통과한 사람이 갖게 되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책이나 학위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연단받은 지도자는 의로운 지도자가 됩니다. 그래서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용기, 정의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몸과 인생을 기꺼이 드릴 준비가 되어있는 희생정신, 권력을 가지되 겸손할 줄 알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해 그것을 사용할 줄 아는 마음..이것이 연단받은 지도자가 가진 덕목입니다.
요즘 한국은 대통령 선거로 다들 난리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라를 이끌 중책을 맡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습니다. 먼저 어떤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인지 생각해봅시다. 잘 사는 나라가 돈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면 경제에 밝은 사람, 많은 일자리를 약속하는 사람을 뽑아야겠지요. 하지만 잘 사는 나라는 돈이 많은 나라가 아닙니다. 중동국가나 중국을 생각해보십시오. 오일머니가 많고 엄청난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고 잘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 사는 나라는 돈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이끌 지도자는 의에 관한 지식과 소신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대선을 앞둔 지금 교회들은 의에 대해 설교해야 하고 의로운 지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암5:24
의로운 지도자는 도덕성이 높은 지도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높은 도덕성, 고귀한 인품, 그 이상의 '지식'을 의미합니다. 의에 관한 지식은 책이나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information이 결코 아닙니다. 이 지식은 '연단'을 통과할 때 주어지는 하늘의 지식입니다. 의로운 지도자는 연단을 받은 지도자이며, 연단을 통해서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알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정의를 세울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지도자입니다.
연단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연단을 경험하지 못한 채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만 하여도 판검사나 의사나 고위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단을 통과하지 않은 '정보'는 사람들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선한 생각'을 하고 있고, '올바른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한 생각, 좋은 계획, 분명한 열정만으로 우리가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권력을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직자나 대통령 등은 엄격한 청문회를 통해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쏙 나게 엄정한 청문회를 통과해야 합니다. 단지 도덕성의 기준만이 아니라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에 합당한 '연단'을 받았는지 제대로 검증해야 합니다. 세상도 그러하듯 교회는 더욱 더 그래야하겠지요.
불을 통과하지 못한 원석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게 캐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금이 아니라 그저 돌에 불과하듯 나의 계획이 아무리 선하고 나의 열정이 아무리 뜨겁고 확실할지라도 그것이 불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참되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자랑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욥28:2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연단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연단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성경은 이 연단을 '징계' '채찍' '시련' '꾸지람' 등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히12:5~8
우리에게 연단이 필요한 것은 이 연단이 없으면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은 이중인격자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중인격성은 죄 아래 태어난 모든 인간이 갖는 특성입니다.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중성, 혹은 정결하지 못한 마음을 치유하고 정결한 마음, 일정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연단의 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불어오는 불은 우리를 태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불순한 찌꺼기를 태우기 위함이며, 우리에게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를 날려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덮고 있는 무거운 껍데기를 날려버리기 위함입니다. 내게 있던 것들이 태워지고 날라갈 때는 그것이 오랫동안 내 몸의 일부였었기 때문에 아프고 아쉽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과 상실 때문에 내가 풍요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깨끗해졌고 또 가벼워졌음을 깨닫게 되고 결국 그것이 은혜였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시66:12
시련의 불을 통과할 때 내 몸의 일부가 태워져버리고 그래서 내 몸이 불타서 없어져버릴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울부짖게 되고,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 때 내게 소중했던 것처럼 여겨진 것들이 하나 둘씩 날아가버릴 때 찾아오는 상실감 때문에 서러운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내가 흘리는 눈물이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무거운 인격으로, 그러나 내 몸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가벼운 몸으로 빚어가는 것입니다. 인격은 무거워지고 몸은 가벼워져야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축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약4:8~10
