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에 관하여
오늘은 거절rejection에 관하여 글을 써보겠습니다.
전능자 증후군, 착한 아이 증후군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전능자 증후군이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는 하나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사고방식을 말하고, 착한 아이 증후군이란 다른 사람에게 결코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은 오늘 다루려고 하는 주제인 '거절'을 못하게 하고, 거절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대체로 전능자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헌신적인 아내와 어머니에게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취하여 들어온 남편의 양말을 벗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숙취에 좋은 꿀차를 갖다 주는 그런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전능자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목회자나 사모도 많습니다. 교인들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에 다 관여를 하여서 '도움'을 주려고 애씁니다. 자신이 지치는 것을 교인들을 향한 사랑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도움'이 사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아니라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어떤 도움이 참된 도움인지를 알면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거절함으로써 그들을 돕고 자신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착한 아이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대체로 여성들이 많은 편인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두려워하여 남들의 요구나 제안을 절대로 거절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나름 성실하고 착하다 싶으면 주일학교 봉사해라, 성가대 봉사해라, 성경학교 봉사해라, 등등 봉사를 권유하는 교회 어른들의 요구에 절대 거절하지 못하고 요구하고 시키는 대로 착실하게 봉사를 잘 하는 어느 청년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정작 본인의 마음속에서는 피곤함과 공허함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에 열심히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지만 혼자 있을 때는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삶에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것 때문에 혼자 고민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절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거절이 있습니다. 유혹에 대한 거절, 부탁에 대한 거절, 기회에 대한 거절, 좋은 제안에 대한 거절, 청혼에 대한 거절도 있습니다. 오늘은 거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거절하는 것 : Say No to temptation
유혹에 대하여 단호히 거절하는 것은 성숙한 사람으로서 필수적인 자질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요셉의 거절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고혹적인 몸짓으로 젊은 청년 요셉을 향해 추파를 던졌을 때 혈기왕성한 청년 요셉이 그 유혹을 거절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은밀한 공간에서 달콤한 유혹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그 유혹을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모든 지혜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유혹을 거절하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어떤 것도 어떤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뿐 아니라 그 어떤 달콤한 유혹도 시원하게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옷을 붙잡고 매달리는 여인의 유혹을 거절하기 위해 자신이 입던 옷조차 벗어던졌고 또 사자를 만난 스프링복스와 같이 무섭게 뛰쳐나갔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다름 아니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곧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은 하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란 죄를 혐오하는 마음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를 끔찍이 무서워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죄에 대해 NO! 라고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의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마음으로서의 거절 : 좋은 기회, 좋은 제안, 좋은 음식, 좋은 지식...
우리가 때로는 유혹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것도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절제로서의 거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내가 나쁜 것을 참는 성품이라면, 절제는 좋은 것을 참는 성품입니다. 잠언 25장에는 절제에 관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꺽느니라." 나의 말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맞는 말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하루에 한 번 페이스북에 묵상한 내용을 올리는데 유익을 받는다는 답글을 보면 참 감사하고 기분도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절제를 합니다. 올리고 싶어도 꾹 참습니다. 절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또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꿀은 몸에 좋은 음식입니다. 몸에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절제하지 못하면 몸에 해로운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제를 배워야 하고,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절제하지 못하면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음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때로는 지식도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꿀이 좋듯, 우리 마음에 지식이 좋지만 지식도 절제하지 못하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지식에 절제를 공급하라고 했습니다.(벧후1:6 참조) 지식만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윤택하게 하는 어떤 좋은 기회나 제안도 때로는 거절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절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첫 번째 거절의 노하우라면, 두 번째 거절의 노하우는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좋은 제안을 거절했던 경우는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족장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유익할지라도 거절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으로서의 거절 : 은사, 부르심, 선택의 경우...
지혜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보고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잠언을 읽어보면 모든 말씀이 댓구법과 평행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고, 차선과 최선을 구별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런 지혜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효과와 효율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지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다르게 보며, 다르게 판단하며, 다르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거절의 노하우는 "지혜로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부귀영화를 거절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히11:24)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모세의 거절은 믿음의 거절이었고, 또 지혜로운 거절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부귀영화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비교해서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비교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영광이 더 나은 것인지 판단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위해 덜 나은 것을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위해 차선을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며 겸손히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때 응답으로 주어지는 마음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이란 또한 자신을 잘 아는 마음, 정체성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지식이며, 쌍둥이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자신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는 것은 곧 자신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데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지식에 관해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자신을 잘 아는 것은 지혜로운 마음으로 거절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비밀secret이 됩니다.
