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knowledge에 관하여 묵상해보았습니다.
지식의 종류
아는 것knowing이란 세 가지가 있는데 배ship를 가지고 설명해보겠습니다.
첫째, 배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배의 특징, 구조, 기능, 종류, 물리적 역학관계, 등등에 관한 백과사전식 정보술information skill입니다.
둘째, 배를 직접 만들 줄 아는 것, 즉 크기, 종류, 목적과 용도에 맞게 건조하는 조선술making skill입니다.
셋째, 배를 몰아서 거친 대양으로 향해할 줄 아는 항해술driving skill입니다.
교만하게 하는 지식, 겸손하게 하는 지식
우리의 성품에 영향을 주는 두 가지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다른 사람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고, 다른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인식), 다른 하나는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knowing이 앞에서 언급한 첫째 단계에 오래 머물수록 사람은 점점 교만에 빠지게 되고, 반대로 셋째 단계로 나아갈수록 사람은 점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첫째보다는 둘째가, 둘째보다는 셋째 단계가 사람을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데 왜냐면 셋째 단계로 갈수록 위험하기 때문이고, 순간의 실수로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조선술making skill도, 항해술driving skill도 없으면서 잘 안다고 큰소리칩니다.-고전8:1
참지식인은 겸손한 사람이다.
따라서 참 지식인은 내가 가진 지식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함부로 으쓱하지 않습니다. 순간의 방심과 오판이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니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며, 별거 아님을 알게 되고, 그래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처럼 참 지식인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참 지식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성품이 겸손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참 지식인은 결코 교만하거나 다른 사람을 무식하다고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다면 그는 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며, 아무 것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참지식인은 자신의 무지를 알아가는 사람이다.
무엇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는 뜻이고,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배움의 길을 잘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식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고, 내가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을 알아가는 중에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 속에서 무엇을 알고 있다는 것이 완료형인지 진행형인지를 보면 그 지식이 성장이 멈춘 죽은 지식인지, 계속 성장하는 살아있는 지식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성장이 멈추어버린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하며 힘쓰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아직도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고전8:2; 엡1:17; 벧후3:18
전공자의 심리상태
전공자는 어떤 것에 대해 남들보다 좀 더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누구보다 잘 절감하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며, 한계의 벽을 날마다 인식하며 그 벽에 부딪히며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영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전공해보니 장난이 아님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영문법에 대해 누구보다 자신있었던 제가 고등영문법 과목을 수강할 때 좌절 그 자체였습니다. 언어학자들의 논리부터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문법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전공과목을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좌절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대원에 입학해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성경 하나면 충분하다고 확신했는데 신학을 하면 할수록 얼마나 방대하고 어렵고 복잡한지 좌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현지인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목회자를 키우는 훈련을 한다고 하지만 가르쳐주는 것보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절감하는 사람은 전공자입니다. 그러나 안다고 함부로 큰소리 치는 사람은 아직도 비전공자입니다.
정보와 지식과 지혜의 상관관계
전에 잠시 이 문제(정보 vs. 지식 vs. 지혜)에 관련하여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한번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들이라고 한다면 지식은 '경험된 정보'이고, 지혜는 '지식을 통제할 줄 아는 힘'입니다. 정보는 경험을 통과하면서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지식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지혜가 됩니다. 저는 정보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보가 없이 지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 지식에 이르기 위해는 신뢰성 있는 정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정보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보의 단계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정보를 지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험정신'입니다. 지식은 실험을 통과한 정보입니다. 반면 지혜는 시련을 통과한 지식입니다.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는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실험을 통과한 정보는 시련을 통과하면서 지혜가 됩니다. 특히 지혜는 지식을 통제할 수 있는 힘으로서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육은 지나치게 정보위주의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학퀴즈나 도전 골든벨이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사회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 이것이 한국교육의 치명적인 약점이자 고질병입니다. 한국교육은 어릴 적부터 수많은 정보를 주입시키나 실험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더구나 실패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국교육에 잘 적응한 사람은 뛰어난 공무원은 될 수 있을런지 모르나 세계적인 리더가 되는 것은 어려운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없는 '정보기술자'의 위험성
