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으로 충분한가?
본문: 잠3:1-8
사람은 저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이성(理性)이라고 합니다. 철학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첫째, 진위(眞僞), 선악(善惡)을 식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 둘째,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 셋째 칸트 철학에서, 선천적 인식 능력인 이론 이성과 선천적 의지 능력인 실천 이성을 통틀어 이르는 말. 좁은 의미로는 감성, 오성(悟性)과 구별되어 이데아에 관계하는 더 높은 사고 능력을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도덕적 판단 능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무튼 사람은 나름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옳고, 저것은 그르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기준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다투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이성적 능력은 사람과 동물을 구별시켜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판단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기능은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세요.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하지,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라 할지라도 이성적인 판단, 도덕적인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고민하는 동물을 보았습니까? 오직 사람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고민할 줄 압니다.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내리는 능력,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고민하면서 “이것이 옳다”라고 판단 내리는 능력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지능이 뛰어난 동물에게도 이성적 능력은 없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증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화론이 틀렸다는 아주 중요한 증거라고 믿습니다. 수만 년이 흘러도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일은 없을뿐더러 원숭이가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더더욱 없습니다. 혹성탈출이란 고전영화에서 나오듯이 원숭이가 사람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처음 볼 때는 무척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으로 보니 그 영화는 사람과 원숭이가 무엇이 다른가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과 동물이 다른 것은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가 바로 이성적 능력의 유무입니다. 도덕적 판단 능력은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저는 세 아이를 키우면서 이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이성적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빠 엄마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금새 “그건 나빠!”라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언니, 그것은 옳지 않아!”라고 자신의 소리를 분명히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웬 대수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것은 사람에게만 있는 능력입니다. 무엇이 옳고 옳지 않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항의할 줄 알고, ,옳지 않은 일을 나름대로 교정할 줄 아는 능력!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것은 정말 놀라운 능력입니다. 저는 이토록 중요한 능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소중한 능력은 바로 이성적 능력, 혹은 도덕적 판단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없다면 세상은 지옥과 같이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찬양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가끔 자기중심적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가끔 그것이 사람마다 달라서 혼란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이치에 맞게 추리하고 판단하는 사고의 능력!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만 주어진 고유의 능력입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을 보면, 이성의 기능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이성이란 무엇이 의로우며,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다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말합니다.(엡4:22,23) 우리의 사고방식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이성의 능력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기능이 작동하지만, 그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부인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자기가 판단하는 것은 다 옳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지느러미가 문제가 생겼을 때 자꾸만 원을 그리면서 헤엄치는 것처럼, 마치 자동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면 나는 똑바로 운전하고 싶어도 똑바로 갈 수 없고 자꾸만 치우치는 것처럼 사람은 나름대로 옳게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삶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동차를 오래 운전하다보면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슶니다. 이럴 때 휠 얼라인먼트가 필요해집니다. 우리 인생에게도 교정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성이 손상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똑바로 쌓아올리고 싶은데 결과적으로 잘 되지 않습니다. 나는 벽돌을 똑바로 쌓아올리려고 노력하는데 결과적으로 보니 삐뚤삐뚤해져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다림줄’입니다. 무거운 추를 실을 매달아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 다림줄에 맞추어서 벽돌을 쌓아올려야 벽을 바로 쌓아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심만으로 똑바로 쌓아올릴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나름대로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준을 점검해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카센타에 선교사님들이 차를 수리해달라고 맡길 때 수리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만일 한눈이라도 판다면 금새 멀쩡한 부품을 빼어서 오래된 부품을 끼워 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식에 대해서 현지인들은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성적 능력이 훼손이 된 증거입니다. 그 증거는 이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약간의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세술과 정직함이란 성품을 구분할 줄 모릅니다. 신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교수에게 자기 부모가 아프다고 말하면서 돈을 타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모가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아니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의 다림줄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성이 손상되면 자신들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직선의 개념을 배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선을 잘 긋지 못한다고 합니다. 막대자를 주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실소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바른 길이지만 결과적으로 사망의 길이 있다고 잠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내가 보기에는 다 깨끗한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복음을 듣고도 믿음을 가지지 못할까요? 자신의 판단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 유학도 하고, 박사학위를 가졌는데 인식능력에 심각한 문제를 가진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로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정서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이성적이라면 대인관계나 정서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이성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은 그것이 원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담의 죄가 오늘 우리에게 영향을 주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의 부모,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아담과 하와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그들의 지은 죄가 그들의 후손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을 인식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영향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죄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란 증거가 무엇입니까? 굳이 성경을 보지 않아도 그 증거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이 사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성의 능력이 뛰어나면 행복해져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한때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합리주의 계몽주의 시대를 보라. 산업과 과학이 발달하면 사람이 행복해져야 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치명적인 무기를 발명해내었습니다. 보세요. 인간의 이성이 강조될수록 사람은 행복해집니까? 조금 편해졌을 뿐, 삶의 퀄리티가 오히려 낮아졌습니다. 편한 것과 행복한 것은 다릅니다. 기술이 발달한다고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편해지는 것과 삶의 질이 올라가는 것은 다릅니다. 보세요. 다윈은 진화론을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아메바에서 진화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해졌나요? 오히려 도덕성이 떨어지는데 결정적인 일조를 한 것입니다. 진화론을 가르치는 나라를 보면 교육과 도덕이 붕괴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을 보세요. 학교에서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진화론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범죄율은 높아지고 교육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단세포에서 진화된 동물이라고 가르칠 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그럴듯하게 제시했지만 오히려 그 결과는 인류의 행복과 정 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사고방식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이성적 능력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데, 결과적으로 잠시 편해질 수 있지만 점점 삶의 질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성에 대하여 과신하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조금 어려운 단어인 인식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인식이란 사물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이 꽃은 아름답다는 말은 인식입니다.