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관계에 관하여 II
How to deal with broken relationship
깨어진 관계에 관하여 두번째 글입니다. 지난번에는 관계가 깨어지는 원인과 대책에 대해 글을 올렸다면 이번에는 근본적인 예방과 비전에 대해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영성회복학교]란 코너에 있는 [위탁]이란 제목의 제 설교와 함께 읽기를 추천합니다.
관계에 소금을 치라
지금까지 우리는 관계가 깨어지는 이유, 결과, 대책 등에 관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처방책이 아니라 예방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관계의 깨어짐을 예방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예고 없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관계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여야겠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예수님은 우리의 관계가 소금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관계가 상하지 않도록 부패하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관계에 소금간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관계에 소금간을 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소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울과 다윗의 관계
사무엘서를 가지고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소개한 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처음 만날 때 다윗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또 사울이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원하건대 다윗을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삼상16:21,22) 그런 사울이 어느 날 다윗을 향해 증오심을 품게 되고 창을 던지고 죽이려고 자객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말이나 행동을 잘못 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여인들이 사울에게 천천을 돌리고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는 노래를 들을 때 그의 마음속에 있던 열등감이 증오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관계가 이유도 없이 깨어질 때는 대부분 어느 한 사람이 내면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여서 생기는 경우입니다. 다윗처럼 내 의도와 아무 상관없이 좋은 관계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나를 미워하는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는 이처럼 처음부터 상하기 쉬운 관계였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
이번에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요나단 역시 그 아버지 사울처럼 다윗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은 애초에 사울이 다윗을 좋아하던 그런 관계보다는 좀 더 진보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삼상18:3)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다윗과 사울의 관계보다 더 나아가서 둘 사이에 언약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는 사울처럼 그냥 좋아서 좋은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에 근거한 관계는 더운 날의 음식처럼 상하기 쉬운 관계이고,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관계는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더 나아가 더불어 언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을 두라'는 말씀은 언약을 맺으라는 말씀입니다.
관계의 기초가 무엇인지 보라
그래서 관계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감정에 근거하여 서로 좋아하는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에 근거하여 생명같이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언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기 생명처럼 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관계는 언약관계요 생명관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훗날 왕이 되고 나서도 자신이 언약을 맺었던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자기 아들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관계의 기초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감정' '사랑스러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사울과 다윗의 관계처럼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금방 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면 요나단과 다윗처럼 죽어서도 잘 변질되지 않습니다.
언약과 동맹은 다르다
우리는 언약과 동맹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유명한 영화 [대부]에는 마피아 두목들이 피를 나누며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자는 동맹의식을 갖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서로 싸우고 서로 죽이게 됩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어떤 의식을 통해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 "우리 서로 친구하자"라고 선언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소금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금이란 그런 동맹의식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우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대부]에서처럼 거창한 동맹의식을 맺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약속을 했을 뿐이지 서로에게 생명을 내어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언약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건을 걸고 관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걸고 관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언약이란 후자를 의미합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그러면 관계에 소금을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언약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맹과 언약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여야 합니다. 동맹은 비록 영화 [대부]에서나오는 것처럼 함께 피를 나눠 마시는 의식을 거창하게 거행했다 할지라도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깨어지기 쉽습니다. 왜냐면 동맹은 조건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주는 조건으로 나도 상대방에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맹은 아무리 언약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고, 아무리 거창한 의식을 거행한다 할지라도 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할 때 서약을 하고 부부가 되지만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조건적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맹과 반대로 언약covenant이란 내 생명을 주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을 대신해서 죽겠다는 서약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적입니다. 나중에 상대방이 나를 헤치고 모함하고 이용할지라도 나는 그를 위해 이미 목숨을 내어놓았고, 이미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이런 관계야 말로 진정한 소금관계요 언약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는 어떤 변수와 시련에도 쉽게 상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서로 관계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시작된 관계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소금관계인 것입니다.