모세의 연단을 생각해봅시다. 모세는 자신이 애굽의 궁궐에서 40년 동안 지내며 온갖 지식과 정보와 지도자 훈련을 다 받았습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드디어 자신이 고통받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헌신할 것을 다짐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중심으로 결집하도록, 자신이 이렇게 다 버리고 너희를 위해 헌신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애굽의 관원을 죽였지만 그러나 모세의 때는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잘 준비된 지도자감이었으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 연단의 불을 통과하지 못한 원석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에서 양떼를 치면서 제대로 연단을 받기 시작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홀로 양떼와 지내면서 그의 인격은 무거워졌고, 그의 몸은 가벼워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연단을 생각해볼까요.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기 전부터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형들이 선지자를 맞이하기 위해 만찬을 준비하느라 집에서 분주할 동안에 그는 빈틀에서 혼자서 양떼를 지키기 위해 곰과 사자와 싸워야 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릴 충분한 힘과 기술을 갖추었지만,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직 한가지 하나님의 불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연단하기 위하여 사울이라는 사람 몽둥이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다윗을 사울이란 사람 몽둥이로 가혹하리만큼, 너무하시다고 여겨질만큼, 지독하리만큼 매를 가하셨습니다. 사울을 피해 광야를 도망다니며 전전긍긍했던 그 시절, 그 광야가 사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지성소였다는 것을 훗날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시63:2
우리가 연단의 불을 통과할 때 배우는 것은 두 가지 마음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사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단의 불을 통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몸으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하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의로운 지도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즘 많은 '자칭 지도자'들이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기자회견을 하고,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매스컴을 적절한 타이밍에 맞추어 활용합니다. 이런 방면에 뛰어난 두뇌와 감각으로 대중의 마음을 얻어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 불행은 백성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의에 대한 무지와 무식이 의가 아닌 효율을 추구하는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문제는 전적으로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깊은 영성을 추구하되 공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르치지도 설교하지도 못하는 교회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교회건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의에 관한 지식을 전파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의를 추구하기보다 효율을 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의를 전파하기 보다는 성장을 추구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를 보십시오. 일제시대 등 핍박의 불을 통과할 때 교회는 효율이 아닌 의를, 성장이 아닌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암울한 시대에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에 교회가 무릎을 꿇고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의의 지식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효율과 성장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속의 교회가 참 맛을 잃으니 세상이 썩는 냄새로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교회 조차 '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의란 성경이 말하는 의 중에서 지극히 제한적일 뿐이고, 현실도피적이고 탈사회적이며 지나치게 영적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단의 불, 소멸하는 불, 태우는 불, 시련의 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이 불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는 초강력 태풍이 그 인생길 가운데 불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부라고 여겨졌던 것을 과감하게 태워버리게 하십니다. 자신을 가리고 덮고 있었던 덮게를 훌훌 날려버리십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물 흘리고, 너무 큰 상실감 때문에 울기도 하고, 때로는 연단의 불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찌꺼기와 무거운 껍데기를 대면하고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 매정하게 우리의 눈물을 병에 담아서 충분한지 계측하시며 때를 기다리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바다를 건넜지만 오늘 우리는 불붙는 유리바다를 건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내 앞에 불 붙는 유리바다가 가로막고 있을 때 이제 난 죽었구나 싶을 때 연단의 불이 나를 정결하게 가볍게 해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견뎌야 합니다. 연단은 짧고 축복은 깁니다. 눈물은 일시적이고 평강은 영원합니다. 연단은 추억이 되고 축복은 상급이 됩니다.
주님, 소멸하는 불, 연단의 불refining fire을 일으켜주십시오.
주님, 찌꺼기는 태워주십시오.
주님,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정결하게 해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땅에 신속히 들어가도록 몸은 가볍게 해주십시오.
주님,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내 중심은 더욱 무거워지게 해주십시오.
주님, 조국의 땅에 연단받아 의의 지식으로 무장한 주의 종들을 일으켜주십시오.
주님, 교회마다 의로운 주의 종들로 인해 불의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 이기게 해주십시오.
주님, 그래서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