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은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식입니다. 사람이 논리적으로 추론할 때 큰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사실과 인식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사실과 인식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영향력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인식의 틀이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릴수록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인식의 틀이 정형화되지 않을수록 복음을 잘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식의 틀이 진리와 상관없이 굳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인식의 틀이 굳어져버리는 원인은 교육의 문제라기 보다는 주로 상실과 학대와 같은 상처의 문제입니다. 정서적인 문제와 인식의 문제는 아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모든 기독교는 위선자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복음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과 인식을 혼동하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 유대인들이 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죽였습니까?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는 정치적으로 우리를 로마에서 해방시켜주는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 안심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철저히 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사실입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가 사실입니다.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가? 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는 것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이전에 우리는 판단 보류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경건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못박은 유대인들처럼 내 판단을 철저히 과신하게 만드는 것이 죄의 영향력입니다. 우리 모두 죄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강력한 증거가 이것입니다. 사람이 죄인이란 증거.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않으려고 하다가 자기 힘으로 도저히 되지 않는 한계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타락한 증거입니다. 자기 힘으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정작 결과가 원하는 것이 아닐 때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가 임금님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학자는 한 번도 자기 집의 하녀에게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가르치면 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강퍅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잘못된 인식의 틀을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이 실제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식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원하고, 듣고 싶은 것을 듣기 원합니다. 이것이 죄의 영향력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능력,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자체를 사물을 판단하는 기능을 무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과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아래 두자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저는 세 가지 요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이성 위에 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아래 이성을 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 이성을 두자는 것입니다. 내 감정과 내 판단을 하나님 말씀에 영향을 받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의존적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세요.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누가 사랑을 받고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내 이성 위에 둘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옳다고 판단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겸손한 사고방식,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자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고방식이란 말씀에 근거해서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이성을 과신하지 않는 것, 이성과 판단에 있어서 겸손하는 것입니다. 이성의 능력만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5-8절을 보세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여기서 명철이란 말은 영어로, understanding, 즉 이해력입니다. 이성적인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성적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 몸과 내 삶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왜 많은 사람이 고난과 역경을 자초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유연하지 못하면 고난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전제를 버려야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반대학에 들어갔을 때 마음이 너무 어려워서 3년을 방황했습니다.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3년 동안 저는 그토록 원하는 신학교에 인도해주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원론적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일반학교에 가는 것은 세상적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생각을 바꾸어주시기까지 3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때 내 생각이 조금만 유연했더라면 대학생활이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내 생각을 고집한 것 때문에 내 삶속에 고난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판단대로 생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생각하는대로 생각하면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어려움은 우리의 사고방식을 다루는 문제입니다.
셋째, 이성을 뛰어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순종이 필요합니다. 순종은 이성적 능력을 뛰어넘는 행동입니다. 본문 9,10절을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처음 익은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이성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렇게 해야 하나?”이렇게 자기 이성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된 순종을 해볼 기회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것은 어부의 이성을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해가 뜬 이후에는 깊은 곳에 고기가 없다는 것을 베드로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고기를 잡아보지 못하신 것 같아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성으로 불가능하지만,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여러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알고 있습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 캄캄한 동굴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동굴 속에서 한 번도 자기 얼굴을 본적도 없고, 그래서 언제나 자기의 그림자만 본 인생은 자신이 보는 것만 사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만약에 동굴 밖에서 누군가 내 모습에 대해서 “사실은 네가 그렇게 생기지 않았어. 이렇게 생겼어.”라고 말해준다면 그 말을 믿으려 들겠습니까?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이성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는데 이성의 능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 내가 보는 것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기독교 신앙은 시작합니다. 여기 네 명의 시각 장애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리를, 어떤 사람을 코를, 어떤 사람은 귀를, 어떤 사람은 몸통을 각각 만지면서 자기 나름대로 코끼리가 어떻다고 주장합니다. 코끼리는 고무호스다. 아니다. 기둥이다. 아니다. 벽이다. 아니다 커다란 부채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우기다가 결국 싸우다가 그만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것과 달리 하나님 보시기에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내 좁은 사고방식이 고난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합시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성 위에 둡시다. 그 말씀을 이성 위에 둡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계시와 이성을 놓고 보면 3가지 종류의 신앙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만 인정하고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신비주의
둘째,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이성만 강조하는 신앙-자유주의
셋째, 인간의 이성 위에 계시를 두는 신앙-복음주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행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이성을 어디에다 둘 것인지 잘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아래 두기 바랍니다. 경험이나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의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입니다. 비록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할 때 홍해를 건너갔다는 것, 예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다시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수많은 이적들을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말씀 아래 작동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성이 말씀 아래 있을 때 건강하고, 형통하게 될 것이고, 잘 살게 될 것이고,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계시만을 붙잡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 아래 내 이성이 복종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똑바로 헤엄치고 싶을 때 헤엄칠 수 있고, 똑바로 가고자 할 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의 능력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둘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증설교(4)-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0) | 2012.02.19 |
---|---|
변증설교(3)-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0) | 2012.02.19 |
변증설교(1)-기독교 신앙의 본질 (0) | 2012.02.19 |
부활절설교자료(10)-예수 부활의 확실한 증거들 (0) | 2012.02.19 |
부활절 설교자료(9)-부활에서 승천까지 재구성 (0) | 2012.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