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설교

변증설교(3)-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등불지기 2012. 2. 19. 19:49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본문: 롬1:18-20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혹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가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싶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가 있으면 하나님을 믿겠는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와 이유를 따지면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서 이런 저런 합리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성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감정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유신론자 아니면 무신론자입니다. 결코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역으로 질문해봅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무신론은 유신론보다 더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가 하나님의 부재를 증명하기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믿기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나는 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는가? 이것은 마치 내가 부모님을 나를 낳아준 부모로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저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부모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모님을 믿는 것은 논리와 추론으로 따져서 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물론 이 믿음도 증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는 믿음은 맹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만이 참된 증거는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증거,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파악되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증거를 이야기할 때 눈에 보이는 증거만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사람의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본능적인 능력입니다. 둘째, 자연과 우주에 나타납니다. 셋째, 성경에 나타납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람은 종교적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하나님을 알만한 능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은 자기가 한계상황을 만나게 되면 스스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죽음의 한계에 맞닥뜨렸을 때 신음소리를 낸 것이 그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긍휼과 도움을 간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능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이 존재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식욕이 있다는 것은 음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눈이 있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증거이고, 귀는 소리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욕구는 대상의 존재를 전재할 때 설명이 됩니다. 분명 사람에게 종교성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라는 철학자는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믿지 않는 것은 마치 부모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없는 문제아의 모습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로, 사람에게는 도덕성이 있습니다. 즉, 양심, 혹은 이성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능력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롬2:12-15절에 보면 양심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고 합니다. 그 증거가 이것입니다. 자신이 피해를 보거나 손해를 입게 되면 그러한 능력이 아주 예민하게 발동합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정신적 혹은 물질적 피해를 주었다면 그 문제에 대해 과도하게 반응하면서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피해에 관해서는 그렇게 분노하며 피해를 가한 사람을 판단하면서 정작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자신에게 이런 피해를 가하는 자를 살인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서도 정작 본인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동성애를 하는 경우에 대해서 너무나 관대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딸이 만약 동성애를 한다면 과연 관대해질까요? 다른 사람이 도적질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물건을 훔치면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처럼 이중적인 잣대로 사람과 사물을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것에는 분노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란 증거입니다. 이렇게 양심이 마비되어버리면 하나님을 인식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운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정하면 자신의 이중적이고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해도 핑계대지 못할 것입니다. 존재를 부정한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 자연과 우주에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인과의 법칙이 작용합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주 만물은 어디서 시작했을까요? 어떤 사람은 우주는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최근 과학자들은 물질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서 주장합니다. 물질과 생물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성과 소멸은 저절로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원인이 없다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주장하지 못했고 지금도 못하며 앞으로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생성이론으로 “빅뱅이론”을 제시합니다. 우주는 어느 한 순간에 시작했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우주의 궁극적인 원인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는 우주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넷째로, 우주에는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과 행성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지구 주변에 달이 공전하고, 태양 주위에 지구가 공전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물질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분자는 원자의 공전으로, 원자는 양자의 공전으로 이루어집니다. 큰 행성계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분자나 모두 같은 구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디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들판의 꽃 한 송이도 하나님의 솜씨를 뽐내고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 하늘의 구름과 바람과 비도 마찬가지다. 정교하게 만든 로봇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을 하지만 그것을 보고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질서를 가질수록 저절로 된 것은 없습니다. 아시모(혼다)란 로봇에 들어간 부품이 십만 개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교한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들도 콩 하나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모든 질서는 그것을 고안한 디자이너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질서와 조화에는 그것을 고안한 디자이너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면서 저절로 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우주를 보면서 저절로 되었다고 믿고 싶은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증거가 분명히 두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기가 두려워서가 아닙니까? 제가 볼 때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 도피기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두 눈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내심 알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이란 개념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줍니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밝혀낸 것입니다. 완전이라는 개념은 완전한 자가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책상이란 개념은 책상이란 존재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란 개념은 컴퓨터란 실제를 전제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란 개념은 하나님의 실제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 마음속에 절대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마다 그 명칭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명칭들을 가지고 있을수록 더욱 더 그 존재는 확실한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다양한 명칭들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명칭들은 많은데 실제로 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보지 못했지만 수많은 명칭들이 그 존재를 지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여섯째로, 이상의 증거들을 살펴보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증거들 자체는 내 영혼에 아무런 믿음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내게 믿음을 가져다주는 증거는 성경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그는 창조주이며 만물을 보존, 유지, 통치, 그리고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눈으로 본다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저를 보기만 한다고 저를 향한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어떤 사람을 두 눈으로 본다고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존경과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면 그 대상이 실재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거나 여러 가지 증거를 가지고 법정에서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귀로 얻는 것입니다. 귀로 믿음을 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믿음이란 대상에 대한 인격적 관계입니다. 대상에 대한 인격적 관계를 가지려면 인격적인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여기 놓인 책상을 ‘믿는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옆에 앉아 있는 아무게 형제를 나는 ‘믿는다’는 표현은 가능합니다. 왜냐면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은 하나님과의 어떤 인격적인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증거를 두 눈으로 확인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제가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여러 가지로 증명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증거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인격적인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참 믿음은 실험실이나 법정에서 증명되고 판명될 증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신뢰할만한 ‘인격적인 증거’를 통해 얻어지는 ‘인격적인 관계언어’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끔찍한 전쟁, 살인, 재난 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현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살아계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악은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력하게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러한 현상을 바로잡아줄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러한 현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죄 때문에 생겨난 모든 불행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역으로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인류역사나 자연과 우주는 지금까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해서 이토록 끔찍한 재난들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반대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해서 이토록 우주만물이 아름다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결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공기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공기는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끔찍한 사건, 사고, 재난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더욱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증거보다 더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증거입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증거는 우리를 참 믿음으로 안내하지 못하지만 말씀의 증거는 우리를 영원한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는 그 사람과 인격적인 교류를 통해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해주는 보배로운 책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기 위해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미 명확하게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4:1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분명히 선포되어졌는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무리 증거해도, 그 명확한 증거들을 제시하여도 사람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증거들은 사람들의 불신을 강조할 뿐입니다. 그 증거들은 불신자들을 정죄하기 위해 필요할 뿐입니다.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드러내신 일들이며, 그것에 대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신4:32-35; 2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