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설교-II
예수부활의 확실한 증거들
본문:막16:1~11 김 광 락 목사
I. 예수님은 첫 주일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말이고 사망권세가 그분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선언은 기독교의 뿌리요 주춧돌입니다. 이 선언이 거짓말이라면 기독교 전체가 위선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저는 이 시간 예수부활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다는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그냥 믿으면 되지 믿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냥 믿으면 되지 굳이 정말 부활하셨는지 증거를 확인하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까?”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은 “예, 우리는 증거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은 근거가 필요 없다.” 즉, “근거가 없어도 우리는 믿어야 한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근거 없는 신앙,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맹목적 신앙은 때로는 불신앙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3. 지난 주 몇몇 학생들과 학습문답 하는데 제가 한 학생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니?” 그 학생이 대답하기를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단 말이니?”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믿으면 마음에 평화가 오기 때문이에요”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교회생활이 불편하고 불안해지고 세상 생활하면서 더 마음이 편해지면 교회에 안나오겠네?” 저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과 분명한 근거가 없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신앙생활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제가 서두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실에 근거한 믿음이 중요하고 또 귀하다는 말입니다.
4. 사실은 휘발류과 같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태우면서 얻는 엔진과 같습니다. 그리고 감정이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그 에너지로 끄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5.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을 가지고 감정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자동차를 움직여 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사실에서부터 부단히 에너지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내 힘과 의지와 내 믿음으로 무엇인가 이루어보려고 하는 경우는 오래가지 않아 지치고 맙니다. 처음에는 열매를 맺는 듯 하더니 나중에는 금방 열매가 사그라들고 맙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항상 변함없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신앙생활은 사실이 끌고 가야지 내 믿음이 끌고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믿음을 끌고 가야 합니다. 사실에서 믿음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실이 계속해서 연료를 공급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믿음이라는 객차는 멈추어 설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다는 행동이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그 사실입니다.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그것은 구원받는 믿음의 본질에 속한 것입니다.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 죄가 속해졌다는 사실!! 사망의 통치가 종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생명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6. 제가 한 가지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과 사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까? 예를 들어, 만약 역사적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할 때 그래도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만약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사실이 아니어도 믿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자유주의자들입니다. 만약 성경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 속으로 가버리겠다고 말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복음주의자들입니다. 만약 역사성을 부인하고 믿음만 갖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II.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이 부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부활신앙의 유형이 분명 있습니다.
1. 그들은 생각하기를,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영원히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몸으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정신을 우리가 소유할 때 우리는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주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는데 주님의 그 정신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살아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는 것이 진정한 부활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다 잘못된 교리입니다.
2. 혹은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고 절대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을 제시함으로써 그런 말들이 다 마귀의 속임수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절대로 그냥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위해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방식입니다.
3. 저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한 증거를 많이 가지면 가질 수록 부활에 대한 믿음도 더욱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맹목적으로 부활신앙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왜 부활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조건 예수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될 절대적인 이유와 분명한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에 입각한 믿음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4.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건이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고,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먼저 4복음서 내에서 우선 찾아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복음서 밖에 기록된 부활의 확실한 증거들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 마귀가 어떻게 신학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III. 복음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예수님 부활하신 확실한 증거들
1. 첫째 증거는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군사들입니다.(Mathew)
(1)마태복음 27장과 28장을 보면 예수님이 금요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안장된 후 유대지도자들이 빌라도와 함께 의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건의합니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케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마27:63~66)
(2)그러나 안식일 후 첫날 즉 주일 아침에 부활의 사건이 있고 무덤이 비게 되자 이들은 자기들이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했습니다. 그들은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도지 않게 하리라.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마28:13~15)
(3)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다니면서 자기들이 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말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앞뒤 모순이 가득 찬 말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의 입장에서의 모순: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최소한 시인하는 셈이다.. 그들은 예수 부활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증인들입니다.
-군병들 입장에서의 모순: 파수의 책임을 맡은 군병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잠을 잤다는 것은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이 스스로 자기들이 잤다고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의 모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 도망가버린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에도 도망갔던 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군병들과 싸우기 위해 다시 무덤을 기습했다는 것은 앞뒤가 말이 안됩니다.
-이 말 자체의 모순: 군병들이 말하기를 잠을 자는 사이에 제자들이 와서 시신을 훔쳐갔다고 했는데 자기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제자들이 와서 돌을 굴리고 시신을 훔쳐 가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오는 것을 알았으며 시신을 훔쳐 가는 것을 알았단 말입니까? 돌을 굴리는 데만 해도 시끄러운 소리가 났을 텐데 잠을 자는 동안 훔쳐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마가복음 16:4을 보면 “돌이 심히 크더라”고 했습니다. 큰 돌을 움직이려면 시끄러운 소리가 났을 것이고 군병들이 잠을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군병들이 잠을 잤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무덤을 막고 있었던 돌이 증거가 됩니다.