관계에 시련이 오는 이유
요즘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가 활발하여 친구도 금방 만들 수가 있습니다. 페이스북에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구신청을 할 수 있고 또 쉽게 친구 수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문제 때문에 너무나 쉽게 친구 관계가 단절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너무나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친구가 500명이다, 혹은 5천명이다 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소금으로 간을 한 관계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쉽게 친구가 되고, 또 쉽게 친구관계가 단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적당히 아부도 하고 싫은 말 하지 않고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피상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관계의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계에 어려움이 오고, 관계에 시련이 찾아오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관계의 어려움을 통해서 관계의 기초를 돌아보기 위함인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올린 글에서 썼듯이 우리의 삶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기초가 약하다는 신호입니다.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기초를 돌아보아야 하고, 기초공사를 다시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관계는 성장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어떤 상태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 관계는 성장하는 생명체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과 나름대로 '괜찮은' 혹은 '상당히 우호적인'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만족하면 큰 코 다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사역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보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말하기를 자신이 어릴 적 다녔던 교회는 그렇게 화평하고 분위기도 좋고 은혜스러운 교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가 냉랭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서로 분열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하는 그런 분위기가 되고 말았는데 자기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분이 생각한 '좋은 분위기' '은혜스러운 분위기'는 원래 깨어지기 쉬운 관계였고, 작은 시련에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취약한 관계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좋은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처럼 오래동안 아무 문제 없이 상당히 '은혜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단지 좋은 관계, 은혜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면 사소한 문제에도 취약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사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겉으로 좋은 분위기를 오래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착각'과 '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성장하는 관계"입니다. 관계는 그저 좋은 관계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장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관계가 어떻게 성장하는가?
어떻게 말입니까? 그저 좋은 관계에서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관계로, 다시 생명을 주는 관계로, 다시 죽어서도 계속되는 그런 관계로 성장해야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묵상해보면 그들의 관계가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졌고 서로 좋아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데까지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관계가 더욱 성장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서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요나단이 전장에서 죽은 이후에도 그 아들 장애인이었던 므비보셋에게까지 성장하고 있습니다. 친구와 나의 관계, 연인과 나의 관계,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직장동료와의 관계, 혹은 교회 식구들과의 관계..여러 관계가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관계가 지금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관계가 '그저 좋은 관계' '그저 이유없이 좋아하는 그런 관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소금관계'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소금관계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없다면, 그 관계는 작은 일에도 깨어지기 쉬운 연약하고weak, 취약한vulnerable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배우자
우리의 관계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관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관계하는 법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사람과 소금언약을 맺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 곁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기 어려워할까봐 하나님으로서의 영광, 능력, 특권을 내려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무장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그 어떤 사람도정죄하지 않기로 작정하셨고, 그 어떤 사람도 존중하며 자신보다 낫게 여길 것이라고 다짐하셨고, 그 어떤 사람의 비난과 조롱 앞에서도 상처받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던 사람들을 위해 먼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죄인들의 몸값을 먼저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계방식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관계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셧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그런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7-12)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일들이 우리에게 최고의 교본이 됩니다.
관계하는 법을 배우고, 배운 것을 연습하자
특히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라면, 그리고 이미 결혼한 부부라면, 관계성장을 위해 함께 아가서를 묵상할 것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아가서에는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 충만합니다. 처음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 관계에 어떤 위기가 찾아왔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고 결혼하고 부부가 되어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위기가 무엇이었고 그들은 어떻게 극복하게 되었는지, 위기와 시련을 지혜로운 두 남녀가 함께 극복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서 보여주는 관계의 성장은 삼단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아2:16)
둘째,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아6:3)
셋째,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7:10)
아가서에서 말하는 소금관계
그리고 아가서에서 최종적으로 말하는 관계는 '죽음과 같은 사랑' 즉 언약관계, 소금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8:6,7) 언약적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을 통해 성장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죽음같이 강한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소금관계 역시 '죽음같이' 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역시 죽음같이 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금관계란 죽음과 같은 것으로 맺는 언약적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입니다. 이것은 단지 너무 좋아하고,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너무 좋아서 죽음까지도 함께 할 것 같은 그런 것과 다른 것입니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또한 일순간에 돌변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좋아했던 사울의 감정, 그리고 다말을 향해 품었던 암논의 연애감정은 소금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너무 좋아하는 관계, 그래서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그런 관계는 견고한 것 같지만 그 안에 소금이 빠져있기 때문에 아주 작은 변수에도 취약하여 깨어지기 쉽고 상하기 쉬운 것입니다.
