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관하여
대학시절 전공과목으로 배울 땐 그렇게도 지루하고 재미없었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요즘 들어 재미있어지니 이제야 겨우 철이 드나 봅니다.(25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말입니다.) 지금까지 영화로 10회 이상 리메이크된 원작소설로는 유일하지 않나 싶은 이 19세기 소설은 사람이 빠지기 쉬운 오만과 편견을 어떻게 사랑으로 극복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소설을 알면 모든 로맨틱 영화와 드라마가 보이게 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캐릭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볼 때 현대 로맨스 문학과 문화에 이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준 원작은 없었습니다. 영화 [오만과 편견](2005년)과 같이 단순히 리메이크한 영화도 10편 가까이 되고, 비커밍 제인(2007)이나 브릿지 존스의 일기(2001, 2004)처럼 모티브만 가져온 영화도 많이 있고, "까도남"과 "도도녀"와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결혼못한 남자], [베토벤 바이러스], [꽃보다 남자], [궁], [파스타], [미남이시네요], [시크릿 가든], [최고의 사랑] 등.. 거의 모든 로맨틱 드라마가 이 [오만과 편견]이라는 소설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로맨틱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복잡한 것 싫어해서 단순한 액션이 좋습니다.)
제가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은 이 소설에 관해서가 아니라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오해와 편견'에 관해서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두 건강한 젊은이는 서로에 대해 끌리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에 내면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러한 내면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사랑에 이르게 되는지 관찰하는 것이 이 소설을 감상하는 포인트가 됩니다. 18세기 당시 영국의 결혼풍속이나 신분에 대한 이해 등 당시 배경도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건강한 두 젊은이들로 하여금 오해와 편견을 갖게 했으며, 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게 했을까요? 이처럼 오해와 편견은 사람과의 관계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중요한 장벽이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작동하는 오해와 편견을 어떻게 발견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관계를 가로막는 '오해와 편견'이란 무엇일까요? 소설제목은 [오만과 편견]이지만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잘 생긴 다아시를 보면서 그에 대해 끌리기도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서 그가 매우 도도한 남자라고 굳게 믿는데..그래서 저는 '상대방을 교만하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편견'이라고 해서 '오해와 편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견'prejudice이란 어느 한쪽만을 본다는 말로서 특정 대상에 대해 분명한 이유 없이 호감 혹은 비호감을 갖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해'란 이 편견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혹은 '구체적이고 정당한 근거도 없이' 특정 대상에 대해 너무 좋아하거나 혹은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은 단지 남녀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종적인 편견, 학자적인 편견, 지역적인 편견, 등 우리 사회 전반에 깊게 스며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스틴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남녀사이에 '괜히 싫어하게 되는 감정'을 갖는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고, 외국에서 살면서 보고 느끼는 것처럼 흑인은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인종적인 편견 또한 백인과 한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고 연구와 학문을 위해 책을 많이 읽는 학자나 교수들에게서조차 이러한 편견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정당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갖는 편견이나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편견이란 큰 것이고, 특정 지역에 대한 지역적인 편견, 예를 들면 경상도와 전라도에 대한 편견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나름대로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관찰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결론을 내리는 과학자들조차 이를테면 진화론에 대한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며, 심지어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사들에게서도 이러한 편견은 피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편견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십시오. 저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편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 때문에 겪는 관계문제로 인해 누구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재물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특정 편견에 사로잡힐 때 무서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혼을 바라고 준비하는 젊은 남녀에게 이 편견은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고 관계에 대한 기대를 좌절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목회자가 편견에 사로잡힐 경우 교인들이 받는 상처는 큰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목회자가 편견에 따라 어떤 사람은 가까이 하고 자주 심방하고 축복기도를 하지만 특정한 사람은 멀리하고 설교할 때 자주 '때리는' 설교를 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 교회는 행복한 교회이겠습니까? 저는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에게 갖는 편견도 알고 있고, 반대로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사람에게 대해 갖는 편견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견이 좋은 관계를 해치는 주범이 되고, 시너지를 갉아먹는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견이란 왜 생기는 걸까요? 편견을 갖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모든 면을 다 볼 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한쪽 면만 바라보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바라보는 것이 '전부이고' 그래서 '사실일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오스틴의 소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까칠하고 도도한 태도'를 보면서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다아시는 자신의 일에 성실한 사람이고 실제로 그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도회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추기에 충분히 예쁘지 않는 여자"라는 말을 들을 때 엘리자베스는 당연히 그가 매우 교만하고prideful 건방진 남자라고 단정을 해버리고, 이후에 그녀는 그러한 편견을 정당화하고 더욱 견고하게 하는 방식으로 다아시를 대하게 됩니다. 이처럼 편견이란 어느 한쪽만을 보고 그것을 전부라고 믿는 경향에서 생기는 '호감' 혹은 '비호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여러 시각장애인들이 코끼리를 만져볼 때 코를 만진 어떤 사람은 코끼리가 호스같다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과 같다고, 허리를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고 하면서 서로 자신이 경험한 것이 진짜라고 우기고 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지 뒤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쪽만 보지 다른 쪽도 함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편견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렸던 어느 선교사님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2012년 10월 12일)