-이 말 자체가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적어도 무덤 안에는 시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유대지도자들과 군병들이 공적으로 선포하고 다닌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A라는 사람이 새빨간 거짓말로 B라는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한다면 우리가 그 말이 거짓말인 줄 안다면 우리는 B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태도입니다.(Mark)
(1)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전해준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을 읽어보면 부활의 소식을 듣고서도 믿지 않았다고 한 표현이 세 번 이상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처음에는 불신했습니다. 여자들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허탄한 말’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불신하고 믿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렇게도 강하게 믿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단 말입니까?
(2)분명히 제자들은 낙심해있었습니다. 왜냐면 자기들은 3년 동안이나 섬기고 따라왔던 스승을 배반하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낙심 가운데 있고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선포한 말에 자기들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고서 가능하겠습니까?
(3)또 제자들은 유대지도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요20:19절) 그들은 언제 예수님처럼 잡혀서 끌려가 반역죄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떻게 시체를 훔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담대하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이 외친 그 말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4)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제자들이 슬피 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존경하고 따랐던 스승이 죽었으니 슬퍼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였던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서 울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강력한 알리바이가 되는 것입니다.
3. 셋째 증거는 흩어진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Luke)
(1)눅 24:12절 이하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이심을 믿었지만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보고 절망하고 낙심한 채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식후 첫날 주일 저녁 즈음에 그들은 기쁜 얼굴을 하고서 예루살렘 마가 다락방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이 다시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2)그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하실 때 다른 9명의 제자들은 도망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체포당할 지 모르는 위험을 스스로 감수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분명히 도망갔던 그들이 하나 둘씩 모여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10명의 제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도망갔던 그들이 다시 위험한 예루살렘으로 바로 이튿날 다시 모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도망간지 하루만에 다시 모두 다 모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과연 살아나셨다는 사실 밖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4.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의 넷째 증거는 무덤 안에 놓인 세마포입니다.(John)
(1)여자들이 무덤으로 가보니 무덤은 이미 비어 있었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이미 옆으로 치워져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제일 먼저 전했습니다. 이 때 다른 9명의 제자들은 어디론가 멀리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해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뜀박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무덤이 비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2)제일 먼저 요한 사도가 먼저 도착해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까 세마포가 놓여 있었습니다. 세마포는 시신을 감싸는 수의였습니다. 여러분, 염을 하는 것을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흰 천으로 시신을 둘둘 감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서 나올 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천을 감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천을 풀어주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당시 시신을 어떻게 했는지 배경을 알려면 요11:44을 보십시오. 천으로 시신을 둘둘 감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장될 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흰 천으로 둘둘 감고 무덤 안에 누인 것입니다.
(3)그런데 무덤 안에 예수님을 둘둘 말았던 그 세마포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마포가 무덤 안에 있었다는 말은 첫째로,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누가 시신을 훔쳐갈 때 세마포를 풀겠습니까? 세마포를 풀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마포를 풀면 냄새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냥 세마포가 둘둘 말린 채로 옮기지 않습니까? 유대지도자들도, 로마인들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훔쳐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 스스로 풀고 살아나신 것도 아니라 것을 보여준다. 사람의 힘으로 자신을 묶고 있는 천을 풀 수 없습니다.
(4)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본 것입니다. 들어가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요20:6,7절,요11:44을 비교해 보라) 이 표현은 부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자 보십시오. 세마포가 놓였는데 다른 한 쪽에는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딴 곳에 개켜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개켜 있다’는 말은 번역이 좀 모호한 표현인데 정확한 표현은 ‘둘둘 말린 채로 놓여져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몸은 세마포로 쌉니다. 그리고 머리 부분은 따로 천으로 둘둘 싸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는데 베드로가 본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시신을 둘러 싼 천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천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로 몸이 천을 통과하여 쏙 빠져나갔다는 겁니다. 그래서 머리가 놓인 부분에 머리를 쌌던 수건이 둘둘 감긴 채로 있고 몸을 놓은 부분에 몸을 쌌던 천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부활하셨는가? 두 천사가 와서 감았던 천을 풀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신 채 몸만 쏙 빠져 나오셨습니다.
(5)이것이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과 다른 점입니다. 나사로는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누가 풀어주기 전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붕대를 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처럼 붕대를 누가 풀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살았다가 나중에 죽었지만 우리 예수님은 다시 무덤에 들어가신 일어 절대로 없습니다.
5.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부활의 증거는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1)무덤을 굳게 지키던 병사들이 그 증거입니다. (2)그들이 퍼뜨린 소문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3)무덤을 굳게 막고 있었던 큰 돌이 그 증거입니다. (4)흩어진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인 것이 그 증거입니다. (5)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불신하고 계속 울며 슬퍼하고 절망하던 제자들의 태도가 그 증거입니다. (6)그리고 무덤 안에 이해하지 못할 모습으로 놓인 세마포가 그 증거입니다.