아는 것knowing의 3단계를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요..한국사회처럼 정보기술을 강조하는 교육분위기에 잘 적응하게 되면 누구든지 시험을 쳐서 고급공무원이되고 판검사가 될 수 있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정보기술information skill을 가진 사람이 시험에 합격하여 어떤 권력power이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position가 주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큰 위기를 만났을 때 경험이 없고, 실패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를 몰라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교육은 주입식교육, 정보위주의 교육에서 실험을 강조하고 실습을 장려하는 지식위주의 교육으로, 더 나아가서 실패도 좌절도 격려할 줄 아는 지혜교육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과목의 경우 시험지를 내주어서 정해진 시간안에 주어진 문항에 정답을 적어내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보다는 직접 스피치를 하게 하거나 혹은 직접 백지에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작문해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수학과목도 50개의 문제를 제한된 시간안에 얼마나 정답을 맞추느냐보다는 배운 공식을 가지고 어떤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지 쓰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머리에 입력했다고 할지라도 실제 상황에 응용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예측하지 못하는 위기를 만났을 때에 침착하게 대응하며 위기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며 대처해나가는 것을 학교에서 연습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실험과 시련, 경험과 실패를 경험해보지못한 채 정보기술력 하나만으로 지식의 유무를 판단해버리고, 그리고 어떤 지위나 권력을 소유하게 될 때 그 사회나 단체가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지식의 책임성
남보다 더 알고 있다는 것은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남보다 더 알고 있다는 것은 더 큰 책임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잘 모르고, 나보다 무식한 사람에 대한 책임인 것입니다. 학교에서 만일 공부 잘 하는 사람에게 칭찬과 상을 준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공부를 잘 못하거나 성적이 나쁘다고 모욕과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교육의 본질을 망각한 것입니다. 왜냐면 성적이 나쁜 학생들이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내가 남보다 더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월감을 갖게 될 것이고, 나보다 지식이 모자란 사람을 무시하게 될 것이고, 결국 배운 자의 책임을 망각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적이 나쁘다고 수치심을 주거나 어떤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대신 반드시 배운 자의 책임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남보다 무엇인가 더 알게 된 것은 결코 자랑이 아니며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는 뜻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전도서1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가 만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무슨 뜻일까요? 지혜가 많으면 행복하고, 지식이 많으면 즐거워야 할텐데 그 반대로 고민하고 걱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식의 책임성 때문입니다. 더 많이 아는 것은 더 많은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죄를 짓는 사람보다 알면서 죄를 짓는 사람에게 더 큰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누군가 아는 것은 힘이라고 했나요? 그러나 사실은 아는 것은 책임responsibility입니다.
지식의 근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즉,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배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정보를 흡수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참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지식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식으로 만물을 붙들고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경외하기를 거부하는 자, 곧 미련한 자fool는 지혜를 비웃습니다. 그것이 돈이 되는가 그것이 떡을 주는가 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경외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원칙과 훈련을 비웃습니다. 원칙과 연습(principle and practice)는 지혜를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언급한 단어로써 설명해보겠습니다. 좋은 정보, 균형잡힌 정보, 신뢰할만한 정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진정 신뢰할만한 정보라면 실행에 옮겨보고 실험해보아야 합니다.(지식으로의 전환단계) 그 과정에서 다시 한번 걸러질 것은 걸러지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실행하고 실험하는 동안 시행착오를 반드시 겪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배우게 되는 것이 '원칙'principle이고, 그러면서 얻게 되는 것이 지식을 통제control할 수 있는 능력인 '성품'character을 얻게 됩니다. 성품과 원칙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서 지혜의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제 방식대로 풀어쓰자면 "하나님을 경외할 때 비로소 참된 배움이 시작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거부할 때 참 지식에 이르지 못하게 되고, 지혜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원칙과 성품의 중요성도 망각하게 된다."
최고의 지식 : 하나님을 아는 지식
단연 최고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 때만 비로소 우리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될까요? 앞에서 제시한 지식의 3단계를 따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 주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육신을 입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information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정보를 얻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의미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정보는 아무리 유용하고 신뢰할만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경험하기 전까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경험을 통해 참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과 연합'의 원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고 방법은 영접(요1:12)과 연합(롬6:4)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연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또한 시련과 징계와 연단을 거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의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하나님을 아는 마지막 경지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원칙과 성품에 순종하여 나갈 때 내 삶에 하나님의 원칙과 성품과 같은 '열매'들이 맺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내 삶에서 반영되는 하나님의 원칙과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결코 어떤 개념이 아닙니다. 멈추어 있는 어떤 성격이 아닙니다. 계속 성장하는 어떤 생명체와 같이 변화하고 자라남과 굳어짐이 반복되는 어떤 패턴과 같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를 얻습니다. 이 정보를 토대로 우리는 '믿음과 연합'이라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징계와 연단과 시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원칙을 배우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나타내게 됩니다. 이 마지막 지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단계의 지식입니다.