이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해야만 하겠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의 신분, 자신의 소명, 자신이 이루어야 할 사명, 자신의 가치, 등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자신을 볼 줄 아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자신을 아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게 되면 자신에 대한 관점도 바뀌게 되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대로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데 이것이 지혜의 또 다른 본질적인 측면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아는 사람은 자신이 왜 살며(목적), 무엇을 위해 살며(목표), 어떻게 살며(은사),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지(사명)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목적, 목표,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사명과 맞지 않는 '제안' 혹은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 어른들이 착하고 성실한 어느 학생이나 교인에게 이것저것 봉사를 시키고 섬김을 권유하고 직분을 제안하는데 이런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거절하지 못하게 되고, 또 제안을 받아들여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지만 마음의 기쁨도 만족도 평안도 없이 내면의 공허감과 무의미로 신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나 성취해야 할 사명이나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내려주신 은사들이 무엇인지 잘 알면 "지혜로운 거절"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살아가면서 저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때로는 목회에 대한 제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한인교회의 설교를 부탁받기도 합니다.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생각되어도 일단 나의 부르심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사명을 먼저 생각합니다. 항상 매정하게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나의 부르심, 나의 은사, 나의 사명과 맞지 않다고 느끼면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때로는 더 나은 것을 위해 덜 나은 것을 거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최선을 위해 차선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비교해보면 무엇을 거절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절이 그러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챙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소돔왕은 천문학적인 재산을 제안합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족장의 위치가 아니라 왕의 위치에서 살아갈 수 있고, 또 나그네의 입지가 아닌 제법 위상이 높은 생활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14:22,23) 세상의 관점으로는 아브람의 거절은 바보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최선을 위해 차선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교해보고 차선을 무겁게 거절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이었습니다. 더 나은 것을 바라보고 덜 나은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리고, 거절할 줄 아는 것이 그가 가진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에 하나님께서 15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시며 반응하여 주십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저는 이 말씀을 너무 좋아합니다. 최선을 바라보고 차선을 거절한 믿음에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 되시는 자신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장을 위한 거절: 부탁을 거절해야 할 때와 받아들일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착한 아이 증후군'에 빠지게 하는데 원수가 즐겨 사용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0-42)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부탁을 할 때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어떨 때 거절해야 하고 어떨 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비밀을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둘째, 자기를 지키는 마음, 셋째, 지혜로운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죄와 유혹을 거절할 때 필요한 마음이고, 자기를 지키는 마음은 자신에게 유익한 어떤 것(음식, 지식, 기회..)을 절제할 때 필요한 마음이고, 지혜로운 마음이란 비교하고 선택할 때 최선을 위해 차선을 거절할 때 필요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네 번째 거절의 비밀secret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성장과 다른 사람의 성장을 바라는 마음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탁과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고 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롭지 못합니다. 만약 그것이 '유혹'도 아니고, 내 몸과 마음과 생활에 유익한 어떤 "꿀"도 아니고, 또 그것이 내 정체성과 은사와 부르심에 관련된 것도 아니고, 단지 요청과 부탁이라면 어떨 때 거절하고 어떨 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때 중요한 기준이 "성장가능성"의 원칙입니다. 만약 내가 그의 요청과 부탁을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성장하게 된다면, 그리고 동시에 그가 성장하게 된다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 나의 성장이 문제가 생기거나 그의 성장이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그가 비록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거절해야 합니다. 때로는 순진하게 엄청난 기회와 제안을 거절하기도 하지만 원수들이 나의 성장을 가로막고 방해하기 위해 빛나는 천사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런 저런 멋진 제안을 해오기도 하는데 이것도 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움"입니다.