IV.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이렇게 분명하고도 확실한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1. 믿지 못하는 이유는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불확실해서가 아닙니다. 그들 마음 속에 예수님을 모셔들이기가 싫어서입니다. 빛보다 어두움이 더 좋아서입니다. 빛으로 나아갈 때 고통을 감수하기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리게 될 것이 아깝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른 말을 지어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기록된 그런 증거들은 다 제자들이 지어낸 말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V. 그러나 그래도 증거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증거 이외에도 부활의 증거는 오히려 더욱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더라도 세계 역사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라는 겁니다.
(1)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라는 사실은 비단 성경이 아니더라도 당시 문헌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 자체에 대해서 적어도 논쟁이나 이견이 전혀 없었습니다.
(2)많은 추종자를 둔 정치지도자나 종교지도자치고 무덤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무덤은 인도의 능수해안에 있습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무덤은 중국 장평량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무덤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2. 둘째로, 세계역사를 볼 때, 기독교가 시작된 곳이 다름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루살렘이었다는 겁니다.
(1)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곳에서 기독교가 시작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장 철저하고 열심있는 유대교의 수도 한 가운데서 유대교의 핍박을 받으면서 기독교가 시작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종교의 핵심 본거지인 예루살렘 한 가운데 목숨을 걸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전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입니다.
(3)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분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도망갔습니다.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에 모으게 한 힘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었다는 겁니다.
(4)기독교회의 강력한 모체는 바로 예수님의 무덤이 있었던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최초로 부흥성장한 교회는 바로 무덤이 가까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후대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3. 셋째로,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1)분명히,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심지어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돈을 받고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가룟유다는 목을 매어 자살했고, 나머지 11명의 사도들과 평소에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순간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2)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지 6주 만에 변화되었습니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도망가던 사람이 이제는 담대하게 바뀌었습니다. 고난받기 싫어 도망가던 자들이 부활의 메시지 때문에 고난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그들이 이렇게 변화된 것이 과연 그들이 스스로 꾸며낸 이야기 때문일까요? 자신들이 지어낸 말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 그 거짓말에 고난을 자청하고 순교를 자청하는 담대한 사람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이것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이 과연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에 의해서만 이해되는 겁니다.
4. 넷째로, 세계역사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 증거입니다.
(1)세계 역사상 기독교만큼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한 종교는 없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말씀 때문에 순교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순교자들이 너무 광신자여서 그럴까요? 그들은 광신자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이 순교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 하나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교회의 영광은 곧 순교자의 영광입니다. 순교자들을 배출한 교회마다 오히려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가 왜 일어났을까요? 대답은 오직 한 가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한 가지 사실입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도 정신나간 사람들이고 시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째로, 기독교가 세계역사를 뒤바꿔놓았다는 겁니다.
(1)교회가 부활의 주님을 높이며 부흥할 때마다 반드시 그 지역사회도 변하였습니다. 부흥하는 교회가 있는 사회와 국가는 그 도덕기준이 높아졌고, 범죄율이 낮아졌고, 사회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부도덕한 사회풍조를 바꾸고 범죄율을 내리고 도덕적 분위기를 쇄신한 기독교의 진정한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과연 살아나셨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뿐입니다. 이 사실이 사실이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라면 기독교는 거짓말장이요 위선자요 광신자가 되는 겁니다. 사회문화를 바꿔놓은 그들이 미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과연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온갖 음란풍조로 망해가던 로마를 구해 준 카타콤 교회는 미친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사회의 도덕적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던 그들이 거짓말쟁이일까요? 거짓말쟁이가 사회도덕문화를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이 과연 살아나셨다는 사실뿐입니다.
6. 여섯째로, 세계역사에 주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주일 중에 하루를 지켜서 쉬는 것은 세계민족 가운데서 오직 유대민족 뿐이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7일 중에 하루를 쉬어야 한다는 개념이 없이 모든 나날이 노동의 날이었습니다. 오직 유대민족만이 일주일 중에 하루를 지켜 쉬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얼마 있지 않아 유대인이 지키던 안식일이 아닌 안식일 다음 날을 공휴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휴일 제도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주일 중에 하루를 쉬는 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모셔들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주일이 되면 차를 타고 야외로 놀러가고 골프치러 놀러갑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마음대로 주일만 되면 놀러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이 부활하신 날 때문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주일이나 일요일의 개념이 없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해야만 하는 노동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7. 일곱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의 일관된 고백과 삶입니다.