얼마전 저의 동료 선교사님 가정에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어린 아들과 두 딸을 둔 사모님에게 암이 발견되어 수술차 급히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현지에 남은 선교사님과 세 자녀가 아내와 엄마없이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원래 너무 착하고 얌전하였던 아들은 엄마의 빈자리 때문에 예민해졌는지 다니던 현지 초등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나봅니다. (이곳 현지 학교에서는 매우 엄격해서strict 다른 아이들에게 약간이라도 과격하게 행동하면 부모는 즉시 학교에 불려가서 주의를 받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학교로부터 아이의 아빠인 선교사님이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청문회를 하는 듯 교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교사들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선교사님에게 아이를 퇴학시킬 수도 있다며 엄중한 경고를 주었습니다. 마음이 아팠던 선교사님은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지만 꾹 눌러 참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학교가 그 아이의 엄마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그 아이를 향해 내내 불편한 시선을 던지던 교사들의 태도가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떤 교사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안아주고 어떤 분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주었습니다. 미움의 시선이 사랑의 시선으로 바뀐 것입니다...내가 바라보고 판단하고 느끼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보일지라도 나는 어쩌면 편견의 안경을 끼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truth을 알면 왜곡된 인식recognition의 안경을 벗어던질 수 있을텐데요..-잠16:2;요8:32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편견이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큽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관계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는 관계가 시작하기도 전에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보내주신 사람에 대해 마음을 닫아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사랑해야 할 사람을 이유없이 미워하고, 섬겨야 할 사람을 이유없이 멀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제한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스스로 답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우리가 소중한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어떤 전도사님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결혼하기를 열망하고 있고 오래동안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어느날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예비하신 배우자를 찾을 수 있을까요?"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위해 예비해놓으신 배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택정하신 배필을 찾는다면 평생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뿐입니다." 그분의 마음속에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이 어떤 편견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그 편견을 교정시켜드리고 함께 기도하며 축복해주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교제하는 자매가 생겼다고 그리고 결혼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사역도 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편견은 사고방식속에 작용하고 있는 어떤 힘입니다. 그 편견은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관계를 단절시키게 합니다. 우리는 이 편견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겸손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어떤 편견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보는 것이 '사실이고' 자신이 느끼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내 안에 어떤 편견이 나로 하여금 관계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언제나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는 것이 한쪽만 보는 것일 수 있음을,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16:2)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만이 오직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은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말씀하실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겸손입니다.
둘째,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경청이 필요합니다. 겸손한 마음에서 경청하는 태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선 나와 다르게 보는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다원주의를 옹호하거나 여러 진리가 있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여러 시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로서 꼭 성경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외에도 읽을만한 좋은 인문학 책들이 많습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다른 설교집만을 참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시집도 읽고, 수필도 읽고,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글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말도 잘 경청해야 합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말을 잘 경청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대화 한 대목을 소개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다아시 씨가 어떻게 자기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길 원했다.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중략)..
"제 미모는 처음부터 인정 안 하셨고, 태도에 대해서라면, 당신에 대한 제 행동이야 가까스로 늘 무례를 면했다고나 할까요. 말을 건넸다 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당신께 고통을 주려고 했지요. 이제 속내를 털어놓아 보세요. 제 건방진 점 때문에 제가 마음에 드셨나요?"
...(중략)
"건방지다고 해도 될 거예요. 거의 그랬으니까요. 실상은 말이에요. 당신은 예절이라든가, 경의라든가, 괜스러운 친절 같은 것이 지긋지긋했던 거예요. 언제나 당신의 인정만 받으려고 말을 건네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여자들에게 염증이 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여자들하고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당신은 정신이 번쩍 나서 흥미가 생겼던 것이죠. 당신이 진정으로 상냥한 분이 아니었다면, 그 때문에 절 미워했을 거예요. 스스로를 감추려고 애쓰는 가운데서도, 당신의 감정은 늘 고귀하고 정당했어요. 마음속으로는 당신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을 철저히 경멸했던 거지요."