좀 더 설명해보겠습니다. 어릴 적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막에서 어떤 사람이 텐트를 치고 자는데 바람이 부는 밖에서 자는 자신의 낙타가 불쌍해서 낙타의 머리만 자신의 텐트 안에 들여놓게 했더니 그 낙타는 머리만 아니라 발도 들여다 놓고, 급기야는 그 텐트 안에 자신이 완전히 들어와서 주인을 텐트에서 내쫓아버렸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조금 도움을 주었는데 그것이 나중에 오히려 자신에게 큰 피해가 되는 경우는 이곳 아프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집에 찾아와서 도움을 구하는 흑인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샌드위치나 음료수 등을 챙겨주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하고 요청에 들어주지 않으면 화도 내고, 어떤 경우는 잘 대해주었는데 강도단을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상처를 받고 다시는 아프리카를 쳐다보지 않으리라고 맹세하면서 아프리카를 떠나는 그런 선교사도 본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흑인들은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계속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하면 그들은 나의 도움에 의존을 해버리게 되고 스스로를 도우려는 생각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돕는 나의 구제, 도움, 선행은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게 의존하게 만드는 '도움'은 도움이 아니라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구제를 반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도움을 줄 때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마태6:3) 제가 반대하고, 거절해야 하는 것은 노출된 구제, 공개적인 구제, 드러나는 구제인 것입니다. 옛날 제가 어릴 적 시절에 집앞에 쌀이나 과일 등을 놓고 가는 일들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구제하고, 은밀하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을 오히려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적인 도움과 선행은 반대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성장을 가로막는, 그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무 상급도 없고, 또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질 수 있는 "아주 나쁜 구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도움은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네 번째 거절의 원칙secret은 이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성장과 남의 성장을 돕는 것인가 아니면 가로막는 것인가? 그것이 성장을 돕는 것이라면, 그것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의 요청에 우리는 두 배로 반응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의 요청에 우리는 정중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넘어지면 즉시 일으켜 세우지만 커서는 스스로 일어서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듯 자립, 성장,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성장을 위해서 거절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언급하고 다음 단계인 [거절감을 다루는 법]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의존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경우 거절하는 것이 그에게 유익한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성장을 위해 거절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사실 문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경영학에 대해 관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영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를 좋아했는데 경영학 책들 중에 '거절'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더군요.. 좋은 경영자는 거절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런 저런 부탁을 할 때 거절하지 못하고 다 받아들이는 모습을 원숭이를 한 마리씩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설명한 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은 원숭이들이 몸에 붙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내 몸에 많은 원숭이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나의 성장을 위해 우리는 남의 부탁을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나의 성장을 위해서 거절한다는 것은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이고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은 또한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내가 성장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한 짐을 지는 것은 "서로 짐을 지라" "서로 사랑하며 섬기라"고 하신 주님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성장이 중요한 것처럼 나의 성장도 중요합니다. 진정 남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일 겁니다. 진정 나의 성장을 위한 것이면 남의 성장을 위한 것일 겁니다. 이 둘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이 반대로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성장을 위하여' 거절할 때는 Win-Win해야 합니다.
거절감Sense of Rejection 다루는 법
만약 거절해야 한다면 단호히 거절해야 할지, 부드럽게 거절해야 할지, 혹은 간접적으로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죄와 유혹에 관해서는 단호함이 필요하겠고, 요청이나 제안의 경우는 부드러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어떻게 거절하느냐가 아니라 만일 내가 거절을 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거절감은 모든 분노의 뿌리감정입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부드럽게 부탁했는데 거절을 당한다면, 만일 내가 좋은 제안을 했는데 그가 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만일 내가 최선을 다해 좋은 것을 준비해서 제안했는데 그가 만일 거부한다면..우리는 거절감sense of rejection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한 거절감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 혹은 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관계에 좋지 않는 영향을 줄 것입니다.