고난과 역경의 가치
지식이 지혜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고난과 역경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처음 단계에서 사람들은 정보를 얻기 시작할 때 그리고 얻은 정보를 체계화해나갈 때 기분이 좋아집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는 말씀(고전8:1)이 바로 이 순간입니다. 많이 배울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와 그 정보를 알고 있는 자신이 동일한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생 시절에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 시절엔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역경의 불을 통과할 때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이 다 타 없어져 버리는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지금 내가 겪는 이 고난 속에서 자신이 가진 그 많은 지식(사실은 정보)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내가 배운 모든 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가 사실을 고난의 정점에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참된 지식이 시작됩니다. 고난의 불을 통과하면서 지식도 순화되고 성결케 됩니다. 그간 배운 것들은 헤쳐모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절제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친 공부는 몸을 피곤케 한다는 전도자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전12:12) 절제란 성품은 수많은 정보들을 통제하는 성품입니다. 처음 무언가에 대해 많은 정보를 흡수할 때에는 그 즐거움이 크고 그래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적용해보고 경험하면서 조금씩 걸러지게 되고, 고난과 역경의 불을 통과하면서 절제하는 힘을 얻게 되고, 지식을 통제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원칙과 성품으로 요약될 수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에 이르는 단계에 시간이 필요하고, 역경도 고난도 좌절도 눈물도 참 지식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시119:71
문제의 원인
현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교육현실은 기다려줄 줄 알며, 실패와 좌절의 가치를 인정해줄 줄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한국에서 사교육이 강조되고 사교육비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IMF이후부터였습니다. IMF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자녀교육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뿌린 대로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자녀교육에 투자를 한 만큼 삶의 질은 달라졌고 가정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고 부모의 삶이 더 윤택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는 자녀에게 실험할 시간을 주지 않고, 실패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수능시험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3년 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해 공부한 것이 하루만의 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것이 정당할까요? 부모도 자식도 교사도 어느 누구도 이런 시스템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이상하고도 괴상한 게임의 룰에 자녀들을 밀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또 누군가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이건 아니라도 생각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대안학교를 위해 준비하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무엇이 문제일까요?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대구의 수성구에서는 최근 10달 동안 무려 11명이나 자살한 충격적인 일이 계속 되고 있음에도 아무도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합니다. 워낙 시스템이 심각하고 구조적인 문제가 커서 엄두가 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문제가 왜 어디서 생겼을까요? 실패와 시련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참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지식의 첫 단계인 information skill에 모든 것을 올인하기 때문입니다. 실험과 경험을 통해 making skill을 가질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주지 않고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리고 시련과 역경을 통해 driving skill을 갖도록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험하고 경험하기에 너무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조급해합니다. 그리고 실패하고 좌절하면 낙오자라고 아예 낙인을 찍어버리는 성급함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교육풍토가 옛부터 시행된 '과거제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책을 외워서 제시된 질문에 척척 적어내면 '신동'이라고 칭찬하던 습관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거시험에 의하면 오답을 적어내거나 혹은 기발한 답을 적어내면 어떤 의도로 그렇게 적었는지 물어보지 않고 탈락시켜버립니다. 과거제도의 폐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니 우습지 않습니까? 창의적인 방법으로 경험해보고 실험해보는 것을 경시하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조급함'을 다루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은 요원할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교회뿐이다
그러나 소망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교회가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대안은 성경에 있고, 하나님의 교회에 있습니다. 참 지식의 열쇠는 교회가 쥐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교육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교회에는 최고의 지식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참 교육의 원리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일학교 교육에서 참된 지식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가 대안이고, 교회교육이 유일한 치유책입니다.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니라 어린 학생들, 대학생 그리고 청년들에게 '배움'을 강조하되, '실습과 경험을 통한 배움'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과 시련도 필요하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실패와 시련을 통해 '원칙과 성품'을 얻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실험과 시련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교회, 실습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게 하는 교회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실습하게 하고 실패를 맛보게 하라.
가정과 교회에서 자녀들에게 '실험(실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직접 교사가 되어볼 수도 있고, 수련회에서는 외부강사가 아닌 학생들이 직접 강의를 준비해서 강의를 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실수하더라도 일단 해보는 것입니다. 실수하더라도 칭찬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꾸준히 '실험'하고 '실습'하다보면 실수도 하고, 또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겠지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나가면서 점차 스스로 어떤 원칙을 배워가게 될 것이고, 점점 위기에 대처하는 성품의 능력을 배양해나가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이것을 적용해볼 수 있겠습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실습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 그리고 '실수와 실패'에도 수치나 고통을 주지 않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창의적인 방법을 칭찬하고,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나가는 즐거움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고,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실패해도 잘 했다고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실습과 실패, 실험과 시련, 경험과 원칙..이것이 지식과 지혜에 이르는 길입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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