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에 청년들에게 전했던 설교원고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본문: 유1:3,4
오늘부터 저는 여러분에게 변증설교를 할 것입니다. 변증이란 복음을 변호하고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변증이 오늘날 필요한 이유는 이단들과 거짓 선지자들 때문입니다. 이단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단뿐만이 아니라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비웃고 있습니다. 세상의 조롱 앞에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변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공격을 받을 때 변증은 교회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세상 가운데서 강하게 해줍니다. 구약성경 다니엘서 11장 32절에는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언약을 배반하게 하고 악행하게 만들며 또 교묘한 말로 타락시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강하여 용맹을 발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변증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 가운데서 강하고 용맹을 발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변증은 결코 지식을 위한 지식을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변증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증의 목적은 세상 가운데서 강하여 용맹을 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강한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강하다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람이 불 때 넘어지지 않는 것은 강하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에서 용맹을 발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세상을 흔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증설교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에서 강하여 용맹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변증설교를 시도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은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왜 믿음이 필요합니까? 왜 믿어야 합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은 매우 기본적입니다. 그러나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서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가지려고 한다고 믿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세요.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 어느 날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번에’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약 믿으라고 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면 믿음은 단번에 받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이 믿어지고 성령님이 믿어지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저절로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믿음이 없는 사람보고 믿으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믿어지지 않는데 믿으라고 다그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요? 믿으려고 노력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면 이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쉬운 한 가지 사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믿음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에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믿는다고 할 때는 무엇인가를 신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깊이 알지 않고서는 결코 그 대상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그 대상이 인격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여러분이 잘 알게 되고 그 대상이 신뢰할만하다고 판단이 될 때 여러분은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이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대상을 믿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단지 그 대상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이 저절로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신앙의 큰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나도 모르게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요구한다고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대상을 인격적으로 알게 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 역시 우리의 행위와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갈 때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정도와 믿음의 정도는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깊은 믿음이 생겨날 것이고, 하나님을 크게 알수록 큰 믿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나중에 이 계시의 문제에 대해 깊이 다룰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4절을 보시면 “우리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나오고, “홀로 하나이신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 나옵니다. 이 두 말은 서로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너무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날 설교를 듣고서 내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을 받았다면 우리는 “아, 오늘 큰 은혜를 받았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은혜의 측면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동시키고 놀라게 하셔야 우리가 믿음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무엇입니까?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 부분에서 은혜를 놓치고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참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참 믿음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 만약 이 은혜를 알지 못하면서 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크나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이단과 세상의 놀라운 거짓말이 숨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단과 사단과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있느냐고 저들은 반문합니다.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기서 먼저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냐면 경건과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경건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건을 알지 못하면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인정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품입니다. 성격이 좋다고 다 경건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 앞에 자기 생각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 진리 앞에 자신을 굴복시킬 줄 아는 용기, 진리 앞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정직함,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예를 들어, 2 더하기 2는 4입니다. 이것은 수리의 영역에서는 최소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 더하기 2는 5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도전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 즉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 없고, 더 나아가서 참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두드러진 성품은 진리를 알고도 진리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경건합니까? 경건함이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옳다면 나에게 해롭다할지라도 굴복할 용기가 있습니까? 그것이 진리라면 기꺼이 내 생각을 진리에 맞추어서 수정할 용기가 있습니까? 기꺼이 진리에 내 생각을 맞출 용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경건한 성품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바탕입니다.
그러나 경건이 무너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도 비웃습니다. “흥, 그것이 왜 은혜야?”라고 비웃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은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 체험, 신기한 기적, 종교적인 행동 등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경건의 성품이 무너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역사나 체험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신비한 현상을 추구함으로써 실제 자기들의 삶 자체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 받으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이 그것일까요? 여러분이 신앙생활하면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한 것들이 그것일까요? 저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아들을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하여 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저에게 없다고 굳게 믿습니다. 비록 내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어도, 비록 내 삶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을지라도, 비록 내 삶속에 신비한 체험이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신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다고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은혜는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신비는 없습니다. 이것보다 나를 놀라게 할 신비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은혜” 다시 말해서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을 때 우리 안에는 저절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날 갑자기 내 안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고,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에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골로새서 1장 5, 6절에도,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코 믿음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인 것입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혹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거나 혹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은 그 은혜 다음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은혜 이후에 저절로 맺히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예상하지도 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가운데 내 안에 ‘단번에’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원수 사단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 사단은 이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기의 꼭두각시를 우리 안에 파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세요.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사단의 파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가 단번에 받은 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우리의 시선을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서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참 은혜의 본질을 놓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보는 것이고 듣는 것이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은혜의 본질을 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들는 것은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복음설교에 대해서는 하품을 해댑니다. 그리고 지루하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런데 간증이나 체험 이야기에 관해서는 눈을 반짝거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단의 파견을 받은 자들임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사단의 의도와 목적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원수 사단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미혹을 받은 자신들조차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철저하게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단에게 놀아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환난과 시련의 바람이 불어오면 다 바람에 날려가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고난을 결코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는 그 날에 단번에 받게 된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셔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흩트리는 원수 사단의 계략에 속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신앙의 본질을 호도하며 흩트리게 하는 원수들의 계략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교회가 해야할 영적 전쟁입니다. 환란과 핍박이 무서운 적이 아닙니다. 차라리 환란과 핍박은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호도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원수의 전략을 반드시 기억합시다. 원수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놓치게 하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상한 체험이나 신비나 행위로 돌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더 알기 위해 힘씁시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힘의 원천입니다. 그분을 알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분을 결코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결단코 맹목적으로 믿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단코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는 믿을만한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을 믿을만한 분인지 아닌지 한번 알아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분명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잘 믿을 수 있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지난 주간에 제자훈련하는 모임에서 나이가 60이 다 되어가는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데 잘 안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아서 해결하기 참 힘듭니다.” 그분이 궁금해 하는 것은 주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사람을 만드셨는가,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 등등입니다. 이분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보다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두려워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 안에 끊임없이 이런 저런 문제들을 만들어낸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런 저런 예리한 질문을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회피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려면 믿을만한 분인지 아닌지 증거를 조사해보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면 하나님을 믿게 될지 믿지 말아야 할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질문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경건치 않음을 은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 사단은 종종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함으로써 은혜의 본질을 놓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절대로 맹신이나 강요에 의한 믿음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을지 믿지 않을 지 결정하려면 증거를 조사해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만한 증거를 먼저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궁금한 것이 있다면 사람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사람에게 묻는다면 자신의 경건치 않음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그런 다음에 물을만한 사람에게 물으십시오. 그런 다음 세 번째 단계로 하나님께서 직접 혹은 사람을 통해 명쾌하게 계시하여주지 않으신다면 본질이 아닌 것이라고 여기고 중요한 것부터 붙잡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만드셨는가를 붙잡으면서 평생 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홀로 하나이신 주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놓쳐버린다면 이보다 더 불쌍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분에게 읽어드린 말씀을 여러분에게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29:29)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거나 지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들을 배워서 생명을 얻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신앙의 본질을 놓쳐버리고 살았다면 오늘 다시 회복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면 다시 회복하기를 축복합니다. 혹시 사소한 것에 매여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 않는지 자신을 점검해보기를 축복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직장을 구하고 배우자를 만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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