거절감을 다루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납되었음을 충분히 알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에 대해 신뢰하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에게서 거절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거절을 당할지라도 거절감은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거절감을 쉽게 받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이 용납되었다는 것을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싫어하실 수 있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용서받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죄책감을 지고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용서받고 용납되었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거절감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거절감을 다루는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제안하는 것, 혹은 내가 주는 것과 그것을 주는 나 자신과 분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정성껏 선물을 준비해서 주었는데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의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혹은 그 선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내팽개칠 때 나는 거절감으로 상처를 받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상처는 예방이 최고입니다. 거절감의 상처를 받기 전에 내가 그 선물을 어떤 사람에게 줄 때 그 선물과 나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선물을 줄 때 나 자신에게서 그 선물을 온전히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주는 것" 아니라 "주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나 선행에 우리 자신을 투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의 의로 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나의 호의와 나의 선물을 거절할지라도 거절감을 갖게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호의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 있는데 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가 먹을 것을 사먹으라고 하면서 동전 몇 닢을 집어던진다고 생각해봅시다. 이런 식의 호의는 받는 사람에게 호의가 되지 않을뿐더러 호의를 베풀면서도 거절감을 주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호의를 받을 때에도 조심해야 하고 호의를 베풀 때에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안을 한다면 최선을 다해 제안을 하되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만일 호의를 베푼다면 예수님을 섬기듯이 최선을 다해 하되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의 최선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 역시 주어야 하고, 만일 사랑을 베푼다면 나의 의로서가 아니라 빚진 자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으로서 해야 거절감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의 기질: 좋은 것이 좋다!
제가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는 심방을 자주 했는데 심방할 때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정성껏 음식을 차려놓습니다. 먹지 않으면 거절감을 받으실까봐 맛있게 먹어야 했습니다!! 정기심방이 있는 날에는 하루에도 두 번 씩 점심을 먹어야 했던 때도 많았습니다. 교인 집을 심방할 때 힘든 것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거절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정성껏 대접하는 분의 양심을 위해 '정성껏' 먹어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인과의 관계가 아닌 경우는 제가 잘 거절하는 편입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제게 전화를 해서 자신이 맛있는 고기를 준비했으니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별로 고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음식을 가리는 것은 없지만 그렇게 식탐이 큰 편도 아니고 해서 아무튼 와서 가져가라는 전화에 저는 정중하게 사양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이고 계속 권하길래 저는 계속 정중하게 사양을 했습니다. 그 일로 그분은 제게 대해 마음이 상했는지 저를 조금 어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한국인의 독특한 기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번이고 간청하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을 한국인들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양사람 심지어 아프리카 흑인들의 사고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NO"라고 말하면 더 이상 권하지 않습니다. 한두 번 더 권할 수는 있겠지만 계속적으로 권하는 것은 오히려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사고방식에는 "좋은 게 좋다"라는 생각이 강한 것 같습니다. 내가 좋으면 다른 사람도 좋아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입니다. 수 천 년 세월 동안 단일문화, 단일언어를 가지고 좁은 땅에서 옹기종기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너와 나의 구분이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공동체주의는 발달했지만 건강한 개인주의는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서양 사람이나 흑인들과 좋은 관계를 갖는 것보다 더 어려운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거절을 어려워합니다. 한국인은 거절하는 것도 약하고, 거절감을 다루는 것도 약합니다.
거절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함
그러나 우리는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지키기 위해 거절해야 하고, 그것이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의 정체성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그것이 선하지만 최선을 바라는 믿음 때문에 거절해야 하고, 그것이 성장을 가로막는 것이기 때문에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거절해야 한다면, 거절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나는 왜 이것을 거절하는 거지?" 다음 중에서 하나를 고르십시오.
(1)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거절: 하나님이 두려워서 혹은 죄가 싫어서
(2)나를 지키기 위해 거절: 나에게 좋은 것이지만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3)지식에 의한 거절: 나의 정체성(소명,사명,은사)과 맞지 않아서
(4)믿음의 거절: 최선을 위해서 차선을 거절함
(5)지혜로운 거절: 나와 그의 성장을 위해서
(6)기타 이유를 구체적으로 서술해보세요:
어떤 때는 상대방의 속내를 다 알고 속아주기도 하고 알면서도 즐거이 당해주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정중하게 때로는 매정하게 때로는 차갑게 거절할 필요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성품을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비둘기 같기도 하고 동시에 뱀 같기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둘기 같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뱀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품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품의 균형을 이루는 일..그것이 성숙maturity입니다.
자, 이제부터 거절을 연습해볼까요? ^^
Let's say "NO!!"
제 글을 읽은 모든 분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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