(1)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어부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변화되어 제자들의 리더가 된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2)여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랑했던 구세주가 죽었다는 사실로 슬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만에 기쁨이 충만한 자들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3)다른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다 도망간 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보면 그들은 다 순교함으로 인생을 마감한 자들이었습니다. 비겁쟁이들이 순교자들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4)의심하던 도마를 보십시오. 그는 만져보기 전에는 절대로 안믿겠다던 회의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지금도 도마를 인도에서는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회의주의자가 성인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5)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형 예수님을 처음에는 ‘미친 사람’이라고 놀려댔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형을 비난한 동생이 형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강력한 지도자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6)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던 열렬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목숨을 걸고 전파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메시지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았습니다. 핍박자가 변하여 예수를 위해 고난을 자청하고 순교한 자로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7)이외에도 증거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8. 여덟째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전 인격이 바뀌게 된 것이 지어낸 거짓말 때문에 가능할까요? 허구의 말 때문에 우리가 변화된 걸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더라면 가능하겠습니까? R. Bultmann과 같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실제로는 무덤에서 부활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지 않으셨다고 가정한다면 저는 지금 목사직을 집어치우고 보따리 싸겠습니다. 제가 무엇이 부족해서 사서 고생길합니까? 저는 어릴 때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공부도 꽤 잘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받고 예수님이 정말 나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그 말씀이 믿어지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꿈을 다 접어두고 그렇게 주위에서 반대를 했는데도 무릅쓰고 목사 되어 평생 이 복음 전하는 데 생명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지금 정신 나간 것입니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면 분명히 저는 미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다면 저는 바른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부활하셨다면 저는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은 지금 교회 나오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집에서 애기나 보고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상 쾌락을 실컷 즐겨야 합니다.
VI. 그러나 불행하게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서 정말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시고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몸은 교회에 나오는데 마음은 이 귀한 진리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마귀는 교회 밖에서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더 크게 역사합니다. 교회 밖에서 미혹하는 것보다 교회 안에서 더 크게 미혹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자들이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교리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습니까?
1. 예수님을 보기는 보았지만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한 두 사람이 환상을 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집단으로 환상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환상을 보는 사람들은 저마다 성격이나 개성이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자들을 보십시오. 한 두 사람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고전15:4이하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한 두 사람이 보았다면 그렇게 의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최소한 520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환상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제자들은 각기 개성도 달랐고 특성도 달랏고 성격도 제각기였습니다. 이렇게 다른 개성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일관성있게 증거하는 것이 환상일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이 죽지 않았는데 일부러 죽은 척 하셨다는 위장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형에 익숙한 로마군병들이 실수할 리는 없습니다. 로마군병들은 죄수를 빨리 죽게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기 전에 채찍을 심하게 때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죄인들은 반드시 다리를 꺽어서 죽었는지 확인합니다. 예수님은 다리를 꺽는 대신 창을 깊숙이 찌름으로써 죽으셨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마포에 싸여 매장된 사람이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세마포를 풀고 일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상처입은 몸으로 큰 돌을 안에서 굴리는 것도 불가능한 겁니다.
3.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제자들이 지어낸 허구라는 날조설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기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목숨 걸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 때문에 자신의 인격이 변하고 자신들의 성격이 변하고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 때문에 슬픔이 변하여 희망으로 바꾸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얘깁니다.
4. 이외에도 영체설, 유기설 등 여러가지의 이론들이 있지만 모두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기를 싫어하여 지어낸 헛된 이론들입니다. 어떤 이론을 가져오더라도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VII. 결론을 맺습니다.
1. 1930년대에 프랭크 모리슨이라고 하는 영국의 유명한 법률가이면서 저널리스트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부활신앙은 헛되며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한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의 원래 제목은 [집필되지 못한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중하게 기독교 부활신앙의 허구를 증명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검토하는 중 오히려 원래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증거를 검토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 사실이며 성경에 기록된 것은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 제목을 바꾸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오히려 증거하는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그 유명한 “Who Moved the Stone?” 즉, [누가 돌을 옮겼는가?]입니다.
2.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아무리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부인하지 못할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부활의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아마 없을 겁니다.
3.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왜 이렇게 지루하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들을 수집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결코 근거없는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실에 근거한 믿음이 될 때 우리의 믿음은 독수리가 날개치며 힘차게 올라가는 것같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증거에 기초하여 사실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은 더욱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4. 여러분, 믿음이 식어지십니까? 그렇다면 사실을 확인하십시오. 사실 여부를 따져 보십시오. 지금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의심이 찾아오는 분이 있습니까? 너무나도 확실한 부활의 증거들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고 싶은데 믿음이 안 생긴다고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변함없는 사실만을 붙드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열정이나 감정이 안 찾아와서 힘드신 분이 계십니까? 내 의지에서 시작하지 마시고 사실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에서부터 우리는 순간순간 삶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확실한 사실에서부터 시작해보십시오.
5.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확실한 사실은 우리에게 날마다 충분한 삶의 에너지와 활력을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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