위 대화는 소설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여러 가지 편견, 특히 계급과 신분의 차이에서 생기는 사회적 편견을 극복하고 상대방이 건방지고 교만하다는 오해를 극복하고 드디어 약혼을 한 다음 서로 어떻게 각자의 편견을 극복하게 되었는지 대화를 주고 받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할 줄 아는 그런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건방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경청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내면에 감추어진 고귀한 성품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과 경청은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는 중요한 성품입니다.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편견을 대처하는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부끄럽지만 저의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저 역시 편견이 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저는 어릴 적 아주 보수적인 신앙의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영적 체험은 오순절 교단의 그것이었지만 사고방식은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저는 세상과는 담을 쌓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든 것은 다 담을 쌓아야 하는 세상 학문들이었으니 제가 학교 다닐 때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심지어 대학에 입학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일반대학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어야 하고 이 책을 분석해야 하고 숙제를 내야 했고 시험을 치러야 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저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도 힘들게 하시는지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를 힘들게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 어떤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려야 했습니다. 편견이 제거되고 나니까 비로소 저는 신학대학이 아니라 일반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습니다. 저는 편견을 가지고 지금의 제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아니라 지금의 제 아내가 "까도녀"였습니다. 까칠하고 도도하게 보였고 그래서 처음에는 속으로 거부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첫 만남에서부터 비호감에 사로잡히게 만든 사람이 지금 20년 가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몇 시간이고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많은 커플이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첫 만남시에 호감을 갖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만 저의 경우는 정반대였으니 다들 궁금할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이랬습니다. 비호감에 저는 당연히 아니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결정을 했습니다. 저는 돌아설 때는 냉정하게 돌아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제 마음을 짓누르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편견이란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정의해드린 대로 편견이란 '특정한 이유 없이 갖게 되는 호감 또는 비호감을 갖게 하는 사고방식의 경향'입니다. 저는 "이유없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왜 이유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는 싫어하는걸까?' 어떤 사람들은 그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좋아하는지, 아니면 왜 싫어하는지..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다면 편견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유없는 호감, 혹은 이유없는 비호감이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유 없이 가지게 되는 감정"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제게 이유를 가르쳐주십시오!! 저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이 사람을 싫어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 제가 사람을 바로 보고 있는 것입니까?" 제 마음 속에 강하게 다가온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내 생각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고,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하나님을 원수로 여길 때에 나를 위해 죽어주셨는데 나는 왜 다른 사람을 나의 기준을 따라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좋아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인가? 나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비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것이 아닌가? 내가 만일 이렇게 누군가를 내 기준을 따라 좋아하고 또 내 기준을 따라 싫어하기로 결정을 해버리고 선을 그어 버린다면 그것이 과연 목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목회하겠다면 그것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주님은 나같은 죄인도 사랑하셨는데 나는 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걸까?" "너는 왜 네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려고 하니? 주님을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이 아닌데.." 이런 생각이 제 마음을 강타했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에 있던 어떤 편견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이 제게는 큰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 앞에 머물면서 저는 왜 그런 편견이 생겼는지 내가 왜 특정 대상에 대해 그런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무엇이 그런 편견을 만들어냈는지 저의 성장배경과 성장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오늘 글의 주제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는 제게 비호감을 주었던 사람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혼을 하였고 그리고 결혼을 하였고 지금까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며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이유 없는 감정 안에 편견이 도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 없는 호감, 혹은 이유 없는 비호감'말입니다. 괜히 좋아하거나 혹은 괜히 미워하는 마음이 든다면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데모하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데올로기가 주된 이슈였습니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는 저의 선배들이 칼 막스의 [자본론]을 독일어 원서로 읽는 것을 지켜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진 자들(부르조아)과 가지지 못한 자들(프롤레타리아)이란 이분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교회도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섬기던 어느 교회에 장로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아주 큰 부자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투와 태도가 제 눈에는 '오만'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주님은 제게 그분이 은밀하게 구제를 많이 하는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분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고,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편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누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사람을 나누고 있다는 것에 대해 회개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 안에 참 많은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많은 편견을 보여주셨고 또 그때마다 회개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어떤 편견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며 삽니다. 저는 주님처럼 아무 편견이 없이 공의롭게 모든 것을 다 볼 줄 아는 눈이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기로 노력하며 삽니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리고 내가 경험하는 것이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그리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이 보시는 것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내 안에 있는 모든 편견에 휘둘림을 당하거나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합니다. 저는 그 어떤 '이유없는 호감과 비호감'을 갖게 하는 편견이란 사고방식과 싸워나갈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여전히 편견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런 존재이지만 말입니다.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제게 지금까지 그러하셨듯이 앞으로도 언제나 승리를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편견과 씨름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South Africa,
김광락 선교사 올림.
P.S.
결혼을 앞두고 있는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편견과 씨름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로맨틱 영화와 드라마에 지금까지도 영감을 주고 있는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추천합니다^^
아니면 원작의 깊은 맛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지만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영화 [오만과 편견](2005)을 감상해보시길..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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