애정관계, 동맹관계, 소금관계
따라서 모든 관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에 근거한 애정관계인지, 필요와 조건에 의한 동맹관계인지, 아니면 언약에 근거한 소금관계인지 말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누구와 서로 좋아하고 있고 너무 마음이 잘 맞고 그래서 너무 좋은 관계이고 깨어지지 않을 관계라고 자랑한다면 아주 순진한naive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가 그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좋아서?" 바로 그것이 소금의 부재를 말해줍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변함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지만 사실 감정은 변덕스러운 것이고 작은 것에도 변질되고 상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속으로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혹은 반대로 충족되기만 하면 즉시 자신의 감정이 헐크와 같이 돌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소금관계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만일 각기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한다면 혹은 그 반대로 자기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래도 서로에게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것이 어떤 보이지 않는 조건 때문이 아닐까?"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관계는 감정이나 조건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내놓은 언약에 근거한 것인가?"
작은 여우를 잡는 법
원수 마귀는 언제나 관계를 깨뜨리는 일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약간의 빈틈이라고 생기면 즉시 뛰어들어 작업을 시작하려고 항상 벼르고 있습니다. 사실 관계를 깨뜨리는 일에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소중한 관계가 깨어짐으로 파생되는 파괴력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마귀가 취하는 여러 가지 전략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작은 여우' 한 마디를 파견하는 것입니다. 관계라는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것은 사자나 곰이 아니라 아주 '작은 여우' 한 마리입니다. 작은 여우 한 마리 때문에 관계가 깨어질 수 있습니다. 이를 잡아내지 못하면 관계라는 꽃이 꺾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술람미가 취한 행동은 관계의 성장을 위해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우선 술람미는 관계라는 꽃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꽃과 같이 여겨야 합니다. 모든 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느 관계도 무시할 것은 없습니다. 둘째, 술람미는 관계를 해치는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울왕처럼 열등감이 작은 여우 노릇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암논과 같이 절제할 수 없는 정욕과 감정이 여우 노릇을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히도벨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여우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꽃relationship을 해치려는 '작은 여우'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괜찮다고, 지금은 아주 은혜롭다고 착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작은 여우' 한 마리는 꽃 뿐만 아니라 포도원 전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작은 여우 한 마리 때문에 탈영하고, 자살하고, 심지어 잔인하게 살인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셋째로 그것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겸손히 상대방에게 알리고 상대방과 공유하고 상대방에게 겸손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아2:15)
관계는 꽃이다.
모든 관계는 아주 맛있는 음식이고, 아주 아름다운 꽃입니다. 음식은 소금이 들어가야 제맛이 납니다. 그리고 소금이 들어가야 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관계는 꽃과 같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관계란 이름의 꽃은 방치해두면 '작은 여우'에게 너무나 취약합니다. 또한 관계란 꽃은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합니다. 관계란 꽃은 또한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보호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봄과 보호가 없이 절로 열매맺을 수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돌봄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혼자서 관계를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두 사람입니다. 함께 관계란 꽃의 소중함을 알아야 하고, 함께 관계란 꽃을 가꾸어야 하고 또 함께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새싹이 돋고 꽃봉우리가 생기고 탐스러운 열매가 맺힐 때까지 함께 가꾸고, 함께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대부분의 이유가 재정도 건강도 아니라 관계입니다. 깨어진 관계는 선교사를 선교지에서 내쫓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단지 선교지의 문제이겠습니까?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재정결핍도, 건강문제도 아닌 깨어진 관계인 것입니다. 반대로 건강한 관계, 성장하는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힘과 재능로 성취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까지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깨어진 관계를 이해하고, 대처하고, 예방하고, 또 성장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배우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관계를 위하여,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영화감상 포인트]
[대부]라는 영화를 보면서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을 겁니다.
깨어지기 쉬운 관계의 한계에 대해서 말이지요..ㅎㅎ
깨어지지 않는 관계에 대해서 알려면 물론 성경을 묵상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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